도겸은 최근 한 달의 감시 화면을 기록한 파일을 클릭했다.연희는 이미 잠들었다. 아래층에서 어렴풋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떠날 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났다고.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흥, 재벌 집안 사모님도 별거 아니네! 아니면 정말 나 혼자 여기에 내버려두든가. 어차피 내 뱃속의 아이로 천 억을 바꿀 수 있으니까. 누가 누굴 무서워한다는 거야?’서영숙이 돌아오면 왕미자와 임강주 그들도 함께 돌아올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니 이모님에게 보신탕 좀 끓여 달라고 해야지.’연희는 거실과 주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의혹을 느끼며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이때 연희는 현관에 남자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도겸 씨가 돌아온 거야?’생각을 하다가 연희는 얼른 침실로 돌아가서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살금살금 서재로 걸어갔다.똑똑-“도겸 오빠, 돌아왔어요?”그녀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으니 도겸 말고 또 누가 안에 있겠는가?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연희는 흥분한 심정을 꾹 누르며 웃으며 문을 밀었다.“도겸 오빠...”도겸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빨간색 레이스로 된 잠옷 치마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푹 파인 스타일에 가느다란 끈 두 개가 새하얀 어깨에 걸려 있었다.경망스럽고 저속한 모습이었다.남자가 자신을 쫓아내지 않자, 연희는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언제 돌아오셨어요? 또 야근하신 거예요? 이주 동안 계속 힘들게 일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죠? 자, 제가 안마해드릴게요...”연희는 남자가 그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에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전에 다투지 않았던 것처럼 활짝 웃었다.연희가 비위를 맞추며 가식적으로 웃는 것을 보면서 도겸은 화
화면 속의 연희는 몰래 서재에 잠입한 후, 두 서류를 바꾸고 있었다.이 외에 또 평소 거들먹거리며 서영숙을 지시하고 모욕하는 장면도 있었다.갑작스러운 증거 앞에서 연희는 멍해졌다.이 영상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의 매정한 따귀 때문인지, 연희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네가 단지 허영심이 있고 천박한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릇처럼 거짓말을 하고, 각박하고 신랄하며 또 시비를 일으키고 나와 우리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네가 자신의 주제를 똑똑히 파악했으면 해서 널 때린 거야. 있어서는 안 될 망상을 하지 말고. 그리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해. 그렇지 않으면...”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투가 음침했다.“넌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연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극심한 공포에 따가운 양쪽 볼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 도겸 오빠, 저 정말 잘못했어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제가 내일 본가에 찾아가서 아주머니에게 사과할게요. 절 때리든 욕하든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을 거예요! 아주머니께서 화를 푸실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남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연희는 당황해지더니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렸다.“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임신해서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아주머니를 그렇게 대한 거예요...”도겸은 차가운 눈빛으로 연희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질질 짜며 불쌍하게 울고 있었다.“말 다 했어?”연희는 멈칫했다.“다 울었냐고?”“오빠...”“다 울었으면 얼른 가서 네 짐이나 싸.”“뭐, 뭐라고요?”도겸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그날 너에게 꺼지라고 한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한 거야? 이주 넘게 이 집에 남겨뒀으니 나도 널 봐줄 만큼 봐줬어.”“아니요! 그건 안 돼요! 저한테 이러면 안 되죠!” 연희는 울며 고개를
“가족분 이미 떠나셨어요...”“뭐라고요?! 떠났다뇨, 그게 무슨 뜻이죠?”“이, 이 임산부는 저희 병원의 SVIP인데, 전에 갖은 이유로 여러 차례 입원하신 적이 있거든요.”의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마침 당직을 섰는데, 전에 연희를 본 적이 없어서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그러나 간호사는 달랐다, 연희를 아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까칠한 임산부 때문에 엄청난 괴롭힘을 받았다.매번 연희가 입원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근심을 하기 시작했다.“이게 통지서에 사인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얼른 가족에게 연락해요! 사인을 해야 수술을 할 수 있으니까요. 태아의 심장은 이미 뛰지 않고, 임산부는 출혈이 심하기 때문에 시간을 계속 끈다면 생명에 위험이 생길 수도 있어요.”“하, 하지만 임산부를 데려다주신 그 남자분은 이미 떠나셨어요...”의사는 화가 났다.‘세상에 이런 남편이 있다니! 돈이 많으면 다야? SVIP 병실에 입원시킬 돈은 있고, 출혈이 심한 아내 곁에 있을 시간이 없다 이거야? 이 호족들은 정말 사람도 아니군!’“전에 이 임산부가 몇 번 입원하신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그런 다른 방문객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가서 방문객 기록을 찾고 아무에게나 연락하면 돼요.”“네, 교수님!”...전화가 왔을 때, 서영숙은 한창 꿀잠을 자고 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설정했기에 벨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꺼졌다, 꺼졌다 켜졌다 하다가 결국 조용해졌다.강서정도 간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한창 신나게 놀고 있었다.“서정아, 네 핸드폰이 울리고 있어.”“어디 보자...”그녀는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전용기 번호인 것을 발견했다.‘스팸 전화겠지...’서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은 또 전화를 했다.이번에 서정은 전화를 받았다.그러나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서정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했다.“네?
