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영도 강요하지 않고 기사에게 먼저 떠나라고 분부했다.정은은 호텔 입구에서 차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자, 그녀도 일일이 대답했다.백지영은 정은을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기사를 안배해주지 않았다. 재석도 확실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세미나에서 오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2분 앞당겨 도착했다.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재석은 창문을 통해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았다.장막을 사이에 두고, 정은은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그림에서 나온 미인처럼, 그녀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재석은 잠시 멍을 때리다가 정신을 차리며 차를 옆에 세웠다.그리고 차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정은을 만난 후, 재석은 세심하게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었다.정은이 허리를 굽히자, 남자는 즉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리며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고마워요.”정은은 자리에 앉은 후,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됐네요, 선배님.”원래 그녀는 재석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 혼자 택시를 타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오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정은은 재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은 날씨가 눈 깜짝할 사이에 비가 내릴 줄이야. 이런 날씨에 차를 전혀 잡을 수 없었다.호텔 문 맞은편에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강서원은 바로 거기에 서서 웨이터가 자신의 차를 몰고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한복을 입은 정은이 검은 폭스파겐에 올라간 것을 보았다.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녀는 남자의 모습을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그가 손에 든 우산에 롤스로이스 로고가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것은 롤스로이스 차 안에 든 우산이었다.강서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이젠 얼굴이 꽤 예쁜 아이들은 모두 부자의 애인이 되려고 애를 쓰는군. 이 아가씨는 겁도 없는 것 같아서,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런데 정말 납득이 안 가
밤이 깊어지자, 주위도 많이 고요해졌다.이때 두 사람은 실험기구를 조작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재석은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소녀는 한창 열심히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니, 코 옆에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전에 재석은 줄곧 혼자 야근을 하고 밤을 새웠다. 오늘 누군가 자신과 함께 있으니, 그 느낌은 낯설면서도 뿌듯했다.두 사람이 실험실을 떠날 때,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다.아파트로 돌아와 서로에게 인사를 한 다음, 정은이 먼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재석은 정은의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오후의 장막 속에서 한복을 입고 호텔 문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그림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예쁘고 우아했다.가녀린 허리, 하얀 피부...남자는 문득 정신을 차리며 가볍게 중얼거리더니 재빨리 집으로 들어갔다.마치 1초라도 늦으면, 자신의 낭패한 모습을 숨길 수가 없는 것만 같았다....정은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같은 시각, 연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미 새벽 2시가 되었는데, 도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서영숙이 낮에 자신을 욕한 말들은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뿌리를 박은 듯 잊혀지지 않았다.연희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아예 침대에서 일어났고, 잠옷 치마를 입은 채로 침실을 나섰다.넓고 큰 별장은 어둡고 텅 비었으며 아무도 없었다.“이모님? 대체 어디에 간 거예요?!”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당장 나오지 못해요!”한밤중에 두 가정부는 한창 달콤하게 자고 있었다. 연희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들은 또 무슨 상황이 생긴 줄 알고 서둘러 일어났는데, 외투를 입을 겨를조차 없었다“아가씨, 왜 그러세요?”“배가 아프신 거예요?”“의사 선생님 불러올까요?!”연희는 제자리에 서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어쩜 이렇게 돼지처럼 쿨쿨 잘 수가 있는 거예요? 복을 누리러 온 거예요 아니면 나와 아이를 챙기러 온 거냐고요?!”두 가정
‘그래, 어차피 무슨 일 생겨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임산부가 스스로 요구했으니까.’“네, 그럼 얼른 누우시죠.”연희는 소파에 누워있었다.“진작에 이랬어야지. 꼭 내가 욕을 해야 움직일 거예요? 정말 한심하네요. 따지고 보면 비천한 것들이라 더 그래!”가정부는 멈칫하더니 심호흡을 했다. ‘참자 참아!’“저녁에 밥 안 먹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예요? 힘 좀 쓰면 안 돼요?”“네.”“아! 힘 좀 쓰라는 거지, 날 죽이라는 게 아니잖아요. 나랑 맞서려고 작정한 거예요?”가정부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면 괜찮으신 겁니까?”“응.”30분 후, 갈비탕이 올라왔다. 담백하고 향기로워서 딱 봐도 제대로 삶은 게 분명했다.가정부는 꿀을 조금 넣었는데, 이 순간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그러나 연희는 한 입만 맛보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이게 무슨 맛이지? 왜 이렇게 이상한 거예요? 설마 안 익은 건 아니죠?”임강주는 이 말을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덜 익을 리가 어딨겠어요? 제가 그동안 갈비탕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데. 원래 이런 맛이에요. 다시 한 번 드셔보시지 그래요?”연희는 팔짱을 끼고 냉소를 지었다.“끓인 방법에 문제가 없는 이상, 갈비에 문제가 있다는 거네요? 그러나 아주머니께서는 최고급 갈비를 사줬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당신은 좋은 갈비를 숨겨 놓고 나에게 일부러 나쁜 갈비를 먹인 거네요?!”임강주는 연희의 말에 놀랐고, 정신을 차릴 때 얼른 억울함을 호소했다.“아가씨, 어떻게 마음대로 저에게 그런 누명을 뒤집어씌울 수 있습니까?! 저는 강씨 가문에 20년 넘게 일했고, 아가씨와 사모님을 위해 만든 수많은 음식을 만들었지만, 여태껏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손을 썼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경찰에 신고하세요. 저는 무조건 조사에 협조할 것입니다!”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연희는 마음이 찔렸다.그녀도 정말로 이 갈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를 빌
