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정은 씨와 같은 여자는 아무리 널 사랑해도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지.”‘6년이라...’현빈은 이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꼈다.한때 눈부시게 빛났던 여자아이가 사랑에 눈이 먼 꼭두각시 인형이 되었으니까.현빈은 한때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하마터면 포기할 뻔했다.다행히 정은은 결국 도겸에게서 떠나며 본래의 자신을 되찾았다.“그 6년 동안 정은 씨는 너에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널 사랑했는데...”현빈은 정말 질투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아쉽게도 넌 결국 정은 씨를 실망시켰어. 그래서 정은 씨는 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망설임없이 떠났던 거야.”이게 진정한 소정은이었다!사랑할 때는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뜨겁게 사랑을 했고, 사랑하지 않아도 멋지게 포기하며 혼자 나아갈 수 있었다.이전에 동건은 정은을 ‘사랑에 미친 여자’,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또 그녀가 너무 독하고 너무 이기적이라며 원망을 했다.그러나 현빈은 정은이 결코 남의 평가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랑은 뜨겁게, 포기는 과감하게.“정은 씨가 떠나기로 결정한 순간, 네 위가 어떤지, 너라는 사람이 어떤지는 더 이상 정은 씨의 관심사가 아니야.”도겸은 그 말을 듣고 몸을 약간 비틀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그는 입을 벌렸지만, 말투는 더 이상 전처럼 그렇게 매섭지 않았다.“넌... 넌 또 정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현빈이 웃었다.“여자는 한 권의 책과 같아. 누가 감히 자신이 이 책을 낱낱이 훑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 그리고 나이와 경력에 따라 같은 책을 펼치면 보는 것과 체득하는 것이 모두 다를 거야. 난 짧은 시간 내에 정은 씨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없어. 난 단지 평생 정은 씨를 마음속에 품고,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바랄 뿐이거든. 그래서, 네 질문에 향한 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해. 난 정은 씨에 대해 잘
술집을 떠난 도겸은 별장으로 돌아왔다.연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문을 여는 소리에 바로 나와서 맞이했다.도겸은 그녀를 무시하며 곧장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연희는 화가 나서 입술을 세게 물었다.안방에서.도겸은 큰 침대에 누웠다.전에 두 사람은 이 침대에서 뒹굴었다. 이 순간, 서로의 몸과 얽히고설킨 화면들이 하나하나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숨을 쉬는 사이, 도겸의 눈빛은 어느새 욕망으로 물들었다.그는 낮은 소리로 욕을 하더니 바로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했다.오늘 밤 두 잔밖에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겸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빈이 한 그 말들은 더욱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사랑한다면 왜 정은 씨와 헤어진 거야?”“넌 단지 6년이란 시간으로 정은 씨를 잃어버렸을 뿐이야.”“너는 말끝마다 정은 씨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전에 한 모든 일은 정은 씨를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어.”“그러니 정은 씨와 같은 여자는 아무리 널 사랑해도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지.”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못처럼 도겸의 가슴에 박혔다....이른 아침, 도겸은 일찍 일어나 양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회사에 가려고 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식탁 위에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왕미자가 만든 것인 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자 연희가 웃음을 지으며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손에 심지어 만두 한 접시를 들고 있었다.“도겸 씨, 일어나셨어요? 저 오늘 죽도 끓였고 만두도 좀 쪘는데. 좀 드시지 그래요?”“필요 없어.” 도겸은 표정이 차가웠다.연희는 얼른 접시를 내려놓고 도겸의 앞으로 다가갔다.“그럼... 두유라도 좀 마실래요? 단 거 싫어하시죠? 그래서 설탕 하나도 안 넣었는데...”연희는 말투가 자연스러웠고 태도까지 부드러웠다. 마치 어제 두 사람이 전혀 다투지 않은 것 같았다.도겸은 식탁 위의 아침을 힐끗 보더니, 눈빛은 또다시 연희의 얼굴에 떨어졌다.
