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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초여름의 하늘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2-05 19:11:04
의사가 매무새를 정돈해준 덕분에 지현석의 얼굴은 말끔하게 변했다. 비록 혈색은 없었지만 여전히 잘생겼다.

40년 전을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 어린 내가 가업을 잇기에 무리인지라 이화 그룹은 부도 직전까지 갔다.

그때 나타난 구세주가 바로 지씨 가문이었고, 이화 그룹을 인수함과 동시에 결혼까지 하는 조건으로 매년 배당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지현석의 잘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매, 게다가 매년 넘쳐나는 돈을 떠올리자 마음이 혹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잣집 아가씨가 어찌 사회의 흉흉함을 알겠는가? 결국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이 바닥에서 꽤 알아주는 분들이었기에 지현석과 결혼한 이후로 이화 그룹의 거래처였던 회사들이 전부 지성 그룹으로 넘어갔다.

덕분에 지성 그룹은 눈에 띄게 승승장구했고, 무려 2년 만에 무명 기업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국내 업체로 급부상했다.

다만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지현석에게 첫사랑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모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법무팀장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곧바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 일단 남편의 사망을 부고하고 장례식은 최대한 품위 있게 진행해요.”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마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처럼 비통하게 말했다.

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구석에 흰 천을 반쯤 덮고 누워 있는 안정미를 힐긋 바라보았다.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저 여자는 어떡해요?”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지현석과 꼭 껴안고 죽었으니 나름대로 ‘결실’을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명문가 출신인데 차마 이런 말까지 내뱉기는 어려웠다.

결국 메마른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돌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난 모르는 사람이라서 우선 병원에 안치해두세요.”

의사가 떠난 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죽고 나서도 구설에 오르게 할 수는 없어. 두 사람을 죽인 범인은 바로 불효녀 지예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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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현석이 살아있을 때 내가 과묵해서 싫다고 하면 옆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엄마, 아빠는 집에서 애만 보는 여자보다 말이 통하고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하거든요?”만약 꼬치꼬치 캐묻는 걸 귀찮아하는 눈치라면 질세라 말을 보탰다.“아무 생각 없이 우리 집에 기생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요?”그게 왜? 하루하루 마음 편히 남편 돈 쓸 때도 떳떳하기만 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창피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그렇다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내가 체면 때문에 부모님이 일궈낸 백년 기업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보다가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노래방 도우미라도 해야지 그나마 덜 쪽팔린다는 건가?지예령은 묵묵부답하는 나를 보자 테이블을 대뜸 내리쳤다.“내 말 못 들었어요? 아빠는 어디 있죠? 얼른 대답하세요.”결국 참다못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너 같은 딸을 둔 적이 없으니까 썩 꺼져.”갑자기 얻어맞은 탓에 지예령은 넋을 잃고 말았고, 오히려 강선우가 혈안이 되어 손가락질하더니 고래고래 외쳤다.“그럼 우리 엄마를 죽인 사람도 아줌마겠네요? 내 말 맞죠? 옛날부터 눈엣가시 취급하더니 유언비어나 퍼뜨리고 다니고, 아줌마가 바로 범인이죠?”이때, 눈치 빠른 비서가 재빨리 지성 병원 입구의 CCTV 영상을 플레이했다.곧이어 스크린에 제발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내 모습이 나타났고, 경비원은 지예령이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지예령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을 덜덜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이럴 수가...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요?”어쨌거나 미리 언질 준 사람으로서 너무 억울했다.그리고 사건 당일 저녁에 보낸 문자 메시지를 가리키며 말했다.“분명 사진 찍어서 보여줬잖아. 대체 왜 의심하는 거야? 게다가 다른 사람 번호로 두 번이나 연락했는데 끝까지 믿지 않았잖아. 이 불효녀야! 너 때문에 아빠가 죽었는데 감히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와?”지예령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6화

