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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작가: 유요요
서인아는 멍한 눈으로 그의 손 가까이에 놓인 나무로 된 단정한 도시락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서인아는 한도윤이 그녀를 위해 음식을 사러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나. 우선 밥부터 먹어.”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돌아가면서도, 서인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멍했다. 그녀가 침대에 앉자 한도윤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하나씩 꺼내어 그녀 앞에 차려놓았다.

그러다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난 앞으로 다시는 네가 가치 없는 사람 때문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서인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어떤 남자는 자신이 너무 높이 떠받들어지면 본래의 모습을 잊게 되지. 서인아, 넌 평생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 그런 네가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려 가면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건... 정말 한심한 짓이야.”

서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예전의 너를 다시 보고 싶어. 어디에 있어도 스스로 빛나던 그 서인아를.”

그 말과 함께 그는 병실을 나갔다. 서인아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어디에 있어도 스스로 빛나던 그 서인아를.’

심장이 한 번, 또 한 번, 깊게 울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얼굴 위로, 지금껏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마치 먼지가 쌓여 빛을 잃었던 진주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래, 그녀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왜 감정을 한 사람에게만 쏟아붓고 그 사람에게 휘둘려야 하는 걸까?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묘하게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도시락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와 따뜻한 죽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인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가 준비해 둔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목을 축이고 난 후, 젓가락을 집어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든든한 가족이 있었고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릴 때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을 만큼 호들갑을 떨었고 바쁜 부모님조차 명절이면 빠짐없이 선물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공주처럼 자랐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미련하게 살았을까. 가족들이 깔아준 탄탄한 길을 놔두고 왜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와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었을까.

‘참, 어리석었어.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결심한 순간,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그 시각, 옆 병실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유선미는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을 뿐인데도 머리에 커다란 붕대를 감고 마치 심각한 중병이라도 앓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약간의 혈색을 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한 메이크업을 했고 창백해 보이는 피부 덕분에 더욱 가녀리고 연약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를 둘러싼 몇몇 친구들이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인아도 너무 심했어! 넌 걱정돼서 병문안 간 건데 널 밀어 넘어뜨렸다니!”

“그래, 선미야. 너도 이제 인아랑 거리를 둬야 해. 분명 질투하는 거야! 넌 너무 착해서 그렇지, 걔 원래부터 집착 심한 거 알잖아? 대학 때부터 유진 오빠한테 매달렸다며? 그런 사람이 가장 위험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맞아, 자기 위치도 좀 알았으면 좋겠어. 연예계에 발 들인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도 듣보잡이잖아. 솔직히 유진 오빠가 챙겨주지 않았으면 벌써 밀려났을걸? 생긴 것도 밋밋하고 밥맛 떨어져. 그런데 감히 널 질투해?”

그러자 유선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인아도 힘들 거야. 어릴 때부터 엄마가 가출했다던데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며? 할아버지랑 단둘이 컸다잖아. 힘들었을 거야.”

오서연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더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넌 진짜 너무 착해! 그런 사람들은 동정할 필요 없어. 엄마, 아빠한테 사랑 못 받고 자랐으니까 남한테 더 집착하는 거라니까? 너도 조심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유선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근데 서연아, 그 얘긴 절대 밖에서 말하면 안 돼. 인아는 가족 얘기 나오면 엄청 예민하거든.”

오서연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장난기 어린 흥미가 서려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라. 재밌겠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 척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유선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물을 홀짝 마시더니 그리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틀 후, 서인아는 퇴원했다.

그녀가 살던 곳은 하성에서도 꽤 이름난 아파트 단지였다. 하지만 그 집은 송유진이 계약한 곳이었다. 이미 끝을 낸 관계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짐을 챙겨 병원을 나서며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던 그때, 한 대의 차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차창이 내려지더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한도윤이 보였다.

그날 이후로 한도윤은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그의 비서인 듯한 덩치 큰 남자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가져다주긴 했었다. 뜻밖의 재회에 서인아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네 오빠가 일이 있어서 대신 데리러 오라고 했어.”