왕미자가 물었다.“아가씨, 이 보신탕은 아직 다 끓이지 않았는데요?”“담으라면 그냥 담아요.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아요?”‘맛이 어떻든 아주머니는 마시지 않을 텐데. 물론 마시면 더 좋지, 아예 배탈나라!’병원, 병실에서.연희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안으로 들어갔다.“아주머니, 보신탕 갖다 드리러 왔어요.”서영숙은 연희를 보자마자 호전된 두통이 다시 발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어지럽고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누가 오라고 했니? 난 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연희는 진지하게 말했다.“아주머니, 저 사과하러 왔어요. 어제는 제가 너무 심했죠? 아주머니와 말대꾸를 하면 안 됐는데. 이건 제가 오늘 아침에 끓인 보신탕이에요. 몸보신해 드리려고 얼른 가지고 왔어요.”서영숙은 냉소를 지었다.“사과? 고양이가 쥐 생각하고 있네. 네가 나한테 대들지 않으면 천만다행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네가 끓인 국을 마시겠니?”그녀는 연희가 안에다 침을 뱉을까 봐 무서웠다!연희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아주머니가 이대로 화병에 죽었으면 좋겠는데!’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연희는 보온병 뚜껑을 열더니 또 깨끗한 그릇을 꺼내 보신탕을 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서영숙의 앞으로 가져갔다.“아주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저는 진심으로 사과드리러 온 건데. 이 보신탕은 두 시간 동안 끓였으니 얼른 좀 드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영숙은 손을 들어 연희가 들던 그릇을 뒤집었다.그리고 또 베개를 들고 연희에게 던졌다.“꺼져! 네가 만든 보신탕은 절대로 마시지 않을 거야. 안에 독을 넣었는지 누가 알겠어! 당장 나가라고...”연희는 병실에서 쫓겨났다.방금 빨리 피했지만 옷에 국물이 조금 튀었다.흰색 원피스는 디올의 여름 신상이었다. 국물 자국은 무척 선명했고, 연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로 닦았지만 지워지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어차피 옷장 안에 비싼 옷이
6월의 실험실은 여전히 무척 바빴다. 정은은 연속 2주일 동안 바쁘게 돌아쳐서야 하루 쉴 수 있었다.새벽에 일찍 일어나 물고기에게 먹이를 준 다음, 소진헌의 전화가 걸려왔다.[정은아, 이미 일어났어?]“네, 일어났어요.”[“왜 좀 더 자지 않고? 오늘은 실험실에 갈 필요가 없다며? 하루 푹 쉬어.]“일찍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져서요. 엄마는요?”[서재에 있지.]“또 소설을 쓰고 계시는 거예요?”[그래! 너도 잘 알잖아, 네 엄마는 아침에 영감이 가장 많을 때지.]정은은 계약서를 떠올리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아빠, 최근에 그 편집장님이 찾아왔었나요?”[아니, 왜? 그 두 사람은 보통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든.][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통화를 마치자, 정은은 주방에 가서 자신을 위해 아침을 만들었다.소진헌은 뒤뜰에 가서 자신의 화초를 다듬었다.이미숙은 서재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 전념했다. 한 줄 한 줄의 문자가 유창하게 생성되자, 마지막으로 하나 또 하나의 스릴러 줄거리로 조합되었다.세 사람의 일상은 평온하고 조용했다.그러나 별장에서 멀지 않은 교직원 동네에서. 그들이 오래 지내던 집 밖에는 한 여자가 짜증을 내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계세요? 이 작가님 계세요?!”유보영은 오늘 샤넬 슈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 갈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하이힐이 흙투성이가 된 땅을 밟자, 그녀는 무척 짜증이 났다.‘이게 사람이 사는 환경이야! 개집만도 못하잖아! 이미숙의 계약이 곧 만기가 되어 재계약을 해야 하지 않았더라면, 난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텐데!’원래 인터넷에서 재계약을 할 수 있었고, 이렇게 번거로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말다툼을 한 후, 이미숙은 뜻밖에도 유보영의 모든 연락방식을 차단했다.유보영은 이를 발견하고 냉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동안 이미숙은 나와 다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 하지만 결국 이미숙이 스스로 날 찾아오면서 타협을 했잖아. 이번에 인터넷 소설을 쓰는 것을 정말
