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서인아,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너는 졌어. 철저하게 완전히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한심하게.’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이 점점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갔다. 서인아는 손에 힘을 주어 휴대전화를 단단히 쥐었고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앞에서 화면이 깜빡였지만 그녀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송유진은 서인아가 낮에 다이빙 장면을 촬영하다가 몸살이 나서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고 오늘 촬영 종료 파티에 원래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유선미와 얽혀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서인아는 어떻게든 송유진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는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찾아왔던가? 아니, 기다리지도 찾지도 않았다.먹구름이 잔뜩 낀 해안선 위로 천둥이 울렸고 이내 가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인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차가운 빗방울을 그대로 얼굴에 맞았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서서히 식어가면서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듯했다.서인아는 송유진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를 따라다니며 그가 음악을 꿈꾸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결국 인기를 좇아 연예계로 발을 들이는 과정까지 전부 지켜봤다.그가 첫 웹드라마에 출연하자마자 인기를 얻고 단숨에 라이징 스타가 되었을 때부터 서인아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소속사는 그와 유선미의‘커플 마케팅’을 기획했고 그는 서인아 몰래 계약서에 사인했다. 송유진은 거절할 수 없는 업무 같은 것이라고 변명하며 처음엔 자기도 괴로웠다고 했다.촬영장에서 손을 잡는 신이 있을 때면 서인아를 찾아와 손을 씻고는 몇 번이나 그녀를 안아주며 속삭였다.“우리 인아가 많이 속상했지? 미안해, 진짜 미안해.”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그와 유선미는 점점 호흡이 잘 맞아갔고 연인 연기를 할 때면 한층 더 자연스러워졌다. 어색했던 스킨십도 점차 익숙해졌고 커플 마케팅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게 되었다.그리고 서인아가 느끼는 불안과 질투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중은
서인아는 고개를 숙여 컵을 내려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조용히 두어 모금 마셨다. 바싹 말라 있던 목이 조금이나마 촉촉해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침대 곁에 있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고마워요.”물컵을 들고 있던 남자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냥 서 대표님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니까.”“서... 대표?”서인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병실 문이 열렸고 서지훈이 결제 영수증을 한 움큼 들고 병실로 성큼성큼 들어왔다.“깨어났네.”서인아는 이제야 그 남자가 말한 서 대표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애써 모른 척했지만 서지훈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의자에 앉으며 비꼬듯 말했다.“이게 네가 말하던 행복이야? 네 꿈이야?”서지훈의 시선이 날카로웠다.“송유진은? 네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남자는 어디 있어? 널 가장 사랑한다며? 네가 40도 가까이 열이 올라서 쓰러질 때까지도 네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던 게 그놈이 말하는 사랑이야?”서인아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지훈이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송유진 연락처 뭐야?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직접 물어봐야겠어. 여자 친구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얼굴 한 번 안 내밀다니, 이게 말이 돼?”“오빠!”서인아는 단숨에 눈을 떴다. 순간, 병실 안이 조용해졌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거친 호흡 소리만 들렸다.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잠시 서인아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곧 다시 시선을 휴대전화로 돌렸다. 서지훈이 서인아의 친오빠인 걸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해성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등학교 3학년 때, 송유진이 해성으로 전학을 오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그 후, 송유진이 대학 진학을 위해 하성의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인아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걸 걸고 그