병실에. 연희는 깨어나서 아이가 유산된 것을 발견하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이 아이는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의사 선생님, 제 아이 아직 살아 있죠? 방금 말씀하신 건 저를 속인 거죠? 이 장난은 전혀 웃기지 않아요, 제 아이는 분명히 살아 있어요!”“아이를 잃은 마음은 저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푹 쉬세요. 아직 젊으시니까, 앞으로...”여기까지 말하자, 의사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계속 말하지 않았다.“왜 제 아이를 지운 거죠? 최선을 다해 제 아이를 구하지 않았죠?! 그리고 왜 본인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수술을 진행했어요?! 당신들에게 그럴 권리가 없어요!”연희가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는지,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했다.“당시 아가씨는 출혈이 심했고 양수도 터졌습니다. 수술실로 옮겼을 때, 태아의 심장 박동은 이미 멈춰 있었습니다. 즉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지 않으면 환자분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가씨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셨습니다.”“결국 병원 측에 긴급 상황을 알린 후, 원장님의 비준을 거쳐 수술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병원 이사들과 보건소 직원이 수술 현장에 있었고, CCTV도 수시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저희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신다면, CCTV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병원 측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입니다.”환자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병원은 이미 완벽한 처리 방법을 생각해냈다.연희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의사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떠났다....“대표님, 병원 쪽에서 엄청 많은 전화가 왔습니다.”도겸이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비서는 핸드폰을 들고 가서 보고했다.“병원?”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네.”서영숙은 이미 퇴원했기 때문에 그녀일 리가 없었다.설령 정말 무슨 일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도겸
“여보세요, 누구세요?”[안녕하세요, 서연희 씨의 가족분이 맞으시죠? 여긴 성종병원 산부인과입니다. 서연희 씨가...]서영숙은 이 말을 듣자마자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그 여자가 또 발광을 하고 있겠지.’그녀는 직접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또 몸이 안 좋은 거야? 죽겠다며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거지? 이제 너희들도 나에게 전화할 필요가 없어. 서연희 그 여자가 죽겠다면 썩 떨어진 곳에 가서 죽으라고 해. 날 귀찮게 하지 말고!”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허! 매번 이 수작이네, 귀찮지도 않나 봐?’서영숙은 연희가 뱃속의 아이를 믿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연희는 감히 그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이렇게 생각하니 서영숙은 자신이 전에 괜히 연희에게 당했다고 느꼈다.그리고 고의로 왕미자, 임강주와 기사 등을 데려간 것도 연희에게 교훈을 주고 싶어서였다.‘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혼자 실컷 고생을 해봐야지!’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마스크팩을 두드리며 흐뭇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병원에서, 두 간호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모두 어이가 없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어휴, 이것이 바로 남의 가정을 파괴한 내연녀가 받아야 할 벌이구나.”...연희는 병실에 이틀째 누워 있었다.그기간 피가 멈추지 않아 또 한 번 수술실에 들어갔다.밀려나왔을 때, 연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비록 정신이 있었지만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출혈과 함께 심각한 감염이 발생하여 그녀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하지만 곁에는 간병인 한 명밖에 없었다.그동안 연희는 도겸과 서영숙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날 버린 거야!’아픈 몸과 우울한 감정 때문에 연희는 갈수록 욱하고 각박해졌다.간호사들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병실에 들어가야 했다.‘SVIP이니 우리도 방법이 없잖아?’...서영숙은 3
연희의 룸메이트였다.“연희야,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진 거야?” 장나미는 연희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잡았다.“유산을 했어도 산후조리를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고질병이...”연희는 ‘유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누가 유산을 했다는 거야?”장나미는 멍해졌다.“허튼소리나 하다니! 난 멀쩡해! 아무 일도 없다고!”“연희야, 너...”“넌 날 비웃으러 온 거지? 어림도 없어!”연희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내가 초라해진 줄 알고 와서 날 짓밟고 싶었나 봐? 장나미, 네 동정심 집어치워.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전에 기숙사에 있을 때, 넌 내가 돈 많은 남자친구 사귀었다고 줄곧 질투했잖아?” “흥, 난 지금 비록 병원에 있지만, 내가 가졌던 것은 네가 평생 얻을 수조차 없는 거라고! 네가 뭔데 감히 날 무시하는 거야?”