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자, 정은도 더욱 불안해졌다.‘수민 회사가 바로 성동로 근처에 있는데!’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정은은 거의 토를 하고 싶었다.기사는 약속한 대로 일찍 도착했다. 정상이라면 30분 정도 걸려야 했지만, 그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차에서 내린 정은은 병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구급차의 경적 소리를 들었다.“빨리 이쪽으로 옮겨요! 성동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부상자들이니 얼른 응급실로 보내요...”정은은 구급차에서 옮겨진 부상자들이 의식을 잃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더니 발걸음을 재촉했다.프론트 데스크의 간호사를 찾은 다음, 정은은 얼른 수민의 이름을 말했다.“가족인가요?”“네, 전화 받고 찾아왔어요.”“그...”간호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안으로 들어가서 한 번 만나보세요.”정은은 가슴이 덜컹 가라앉았다.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을 꾹 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정은은 흰 천으로 덮인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순간, 정은은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하마터면 땅에 쓰러질 뻔했다.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해왔다.“정은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정은은 고개를 번쩍 돌렸다. 지금 수민은 멀쩡하게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깜짝이야! 그럼 저 안에 누운...”“저기요, 왜 여기로 오신 거예요?” 방금 길을 안내한 간호사가 지나가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가씨 친구는 이 옆방에 있어요.”정은은 말문이 막혔다.간호사는 또 수민을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문을 열 때, 이 분이 바로 뒤에 서 계셨는데. 어떻게 사람을 잘못 보실 수가 있죠...”복도에서.“아직도 삐진 거야?” 수민은 정은의 손을 잡았다.“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응? 화나면 주름이 생긴다는 말 못 들었어? 우리 정은이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주름이 생기면 안 되지.”정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보고, 수민은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너 잘났다! 됐지?”“병원의 규정에 따라, 교통사고 부상자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난 부모님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네 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어.”수민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투덜댔다.“핸드폰이 깨지지만 않았어도 네 전화를 받을 수 있었는데.”정은은 그제야 왜 수민의 핸드폰이 줄곧 전원이 꺼진 상태였는지를 깨달았다.“그럼 지금 좀 어때? 어디 아픈데 없어?”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간 데다가 또 이것이 대형 연쇄 교통사고였기에 정은은 수민을 걱정했다.“네가 오기 전에 해야 할 검사는 이미 다 마쳤는데, 모든 게 다 정상이야. 이제 가서 수속을 밟으면 퇴원할 수 있어.”정은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그럼 됐어.”수민은 가방 하나밖에 없어서 두 사람은 바로 1층에 가서 계산을 한 다음 떠나려 했다. 그러나 서영숙과 마주칠 줄이야. 그녀의 곁에는 심지어 서연희가 있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서영숙은 눈웃음을 지었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아주 화목해 보였다.“그럼 앞으로 좀 주의해. 여기저기 부딪치지 않게.”“안심하세요. 꼭 주의할게요.”“풉.” 수민은 냉소를 지었다.“불여우가 이렇게 날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 그 남자의 엄마를 믿고 있었구나!”서영숙은 반년 만에 정은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초라하지 않았고, 오히려 혈색이 아주 좋았다.연희는 멈칫하더니 마찬가지로 정은을 본 게 분명했다.그녀는 즉시 허리를 받치며 배를 내밀었다. 그리고 먼저 인사를 했다.“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 병원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정은은 웃음을 거두며 바로 떠나려 했다.다음 순간, 연희는 무심한 척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요즘 배가 아파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했는데, 글쎄 임신한 거 있죠?”.정은은 발걸음을 멈췄다.“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정말 너무 의외였죠. 그러나 도겸 오빠에게는 아주 큰 서프라이즈였어요
그래서 서영숙은 수민을 뚫어지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만약 눈빛이 칼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수민은 틀림없이 갈기갈기 짖어졌을 것이다.“조수민 씨, 나에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연희는 고개를 들며 억울한 표정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다만 이런 수법은 수민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무슨 오해? 넌 자존심이 있는 거야? 부끄러운 줄 아는 거야?”서영숙은 노발대발했다.“조수민, 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 그래도 난 네 윗사람이야.”“어머, 말로 이길 수 없으니까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여태껏 남의 협박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참, 지금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됐어, 수민아, 더 이상 말해봤자지. 이 사람들과 다툴 필요 없어.”정은은 이런 말다툼을 하기가 귀찮았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뭐가 달라지겠는가?그녀의 담담한 말투, 평온한 눈빛에 서영숙은 바로 폭발했다.“너 지금 열등감 느끼고 있는 거지?” 서영숙은 냉소를 지었다.“우리 도겸이와 6년 넘게 사귀었는데도 임신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연희는 이제 겨우 몇 개월 만에 바로 임신을 했잖니? 아이도 낳을 줄 모르는 넌 애초에 젊고 철이 없던 도겸을 속일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널 우리 가문의 며느리도 받아들일 것 같아? 꿈이나 깨!”서영숙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은은 그녀를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무시에 서영숙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예전에 서영숙은 정은을 무시했지만, 상대방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뒤바뀌면서 정은이 오히려 그녀를 무시했다.그러니 서영숙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이런 느낌은 마치 전에 자신의 발밑에서 기어다니던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에 뛰어올라 그녀를 향해 짖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입 깨문 것과 같았다.정은은 미소를 지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지 않을 거예요. 강씨 가문의 며느리는 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해요. 아주머니