그의 말에 자연스레 시선이 내려갔다. 운전대 위를 잡고 있는 길고 단단한 손가락, 그리고 손목을 따라 살짝 보이는 다이아몬드 장식의 커프스 버튼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그 모든 것이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 오빠가 이 사람을 부하로 쓸 수 있는 위치였나?’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한도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서인아가 먼저 시선을 거두고 문을 열어 조용히 차에 올랐다.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오빠도 그렇고 왜 자꾸 너한테 이런 걸 시키는 거야?”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 후로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인아는 괜히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리다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거리 풍경이 마치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았다.

“아무 호텔에서 내려줘.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녀가 그렇게 말했지만 한도윤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고 결국 하성에서 가장 유명한 H호텔 앞에 도착했다.

호텔 도어맨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렸고 한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차 키를 호텔 직원에게 건네고 익숙한 걸음으로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호텔 직원이 빠르게 다가왔다.

“한 대표님, 객실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는 직원이 내민 카드키를 받아 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서인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호텔 직원들이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나가던 직원들까지 그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하는 모습.

지금까지 한도윤이라는 사람에게 막연한 거리감만 느꼈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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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자가 웃음을 터뜨렸고 정두한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오랜만이야.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서인아가 미소를 지었다.“아저씨도 나날이 멋있어지는 것 같아요.”“이런!”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이미자는 빨개진 눈으로 서인아를 끌고 갔다.“네가 좋아하는 요리를 잔뜩 만들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봐봐. 고향 음식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그동안 먹고 싶었지?”“네.”서인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특히 아줌마가 해준 옥수수 전이 너무 그리웠어요.”“그럴 줄 알았어.”이미자는 짐짓 허세를 부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옥수수 전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서인아가 신이 나서 그녀를 끌어안았다.“아줌마 최고!”집에 돌아온 손녀를 바라보며 서청환은 차에서 내릴 때부터 눈가가 촉촉해졌다.“인아가 드디어 왔네요. 회장님도 이제 한시름 놓으세요.”정두한이 옆에 서서 말했다.서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동안 밖에서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까? 성격이 권혁을 빼닮아서 나쁜 소식은 절대 전하지 않잖아.”“워낙 철이 든 아이라, 게다가 뒷받침해주는 지훈도 있으니 안심하셔도 돼요.”그는 묵묵부답했다.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손자와 통화하면서 들었던 말만 떠올리면 송유진이라는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감히 인아를 속상하게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나?“두한아.”서청환이 말했다.“우리 집안은 대대로 남자가 득실거렸고, 동시대 유일한 여자아이가 바로 인아란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처럼 키우고 자칫 이상한 놈이 탐낼까 봐 꼭꼭 숨겨두었지. 나중에 연애에 눈을 떠서 송유진을 따라 집을 떠났을 때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사회의 쓴맛을 일찌감치 알려주지 않은 탓에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당하게 했어.”“어른이 되려면 뭐든지 경험해봐야 하는 법이죠. 회장님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서청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대외적으로 서씨 가문의 공주님을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16화

    서인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그제야 졸음이 싹 사라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화면에 뜬 제작팀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사기꾼이 아님을 확신했다.하지만 이는 유선미가 여자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던 역할이지 않은가?전하린의 말에 따르면 최종 결정권은 송유진의 손에 있고, 둘은 커플 계약을 맺은 상황인데다가 스타엔터도 유선미에게 배역을 주겠다고 발표했다.그런데 왜 자신한테 기회가 주어진 거지?서인아는 당최 이해가 안 갔다.이때,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발신인을 확인해보니 스타엔터 매니저 구연범의 전화였다.구연범은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이자 연예계 고참이며, 업계에서 발언권이 꽤 셌다.동시에 여러 명의 아티스트를 담당했는데 서인아도 그중 한 명이다.보통 실적이 거의 없는 무명 연예인은 어시스턴트가 케어했기에 직접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조금 전에 받은 연락을 떠올리자 서인아는 대충 짐작이 갔다.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휴대폰 너머로 소음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짜증이 묻어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디야?”서인아는 입술을 깨물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해성이요.”“뭐라고?”구연범의 목청이 한껏 높아졌다.“최근에 해성 스케줄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너 이제 입사한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거나 심지어 늦게 합류한 신입도 더 잘나가는 이유가 정녕 궁금하지도 않아?”서인아는 묵묵부답했다.구연범이 말을 이어갔다.“아티스트의 근무시간이 아무리 유연하다고 해도 통보도 없이 하성을 떠나면 어떡해? 무슨 수를 쓰던지 오늘 저녁까지 당장 돌아와. 이따가 새 영화 촬영하기 전 첫 회식이 있을 거야. 봉 감독님과 박 제작자님 그리고 다른 투자자들도 참석할 텐데 여주인공이 빠지면 되겠어?”서인아는 구연범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무심하게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오늘 밤은 못 가요.”“뭐라고?”“오빠 말이