물을 끄고 가운을 걸친 도겸은, 그 검은 그림자가 문에 닿으려는 순간 재빨리 손잡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연희는 바로 그에게 들켰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어?!”도겸의 눈빛에서 분노가 솟구치고 있었다.“내가 이 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귀 먹었어?! 어떻게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놔?!”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자, 연희는 두려움에 손발이 차가워졌다.“저, 해, 해장국을...”“내가 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줄 알아?” 남자는 웃으며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나랑 몇 번 잤다고 자기가 재벌 집 며느리로 된 것 같지? 너 같은 여자, 난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봤어. 내가 손을 흔들면 개처럼 달려오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난 거야? 네가 홀딱 벗고 내 앞에 서 있더라도, 난 너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을 거야.”도겸은 냉담하게 연희를 바라보며 눈빛은 경멸로 가득 찼다.“왜 그런지 알아?”연희는 온몸을 떨며 귀를 막더니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듣, 듣기 싫어요,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못 듣겠어? 그럼 나 건드리지 마. 징그러우니까. 당장 꺼져!”연희는 울며 뛰쳐 나갔다.도겸은 그녀가 들고 온 쟁반을 아예 엎어 버렸다.그날 밤, 연희는 새벽까지 잠을 지새우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온통 남자의 매정하고 냉혹한 모습이었다.‘왜? 난 이미 도겸 씨의 아이를 가졌는데, 마땅히 나에게 더 잘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지금 줄곧 소정은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 여자와 다시 화해하려는 건가?’여기까지 생각하자 연희는 가만히 눕지 못하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왔다. 그리고 화가 나서 침대 서랍을 모조리 걷어찼다.이른 아침, 왕미자는 안방을 치웠는데, 바닥에 국물이 쏟아진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그리고 이때, 옆방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뭐야? 정말 지겨워 죽겠어! 다들 정신이 나갔네! 내 팔자는 팔자도 아니야? 정말 대걸레로 한 대씩 때리고 싶다!’그러
서영숙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돌렸다.“별일 없으면 됐어. 그럼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임산부는 멀쩡하시니 약을 먹을 필요 없어요. 얼른 데리고 돌아가서 잘 휴양하면 돼요.”서영숙이 입을 삐죽거렸다.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연희가 일부러 이런 소란을 피웠단 것을.병상에 누워 있던 연희는 마음이 좀 찔렸다.그녀는 그때 화가 나서 배가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깜짝 놀랐는데, 병원에 오니 아무 일도 없을 줄이야.서영숙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내 손자를 봐서라도 참자.병실에 들어가자 서영숙은 참지 못하고 경고를 했다.“제발 좀 가만히 있어! 이런 소란을 피우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을 텐데!”연희는 목을 움츠리더니 감히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다.“알았어요.”서영숙은 그녀를 노려본 다음 씩씩거리며 나갔다....실험실에서 한동안 바쁘게 일한 정은은 갑자기 오미선의 전화를 받았다.[다음 주에 짬을 내서 우리 집으로 와. 너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거든.]정은은 오미선의 목소리가 전처럼 정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의심했다.‘이번 주에 시간이 있는데, 왜 꼭 다음 주에 오라고 부르신 거지?’“좋아요.” 정은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오후에 몰래 지하철을 타고 찾아갔다.지난번에 화초를 가꾸러 왔을 때, 오미선은 정은에게 집 열쇠를 주었는데, 갈 때 돌려주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오고 싶은 대로 오라고 하면서.마침 그 열쇠도 이제 쓸모가 생겼다.문을 열자마자, 옅은 한약 냄새가 풍겨왔다. 정은은 신발을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말을 하기도 전에 늘 교수님 집에서 밥을 해주던 가정부가 입을 열었다.“정은 아가씨? 여긴 왜 오셨어요? 교수님께서 다음 주에야 온다고 하셨는데?”“누가 왔어요?”안에 있던 사람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정은은 이 상황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서 이번 주에 오지 못하게 하신