“무슨 일이야? 혹시 또 인터넷에서 난리 났어? 아니면 송유진이 또 뭐라고 전하래?”서인아는 마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전하린은 서인아와 송유진이 정말 헤어졌는지 다시 묻고 싶었으나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서인아가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닌 끝에 가까스로 연인이 되었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서인아의 태도는 예상보다 훨씬 단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고 괜히 말했다가 둘의 대화가 유출되면 또 불필요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게다가 전하린은 병실 안에 있는 이 두 남자 왠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송유진의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서인아에 대해서도 꽤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생활 대부분이 송유진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주변에 아는 남자라 해봐야 송유진과 연관된 사람들이 전부였다.‘그런데 도대체 이 두 사람은 누구지?’전하린은 너무 궁금했지만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고 결국 고민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그게 아니고... 인아 씨가 오디션 본 영화 결과가 나왔어요.”“그래서? 네 얼굴 보니까 결과가 별로인가 보네?”서인아는 담담하게 물었고 전하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에요. 여주인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최종 후보 두 명 중에서 남자 주인공과의 합을 고려해 결정한대요. 이번 영화엔 강도 높은 감정신과 베드신이 많아서 남녀 주인공의 케미가 중요하대요.”서인아는 이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오디션을 보러 갈 때부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송유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와 함께할 시간을 더 갖기 위해서 일부러 지원한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한숨만 나왔다.송유진은 이제 진짜‘대세 배우’가 된 모양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주인공 캐스팅 권한까지 행사할 정도라니. 이게 운명이라는 거겠지, 그야말로 잔인한 운명.“후보 두 명 중 하나가 나라면 다른 한 명은 누구야?”전하린은 잠시 머뭇
서인아는 고열로 인한 폐렴에 걸린 상태였다. 거기에 생리까지 겹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링거를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한편, 서지훈은 단순히 서인아를 보기 위해 해성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투자 미팅이라는 중요한 일정이 있었고 원래라면 어제 오후에 미팅을 해야 했지만 서인아 때문에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해 버린 상태였다.그런데도 오늘 아침 다시 연락이 왔고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서인아가 곤히 자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 그가 답장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병실을 떠났다.서지훈의 검은색 세단이 주차장을 떠나자 멀리서 한도윤이 타고 있는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손끝으로 굴리며 메시지를 천천히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는 듯 또는 충동을 억누르는 듯 병실에서 보였던 그 태연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서지훈의 차가 사라진 후에도 그는 한동안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그리고 약 30분 정도가 흐른 뒤 마침내 차 문을 열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서인아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리고 이내 시선을 거두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그 순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인아야, 많이 아프다면서? 이제 좀 괜찮아?”서인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유선미가 긴 웨이브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세련된 버킷햇을 눌러쓴 채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연한 누드톤의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 사이로 얄미운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그녀는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오면서 콧대에 걸려 있던 선글라스를 손끝으로 가볍게 벗었다.그러자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유선미가 보였다.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그런데 그
한도윤은 차가운 기색을 완전히 거두고 조용히 세면대의 물을 잠갔다. 그리고 손을 털어내며 깊이 숨을 들이쉰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창가에 앉아 있는 서인아는 멍하니 바깥의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 바보 같지 않아?”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도윤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접혀 있었고 목덜미엔 세수하다 튄 듯한 물기가 살짝 남아 있었다. 어수선한 모습이었지만 그에게선 오히려 거친 자유로움과 날 선 분위기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침대 곁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바보 같은 건 네가 아니라, 스스로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눈과 마음이 멀어버린 사람들이야.”서인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상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 듯,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런데 넌 왜 다시 왔어? 오빠는?”한도윤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 대신 나한테 널 챙겨주라고 하더라.”그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하며 방금 전 쓰러져 있던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아까 다 들었어. 미안, 원래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서인아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한도윤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보통 이런 상황이면 울고 나서야 좀 나아지지 않나? 내가 모른 척해 줄 수도 있고 필요하면 잠깐 나가 있을 수도 있는데.”“나가서 뭐 하게?”서인아는 피식 웃었다.“이미 많이 울었어. 수도 없이. 그런데 아무 소용 없더라고.”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그 사람 눈에는 내 눈물이 단 한 푼의 가치도 없으니까.”한도윤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치 없는 눈물은 없어. 단지, 그걸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