생각할수록 화가 난 서영숙은 뜻밖에도 정은과 수민을 쫓아갔다.전에 서영숙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수준이 없는 사람만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때의 서영숙은 그런 수준이 없는 사람으로 되었다. 정말 화가 난 게 분명했다.“안중에 사람도 없는 악독한 것.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바로 너희들을 말하는 것이었네!”수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웃었다.‘날 욕해도 되지만, 정은이를 건드리면 절대로 안 돼!’“그 입 닥쳐요, 아줌마!”“왜, 내 말이 틀렸어? 이 여자는 내 아들과 6년 동안 함께 해도 임신한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럼 소정은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너 정말 웃기네. 반응이 왜 이렇게 커?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허!” 수민은 냉소를 지었다.“6년 넘게 임신하지 않았다고요? 그럼 당신 아들의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자주 병원을 드나들면서, 술과 담배까지 했으니 얼른 그 귀염둥이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세요. 만약 정말 무슨 문제가 있다면, 큰일인데...”말을 마치자, 수민의 눈빛은 연희의 배에 떨어졌다.연희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황급히 변명했다.“난 남자친구라곤 도겸 오빠 하나밖에 없었어요. 난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아들 도겸을 언급하자, 서영숙은 갑자기 흥분해졌다.“감히 허튼소리를 하다니,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수민은 또 어떻게 그런 서영숙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녀는 즉시 소매를 걷고 말했다.“그래요, 도대체 누가 누구의 입을 찢는지 두고 봐요!”정은은 두 사람이 손을 쓰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수민을 말렸다.연희도 멍해졌는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몰랐다.그녀는 한쪽에 서서 서영숙과 수민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고, 정은이 다가오는 틈을 타서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땅에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내 배! 배가 너무 아파요!”서영숙은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고, 수민과 싸울 겨를도 없이 즉시 연희를 바라보았다.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뻔뻔한 사람들이네. 방금 넌 나를 막지 말았어야 했어.” 수민은 방금 힘을 얼마 쓰지 않았기에, 정말 싸운다면, 서영숙은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정은은 연희가 떠날 때의 안색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자, 됐어, 화내지 마. 그럴 가치가 없잖아.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면 몸만 상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하지만 다음에 또 이렇게 나온다면, 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정은은 얌전하니까 이런 일은 내가 나서면 돼.’“알았어.” 정은이 웃었다.“너 오늘 많이 놀랐지? 내가 한턱 낼게. 뭐 먹고 싶어?”수민은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이 말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자, 내가 널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게.”“응? 이 말은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누가 말해도 똑같아. 내 마음만 알면 돼.”...차 안에서.서영숙은 검사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척 건강하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연희는 서영숙의 표정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서영숙과 만났던 것이다.도겸과 함께 할 때, 그는 자신의 가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연희는 그가 재벌 집 도련님이고,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밖에 몰랐다.남자가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한 다음, 연희는 갖은 방법을 생각해가며 그와 연락을 취하려 했다.그러나 예외 없이 줄곧 캄캄 무소식이었다.도겸이 이토록 단호하게 헤어지려 하자, 연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수소문한 끝에 서영숙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고, 연희는 얼른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임신한 일을 말했다.현재 서영숙은 연희와 그녀 뱃속의 아이에 대해 나름 만족한 모양이었다.오기 전에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연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냈다.그녀는 달콤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머님, 처음 뵙는 것이니 제가 선물을 조금 준비했