말하면서 각박한 눈빛으로 유보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허, 이 차림새를 보니 딱 봐도 기생이구먼. 겉으로는 화려하게 입었으면서, 어젯밤에 남자 몇 명이나 시중들었는지 누가 알겠어!”유보영은 놀라서 멍해졌다.그녀는 상대방이 이렇게 더럽게 욕하는 동시에, 자신을 직접 공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당, 당신...” 유보영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욕하자니, 유보영은 이렇게 상스러운 말을 할 수가 없었다.“나 뭐? 혀가 짧아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야? 그럼 비용도 적게 들겠지? 5천 원? 만 원? 십만 원일 리는 없잖아, 늙은 여편네가 그렇게 비쌀 리는 없으니까.”유보영은 화가 나서 얼굴을 붉혔다.“난 당신과 같은 무지막지한 여자와 따지지 않을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고, 말이 안 통하는 거친 사람이네요!”“어머, 그걸 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나도 그렇게 욕해 볼게요. 파렴치한 걸레, 기생, 남의 남자나 꼬시는 늙은 여우!”“나, 난 당신과 다투지 않겠어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개돼지와 비교할 자격도 없어요.”말을 마치자 유보영은 하이힐을 신은 채 떠났다.“쳇, 개돼지도 당신 같은 여편네보다 낫죠!”유보영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하이힐이 진흙탕에 박혔다. 200만 원짜리 신발은 더 이상 신을 수 없게 되었다.그녀는 기분이 더욱 나빴다.‘이미숙이 지내는 이 동네는 대체 뭐야? 뭐 저딴 이웃이 다 있지? 오늘 정말 재수가 없네. 그리고 계약서는... 어차피 두 주일 정도 남았으니, 이미숙도 재계약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이 10년 동안 출판사는 이미 큰 재편을 겪었고, 오프라인 책 판매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미숙의 명성은 이미 예전만 못한 데다가 그녀는 또 인터넷을 탈퇴하여 최신 뉴스를 전혀 접할 수 없었기에, 다른 출판사 자원이 전혀 없었다.‘나 말고 누가 자신의 편집장이 되어주겠어? 누가 대신 책을 내주겠냐고? 사실 이번에 찾아올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계약이 만
아침을 먹은 후, 정은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이주 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먼지가 쌓인 곳이 꽤 많았다.그렇게 오전이 지나갔다.점심 휴식 후, 정은은 밖에 나가서 장을 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자마자 바로 조수민의 전화를 받았다.[정은아, 지금 집에 있어?]“응, 왜?”[그냥, 갑자기 네가 만든 요리가 먹고 싶어졌어.]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정은은 이 말을 듣자마자 수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아니... 그냥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네가 보고 싶네.]그 소리는 무척 갑갑했다.정은은 계속 추궁하지 않았다.“그럼 이리 와, 내가 밥 해 줄게.”[그래! 4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야!]정은은 재빨리 나가서 장을 봤다. 집에 도착하자, 수민도 뒤따라 도착했다.문에 들어선 수민은 정은을 안으며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최고야. 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샀네.”정은은 수민이 은근히 원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백지영과 싸웠을지도 모른다.“됐어, 앉아서 놀고 있어. 난 밥 하러 갈 테니까 금방 다 될 거야.”“응!” 수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잘 듣는 학생과 같았다.50분 후, 요리가 식탁에 올라왔는데 모두 수민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정은아, 집에 술 있어? 우리 둘이 한잔할까?”“냉장고에 맥주 있는데, 마실래?”“응!”수민은 내일 출근할 필요가 없었고, 마침 정은도 이틀 연휴였다.두 사람은 한 상 차린 요리를 별로 먹지 않았고 대신 술을 꽤 많이 마셨다.맥주는 비록 도수가 낮지만, 한 캔씩 계속 마시는 건 너무했다.잠시 후, 수민은 이미 얼굴이 붉어졌고, 눈빛이 흐릿해졌다.시간은 이미 늦었지만, 그녀가 아직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정은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술은? 벌써 다 마신 거야? 두 병 더 가져올게.”말하면서 수민은 갑자기 일어나 비틀비틀 냉장고로 걸어갔다.그러나 얼마 걷지 못하고 하
정은은 깜짝 놀랐다.‘수민이 지금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마침 선배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빨리 올 수가 없잖아!’10분 뒤, 정은은 수민을 침대에 눕힌 다음, 살금살금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몸을 돌리자, 재석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미처 치우지 못한 맥주 캔에 떨어졌다.“이거 다 수민이 혼자 마신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엄격한 편은 아니지만, 정은은 왠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나도 좀 마셨어요.”“조금?” 재석은 차분하게 정은을 보더니 눈빛은 횃불처럼 밝았다.정은은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에헴! 두 캔은 많은 편 아니겠죠? 하지만 나 정말 취하지 않았어요.”수민이 술에 취한 것도 다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을 빌려 근심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궤짝에 있는 와인까지 땄기에, 두 가지 술을 섞어 마시는 바람에 더 빨리 취한 것이었다.