송유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고 표정도 온화했다. 미안함이 묻어있긴 했지만 아주 희미했다.순간, 서인아는 멍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던 그 모습이 마치 꿈에서 본 장면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혹시, 착각이었을까?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모든 걸 산산이 깨뜨렸다.“선미가 가벼운 뇌진탕 증세가 있어서 며칠 입원해야 한대. 바로 옆 병실이야.”그 말은 마치“네가 한 짓을 좀 봐.”하고 상기시키려는 것 같았다.서인아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그래서? 나보고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다친 사람한테 사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내가 다치게 한 게 아니야! 스스로 넘어진 거라고!”굳이 설명하고 싶진 않았지만 가만히 있자니 너무 억울했다. 방금 벌어진 일이 전부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도, 송유진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참을 수 없었다.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단 한 번만 설명해 보기로 했다.그가 믿든 말든, 적어도 그녀 자신을 위해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그러나 송유진은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안함마저 사라졌다.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선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를 꿰뚫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 눈빛 속에는 실망감이 가득 차 있었다.“선미는 널 원망하지도 않아. 그냥 자기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거라고 했어. 널 오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단지 네가 아파서 걱정돼서 찾아왔을 뿐이었는데... 넌 왜 그렇게 선미를 미워하는 거야? 서인아, 넌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거야?”서인아는 한동안 말없이 송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놀람에서 실망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차가운 냉소로 변해가는 눈빛이었다.서인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송유진, 우리 몇 년이나 알고 지냈지?”그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거의 6년.”“6년.”서인아는 조용히 웃었다.“6년이네.”
서인아는 멍한 눈으로 그의 손 가까이에 놓인 나무로 된 단정한 도시락 상자를 바라보았다.그제야 서인아는 한도윤이 그녀를 위해 음식을 사러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일어나. 우선 밥부터 먹어.”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돌아가면서도, 서인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멍했다. 그녀가 침대에 앉자 한도윤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하나씩 꺼내어 그녀 앞에 차려놓았다.그러다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난 앞으로 다시는 네가 가치 없는 사람 때문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서인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어떤 남자는 자신이 너무 높이 떠받들어지면 본래의 모습을 잊게 되지. 서인아, 넌 평생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 그런 네가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려 가면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건... 정말 한심한 짓이야.”서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예전의 너를 다시 보고 싶어. 어디에 있어도 스스로 빛나던 그 서인아를.”그 말과 함께 그는 병실을 나갔다. 서인아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어디에 있어도 스스로 빛나던 그 서인아를.’심장이 한 번, 또 한 번, 깊게 울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그녀의 얼굴 위로, 지금껏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마치 먼지가 쌓여 빛을 잃었던 진주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처럼.그래, 그녀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왜 감정을 한 사람에게만 쏟아붓고 그 사람에게 휘둘려야 하는 걸까?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묘하게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도시락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와 따뜻한 죽 향이 코끝을 스쳤다.서인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가 준비해 둔 물을
