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헌이 말했다.“그럼 저 먼저 집사람과 상의 좀...”[상의?] 진말숙은 기분이 언짢았다.[뭘 상의한다는 거야? 넌 남자이고, 한 집안의 주인이라고! 이렇게 간단한 일을 아내에게 물어봐야 결정할 수 있는 거야?]“어머니, 제가 아무리 집안의 주인이라고 해도 집사람에게 미리 말을 해야죠. 이건 기본적인 존중이잖아요...”[정말 못났구나! 그래 상의해 봐. 정은이 엄마가 동의하면 그만이지만,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나와 네 아버지는 내일 꼭 갈 테니까!]말이 끝나자 진말숙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왜 그래요? 누구 전화예요?” 이미숙은 정원으로 들어서자 남편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우리 어머니.”“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마침 이사한 걸 축하한다면서, 내일 정월 대보름에 우리 집에 오실 거래...”“그래요.” 이미숙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큰 형님네와 작은 형님에 그리고 아가씨까지 모두 불러요.”...이튿날 아침, 이미숙은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오후 4시가 되자, 다른 식구들도 모두 도착했다.주덕순은 들어간 이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는데, 보면 볼수록 점점 질투를 했다.비록 소진헌네가 고급 별장을 샀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여전히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그래서 말이 가장 많고 또 잘난 척하길 가장 좋아하는 주덕순은 들어온 후 보기 드물게 침묵을 지켰다.소진호가 팔로 그녀를 툭툭 치자, 주덕순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도련님, 동서, 정말 축하해.”소시율도 오늘 이곳에 따라왔다. 그녀는 이미숙을 바라보며 물었다.“작은 어머니, 저 집 좀 구경해도 될까요?”“그럼.”시율은 거실에서 두 바퀴 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소진우는 너무 바빠서 오늘 오지 않았지만 박나영이 대신 왔다. 그녀는 심지어 돈을 가득 넣은 봉투를 이미숙에게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정말 화려하고 예쁜 별장이야. 이사 온 걸 축하해.”이미숙은 거절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받을
주덕순은 감탄했다. 비록 악의가 없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 말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박나영은 뭔가를 떠올리며 물었다.“난 아직 정은이 네가 J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데, 일반 직장인은 아니겠지? 일반인이라면 수천만 원을 벌기가 쉽지 않을 텐데.”정은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미숙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신이 대신 입을 열었다.“형님들도 참, 우리 정은이는 대학을 졸업한 후 비록 계속 대학원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집에 박혀 놀지도 않았어요. 중간에 일자리를 바꿔 가며 돈을 조금 모은 것뿐이죠.”소수정은 차갑게 웃었다.“정말 스스로 돈을 벌어서 모은 거면 좋겠지만, 정은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두렵네요.”이미숙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아가씨, 우리 정은이를 관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정은이도 이제 성인이 됐으니 자신의 계획이 있겠지. 우리는 부모로서 그냥 응원해줄 거야.”주덕순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계획? 동서 말을 들으니 정은이에게 이미 다른 계획이 있는 거야? J시에 돌아가서 일자리를 찾는 거? 아니면 새로운 ‘목표’를 찾을 계획인가? 내년에 돌아올 때 또 수천만 원 들고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주덕순은 일부러 ‘목표’라는 두 글자에 힘을 주었는데, 정은을 야유하는 게 분명했다이미숙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려고 했다. 이때 마침 정은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저 전화 좀 받을게요...”“응, 그래.” 이미숙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참자, 참자.’“응, 수민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조수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필기시험 성적 나왔어. 너 빨리 점수 확인해 봐.]정은은 시간을 계산해 봤는데, 성적 발표하는 날이 확실히 오늘이었다!‘너무 바빠서 잊어버렸어...’“그래, 지금 바로 알아볼게.” 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바로 위층으로 뛰어갔다.침실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노트북을 켰다. 정은은 대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재빨리 수험표와 비밀번호를 입력했고, 엔터키를 누르
한 무리의 사람들은 즉시 2층으로 달려갔다. 소리를 따라 정은의 침실에 도착하니, 눈 앞에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시율은 땅바닥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모두들 뛰어들어 들어오자, 그녀는 즉시 울부짖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시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아줌마와 다름없었다.“시율아, 왜 그래? 엄마한테 말해.” 주덕순은 달려가서 시율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자, 우리 먼저 일어나자...”“싫어요! 오늘 소정은이 저한테 사과하지 않으면, 저 절대로 안 일어날 거예요!”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래, 그럼 너 바닥에 실컷 앉아 있어. 누워도 난 상관이 없으니까.”“너--”주덕순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갑자기 웬 사과야?