재석도 머리가 좀 아팠다.“일단 여기에 앉아 있어. 내가 치울게.”술을 마셔서 그런지 정은의 반응은 그리 빠르지 못했다. 재석의 말을 듣자, 그녀는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정은이 정신을 차릴 때, 재석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고 능숙하게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결국 순순히 소파에 앉기로 했다.재석이 다 치우자, 시간은 이미 저녁 9시가 되었다.“잠깐만 기다려, 내가 쓰레기 버리러 나갈게.”문을 여는 사이에 정은도 따라서 일어섰다.“같이 가요. 마침 나도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재석은 그녀를 쳐다보았다.“외투 입어.”“아, 네!”복도의 빛이 어두컴컴했다. 재석은 앞장을 섰고, 정은은 약간 뒤처져 있었다.남자는 키가 훤칠해서, 불빛이 떨어지니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정은은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오후에 작은어머니가 나에게 전화를 했었어.” 재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맞선 때문에요?”
수민이 말한 ‘평소에 별로 연락하지 않고, 성인이 된 이후로 사이가 멀어진’ 사촌 오빠가 그녀를 이렇게 관심하다니.사실 재석은 평소에 비록 냉담하고 쌀쌀해 보이지만, 정은은 그가 너무 바빠서 말로 관심과 염려를 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부드러웠다.“만약 오늘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연락할 수 있어.”여기까지 말하자 재석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정은을 힐끗 쳐다보았다.“알코올은 신경계를 자극해서 구토와 메스꺼움 등의 증상을 일으킬 수 있고, 심하면 쇼크와 실신을 일으킬 수 있어. 그래서 술은 적게 마시는 게 좋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재석이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은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귀까지 핑크 빛으로 변했다.그녀는 목을 가다듬었다.“술의 부작용은 아주 많지만, 잠시 고민을 잊게 해줄 수 있잖아요. 가끔 머리를 비우며 적당히 마시는 것도 기분을 풀어주는 방식인 것 같은데,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해요?”재석은 정은이 반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투를 따라배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기분을 푸는 방식이 아주 많은데, 굳이 술을 마셔야 할까?”“음... 사람마다 다른 법이죠. 만약 그 사람이 술을 마시기 좋아한다면요?”재석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넌 좋아하니?”정은은 멈칫했다. 남자의 그윽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는 즉시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예전에 도겸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다쳤어도 정은은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왜냐하면 그녀는 도피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정은은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두려웠다.재석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어쩐지 작은어머니께서 수민이가 너한테 나쁜 것을 가르칠까 봐 걱정하셨더라니.”정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만약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나에게 전화
하지만 막내딸이 실종된 이후로 이씨 가문은 모든 것이 변했다.이것도 바로 이춘재 부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아직도 행방이 묘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모를 떠올리니, 현빈은 저도 모르게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만약 계속 찾을 수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아쉬움을 메우지 못할 것이다.“현빈아, 목이 좀 마르구나.”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저 물 사러 갈게요...” 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많이 바빠?”“괜찮아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난 물 좀 사러 갈 테니까, 나 대신 두 분 좀 챙겨줘.”“내가 사러 갈까?” 어차피 정은도 내려와서 물을 사려 했다.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평소에 고정된 브랜드의 물만 마시거든. 이 근처에는 없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입 마트에 가서 사야 해.”“그래요? 그럼 얼른 가서 사요. 난 여기서 두 분과 함께 얘기 나누고 있을 테니 안심해요.”“고마워.”현빈은 몸을 돌려 떠났다.할머니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앉혔다.“아가씨, 우리 현빈이와 친구라고? 