한도윤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처음 만났을 때 그는 간단한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리가 날씬해서 벨트도 하지 않은 채 몸에는 눈에 띄는 명품 하나 없었다.서지훈은 한도윤이 어린 시절 해성에서 살았고 그녀의 집과 이웃이었고 후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서인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지금은 여기서 머무는 게 좋겠어. 필요한 건 프런트에 전화하면 돼. 삼시세끼는 내가 호텔에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배달될 거야. 서 대표님은 요즘 많이 바빠서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말하면 돼.”서인아는 널찍하고 깔끔한 스위트룸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고마워.”한도윤은 서인아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서인아.” 그는 잠깐 머뭇거린 후, 약간의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우린 사실 이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잖아.”서인아는 순간 당황한 표정이었고 그가 말하는 의도가 대체 무엇일지 짐작하지 못했다. 아마도 두 가정이 어렸을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다는 얘기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서인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어색하면서도, 그 어색함 속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느낌이 들었다.“알겠어. 그럼 이제부터는 예의 차리긴 뭐하니까. 그럼 오빠랑 친한 친구라면 앞으로는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한도윤은 잠시 말을 아꼈다.“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그렇게 그녀를 방에 안착시키고 나서 한도윤은 자리를 떠났다. 오후가 되자 서인아는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고 통신사를 바꾸었다. 휴대폰을 켜자 메시지가 쏟아졌고 그녀는 차분히 하나씩 답장을 보내며 SNS를 열었다.촬영 종료 파티에 관한 소식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 송유진과 유선미의 또 다른 사건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는 사진이 아닌 몇 개의 동영상이었다. 동영상 속에서 송유진은 유선미를 반쯤 안은 채 병실을 나서며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모습으로 외과 진료실로 들어갔다.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꽁꽁 싸맨 두 사람이 병원을 빠져나왔고 네티즌들의 날카로
용건이 있다면 여건호도 거절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여건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먹으라니까 정말 밥만 묵묵히 먹었다. 식사 속도는 꽤 빨랐지만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서인아는 밥을 먹는 중간중간 그를 살폈다가 잠시 후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 두었던 와인을 한 잔 따라 그의 앞으로 밀었다.“듣기로는 경성 분이라면서요?”여건호는 먹던 것을 삼키고 나서야 답했다.“네.”서인아는 편안한 어조로 마치 친구에게 묻듯 가볍게 말했다.“근데 왜 해성에 계신 거예요?”“직장 때문에요.”“큰아버지 말씀으로는 군부대에 계실 때 능력이 탁월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이면 제대 후에도 일자리 구하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왜 경성이 아닌 서씨 가문을 선택한 거예요?”서인아는 와인잔을 들고 여건호의 잔에 톡톡 부딪혔다.여건호는 슬쩍 잔을 바라보다가 밥그릇을 내려놓고 허리를 세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가씨께서는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서인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이것저것 궁금할 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여건호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약간 긴장이 풀어진 것 같았다.그의 목소리는 한도윤처럼 낮고 부드러운 타입이 아니고, 그의 외모처럼 맑고 단단했다.“저는 고아로 어릴 때부터 복지시설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군부대에 선발되어 입대했고 군에서 15년 지냈어요. 3년 전에는 부상으로 전역했습니다.”짧은 말에 그의 일생이 담겨 있었다.“죄송해요, 그건 몰랐어요...”“아닙니다.”여건호는 테이블 위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사령관님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씨 가문 분들을 잘 모시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지금 하시는 질문 정도는 별것도 아니에요.”그가 고개를 젖혀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서인아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좋네요. 솔직히 말해 주시니 저도 인
엘라라는 한도윤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굳이 캐묻지 않고 바로 업무를 보고했다.“대표님, 나머지 부서 보고서입니다.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그래.”엘라라는 서류를 책상 위에 놓고 물러서려 했다.그런데 한도윤이 갑자기 몸을 돌더니 책상 위에 놓였던 차 키를 움켜쥐고 나가면서 말했다.“하성으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 예약해 줘.”“네?”엘라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무실 문이 닫히고 한도윤은 사라진 다음이었다.‘하성? 얼마 전 금방 다녀왔잖아. 아, 혹시 메시지 주고받은 사람이 하성에 있는 거 아니야?’몸속에서 호기심이 들끓었다. 일중독 철인 같았던 한도윤이 이토록 들뜨다니,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엘라라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항공편을 검색하면서 생각했다.‘이 대단한 스캔들을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되다니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누군진 몰라도 꼭 잘 보일 거야!’...골치 아픈 일을 정리하고 나서 서인아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원래는 그냥 잠깐 눈을 붙이려 했는데 어느새 깊이 잠들어 버렸다.평소 서인아는 잠드는 데 애를 먹는 편이지만, 막상 잠이 들면 웬만한 소음으로는 깨지 않았다. 이불을 꼭 덮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자기 전에 일부러 벨소리를 크게 해 뒀기에 그녀는 거의 휴대폰이 울리는 동시에 눈을 떴다. 몸을 뒤척여 침대 위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보니 여건호였다.“여보세요?”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탓에 평소 청아한 목소리에 한층 나른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코맹맹이 소리도 조금 났다.잠시 뜸을 들인 여건호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저녁 식사하실래요?”서인아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치워 화면을 보니 진짜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그래요. 그런데 나가기 귀찮으니까 그냥 호텔에서 뭐 좀 시켜 줘요.”“알