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엄마! 소정은이 절 때렸단 말이에요.”“뭐?” 주덕순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려 정은을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사람을 때릴 수 있니?”“둘째 큰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침실에 돌아오자마자 드레스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거든요. 저는 도둑이 든 줄 알고... 하지만 저도 궁금해요. 왜 시율이가 제 방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왜 또 물건을 뒤지는 소리가 났는지.”말하면서 정은은 바닥에 떨어진 두 가방을 힐끗 쳐다보았다.주덕순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그랬구나... 시율이는 아마 궁금해서 네 물건을 뒤졌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다니, 그건 네 잘못이지!”“저도 그게 시율인 줄 몰랐어요. 도둑이 들어온 줄 알고 망설이지 않고 손을 쓴 건데. 정상인이라면 왜 남의 집에 와서 옷장을 뒤지겠어요, 안 그래요 둘째 큰어머니?”주덕순은 시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시율은 마음이 찔려서 감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미숙은 웃으며 말했다.“오해였구나. 잘 풀렸으면 됐어. 그럼 이제 우리도 내려가서 식사할 준비해야죠?”이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핸드폰이 바로 소진헌의 옆에 있었기에 정은이 말했다.“아빠, 이리 주세요.”“어.”
‘소정은은 자신이 정말 예전의 그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대학을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공부를 하고 싶어? 꿈이나 깨! 이따가 점수가 나오면 엄청 창피하겠지!’박나영도 맞장구를 쳤다.“시율이가 이렇게 말하니까 나도 좀 궁금해지네.”소수정은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다.“그래, 다들 그렇게 궁금해하니 얼른 확인해 봐, 정은아. 우리 모두 보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점수가 높든 낮든, 합격하든 하지 못하든 다 괜찮아.”이미숙은 정은을 보며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그러나 정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좋아요.”사람들은 컴퓨터 앞으로 둘러섰다. 정은은 방금 이미 수험표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했기에 지금 엔터키만 가볍게 두드리면 점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아빠가 대신 눌러주세요.”“내가?”“네, 그때 수능 점수도 아빠가 확인해주셨잖아요?”“그래.” 소진헌은 손을 비비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엔터키를 눌렀다.로드 중이라는 표시가 나오자, 사람들 모두 숨을 죽였다.1초, 2초...“나왔어! 나왔어!”[총점수: 412]주덕순은 멍해진 시율을 떠밀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만점이 얼마인데? 400여 점도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데...”시율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왜 말을 안 하는 거야?”박나영은 재빨리 놀라운 감정을 조절하며 가볍게 웃었다.“동서, 만점은 500점이야. 정은이의 성적은 아마 3위권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물론 수석일 가능성도 있어.”주덕순은 이 말을 듣고 나서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그럼 정은이는 서비대 대학원에 합격한 거예요?!”소수정은 무뚝뚝하게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대학원 시험은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으로 나뉘죠. 필기시험 성적만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요.”주덕순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그래, 정은이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합격할 수 있겠어. 3위권으로 들어가긴 개뿔...’박나영은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그러나 필기시험 성적도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 일단
정은은 이미숙의 생일을 놓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생일 하루를 앞두고 제시간에 도착했다.이미숙은 책을 꼭 안으며 물었다.“내가 줄곧 이 원문책을 찾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니?”“그동안 줄곧 입에 달고 다니셨으니, 제가 모르는 게 더 말이 안 될 텐데요.”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흥, 그러니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거야? 그래도 고마워, 우리 딸. 이 선물 너무 마음에 들어.”이미숙은 웃으며 다정하게 정은을 안았다. 그리고 물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전에 줄곧 긴 머리를 하고 다녔잖아, 왜 이렇게 짧게 잘랐니?”정은은 이미숙에게 기대었다.“짧게 잘라서 보기 싫어요?”“아니. 우리 딸은 어떤 헤어 스타일을 해도 다 예뻐!” 이미숙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정은은 담담하게 웃으며 이미숙을 더욱 세게 안았다.“필기시험을 통과했으니 곧 면접시험을 봐야겠지?” 이미숙이 말했다.“이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정은은 멈칫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숙은 다정하게 웃었다.“나도 이 작은 도시가 널 가둘 수 없단 것을 진작에 알았지. 이제 너도 다 컸으니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잖아.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정은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며 입을 열었다.“이번에 절대로 두 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주방에 있던 소진헌은 주걱을 들고 나왔다. 모녀가 서로에게 기댄 채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며 그는 입을 열었다.“무슨 기밀이라도 얘기하는 거야? 빨리 손 씻고 밥 먹자!”“네!”이튿날, 정은은 J시로 돌아가는 고속열차에 올라탔다.두 주일 넘게 집을 비웠기에 집안은 쌀쌀했고 먼지까지 쌓였다.짐을 내려놓은 다음, 정은은 가장 먼저 어항 속의 물고기를 살펴보았다. 두 마리의 금붕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사료를 조금 주었다.그런 다음, 정은은 또 베란다의 화분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