최신 챕터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40화

    용건이 있다면 여건호도 거절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여건호는 말이 거의 없었고, 먹으라니까 정말 밥만 묵묵히 먹었다. 식사 속도는 꽤 빨랐지만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다.서인아는 밥을 먹는 중간중간 그를 살폈다가 잠시 후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 두었던 와인을 한 잔 따라 그의 앞으로 밀었다.“듣기로는 경성 분이라면서요?”여건호는 먹던 것을 삼키고 나서야 답했다.“네.”서인아는 편안한 어조로 마치 친구에게 묻듯 가볍게 말했다.“근데 왜 해성에 계신 거예요?”“직장 때문에요.”“큰아버지 말씀으로는 군부대에 계실 때 능력이 탁월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분이면 제대 후에도 일자리 구하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왜 경성이 아닌 서씨 가문을 선택한 거예요?”서인아는 와인잔을 들고 여건호의 잔에 톡톡 부딪혔다.여건호는 슬쩍 잔을 바라보다가 밥그릇을 내려놓고 허리를 세운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아가씨께서는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서인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이것저것 궁금할 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여건호는 잠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약간 긴장이 풀어진 것 같았다.그의 목소리는 한도윤처럼 낮고 부드러운 타입이 아니고, 그의 외모처럼 맑고 단단했다.“저는 고아로 어릴 때부터 복지시설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때 군부대에 선발되어 입대했고 군에서 15년 지냈어요. 3년 전에는 부상으로 전역했습니다.”짧은 말에 그의 일생이 담겨 있었다.“죄송해요, 그건 몰랐어요...”“아닙니다.”여건호는 테이블 위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사령관님께서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서씨 가문 분들을 잘 모시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지금 하시는 질문 정도는 별것도 아니에요.”그가 고개를 젖혀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서인아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좋네요. 솔직히 말해 주시니 저도 인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9화

    엘라라는 한도윤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굳이 캐묻지 않고 바로 업무를 보고했다.“대표님, 나머지 부서 보고서입니다.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그래.”엘라라는 서류를 책상 위에 놓고 물러서려 했다.그런데 한도윤이 갑자기 몸을 돌더니 책상 위에 놓였던 차 키를 움켜쥐고 나가면서 말했다.“하성으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 예약해 줘.”“네?”엘라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무실 문이 닫히고 한도윤은 사라진 다음이었다.‘하성? 얼마 전 금방 다녀왔잖아. 아, 혹시 메시지 주고받은 사람이 하성에 있는 거 아니야?’몸속에서 호기심이 들끓었다. 일중독 철인 같았던 한도윤이 이토록 들뜨다니,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엘라라는 얼른 휴대폰을 꺼내 항공편을 검색하면서 생각했다.‘이 대단한 스캔들을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되다니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누군진 몰라도 꼭 잘 보일 거야!’...골치 아픈 일을 정리하고 나서 서인아는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원래는 그냥 잠깐 눈을 붙이려 했는데 어느새 깊이 잠들어 버렸다.평소 서인아는 잠드는 데 애를 먹는 편이지만, 막상 잠이 들면 웬만한 소음으로는 깨지 않았다. 이불을 꼭 덮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자기 전에 일부러 벨소리를 크게 해 뒀기에 그녀는 거의 휴대폰이 울리는 동시에 눈을 떴다. 몸을 뒤척여 침대 위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보니 여건호였다.“여보세요?”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전화를 받았다.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탓에 평소 청아한 목소리에 한층 나른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코맹맹이 소리도 조금 났다.잠시 뜸을 들인 여건호가 입을 열었다.“아가씨,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저녁 식사하실래요?”서인아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치워 화면을 보니 진짜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그녀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그래요. 그런데 나가기 귀찮으니까 그냥 호텔에서 뭐 좀 시켜 줘요.”“알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8화