너희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도겸이 바로 그 ‘친구'였다.“그렇구나. 현빈이는 여성 친구가 거의 없는데, 네가 처음은 것 같구나!” 봉수진은 웃음을 지었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와, 심 대표는 정말 물 마시듯 여자친구를 바꾸었지.’“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너무 많이 변했어.”이춘재는 갑자기 감탄하기 시작했다.정은은 그의 말투에 묻은 그리움을 알아차리며, 최근 몇 년 J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정은이 J시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넌 이곳의 사람인가?”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L시의 사람이에요. L시 아시죠? 남방의 구릉지대인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물도 있고...”정은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이게 뭐야! 너무 쪽팔려!’결국 재석은 정은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뚫으며 밖으로 비집고 나갔다.이번에는 아무도 정은을 밀지 않았다.“휴...”정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들자 뜻밖에도 남자의 웃음을 머금은 눈과 마주쳤다.“미안해요, 선배. 나도...”재석은 그녀의 볼을 가리켰다.“머리카락이 붙었어.”“네?”정은은 손을 들었지만 그 머리카락이 어딨는지 몰랐다.재석은 그녀를 도와 떼어냈다. 비록 충분히 조심스러웠지만, 손끝은 여전히 여자의 매끄럽고 따뜻한 피부에 닿았다.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다 됐어.”정은은 어색하게 그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현장이 너무 붐벼서 머리카락이 다 엉망됐잖아. 게다가 땀까지 흘렸으니 볼에 붙은 거야. 너무 쪽팔려.’방금 재석의 품에 안긴 장면을 떠올리면 정은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호흡이 가빠졌다.‘이곳에 못 있겠어...’“선배님! 목 안 말라요?! 나, 나 물 좀 사러 내려갈게요!”말을 마친 후 얼른 줄행랑을 쳤다.재석은 입을 벌렸다. 그는 목마르지 않다고, 만약 그녀가 마시고 싶다면, 자신이 가서 살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정은은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현빈과 마주칠 줄이야.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곁에 두 노인이 있었다.할아버지는 백발에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있어 무척 엄숙하고 까다로운 느낌을 주었다.그의 옆에 있는 할머니는 많이 부드러워 보였지만,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고,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정은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노부인은 고개를 돌렸지만, 망연히 다시 시선을 옮겼다.현빈은 여기서 정은을 만날 줄 몰랐다.그는 오늘 특별히 일정을 취소한 다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놀러 나왔다.두 노인은 일주일 전에 귀국했는데, 현빈은 미리 사람 시켜 본가를 치우라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러나 앞줄은 모두 여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가 비슷한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이게 뭐야?”남자친구도 어리둥절해지더니 저도 모르게 말했다.“왜 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야?”이 말에 대중들은 분노를 느꼈다.“아저씨 아줌마가 뭐가 어때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남자친구는 해명하려 했다.“아, 아니요... 이 나이에도 사인회에 나오시는 거예요?”“소설 때문에 왔다! 왜?”“그러게!”남자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미숙 작가님의 독자들은 연령층이 이렇게 넓었어요?”“흥! 우리는 10년 전에 이미 작가님의 팬이었어. 물론 후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돈을 버느라 바빠서 인터넷에서 활약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 그래서 너희 젊은이들처럼 투표할 줄도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돈을 내고 책을 샀단 말이야.”“맞아, 우리는 좀 바빴을 뿐이지, 죽은 게 아니라고!”여자는 앞을 내다보니, 현장의 독자들은 정말 젊은이와 어르신들이 반반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 간단히 인사를 마쳤고, 이미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우와...”“이 작자님이 이렇게 예쁘신 분이라니!”“세상에! 너무 예쁘셔!”“그렇게 섬뜩한 소설을 쓰신 분이 이렇게 예쁜 미녀라니!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어제 산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에 하얀 스카프를 맨 이미숙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치맛자락이 가볍게 넘실거리며 우아한 분위기를 선보였다.