정은 자신조차도 지금 아무런 자신이 없었다.재석의 새까만 눈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너도 그게 ‘만약’이라고 했잖아. 난 네가 통과할 수 있다고 믿어.”정은은 활짝 웃었다.“그럼 나도 선배님만 믿을게요.”...서비대학교 면접시험은 3월 초로 정해졌다.정은은 특별히 정장 한 벌에 굽이 낮은 검은색 구두를 선택했다. 단정한 차림새는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절대로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외출하기 전, 정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오렌지색과 녹색이 섞인 스카프를 꺼내 묶었다.평범하고 답답했던 정장은 순식간에 살아났다.어젯밤에 비가 내렸기에 지면은 축축했고, 바람도 촉촉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세상은 마치 비닐봉지라도 덮어씌운 것 같았다.정은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대기실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탄식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그래도 평온한 편이었다.“저기, 넌 긴장하지도 않은 거야?” 뒷좌석의 젊은 여자아이가 정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아니. 그리 긴장되지가 않아.”그녀는 벼락치기를 싫어했기에 오늘을 위해 엄청 많은 준비를 했다.지금 정은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단지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의 흥분을 느낄 뿐이었다.“45번, 소정은 학생.”“네.”정은은 일어나서 옷의 주름을 편 뒤, 교실로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 정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일렬로 단정하게 앉아 있는 면접관 중에 뜻밖에도 재석이 있었던 것이다!남자는 오늘 회색 양복에 금테 안경을 쓰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이는 평소의 재석보다 좀 더 엄숙해 보였으며 더욱 인정사정 없어 보였다.그러나 다음 순간, 재석은 고개를 들더니 부드러운 눈빛은 정은의 얼굴을 스쳤다.정은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이제 본격적으로 면접시험이 시작되었다.면접관은 우선 몇 가지 전문적인 질문을 던졌고, 정은은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나름 여유롭게 대답할 수 있었다.나머지 몇 명의 면접관은 정은이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많은 준비를
“에헴! 그렇긴 하지만 또 그게 아니에요.”“quasi-crystals가 또 뭐죠?”“준결정체라고 하는데, 준결정 체내의 원자 배열 조합이 반복 주기성 대칭에 따라 배열되지 않고, 원자 배열 방식이 결정체와 비결정체 사이에 있는 결정 구조예요. 그리고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다니엘 셰시트먼이라고, 2011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여받았어요.”“아, 그렇군요... 잠깐만요! 무슨 노벨상을 수여받았다고요?”“화학상이요.”“그런데 오늘은 생물학과 면접시험이 아닌가요?”‘왜 갑자기 물리와 화학에 대해 묻는 거지?’“소 교수님이 방금 말했잖아요. 자신의 질문은 생물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쉿! 사실 이 문제는 대학생에게 있어서 너무 어렵긴 하죠.”“앞의 몇 가지 질문에 아주 잘 대답했는데. 다만 운이 좀 나빴네요. 소 교수님이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할 줄이야...”“어려운가?” 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물론 대답을 포기할 수 있어.”정은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화이트보드와 기호펜 있나요?”‘이 문제의 중점은 data support, 즉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거야! 동시에 다른 학과의 능력을 고찰하는 거지.’“응.” 재석은 손을 들어 화이트보드를 준비하라고 했다.곧 화이트보드가 들어왔고, 그들은 펜을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몸을 돌려 화학식을 적었다. 그리고 이 화학식을 접점으로 준결정의 원자 구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그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 즉 20면체 원리와 황금 중치 원리가 있었다.이 두 가지 원리를 통해 가장 간단한 준결정 구조를 얻을 수 있으며, 이 모델은 Al-Mn 준결정의 고해상도의 모든 디테일을 설명할 수 있었다.이상은 화학 분야에 관한 지식이었다.곧이어 정은은 또 분형 기하학, 패턴 서열, 연관 측정, 연관 차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준결정체에 대한 공식을 추론했다. 그중 패턴 서열은 각각 2 단계, 3 단계, k단계에서 세분화되었다.이상은 수학 영역에 속했다.영어와 숫자가 빽빽
