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결혼생활 동안, 이은화는 세 아들보다 남편인 정군호를 더 치밀하게 관리했다. 그것은 이은화가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군호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애가 죽은 건 그애 스스로 초래한 거야. 마음속에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애가 나한테 복수하려고 또 당신 장남을 꼬셨어. 군호 씨가 보기에 이게 뭐인 것 같아? 스스로 생각 좀 해봐.”“당신 큰며느리가 지금 집에서 이혼한다고 난리 치고 있어. 이윤정, 그 애가 우리 가정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당신 장남의 가정까지 망쳐놨어. 그 애는 죽어 마땅해. 그 애가 자살이든 타살이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우리 누군가 이씨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 이 일을 조사하려고 한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누구든 내 허락 없이 이씨 가문의 세력을 이용하려는 자는, 가차 없이 벌받게 할 거야!”이은화는 단호하게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높이 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정군호는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정군호는 이씨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은화의 앞에서 허리를 펼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내의 기분이 좋아야만 정군호의 삶도 평온해질 수 있었다.분명, 두 사람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하지만 아내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냉랭해졌다. 언제나 남편인 정군호가 양보해야 했고, 그녀한테 맞춰야 했고, 그녀를 이해해야 했다.이은화가 병실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아들 정일호와 마주쳤다. 이은화의 표정은 어두웠고 정일호는 엄마가 걱정스러웠다.“엄마...”“그래, 일호야. 네 아빠가 퇴원하면 이제는 네 별장에서 지내도록 부탁해.”이은화는 정일호에게 당부하고 급히 떠났다.‘아빠를 더 이상 이씨 가문 대저택에 들이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정일호는 이은
정일호가 그런 정군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위로밖에 없었다. 사실, 정일호 역시 이윤정이 실족사인지, 친오빠에게 떠밀려 타살된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감히 조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이미 이은화가 그들한테 명확하게 뜻을 전달했기 때문이었다.“이윤정은 이미 죽었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그 애의 이름조차도 입 밖에 내지 마라.”정군호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들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밖에 없었다.“퇴원하거든 네 별장으로 가지 않을 거다. 대저택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 네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비는 이미 70살도 넘었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너희들을 끝까지 지킬 거야.”“내가 있으면, 네 엄마가 화가 나더라도 나한테 화풀이할 테니, 너희들은 그나마 덜 괴로울 거야.”그리고, 정군호는 정일호에게 당부했다.“일호야, 너희 형제들도 조심해야 한다. 물론, 너희를 낳고 기른 엄마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이씨 가문보다 중요한 건 없어.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면, 너희 형제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정군호의 말에 정일호는 침을 삼켰다. 이은화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가혹한 결정도 내릴 수 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너희도 나와 윤정이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너희 힘으로 사업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씨 가문을 벗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야.”정군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비 말을 명심하거라. 난 네 엄마와 50년을 함께 살았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뼛속까지 알고 있어.”“그리고 이윤미는 너희를 형제라고 생각도 하지 않아. 네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도, 언젠가 이윤미가 너희를 하나하나 쳐낼 거야. 그 애의 피에는 너희 엄마와 똑같이 냉혹함이 흐르고 있어.”정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빠,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사업이 조금 어려워요? 저희도 여러 번 사업
이윤미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바로 하예진이었다.하예진은 마스크까지는 아니었지만,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모자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이윤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래요.”하예진은 이윤미를 유심히 살폈다.“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윤미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난 그저 가만히 있었어요.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내 손에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그리고, 기분이 좋아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잖아요.”“여기요.”이윤미의 말이 끝난 뒤, 하예진은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돌아가고,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한 입 맛 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여기 디저트 잘하네요. 너무 맛있는데요.”하예진의 말에 이윤미는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여기가 어디 호텔인데.”그리고 그녀는 또 물었다.