한도윤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었어도 엘라라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지만 속으로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한도윤이 누구던가? 그는 언제나 일을 1순위에 놓던 사람이다. 하지만 회의 중 전화를 받는 것도 질색하던 사람이 지금은 몰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게다가 그 상대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충격적인 대형 스캔들 감이었다.[너 괜찮아?]메시지를 보냈으나,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한도윤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그를 몰래 관찰하던 임원들은 그와 눈 마주칠까 봐 고개를 더 푹 숙였다.한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류로 시선을 돌린 듯 보였지만, 사실 시선은 다시 슬쩍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의 눈길 한번에도 옆에 선 총무부 부장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사무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분위기가 폭풍 전야처럼 긴장되는 가운데, 한도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무심히 회의는 여기까지라고 알리고 뒤돌아 사라졌다.‘갔다고?’‘뭐지, 이 상황은?’보고는 이제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직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적 타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끝났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엘라라는 한도윤의 앞에 있던 서류를 챙기면서 다가오는 임원들에게 둘러싸였다.“염 비서님, 대표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혹시 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아니면 새 프로젝트에 문제 생겼어요?”“어느 회사랑 하는 거래인지, 대략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아세요?”엘라라의 본명은 염시현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모든 서류를 정리한 뒤 우뚝 일어서서 호기심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저도 규모 같은 건 정확히 몰라요. 다만... 대표님께서 무척 중시하시는 일인 것 같긴 하네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더욱 의아해졌다. 한도윤이 그토록 신경 쓰는 일은 상당히 드물기 때문이다.“설마 해외 재벌 기업인가요?”염시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성그룹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도윤이 그의 아버지 한명훈에 비해 훨씬 더 강경하고 냉혹하다는 걸 말이다.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실제로는 무척 단호했다.그래서 회사 고위 임원들도 한도윤을 대할 때면 늘 긴장했다. 주주들 역시 조용히 지내며 괜히 회사를 들쑤시지 않았다.“대표님?”수많은 임원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한도윤을 노심초사 살폈다.누군가는 불안해하고, 누군가는 자기 업무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혹여 허점이 발견될까 전전긍긍하면서 말이다.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부서별 종합 보고였지만, 그 긴장감은 전쟁터 못지않았다.이미 두 시간 가까이 지났다. 커다란 테이블을 둘러앉은 엘리트 임원들은 겉보기에는 깔끔해 보였지만 사실 등줄기가 땀으로 흥건했다.그도 그럴 것이, 한도윤은 어리고 훤칠한 인상과 달리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기획부 부장은 보고를 마친 뒤 가슴을 졸이며 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도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를 보지도 않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부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기획부 부장은 식은땀을 훔치며 한도윤이 언제 날카롭게 질문을 퍼부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 순간 바로 지적이 날아올 것 같아 잔뜩 긴장했다.그렇게 몇 분을 더 버텼다.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기획부 직원들은 긴장감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한도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결국 기획부 부장은 엘라라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엘라라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의자를 끌고 다가가 한도윤의 어깨너머로 살짝 불렀다.“대표님...”한도윤이 고개를 들어 엘라라를 보았다.엘라라는 잠시 멍해졌다.회사에 입사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이런 식으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빛을 한도윤에게서 본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대표님, 기획부 보고가 끝났습니다.”한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획부 보고서를 뒤적였다가 낮고 단단한