정은은 꽉 쥔 주먹에 힘을 풀더니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다른 한 면접관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며 농담을 했다.“재석아, 넌 이 학생에게 너무 엄격한 거 아니야? 방금 그 문제는 대학원 3학년의 학생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걸.”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훌륭할수록 난 그 학생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더욱 궁금해지거든.”‘정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잠재력이 있어.’...시험장에서 나오자, 정은은 수민의 톡을 받았다.일주일 전, 두 사람은 면접시험이 끝나면 함께 축하하기로 약속했는데, 수민은 이미 그녀들이 자주 가는 프랑스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정은은 차를 부를 준비를 했다.이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은 언니? 정말 언니였구나.”강서정도 오늘 면접시험을 보러 왔다. 하지만 그녀의 시험은 오후에 시작되었다.그녀는 긴장할까 봐 미리 와서 환경을 익히려고 했는데, 정은을 만날 줄은 몰랐다.“이곳엔...” 서정은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정은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면접시험 보러 왔어.”“필기시험을 통과한 거예요?!” 서정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음.”“몇 점인데요?”“412점”“언니가 바로 우리 전공 필기시험 1등이었어요?!”정은은 의아해했다.“그래? 난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서...”“허, 시치미를 떼긴요? 재밌어요?” 서정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녀는 392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는데, 정은이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정은은 무척 억울했다. 그녀는 확실히 순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면접시험에 관한 문자를 받고, 또 시험 시간을 확인한 다음, 그녀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았다.보통 학교 홈페이지의 합격 명단은 필기시험 성적에 따라 순위를 매겼지만, 정은은 한 번도 확인한 적이 없었다.“못 믿겠으면 됐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정은도 설명하기 귀찮았다. 서정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그녀에게 있어서 조금도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
예전 같았으면, 수아는 또 한동안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상하리만큼... 숨이 트였다.‘피한 거야. 벗어났어. 그 사람에게서도, 그 일에서도.’집에 돌아오자, 부모님이 이번 융합연구 포럼은 어땠냐고 물으셨다. 수아는 짧게 대답하고 얼버무렸다.“뭐... 그냥 그랬어요. 피곤하네요.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간신히 표정을 숨긴 채 방으로 들어온 수아는, 여행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터져버렸다. 눈물이 쏟아졌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단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았다.‘들키면 안 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다음 날, 수아는 ‘아프다’는 이유로 재석에게 병가 메일을 보낸 후, 일주일 가까이 실험실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수아가 아프다고?”조미진과 전진욱은 당황했다.“무슨 병인데요? 심각한 거예요?”재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나도 모르겠어.”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실험에 집중했다.재석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 차가운 실루엣은 말없이 거리를 그었다.‘뭔가 이상한데...’진욱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일해온 사람인지라 느낄 수 있었다.지금 재석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하지만 실험실 맴버의 개인 사정에 대해선, 그도 쉽게 묻거나 개입할 수 없었다.결국 진욱은 마음속 의심을 눌러가며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단,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진 않았고, 표정마저 진지한 모습이었다. 반면, 미진은 그 정도로는 촉이 빠르지 않았다.지금 상황만 보면, 미진은 정말로 수아가 큰 병이라도 앓고 있는 줄로 믿고 있었다.재석에게서 도무지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자, 미진은 결국 손태민을 조용히 붙잡았다.“우리... 과일이라도 사서 수아를 찾아가 볼까? 같이 일한 지 몇 년째인데,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잖아.” 그 말에 태민은 멍하니 되물었다.“수아가 아프다고요? 어떤 병인데요? 입원했어요?”그 순간, 태민의 표정은 굳어버렸다.‘아프다고...? 근
사건 진행 상황을 묻자, 경찰은 현재 재석 관련 건이 조사 단계에 있으며, 정식으로 입건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답했다.‘역시... 예상한 대로...’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재석도, 정은도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와 입원 기록, 진료 확인서까지 전부 수사 담당자에게 제출한 후, 두 사람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J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가 넘어서였다.택시를 타고 익숙한 단지 앞으로 돌아온 둘은, 단지 입구 쪽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확실히 우리 동네 음식이 제일 맛있네요.”정은이 그렇게 말하며 웃자, 재석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두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졌다.밥을 먹고 나서, 둘은 나란히 아파트로 올라갔다.정은은 집 앞에 도착해 열쇠를 꺼냈다. 잠깐 멈칫한 그녀는, 옆집 문을 열고 있는 재석을 돌아봤다.“지금은 어때요? 불편한 데는 없고요?”“응, 완전 멀쩡해. 컨디션 좋아.”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당부했다.“그래도 약은 꼭 챙겨 드세요.