“안녕하세요, 이미숙입니다. 오늘 여기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정말 너무 기쁩니다.”말하면서 이미숙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고마움을 표시했다.현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정은은 군중 속에 서서 무대 위에 선 어머니를 보며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응답 코너가 끝나면 모두가 가장 기대하는 사인 코너였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정은은 앞으로 밀려갔다. 그녀는 옆으로 피하려고 몸을 돌렸는데, 누가 뒤에서 밀었는지 정은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넘
사인회는 마크 서점 3층에서 열렸다.아직 입장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독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십여 명의 경호원이 공동으로 질서를 유지했다.문과 가까운 곳에는 큰 전시대가 놓여 있었고, 위에는 이미숙의 새 책 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 외에 또 하나의 큰 등신대가 있었는데, 위에는 책 표지와 중요한 캐릭터의 이미지가 그려 있었다.“와,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한 젊은 여자가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남자친구도 뒤에 있었는데 이 상황을 보고 감탄을 했다.“아니... 사인회인데, 왜 팬미팅 현장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젊은 여자는 좋아하는 아이돌을 자주 바꾸었고 좋아하는 연예인이 가득했지만 소설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그녀는 지난주에 자신의 아버지가 미스터리 소설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표지는 무척 섬뜩했다.마침 그날 여자의 핸드폰이 고장 나서 수리점에 보냈다. 오후에야 수리를 다 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심심해서 그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출 수가 없었다.오후에 핸드폰이 다 수리됐어도 여자는 한 번조차 보지 않았다.밤을 새워 마침내 책을 다 본 후, 여자는 인터넷으로 이 작가의 정보를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아무도 찾지 못했다.그리고 여자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이 작가님은 무슨 조선시대 사람이야?! SNS계정이 하나도 없다니!]여자는 이런 신기한 책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했지만,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이를 악물고 이미숙의 다른 두 미스터리 소설을 볼 수밖에 없었다.10년 전의 작품이니, 여자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또 밤을 세워 그 책을 다 읽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정말 짜증나네!”여자는 일주일 동안 이미숙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개똥보다도 못한 청춘 로맨스 소설 외에 다른 몇 권의 미스터리 소설은 그야말로 훌륭했다.심지어 지금 이 10년 전의 작품을 읽어도 그것이 전혀 시대에
그리고 전에 몇 번 만났을 때도 정은은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렇게 된 이상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았다. 어차피 우연하게 몇 번 만난 것 외에 두 사람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강서원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이는 생긴 것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예의도 없군.’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자, 강서원은 발걸음을 재촉했다.“정은아, 너 어디 갔었어? 빨리 와봐, 난 이미 다 골랐어.”이미숙이 정은을 불렀다.“벌써요? 전 화장실에 다녀왔어요. 엄마가 입어보는 것도 못 봤네요...”“돌아가서 다시 입어볼게.”“네.”“방금 한 여사님을 만났는데, 내가 원피스를 하나 골라줬거든. 그런데 글쎄 자신의 아들이 ‘7일담'을 보고 있다는 거야...”이 시각, 먼 실험실에 있는 재석은 재채기를 여러 번 했다.진욱은 옆에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 교수, 재채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대체 밖에 여자가 얼마나 있길래...”“지금 많이 한가한가 봐??”진욱은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내일 그냥 혼자 크리스털 호텔의 세미나에 참석해.”‘안 돼!’진욱은 속으로 생각했다.조수진은 몰래 웃었다.“쌤통이다! 그러게 누가 조 교수님을 건드리래!”...정은 일행이 쇼핑을 마칠 때, 시간은 이미 오후 6시가 되었다.그래서 그들은 아예 백화점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모녀가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의논할 때, 나석천의 전화가 걸려왔다.[이미 레스토랑을 예약했으니 직접 지하 1층으로 내려오세요.]이미숙이 말했다.“편집장님이 밥을 사시다니? 이건 말이 안 되죠.”[제가 작가님을 J시로 초청했잖아요. 그럼 따지고 보면 제가 작가님의 의식주를 모두 책임져야 하죠. 지금은 그냥 밥을 한끼 사는 것일 뿐, 이건 제가 영광이죠.]나석천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하고 우렁찼다.이미숙이 L시 사람이라서 입맛이 좀 담백한 것을 고려하여 나석천은 J시와 외지