“뭘 더 원하는 거냐고?”비웃음 섞인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내가 더 묻고 싶어. 너 대체 어쩌자는 거야? 송유진, 넌 아직도 내가 멋모른다고 생각해? 네가 나한테 안 주는 건 요구할 수 없고, 네가 주겠다고 하는 건 거절하면 안 되고? 네 욕심대로 안 되면 내가 눈치 없고 사리 분별 못하는 거지?”서인아는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당기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어찌 됐든 내 결정은 변함없어. 이별이든, 계약 해지든.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아.”그녀는 송유진의 충격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을 확 열었다.“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서인아는 마지막으로 방 안 사람들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다신 볼 일 없겠어요.”“인아야...!”쿵!구연범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서인아는 결연한 기세로 문밖으로 사라졌다.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임서원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구연범은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고, 송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완전히 맥이 풀린 듯했다.유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서인아가 떠났는데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예쁘장한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어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그렇게 서인아가 계약을 해지한다는 소식은 금세 스타엔터 내에 퍼졌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점점 내용이 왜곡되었다.결국 회사 내부에서는 서인아가 유선미를 때려서 임원들을 화나게 했고, 그 때문에 쫓겨난 거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물론 서인아는 그런 얘기들을 전혀 몰랐다.그녀는 호텔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워 송유진이나 스타엔터와 함께한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하지만 딱히 추억할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스타엔터에 들어간 뒤로 온갖 안 좋은 소문이 끊인 적이 없다. 팬은 얼마 없는데, 안티팬만 잔뜩 거느린 셈이다.그것도 이제는 끝이다.그녀는 이 바닥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 사실이 마냥 개운하게만 느껴졌다.서인아는 눈
그제야 사람들은 투명 인간처럼 서인아의 뒤에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당신 누구예요?”여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유진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남자와 또 다른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이 사람 누구야?!”서인아는 냉랭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해? 송유진, 난 이미 할 말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여기서 또 말해야겠어?”“...”송유진은 얼굴을 굳힌 채 서인아의 냉담한 기색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이번에는 진짜 마음을 접은 것인지, 회사 임원들 앞에서도 이렇게 매몰차게 말하리라고는 예상 못 한 듯했다.“서인아, 넌 똑똑하잖아. 이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 없어. 배역이 주어지면 조연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고...”서인아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주연이든 조연이든 난 관심 없어. 난 여기서 나갈 거고, 계약도 해지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아직도 못 알아들어?”그녀는 더 이상 송유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임서원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위약금이 얼마가 될지 계산하셔서 알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회사 계좌로 이체할게요. 위약금이 들어가는 대로 나머지 절차 처리하러 사람을 보낼 거예요. 별일 없으면, 저는 다시 여기 올 일 없겠네요.”그 말과 함께 서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송유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인아야, 잠깐 기다려 봐!”구연범은 예상했어도 막상 들으니 충격을 받은 듯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충격을 추스르고 재빨리 붙잡은 걸 보면, 그래도 서인아를 꽤 아끼는 눈치였다.비록 데뷔 후 이름을 날리진 못했지만 포기를 모르는 그녀의 성격은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송유진과 그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또 둘 사이에 애정이 남아있다고 믿었기에,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안타깝다고 여겼다.“계약 해지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신중하게 생각해야지.”송유진은 시종일관 서인아에게
한도윤은 서류 위에 손을 올린 채 한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엘라라조차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대표님, 어디 문제 있으신가요?”한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듯 멈췄다가 은은한 기품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자료는 거기 두고, 우선 나가 봐.”엘라라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준비한 업무 일정을 그의 앞에 놓으며 답했다.“네, 그럼 저는 먼저 나가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사무실 문이 닫히자, 한도윤은 곧바로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제가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주셨네요.”한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쪽에 무슨 일 생겼어?”“아니요, 별일은 없습니다. 다만 사모님께서 위로 올라가신 지 거의 한 시간째인데 아직 안 나오셔서 걱정됩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임준영은 스타엔터 맞은편 골목에 주차해 두고 상황을 지켜보며 한도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한참 만에야 한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괜찮을 거야. 그 정도 일은 혼자서도 잘 처리하겠지.”임준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네, 저도 해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곧 전화가 끊어졌다.임준영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이건 도대체 걱정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임서원의 사무실.서인아는 송유진을 더 이상 쳐다볼 필요도 못 느꼈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책상 뒤쪽에 앉은 임서원을 향해 용건을 밝혔다.“임 대표님, 전에 전화로 말씀드렸던 계약 해지 건인데요. 오늘은 서류 처리를 하러 왔어요.”‘계약 해지?’방 안에 있던 모두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타이밍에 그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예상 못 한 듯 다들 의아해 보였다.알 사람은 이미 알고 있듯, 이번 새 영화 여주인공 자리를 두고 서인아와