    한도윤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었어도 엘라라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지만 속으로는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한도윤이 누구던가? 그는 언제나 일을 1순위에 놓던 사람이다. 하지만 회의 중 전화를 받는 것도 질색하던 사람이 지금은 몰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게다가 그 상대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충격적인 대형 스캔들 감이었다.[너 괜찮아?]메시지를 보냈으나,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한도윤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그를 몰래 관찰하던 임원들은 그와 눈 마주칠까 봐 고개를 더 푹 숙였다.한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류로 시선을 돌린 듯 보였지만, 사실 시선은 다시 슬쩍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의 눈길 한번에도 옆에 선 총무부 부장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사무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분위기가 폭풍 전야처럼 긴장되는 가운데, 한도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무심히 회의는 여기까지라고 알리고 뒤돌아 사라졌다.‘갔다고?’‘뭐지, 이 상황은?’보고는 이제 절반 정도 진행되었고 직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적 타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끝났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엘라라는 한도윤의 앞에 있던 서류를 챙기면서 다가오는 임원들에게 둘러싸였다.“염 비서님, 대표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혹시 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아니면 새 프로젝트에 문제 생겼어요?”“어느 회사랑 하는 거래인지, 대략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아세요?”엘라라의 본명은 염시현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모든 서류를 정리한 뒤 우뚝 일어서서 호기심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저도 규모 같은 건 정확히 몰라요. 다만... 대표님께서 무척 중시하시는 일인 것 같긴 하네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은 더욱 의아해졌다. 한도윤이 그토록 신경 쓰는 일은 상당히 드물기 때문이다.“설마 해외 재벌 기업인가요?”염시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7화

    한성그룹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한도윤이 그의 아버지 한명훈에 비해 훨씬 더 강경하고 냉혹하다는 걸 말이다.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실제로는 무척 단호했다.그래서 회사 고위 임원들도 한도윤을 대할 때면 늘 긴장했다. 주주들 역시 조용히 지내며 괜히 회사를 들쑤시지 않았다.“대표님?”수많은 임원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한도윤을 노심초사 살폈다.누군가는 불안해하고, 누군가는 자기 업무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혹여 허점이 발견될까 전전긍긍하면서 말이다.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부서별 종합 보고였지만, 그 긴장감은 전쟁터 못지않았다.이미 두 시간 가까이 지났다. 커다란 테이블을 둘러앉은 엘리트 임원들은 겉보기에는 깔끔해 보였지만 사실 등줄기가 땀으로 흥건했다.그도 그럴 것이, 한도윤은 어리고 훤칠한 인상과 달리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기획부 부장은 보고를 마친 뒤 가슴을 졸이며 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도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를 보지도 않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부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기획부 부장은 식은땀을 훔치며 한도윤이 언제 날카롭게 질문을 퍼부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 순간 바로 지적이 날아올 것 같아 잔뜩 긴장했다.그렇게 몇 분을 더 버텼다.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기획부 직원들은 긴장감에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한도윤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결국 기획부 부장은 엘라라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엘라라는 입술을 꽉 다문 채 의자를 끌고 다가가 한도윤의 어깨너머로 살짝 불렀다.“대표님...”한도윤이 고개를 들어 엘라라를 보았다.엘라라는 잠시 멍해졌다.회사에 입사한 지 5년이 넘었지만, 이런 식으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빛을 한도윤에게서 본 건 처음이었다.그녀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대표님, 기획부 보고가 끝났습니다.”한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획부 보고서를 뒤적였다가 낮고 단단한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6화