그러나 일은 점원이 예상했던 것처럼 되지 않았다.강서원은 이미숙에게 다가가더니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이 원피스가 잘 어울리네요.”강서원도 입어보았는데, 나름 괜찮았지만 이미숙이 입는 게 더 잘 어울렸다.사이즈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더 잘 어울렸다.강서원의 기질은 너무 강직해서 부드럽지 못했지만, 이미숙은 딱이었다.부드럽게 생긴 데다가 미소까지 부드러워 이목구비가 무척 편안해 보였다.‘얄밉지 않은 얼굴이야.’말하자면, 강서원은 줄곧 동서인 백지영, 그리고 지난번 다례 수업에서 한복을 입은 정은처럼 기질이 부드러운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그러나 앞에 있는 이미숙은 의외로 강서원의 마음에 들었다.점원은 한쪽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이미숙처럼 세심한 사람은 재빨리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릴 것이다.그녀는 강서원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고마워요.”이미숙은 곁에 있는 한 원피스를 가리켰다.“여사님은 몸매가 좋아서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의 원피스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한번 입어봐요...”강서원은 상체가 풍만하고 허리가 가녀려 허리라인이 돋보이는 원피스를 입는 게 더 적합했다.사실 지금 이미숙이 입고 있는 이 원피스는 커팅부터 원단까지 모두 괜찮지만, 허리라인이 뚜렷하지 않아 강서원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뚱뚱해 보이게 만들었다.이미숙이 가리키고 있는 원피스도 검은색이었는데, 입으면 아주 날씬해 보일 수 있었다. 커팅은 허리라인을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물고기 꼬리와 같은 하이웨스트 디자인은 나른함을 더했다. 이는 원피스 자체의 엄숙함을 덜어주었다.강서원도 기대를 품지 않고 옷을 입어보았는데, 뜻밖에도 그녀와 정말 잘 어울렸다.전신거울 앞에 선 강서원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안목이 정말 좋네요. 코디라도 배운 적이 있는 건가요?”이미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하지만 코디 잡지를 즐겨 보곤 했죠.”“보기만 하면 되나요?”“스스로 코디도 할 수 있죠...”두
소씨 가문의 남자는 저마다 잘생겼는데, 소진헌은 키가 크고 훤칠했으며 중년이 되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몇 벌의 양복을 입어보자 모두 아주 어울렸다.소진헌은 이미숙에게 물었다.“여보, 어느 게 괜찮을 것 같아?”정은도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이미숙은 잠시 생각했다.“다 괜찮은데.”“그럼 어느 걸 골라야 하지?”이미숙이 말했다.“고를 필요 없어요. 다 사면 되죠.”“그건 안 돼, 이게 얼마나 비싼데? 난 이 한 벌이면 충분해. 집에 옷이 아직 많잖아.”이미숙은 이미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건네주었다.“이 세 벌 다 포장해줘요. 고마워요.”“네, 알겠습니다!”점원은 웃으며 카드를 가져갔다.소진헌은 수줍은 소녀처럼 이미숙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여보, 이건 너무 비싸잖아. 한 벌에 몇 백만 원이라니...”“괜찮아요, 내가 당신에게 사주는 거예요.” 이미숙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어제 배당금을 받았는데, 수억이 넘어요.”소진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 그렇게 많아?”“그럼요.”“여보, 정말 너무 대단해!”이미숙은 얼굴이 붉어졌다.“콜록!” 정은은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곁에 있는데, 두 분은 좀 자제하시면 안 되는 건가?’소진헌의 옷을 사는데 시간이 들지 않았지만, 이미숙은 아니었다. 2층 여성복 구역을 몇 번이나 돌아다녔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어떤 옷들은 심지어 딱 봐도 아니었기에 입어 볼 의욕이 전혀 없었다.정은은 갑자기 한 프랑스의 브랜드를 떠올렸다. 이름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아, 매장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매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멀리 떨어진 모퉁이에 있었다.그래도 옷은 예뻤는데, 이미숙은 발을 디디자마자 눈이 밝아졌다.정은이 골라줄 필요 없이 이미숙은 이미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그녀는 먼저 치마 두 벌을 입어 보았는데, 오렌지색과 파란색이었다. 디자인은 다르지만, 모두 피부톤과 잘 어울렸다.치맛자락의 무늬는 레이스에 자수를 더한 것으로, 고전적이고 우아한 운치를 띠고