장나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연희는 냉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날 병문안 하러 온 것은 그냥 핑계일 뿐. 넌 날 통해 다른 재벌들과 접촉하고 싶은 거지? 다 같은 여자들끼리 무슨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들어올 때부터 난 네가 여우란 것을 알아차렸단 말이야!”“너...” 장나미는 화가 나서 얼굴까지 붉혔다.“정말 어이가 없네! 넌 아주 미쳤어! 난 네가 혼자 입원했다고 해서 보러 온 것일 뿐인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원래 장나미는 연희를 설득하러 왔다. 지금 빨리 학교에 가서 복학 신청을 하라고.비록 명문가에 시집가는 것은 물거품이 됐지만, 적어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럼 졸업 후에 일자리를 찾아 자신을 먹여 살리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허, 서연희는 이미 돈 때문에 눈이 멀었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있어. 아니, 얘는 나올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안에서 죽고 싶은 모양이야.’장나미는 자리
연희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리더니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나한테 돈이 없다고! 없어! 정말 한 푼도 없다니까! 날 죽여도 돈이 없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그러나 이순정의 귓속으로 유독 연희에게 돈이 없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돈이 없으면 남자와 자든가! 자면 돈이 생기는 거잖아?! 어릴 때부터 가르쳤던 건데, 넌 왜 아직도 그렇게 멍청한 거야?!]“남자랑 자라고? 난 이미 버림을 받았으니 누구랑 자겠어?!”연희가 소리쳤다.이순정은 눈알을 굴리며 그제야 연희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앞으로 계속 자신의 딸에게서 돈을 뜯어내야 했기에, 이순정은 마침내 카드놀이를 그만 두고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버림을 받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그 돈 많은 남자친구는? 저번에 곧 재벌 집안 며느리로 된다고 하지 않았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들이 후회라도 한 거야 뭐야?]연희는 이순정이 흥분해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억울함이 밀려오자, 연희는 울면서 최근 발생한 일을 전부 말했다.이순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 사람들 정말 너무하네! 내 딸을 임신시켜 놓고, 이제 싫다고 바로 차 버리는 거야?]‘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없다니, 이게 뭐야!’여기까지 생각하자 이순정은 눈빛이 밝아졌다.[연희야, 기다려, 엄마와 네 동생이 바로 표 끊어서 널 찾아갈 테니까!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정은의 논문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줄곧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조미진도 그런 정은을 보며 감탄을 참지 못했다.“넌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니!”정은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조수도 팀원도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점심 시간에 정은은 점심을 먹고 평소대로 휴식실에 가서 쉬었다.아무리 바빠도 정은은 자신에게 휴식 시간을 비워뒀다. 푹 쉬어야 오후에 일을 할 때 더 효율적이었다.조재석은 오늘 수업이 꽉
점심시간이라 실험실은 무척 조용했다.재석은 자신의 휴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또 얼굴을 닦은 다음 그제야 안쪽으로 걸어갔다.그의 옷은 모두 안방에 있었다.문을 열고 장롱 앞으로 걸어간 다음, 재석은 셔츠 단추를 풀면서 옷을 꺼냈다.정은은 남자가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이미 잠에서 깨어났다.정은의 접이식 침대는 문 뒤에 놓여 있었는데, 문을 밀자 마침 그녀를 가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은폐하다고 해서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단지 쉽게 발견되지 않을 뿐,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그래서 정은은 눈을 뜨자마자 남자가 셔츠를 벗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정은은 어안이 벙벙했다.입을 열어 상대방을 일깨워 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는 이미 옷을 다 벗었다.이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열면 두 사람은 더욱 난처해질 뿐이었다.그래서 정은은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기 전에 본 그 장면은 눈앞에 훤했다. 남자의 벌거벗은 등, 튼튼한 근육,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가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그것도 아주 선명했다.정은은 문득 자신이 도둑으로 된 느낌이 들었다.재석은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고, 또 더러워진 그 옷을 잘 갠 다음 떠날 준비를 했다.몸을 돌린 순간, 그는 문 뒤에 드러난 접이식 침대의 한 모서리를 발견했다.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재석은 숨이 멎으며 몸이 뻣뻣해졌다.그는 가볍게 문 쪽으로 걸어와 천천히 문을 끌어당겼다.아니다 다를까, 정은이 접이식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도 있었다.그러나 그 모습을 보니 정은은 깨어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재석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니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소녀는 지금 한창 잘 자고 있었다. 꼭 감은 두 눈, 속눈썹은 길고 촘촘해서 두 부채와도 같았다.하지만 담요가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재석은 담요를 주워 살며시 덮어주었다. 여자애의 깊이 잠든 얼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