    “뭘 더 원하는 거냐고?”비웃음 섞인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내가 더 묻고 싶어. 너 대체 어쩌자는 거야? 송유진, 넌 아직도 내가 멋모른다고 생각해? 네가 나한테 안 주는 건 요구할 수 없고, 네가 주겠다고 하는 건 거절하면 안 되고? 네 욕심대로 안 되면 내가 눈치 없고 사리 분별 못하는 거지?”서인아는 한 손으로 문손잡이를 당기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어찌 됐든 내 결정은 변함없어. 이별이든, 계약 해지든.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아.”그녀는 송유진의 충격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을 확 열었다.“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서인아는 마지막으로 방 안 사람들을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다신 볼 일 없겠어요.”“인아야...!”쿵!구연범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서인아는 결연한 기세로 문밖으로 사라졌다.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임서원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구연범은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고, 송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완전히 맥이 풀린 듯했다.유선미는 고개를 숙인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서인아가 떠났는데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예쁘장한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어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었다.그렇게 서인아가 계약을 해지한다는 소식은 금세 스타엔터 내에 퍼졌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점점 내용이 왜곡되었다.결국 회사 내부에서는 서인아가 유선미를 때려서 임원들을 화나게 했고, 그 때문에 쫓겨난 거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물론 서인아는 그런 얘기들을 전혀 몰랐다.그녀는 호텔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워 송유진이나 스타엔터와 함께한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하지만 딱히 추억할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스타엔터에 들어간 뒤로 온갖 안 좋은 소문이 끊인 적이 없다. 팬은 얼마 없는데, 안티팬만 잔뜩 거느린 셈이다.그것도 이제는 끝이다.그녀는 이 바닥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 사실이 마냥 개운하게만 느껴졌다.서인아는 눈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5화

    그제야 사람들은 투명 인간처럼 서인아의 뒤에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당신 누구예요?”여건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유진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남자와 또 다른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이 사람 누구야?!”서인아는 냉랭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해? 송유진, 난 이미 할 말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여기서 또 말해야겠어?”“...”송유진은 얼굴을 굳힌 채 서인아의 냉담한 기색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이번에는 진짜 마음을 접은 것인지, 회사 임원들 앞에서도 이렇게 매몰차게 말하리라고는 예상 못 한 듯했다.“서인아, 넌 똑똑하잖아. 이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 없어. 배역이 주어지면 조연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고...”서인아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들어 제지했다.“주연이든 조연이든 난 관심 없어. 난 여기서 나갈 거고, 계약도 해지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아직도 못 알아들어?”그녀는 더 이상 송유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임서원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위약금이 얼마가 될지 계산하셔서 알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회사 계좌로 이체할게요. 위약금이 들어가는 대로 나머지 절차 처리하러 사람을 보낼 거예요. 별일 없으면, 저는 다시 여기 올 일 없겠네요.”그 말과 함께 서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송유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인아야, 잠깐 기다려 봐!”구연범은 예상했어도 막상 들으니 충격을 받은 듯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충격을 추스르고 재빨리 붙잡은 걸 보면, 그래도 서인아를 꽤 아끼는 눈치였다.비록 데뷔 후 이름을 날리진 못했지만 포기를 모르는 그녀의 성격은 높이 평가했다. 또 그는 송유진과 그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고, 또 둘 사이에 애정이 남아있다고 믿었기에,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안타깝다고 여겼다.“계약 해지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신중하게 생각해야지.”송유진은 시종일관 서인아에게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4화

    한도윤은 서류 위에 손을 올린 채 한참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엘라라조차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대표님, 어디 문제 있으신가요?”한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서려 있었다.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듯 멈췄다가 은은한 기품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자료는 거기 두고, 우선 나가 봐.”엘라라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준비한 업무 일정을 그의 앞에 놓으며 답했다.“네, 그럼 저는 먼저 나가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사무실 문이 닫히자, 한도윤은 곧바로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제가 막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주셨네요.”한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그쪽에 무슨 일 생겼어?”“아니요, 별일은 없습니다. 다만 사모님께서 위로 올라가신 지 거의 한 시간째인데 아직 안 나오셔서 걱정됩니다...”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임준영은 스타엔터 맞은편 골목에 주차해 두고 상황을 지켜보며 한도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한참 만에야 한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괜찮을 거야. 그 정도 일은 혼자서도 잘 처리하겠지.”임준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네, 저도 해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곧 전화가 끊어졌다.임준영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이건 도대체 걱정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임서원의 사무실.서인아는 송유진을 더 이상 쳐다볼 필요도 못 느꼈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책상 뒤쪽에 앉은 임서원을 향해 용건을 밝혔다.“임 대표님, 전에 전화로 말씀드렸던 계약 해지 건인데요. 오늘은 서류 처리를 하러 왔어요.”‘계약 해지?’방 안에 있던 모두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 타이밍에 그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예상 못 한 듯 다들 의아해 보였다.알 사람은 이미 알고 있듯, 이번 새 영화 여주인공 자리를 두고 서인아와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3화