    지현석이 유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기에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억대 재산과 회사는 자연스럽게 나한테 상속되었다.이에 긴장한 나머지 며칠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그러나 미처 한숨 돌리기도 전에 지성 그룹이 발칵 뒤집혔다.비서가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회장님, 큰일 났어요. 얼른 뉴스 확인해 보세요.”이내 느긋하게 휴대폰을 켜고 기사를 읽어보는 순간 손에 힘이 풀릴 뻔했다.다름 아닌 지현석과 안정미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담요에서 굴어 나오는 영상이 실검 1위를 차지했다.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왜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을 못한 거지?물론 마음처럼 되는 건 아니었다. 일이 터지면 구경꾼이 모여들기 마련이니까.이제는 온 국민이 알게 된 셈이다.온갖 댓글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고, 별의별 내용이 다 있었다. “이 사람 지성 그룹 회장님 아니야? 외모는 엄청 유식해 보이던데 사생활이 꽤 문란한가 봐.”“영상 속에서 손수레를 끌고 온 여자가 지씨 가문 사모님이래. 그러니까 회장님이 다른 여자랑 바람 피우다가 목숨까지 잃었다는 거네?”“정말 어이가 없군. 이렇게 방탕한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아니나 다를까 지성 그룹의 주가는 폭락했고 회사 내부는 분위기가 흉흉했다.다행히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대인 관계가 좋았던 지라 내 체면을 봐서라도 오래된 거래처는 투자를 철회하기는커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라희 씨 부모님께서 예전에 워낙 잘 챙겨주셨거든요. 다들 같은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 회장님의 유일한 딸인데, 40년 전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코끝이 찡하며 눈물이 날 뻔했다.심지어 지현석이 죽었을 때보다 더 울컥했다.부모님께서 나한테 정말 큰 재산을 남겨준 듯싶었다.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는 의리 있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우수한 유전자까지 아낌없이 물려주었다.신혼 초를 돌이켜보면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해외 연수를 갔는데 경영자 과정을 이수하는 와중에 생각지도 못하게 수석으로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5화

    의사가 매무새를 정돈해준 덕분에 지현석의 얼굴은 말끔하게 변했다. 비록 혈색은 없었지만 여전히 잘생겼다.40년 전을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 어린 내가 가업을 잇기에 무리인지라 이화 그룹은 부도 직전까지 갔다.그때 나타난 구세주가 바로 지씨 가문이었고, 이화 그룹을 인수함과 동시에 결혼까지 하는 조건으로 매년 배당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당시 지현석의 잘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매, 게다가 매년 넘쳐나는 돈을 떠올리자 마음이 혹했다.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잣집 아가씨가 어찌 사회의 흉흉함을 알겠는가? 결국 얼떨결에 동의하게 되었다.어쨌거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이 바닥에서 꽤 알아주는 분들이었기에 지현석과 결혼한 이후로 이화 그룹의 거래처였던 회사들이 전부 지성 그룹으로 넘어갔다.덕분에 지성 그룹은 눈에 띄게 승승장구했고, 무려 2년 만에 무명 기업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국내 업체로 급부상했다.다만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지현석에게 첫사랑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모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법무팀장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곧바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아, 일단 남편의 사망을 부고하고 장례식은 최대한 품위 있게 진행해요.”나는 손을 내저으며 마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내처럼 비통하게 말했다.의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구석에 흰 천을 반쯤 덮고 누워 있는 안정미를 힐긋 바라보았다.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저 여자는 어떡해요?”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지현석과 꼭 껴안고 죽었으니 나름대로 ‘결실’을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명문가 출신인데 차마 이런 말까지 내뱉기는 어려웠다.결국 메마른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돌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난 모르는 사람이라서 우선 병원에 안치해두세요.”의사가 떠난 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당신이 죽고 나서도 구설에 오르게 할 수는 없어. 두 사람을 죽인 범인은 바로 불효녀 지예령이니까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4화