연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준 다음, 서영숙은 또 그녀에게 배를 조심하라고 당부한 후에야 기사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분부했다.”“네, 사모님.”서영숙은 뒷줄에 앉아 그 못생긴 스카프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려, 그녀는 아예 그것을 좌석 아래로 던진 다음 재빨리 손을 뗐다. 마치 손에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 같았다.연희를 떠올리면 서영숙은 한숨을 금치 못했다.‘생김새도 보통, 행동거지도 대범하지 못해. 청순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 억지로 칭찬하는 것일 뿐이야. 정말 가난한 티가 난다니깐.’서영숙은 다시 한번 그 스카프를 바라보았다.장밋빛의 스카프는 촌스러웠고, 아무리 고급스럽게 포장을 해도 그 수준 떨어지는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일반 가정 출신은 정말 안목이 없다니까.’‘전에 소정은이 준 선물은 그래도 스카프에 주얼리, 가방 등이 있었지. 모든 게 정교할 뿐만 아니라 나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딱 봐도 열심히 고른 게 분명해...’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퉤퉤 했다.‘그 재수 없는 여자를 왜 생각하는 거야?!’...“사모님, 도착했습니다.”서영숙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강서정이 내려왔다. 그녀의 손에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서정은 그게 무슨 비싼 물건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것이 뜻밖에도 장밋빛 스카프일 줄이야. 문제는 그 스카프는 바느질이 울퉁불퉁하여 예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촌스럽기까지 했다.“엄마, 이게 어디서 난 물건이에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딴 촌스러운 물건을 산 거예요? 설마 이걸 쓰고 다니시려는 건 아니죠?”서정은 검지와 중지로 그들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 그 스카프를 들었다.솔직히 그녀는 이렇게 못생긴 목도리는 정말 처음이었다.‘정말 구역질이 나네, 이 색깔이 뭐야? 집안의 개가 봐도 깜짝 놀랄걸.’서영숙은 씩씩거리며 말했다.“네 오빠의 여자친구가 준 거다. 자신이 더 정성스럽게 만든 선물이 더 성의가 있다나. 내가 보기에 그냥 나한테 돈
서영숙에게 있어 그녀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그래도 내 며느리는 대학원 석사 정도 해야지. 해외 명문대에 유학한 배경이 있으면 더 좋고.’아무리 봐도 연희는 서영숙의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기에 서영숙은 마지못해 그녀와 만나겠다고 한 것이었다.‘우리 가문에 시집을 와? 헛된 망상을 하고 있어!’서정은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서영숙의 계획에 놀라지 않은 것 같지 않았다.그리고 서정은 손에 들고 있던 스카프를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티슈로 손을 닦았는데, 행여나 그런 궁상맞은 기운이 몸에 묻을까 봐 두려웠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연희가 뭐라고, 내 올케 언니가 될 자격은 없죠... 심지어 소정은 만도 못하잖아요.”학교 퀸카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으니, 얼굴은 겨우 합격이었지만, 집안이든 돈이든 학력이든 아무도 없었다.‘우리 오빠가 대체 그 여자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귀찮아 죽겠으니까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오빠의 일들은 앞으로 나한테 말하지 마요. 나 밖에 나가볼게요!”서정은 선물과 비싼 과일을 챙긴 다음 외출할 준비를 했다.그녀는 오미선을 찾아가서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 만약 오미선이 학생을 하나 더 모집하겠다고 승낙한다면, 서정은 아직 희망이 있었다!서영숙은 서정이 부랴부랴 외출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타일렀다.“날씨도 추워서 길이 미끄러우니까 운전할 때 주의해...”오미선의 집에 도착하자, 지난번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정은 입술을 깨물며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그러나 성공하면 대학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에, 결국 서정은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 그녀는 선물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는데, 주로 성의를 더 많이 선보이려 했다.오기 전에 서정은 이미 여러 번 연습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기뻐하고, 또 어느 각도에서 웃을 때가 더 보기 좋은지.서정은 오
정은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내가 면접시험을 본 영상은 이미 전 나라의 사람들이 봤으니, 내 점수에 이의가 있다면 학교측에 반영하지 그래. 입만 열면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말고. 요즘 사회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도 벌을 피할 수 있잖아. 나와 조 교수님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그 주모자가 누구인지, 난 아직 알아내지 못했거든.”정은은 말할 때 눈빛은 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의 그 어떤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정은이 ‘사진’과 ‘주모자’를 언급했을 때, 서정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는데, 마음이 찔린 게 분명했다.정은은 즉시 알아차렸다.‘강서정이 한 짓이었구나. 예상했던 사람이긴 해.’“전부터 계속 날 비난하던데, 설마 날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에이 정말, 내가 왜 진작에 교수님 비위를 맞출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넌 뭐가 그리 잘났는데요? 서연희가 우리 오빠의 아이를 임신을 했어요. 아직 모르죠?”정은은 조용히 대답했다.“너보다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이야.”“오늘 교수님을 찾으러 왔지? 지금 집에 안 계시니 그만 돌아가.”정은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서정은 마치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네가 뭔데?! 교수님이 안 계시면, 너도 날 쫓아낼 자격이 없어요! 난 오늘 꼭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날 어쩔 건데요?”“정은이는 어쩔 수 없지만, 주인인 난 거절할 수 있겠지?”뒤에서 오미선은 안경을 위로 밀었고, 얼굴은 무척 차가웠다.서정은 안색이 굳어졌다.‘교수님이 언제 오신 거지? 방금 내가 한 그 말들을 들었을까?’“교수님, 저는...”“나 너 기억해.” 오미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정을 훑어보았다. “지난번에도 날 찾아왔었지.”서정은 오미선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미선은 엄숙하게 말했다.“내가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 난 교수님이니, 내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온갖 방법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