“유진아, 난 그냥 인아한테 인사하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때렸어... 너무 아파.”유선미의 볼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얼음찜질을 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였다. 조그만 얼굴 가득 보랏빛이 뒤섞여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송유진은 놀란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서인아 쪽을 훔쳐봤다. 마치 그녀가 사람을 때린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네가 인아랑 대학 동기라길래, 너희 사이를 생각해서 그동안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아 왔어. 근데 이번에는...”유선미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에 실망과 상처가 가득했다.“유진아, 이번에는 정말 너무 심했어.”송유진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서인아, 같은 회사 배우한테 왜 그런 거야?”이번에야 서인아는 고개를 들어 가까이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그녀는 이제 슬슬 임서원에게 1층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유선미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밝히고 싶기도 했다.그런데 막상 송유진이 유선미의 얘기만 듣고 의심과 실망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송유진은 유선미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서인아의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미안해. 내가 일과 사생활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우리 사이에 괜한 오해가 생긴 것 같아.”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인아야, 네가 나랑 선미한테 화났다는 건 알겠어. 그래도 선미만 탓할 수는 없어. 사람들 앞에서 선미를 때린 건 분명 네 잘못이야. 사과해 줘, 응?”송유진의 말이 끝나자 사무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모두의 시선이 서인아에게 쏠렸고, 그중에서도 유선미의 눈길이 가장 뜨거웠다. 이제는 자신이야말로 승자라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모두가 서인아가 잘못했다고 몰아가는 상황이었다. 유선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누구도 묻지 않았다.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어도, 결국 책임은 서인아에게 돌아오는 형국이었다.서인아는 속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었지만, 곧 평정
“배역 하나 때문에 회사를 협박하고, 말 안 통한다고 잠적해 버리더니, 이제는 회사에서 동료 배우한테 손찌검이라니요?”임서원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인아를 바라보았다.“서인아 씨, 본인이 스타엔터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건가요?”소파에 앉아 있던 유선미의 눈에는 증오와 질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손은 얼음주머니를 파고들 정도로 힘이 꽉 들어갔다.하지만 임서원이 서인아를 호되게 몰아붙이고 질문 공세를 퍼붓자, 유선미 마음속의 증오는 어느새 우월감으로 바뀐 듯했다.서인아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발했던 것만큼 어두운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듯 보였다. 원래부터 유선미는 서인아와 같은 존재는 자신과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대표님, 서인아 태도를 보셨죠? 저 변호사를 선임해서라도...”쿵!유선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그 소리에 한순간 깨졌고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는 송유진이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방 안을 둘러보더니, 결국 서인아 쪽에 시선이 멈췄다.서인아는 그를 확인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감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신발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유진아...”유선미는 송유진을 보자마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울먹이며 달려들었다.그녀가 지나치게 바짝 붙는 바람에, 송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다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살짝 부축했다.그 광경에 구연범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말없이 서인아 쪽을 힐끗 살폈다.유선미와 서인아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스타엔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불화의 씨앗이 된 건 다름 아닌 송유진이었다.송유진은 연예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부터 사람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익숙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관계를 형성할 때도 서인아보다 훨씬 신중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반면, 서인아는 큰 야망 없이 담담한 편이었다.송유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