    “유진아, 난 그냥 인아한테 인사하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때렸어... 너무 아파.”유선미의 볼은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고, 얼음찜질을 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어 보였다. 조그만 얼굴 가득 보랏빛이 뒤섞여 우스꽝스럽지만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송유진은 놀란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서인아 쪽을 훔쳐봤다. 마치 그녀가 사람을 때린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네가 인아랑 대학 동기라길래, 너희 사이를 생각해서 그동안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아 왔어. 근데 이번에는...”유선미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에 실망과 상처가 가득했다.“유진아, 이번에는 정말 너무 심했어.”송유진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졌다.“서인아, 같은 회사 배우한테 왜 그런 거야?”이번에야 서인아는 고개를 들어 가까이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무심한 눈길을 보냈다.그녀는 이제 슬슬 임서원에게 1층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유선미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밝히고 싶기도 했다.그런데 막상 송유진이 유선미의 얘기만 듣고 의심과 실망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송유진은 유선미의 어깨를 놓고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서인아의 앞에 멈춰서서 말했다.“미안해. 내가 일과 사생활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우리 사이에 괜한 오해가 생긴 것 같아.”그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인아야, 네가 나랑 선미한테 화났다는 건 알겠어. 그래도 선미만 탓할 수는 없어. 사람들 앞에서 선미를 때린 건 분명 네 잘못이야. 사과해 줘, 응?”송유진의 말이 끝나자 사무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모두의 시선이 서인아에게 쏠렸고, 그중에서도 유선미의 눈길이 가장 뜨거웠다. 이제는 자신이야말로 승자라는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모두가 서인아가 잘못했다고 몰아가는 상황이었다. 유선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누구도 묻지 않았다.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어도, 결국 책임은 서인아에게 돌아오는 형국이었다.서인아는 속이 꽉 막힌 듯한 기분이었지만, 곧 평정

  • 내 여자 건드리지 마   제32화

    “배역 하나 때문에 회사를 협박하고, 말 안 통한다고 잠적해 버리더니, 이제는 회사에서 동료 배우한테 손찌검이라니요?”임서원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인아를 바라보았다.“서인아 씨, 본인이 스타엔터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건가요?”소파에 앉아 있던 유선미의 눈에는 증오와 질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손은 얼음주머니를 파고들 정도로 힘이 꽉 들어갔다.하지만 임서원이 서인아를 호되게 몰아붙이고 질문 공세를 퍼붓자, 유선미 마음속의 증오는 어느새 우월감으로 바뀐 듯했다.서인아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발했던 것만큼 어두운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듯 보였다. 원래부터 유선미는 서인아와 같은 존재는 자신과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대표님, 서인아 태도를 보셨죠? 저 변호사를 선임해서라도...”쿵!유선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묘한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그 소리에 한순간 깨졌고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곳에는 송유진이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그는 재빨리 방 안을 둘러보더니, 결국 서인아 쪽에 시선이 멈췄다.서인아는 그를 확인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감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신발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유진아...”유선미는 송유진을 보자마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울먹이며 달려들었다.그녀가 지나치게 바짝 붙는 바람에, 송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다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살짝 부축했다.그 광경에 구연범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말없이 서인아 쪽을 힐끗 살폈다.유선미와 서인아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스타엔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불화의 씨앗이 된 건 다름 아닌 송유진이었다.송유진은 연예계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부터 사람들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익숙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관계를 형성할 때도 서인아보다 훨씬 신중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반면, 서인아는 큰 야망 없이 담담한 편이었다.송유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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