    깜짝 놀란 목소리에 현장은 발칵 뒤집혔고,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힘도 없는 60대 여자가 혼자서 무슨 수로 제지하겠는가? 결국 온몸으로 지현석 가로막고 큰 소리로 외쳤다.“찍지 마세요!”이때, 의사가 서둘러 뛰어와 두 사람을 들것에 실어 응급실로 옮겼다.30분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바라보며 고갯짓으로 따라오라고 했다.수술실의 상황이 궁금한 나머지 목을 쭉 빼고 들여다보았지만 침대 위를 가린 흰 천밖에 발견하지 못했다.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남편 진짜 죽었어요...?”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감전사로 돌아가셨어요. 전류가 센 편은 아니지만 워낙 장시간 지속되어서... 게다가 회장님의 체력으로 지나친 자극은 감당하기 힘드시거든요. 골든타임도 이미 지났는지라 어쩔 수 없었어요. 만약 10분만 일찍 오셨더라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10분이라니?그때만 해도 병원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제지당하지 않았는가?나는 괴로운 마음에 머리를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지예령, 이 불효녀 같으니라고! 아빠랑 안정미가 아무리 잘 챙겨주면 뭐 하나...”이내 눈가를 닦아내며 서영자에게 다시 한번 연락하라고 했다. 어쨌거나 친자식으로서 마지막 떠나는 길은 함께해야 하는 법이다.“아가씨, 사모님께서...”서영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예령은 짜증 섞인 말투로 끼어들었다.“엄마는 단지 정미 이모랑 아빠가 사이좋게 지내니까 질투하는 건데 왜 이 난리예요? 똑똑히 들으세요. 아빠와 내 말이 곧 우리 집안의 법이죠. 어떻게 성도 다른 외부인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믿을 수 있어요?”순간, 화가 발끈 나서 단번에 휴대폰을 빼앗아 노발대발하며 외쳤다.“지예령! 정 믿기 어렵다면 직접 병원에 와서 확인하면 되잖아. 네 아빠뿐만 아니라 강선우의 엄마도 죽었어.”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흐르더니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차피 일찌감치 죽기를 바랐던 거 아니에요? 저주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3화