정은은 코끝이 찡했지만 오미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오미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영원히 과학 연구였다.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과학 연구의 미래에 더욱 신경 썼다.어쩌면 평생 연구를 끝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전진하는 과정에서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대수라고?오미선은 과학 연구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후배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게 비추고 싶었다.“왜 또 울어?”오미선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런 정은만 보면 마음이 아팠다.정은은 코를 훌쩍거렸다.“누가 울었다는 거예요? 어차피 전 울지 않았어요.”“그래, 넌 안 울었어.” 오미선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제가 안마해드릴게요...”오미선의 고집과 결심을 이해한 정은은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다음, 정은은 종아리를 가볍게 마사지해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오미선은 다리가 훨씬 편안해졌다.“류머티즘이 심해진 것도 요 며칠 변덕스러운 날씨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저는 이미 발을 담그는 약을 샀으니, 이틀 후에 택배가 올 거예요. 매일 밤 발을 담그면 많이 편해질 거고요.”“알았어.”오미선은 웃으며 책상을 가리켰다.“자, 그 전화번호 가져가.”“네?”“성달수 기억나?”“성 교수님이요?!”“응, 바로 그 영감이야. 네가 내 대학원생으로 됐다는 것을 이미 안 모양이야. 내가 미리 전화를 해서 알리지 않았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지금 이미 삐졌어. 난 그 영감을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전화로 위로해줘. 그 영감은 네 말만 들었잖아.”‘성 교수님은 성격이 조금... 내가 무슨 능력으로 위로할 수 있겠어?’생물정보학은 컴퓨터를 도구로 삼아 생물학 빅데이터를 연구하기 때문에, 정보학 방면의 지식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높았다.심지어 프로그래밍까지 배워야 했다.이것은 또한 도겸이 집에서 쫓겨나 두 사람이 지하실에서 지내며 고생을 할 때, 정은이 프로그래밍으로 도겸을 위해 창업할 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대학에
정은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다시 눈을 뜨니, 시간은 이미 8시가 되었다. 정은은 재빨리 씻은 다음 곧장 실험실로 달려갔다.재석은 그녀가 오늘 30분 지각한 데다가 안색도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은근히 놀랐다.“어제 잠을 잘 못 잤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잠을 잘 못 잔 게 아니라 밤을 새운 거예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정은은 얼굴을 두드리며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이제 일해야지!’점심에 밥을 다 먹은 정은은 미친 듯이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재석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빡세게 일하지 말고, 휴게실에 들어가서 좀 자지 그래?”정은은 확실히 졸려서 거절하지 않았다.재석은 계속 일했는데, 두 시간 후, 휴게실을 지나갈 때, 정은이 아직 안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먼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정은아? 너 괜찮니? 들어갈게.”그는 정은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가볍게 문을 밀었다. 소녀는 한 곳에 몸을 웅크리며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보아하니 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았다.재석은 한숨을 돌렸고,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진짜 고양이 같네. 조용하고 예뻐.’...이틀 동안 병원에 입원한 연희는 도저히 못 있겠다며 퇴원하겠다고 떼를 썼다.두 가정부도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 도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쪽은 직접 전화를 끊었다.그래서 그녀들은 어쩔 수 없이 서영숙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서영숙은 전화로 연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네가 아이를 임신했다고 제멋대로 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계속 네 몸을 들볶고 싶으면 그렇게 해. 만약 네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연희는 그저 조용히 듣고 있을 뿐, 감히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결국 서영숙은 그녀가 퇴원하는 것을 동의했고, 다시 경고했다.[다음은 없어. 아이 잘 챙기고!]연희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집
도겸은 머리가 아팠고, 따라서 점차 짜증이 났다. 그는 무음모드를 켠 다음,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놓으며 다시 차갑게 입을 열었다.“계속해.”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더니 감히 도겸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도겸은 핸드폰을 힐끗 보았는데, 화가 나서 되려 웃음이 나왔다.연희는 그가 준 가족카드를 사용했기에, 무엇을 사든 그 기록은 도겸의 휴대폰으로 발송될 것이다.문자가 끊임없이 들어오자, 도겸은 이마에 핏줄이 나타났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연희가 톡을 보냈다.[도겸 씨, 이거 모두 제가 산 건데, 예뻐요? 그리고 당신을 위해 넥타이와 외투까지 샀어요.]도겸은 확인한 다음 냉소를 지으며 연희의 번호를 차단했다.그는 미간을 비비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도로에서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도겸은 또다시 정은을 떠올렸다.‘요즘 자꾸 정은이 생각만 하는 것 같아. 심지어 꿈에도 전부 정은이었어.’전에 도겸도 정은에 가족카드를 주었는데, 기본적인 생활지출과 서영숙에게 선물을 사는 것을 제외하고, 정은은 그녀 자신의 돈을 썼다.도겸은 그녀가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기에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벌 수 있을지는 잘 몰랐다.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정은이는 명품을 거의 사지 않았지.’서랍 안의 주얼리며 명품 가방들도 다 도겸이 정은을 위해 산 것이었다. 필요한 상황을 제외하면, 정은은 거의 그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헤어진 후, 그 물건들도 자연히 별장에 남겨졌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것처럼.마치 쓰레기를 버리듯이 도겸의 집에 버렸다.그러나 연희의 존재는 마치 저주와도 같았다. 시시각각 도겸에게 그가 잃은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완벽한 존재이고, 그에 비하면 연희는 얼마나 추악하고 역겨운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백화점에서.연희는 남자가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다른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문자가 전송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날 차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