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3일은 꾸준히 먹는 게 좋다 했어요.”“알겠어. 꼭 먹을게.”서로 인사하고, 각자의 문을 닫았다....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논문 두 편을 읽은 뒤, 평소처럼 불을 끄고 누웠다.‘그래, 오늘은 꽤 길고도 복잡한 하루였지...’그녀는 금세 잠에 들었다.한편, 옆집.재석도 짐을 정리하고 샤워까지 마친 후, 이불 속에 누웠다. ‘약은... 아, 까먹을 뻔했네.’정은의 당부가 떠올라,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일어났다. 거실에서 약을 챙겨 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너무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이 약 때문인가...’자꾸만 정은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화내는 얼굴...‘대체 왜...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 거야.’결국 재석은 새벽 세 시가 다
“이 서류들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예요.”“신경 써줘서 고마워.”“두 번째네요.”“응?”“깨어나서 저한테 고맙다고 말한 거, 두 번째예요.”“아...”재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보기 드문 허당미가 드러난 순간이었다.“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정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럴 땐 이렇게 말하면 돼요.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좋아, 샤부샤부 사줄게, 어때?”‘어떻게 알았지? 나, 오늘 아침에 샤부샤부 생각했는데?!’ ‘설마... 내 배고픈 마음마저 읽힌 거야?’하지만 정은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근데 의사 선생님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라고 하셨잖아요.”“우리 반반탕 시키면 되잖아. 맑은 국물도 있으니까.”“좋아요!”정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수액은 다 맞은 건 점심 무렵이었다.두 사람은 퇴원 수속을 밟으러 이동했다. 정은은 약국으로 약을 가지러 갔고, 재석은 병실 담당 의사를 찾아가 필요한 기타 서류를 요청하려 했다.그런데 의사가 재석을 보자, 안경을 살짝 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왜 그러시죠?”재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목은 괜찮아요?”“네?”“목소리요. 쉬었다거나, 건조하다거나... 그런 증상은 없어요?” 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요?”“다행이네요. 어젯밤에 부르짖는 거 보고, 혹시 성대가 붓는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제가... 어젯밤에... 그렇게 소리 질렀어요?”“크게는 아니었어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냥... 계속 불렀죠. 끊임없이.”재석의 숨이 순간 멈췄다.“제가 누굴 불렀는데요?”의사는 재석을 한 번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이상한 말은 아니고, 그냥 아주... 정상적인 말이었죠.” ‘그 말이 더 무서운데요...?’재석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정은... 정은아... 정은...’ 아주 다양한 어조와 감정으로 부
정은은 벌떡 일어나 재석에게 달려갔다.남자의 눈은 꼭 감긴 채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기 그지없었다.“선배님? 선배님... 제 말 들리세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재석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좀처럼 뜨이지 않았다.“선배님! 제발 깨어나세요!”간절한 외침 끝에, 재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정은아?”“하... 진짜, 심장 멎는 줄 알았어요...”정은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재석의 손이 뻗쳐 나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거센 힘으로 당기더니 그녀는 고스란히 재석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다.“꺅...!”‘지금... 뭐야 이게?!’“정은아...”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칠게 들려왔다.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둘이 몸이 너무 가까워서, 마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로를 녹일 것만 같았다. “읏...”재석이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 소리를 내뱉었다.정은의 온몸이 굳어버렸다.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정신이 흐려진 듯한 재석의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설마, 약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거야?’정신을 다잡은 정은은 바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재석을 밀어 침대 쪽으로 눕힌 후, 온몸으로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앗!!!”뜨거운 열기에 놀란 정은이 입을 틀어막았다.‘이건... 단순한 열이 아니야. 열기가 심하게 오르고 있어...’“선배님! 제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선배님!”하지만 재석은 계속해서 중얼댔다.“정은아... 정은...”단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묘하게 끈적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그 숨소리와 어우러지니, 괜히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하... 미치겠네. 이 분위기 뭐야...’정은은 괜히 고개를 숙였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드러난 재석의 단단한 상체.잘 정리된 근육, 그리고 땀으로 촉촉이 젖은 피부.‘어?!’‘눈을 어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