    서영자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사모님... 전... 지금 아가씨한테 연락해볼게요.”나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전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예령이 내 말은 못 믿어도 서영자까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통화가 연결되자 서영자는 곧바로 스피커폰을 켜고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아가씨, 얼른 집에 오세요. 회장님께서 일이 생긴 것 같아요.”지예령은 혀를 찼다.“이모, 우리 엄마 옆에 있죠?”서영자는 나를 흘긋 쳐다보며 순순히 인정했다.“네, 아가씨...”지예령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외쳤다.“이모, 정말 실망이에요. 나랑 아빠가 이모를 얼마나 믿고 있는데 어떻게 엄마와 한통속이 되어 거짓말할 수 있죠? 집에 있는 욕조는 나도 써봤거든요? 전기가 통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감전되어 죽겠어요? 핑계도 그럴싸한 걸 대야지, 만약 엄마를 도와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아빠한테 이모를 해고하라고 할 거예요!”지예령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내가 큰소리로 끼어들었다.“예령아, 엄마는 거짓말한 적이 없어. 네 아빠가 곧 숨을 거둘 것처럼 보여.”지예령은 코웃음을 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엄마가 죽으면 몰라도 아빠는 그럴 리 없거든요?”서영자는 욕조에 있는 지현석과 안정미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외쳤다.“사모님, 얼른 119에 연락해요.”나는 지현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안 돼, 그래도 나름 명성이 자자한 그룹사 회장인데 행여나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조상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영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회장님을 내버려 둘 생각인가요?”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무리 미워도 남편인데 죽어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지. 지성 그룹 산하에 병원이 있으니까 거기로 보내.”서영자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방에서 플라스틱 국자를 가져와서 안정미 다리 사이에 있던 물건을 건져 올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두 남녀를 욕조에서 끌어냈다.나는 상대방의 체면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2화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흐르더니 지예령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곧 내일 모레 하는 사람이 이런 유치한 짓 좀 그만할래요? 아빠랑 정미 이모는 평생을 떳떳하게 살아온 분들인데 대체 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헐뜯는 거예요? 엄마 때문에 선우가 회사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요.”이때 화가 난 듯한 강선우가 버럭 외쳤다.“예령아, 아줌마가 설마 또 우리 엄마랑 네 아빠의 사이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 너무 한가해서 그래. 아줌마한테 딱일 것 같은데 이참에 양로원이나 소개해줄까?”나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신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군.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간사한 놈!그리고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쿵 하는 소리가 났고 곧이어 강선우의 신음이 들려왔다.“예령아, 다리가... 고질병이 또 도졌나 봐.”“선우야!”지예령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대뜸 휴대폰에 대고 악을 썼다.“선우가 다리를 다친 것도 다 엄마 때문이에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 용서 안 할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이내 전화가 뚝 끊겼다.나는 너무 억울했다.그때 뭐라도 도움이 되려고, 게다가 겸손한 사모님으로서 40년의 결혼 생활이 유의미할 수 있도록 지성 그룹에서 청소 담당자로 일했다.당시 회사 입구에서 한창 유리 청소하는 와중에 안정미는 나를 보고도 브레이크를 밟기는커녕 곧장 들이받았다.마침 안정미의 아들 강선우가 등 뒤에 서 있었는데, 옆으로 피하는 순간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그런데 뭐가 내 탓이라는 거지?또한, 지예령이 아빠의 편을 들어 나를 원수처럼 대하는 이유도 안정미와 강선우의 관계 때문이다.남편은 안정미를, 딸은 안정미의 아들 강선우를 좋아했다.나중에 강선우가 회사에서 나를 괴롭혀도 지예령은 못 본 척했다.한편, 욕조 안의 물건이 진동하면서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자 이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제 어떡해야 한단 말이지?지현석은 안정미와 색다른 놀이를 경험하려고 가정

  • 내 삶의 전성기는 60대부터   제1화

    여행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얼른 집에 가서 남편 지현석에게 서프라이즈해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올해는 결혼 40주년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별장에 가정부와 집사는커녕 아무도 없었다.이내 안으로 들어서자 안방 욕실에서 물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유리창을 통해 욕조에 가만히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나는 덜덜 떨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항상 점잖고 진지하던 남편이 첫사랑인 안정미와 함께 안에 누워 있었다.욕실 바닥에는 빨간색 양초가 하트 모양을 이루었고, 두 남녀는 눈을 꼭 감은 채 서로를 껴안았다. 안정미의 다리 사이에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는데 마치 무언가 있는 듯싶었다.결혼해서 지금까지 지현석은 나랑 무드를 잡아보거나 색다른 경험을 시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첫사랑과 무려 욕조에서 그런 짓거리를 했다.심지어 황홀경에 이르러 잠까지 들었다.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내주었다.[예령아, 네 아빠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대신 봐줄래?]몇 분 뒤, 지예령이 답장을 보냈다.[정말 대단하네요. 다 늙어빠진 사람이 아직도 남의 뒷조사나 하고 다니는 거예요? 표정이 어색한 게 전혀 실감 나지 않잖아요. 아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가 바로 엄마랑 정미 이모라고 분명히 얘기했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죠?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청춘이 영원할 거로 생각해요? 아빠가 젊은 시절의 유일한 추억을 회상하게 해주면 어디 덧나요? 참 이기적인 사람이네요. 정미 이모가 얼마나 착하고 순수하신 분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갱년기 아줌마와 비교가 되겠어요?]쉴새 없이 비난하는 딸의 문자를 보며 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고 이내 답장을 보냈다.[예령아, 네가 예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엄마가 3일 동안 수혈해준 걸 벌써 잊었어?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그러자 지예령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 대뜸 호통을 쳤다.“대체 수혈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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