경혜는 도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그녀는 오늘에야 남자의 차가 포르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옷은 아르마니, 시계는 파텍필립이었다.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케이크를 보니 경계는 눈빛이 절로 깊어졌다.다른 한편, 정은이 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는 이미숙을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갔기 때문이다.그녀는 전공 수업의 교수님에게 미리 설명을 했다. 다행히 오늘은 새로운 내용을 배우지 않고 주로 지난주 팀 과제를 보고하고 총결하는 것이었는데, 민지와 서준이 보고하면 됐기에 정은도 부담 없이 휴가를 낼 수 있었다.내일이 바로 사인회였고, 요 몇 년 동안 이미숙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거의 참석한 적이 없었다.이미숙은 이리저리 골랐지만, 옷장에 있는 옷이 사인회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못 입는 건 아니지만 뭐가 좀 부족했다.소진헌은 진심으로 칭찬을 했다.“우리 여보는 무엇을 입어도 다 예뻐, 정말이야!”그러나 이미숙은 평소처럼 소진헌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정은은 재빨리 알아차렸다.“엄마, 우리 새 옷 사러 가요! J시에 큰 백화점이 얼마나 많은데, 틀림없이 엄마가 좋아하는 옷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이미숙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그래!”소진헌은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왜 내 칭찬이 쓸모가 없는 거지?’...SSG 백화점에서.세 식구는 관광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1층에 고급 브랜드가 가득 모인 사치품 매장이 점차 작아지는 것을 보며, 이미숙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 백화점 정말 크네!”의상은 2층과 3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층수를 미처 누르지 못해서 그들은 4층으로 올라갔다.이미숙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책장 포스터에 이끌려 세 사람은 아예 이 층에서 내리기로 했다.위에는 ‘SSG RENDEZ-VOUS’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서점처럼 보이지만 일반 서점과 달랐는데, 서점과 카페 및 레스토랑이 하나로 된 곳이었다.문에 들어서면 카페라서 공기 중에 진한 원두 향기가 풍겼다.뒤에는 음식이 있었다.가운데는
“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말하면서 민지는 서준의 팔짱을 끼고 기뻐하며 학교 밖으로 돌진했다.서준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손을 빼려고 했다.민지는 바로 그를 잡아당겼다.“야, 쑥스러워하지 마. 우린 절친이잖아!”민지는 말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팔을 못 빼겠네! 이 여잔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두 사람은 교문을 나서자마자 케이크를 들고 스포츠카에서 내려오는 도겸을 보았다. “어머!”민지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왜 매번 차를 교문 앞에 세우는 건지 모르겠네. 심각한 교통 체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서준은 잠시 침묵했다.“아마도 이런 자신이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어디가 멋있다는 거야? 포르쉐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으니까?”“그럴 수도?”민지는 서준을 바라보았다.“너도 이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집은 국산 자동차를 선호해서.”민지가 말했다.“나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삼촌 할아버지는 모두 렉서스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거든.”“그럼 왜 자꾸 포르쉐를 운전하는 거지?”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도겸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들고 있는 케이크는 아주 맛있어 보이는데.”서준은 그녀가 침을 삼키는 동작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도겸은 몇 번이나 찾아오면서 정은이 늘 민지와 서준과 함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횟수가 많아지자, 그도 두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도겸은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정은이는? 오늘 왜 너희들과 같이 있는 않는 거야?”민지는 사실대로 말했다.“정은 언니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요.”“왜?”“휴가를 냈거든요.”“왜 갑자기 휴가를 낸 거야?”“그건 저희도 잘 몰라요.”도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묻고 싶었다.그러나 민지는 이미 서준의 팔을 잡으며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저희는 아직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도겸은 허탕을 쳤다. 양복 차림을 한 사람이 미니언즈 포장의 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