“듣자 하니, 전씨 집안 도련님들이 모두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던데요?”하예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잘 아는 건 저희 제부, 그리고 전이진이랑 전호영, 셋이 요리를 정말 잘해요.”“그리고,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호텔을 운영하니, 카페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가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하예진은 살이 찔까 봐 걱정되어, 디저트를 한 입 먹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미는 하예진이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 같아 디저트 접시를 하예진 앞으로 밀었다.“맛있으면 더 먹어요.”하예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에요. 맛만 보면 됐어요. 단 음식은 쉽게 살찌잖아요. 저 1년 동안 매일 뛰면서 운동 유지하고, 식단 조절에 일도 많이 하면서 겨우 다이어트에 성공했어요.”그녀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이후, 요요가 오는 것이 두려워 철저하게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오고 있었다.“이제는 그 고생을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도 난 사업으로 예진 씨와 한 판 붙고 싶어요. 예진 씨도 제대로 배워야 할 거예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언제든 판이 바뀔 수 있는 게 사업이에요. 아직 독하게 마음먹지 못한 것 같네요.”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윤미 씨만큼 못 하는 거 인정해요. 현재로서는 내가 윤미 씨를 따라갈 수 없어요.”하예진은 과거 직장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결혼 후 한동안 전업주부로 지냈다. 그녀가 다시 시작한 커리어도 작은 사업일 뿐이었다.하예진은 이번에 큰이모의 덕으로 강성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몇몇 가문들이 뒤에서 도와준다 해도, 그녀 스스로 능력과 인내가 없으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었다.그리고, 하예진이 사업 판에 발을 들인 시간도 이윤미보다 훨씬 짧았고, 무엇보다 강성에서는 금방 시작한 단계에 불과했다.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지금 예진 씨 계약을 가로채고, 고객을 빼앗기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니겠어요? 그럼, 예진 씨한테는 큰 타격일 텐데. 미안하지만, 예진 씨가 일주일 동안 공들였던 계약, 내가 오늘 방금 따냈어요.”하예진은 눈빛이 번쩍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나도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우리 큰이모가 한 달 동안 성사하지 못한 계약, 내가 따냈거든요. 솔직히 윤미 씨랑 나는 친척이고, 또 이렇게 잘 통하는데, 저보다 어른인 윤미 씨의 사업을 가로채는 게 좀 미안했었거든요.”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윤미 씨가 제 걸 빼앗고, 나도 윤미 씨 걸 빼앗았으니, 이제 우리 서로 주고받는 셈이네요. 그러면 이제 미안해할 것도 없네요.”이윤미는 하예진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좀 하네요.”하지만, 하예진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솔직히, 내가 두씨 그룹 계약을 성사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두씨 가문이 내 뒤에 있는 몇몇 대기업들을 봐서예요.”이윤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그게 뭐가 중요해요. 결국 계약은 예진 씨
이윤미는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다 먹지 못하면 포장하곤 하였다. 그녀는 누군가 비웃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농촌에서 자란 이윤미는 김현미의 집에서 잘 살지 못했기에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다.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런 그녀가 당연하게만 느껴졌다.십몇 분 후.이윤미는 차를 운전해 이 씨 그룹에 돌아왔다. 회사 입구에 도착하자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들은 바로 김현미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그녀가 외출한 걸 몰랐던 그들은 한참 동안 회사 입구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고개를 돌려본 정지훈은 차에 탄 사람이 이윤미인 것을 보고 김현미에게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이윤미인 것을 확인한 김현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이윤미는 차를 멈춰 세웠다.그녀의 구역이었기에 이윤미는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그들이 이 씨 그룹 구역에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이윤미는 그들이 가까이 다가서자 차창을 내리고 차가운 말투로 김현미에게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윤미야.”이윤미는 김현미가 간신히 짜낸 웃음이 우는 것보다 더 흉해 보였다.친딸이 어젯밤에 죽었는데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윤미는 차분하게 말했다.“웃기 싫으면 웃지 마세요. 당신 딸이 어젯밤에 죽었는데 지금 웃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요. 비록 윤정이는 당신 곁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당신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요. 매번 당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 있는 모든 좋은 물건을 윤정이에게 보내줬으면서요.”“윤정이에게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딸이 죽었으니, 엄마로서 슬픈 것은 당연한 거예요,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요.”수척해 보이는 김현미는 마치 열 살은 더 늙어 보였고 눈도 벌겋게 부어있었다.이윤미의 말처럼 친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윤미야...”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양모는 울먹이며 말했다.“지난날...미안했어.”이윤미는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다시 말하고 싶지
“엄마의 건강도 점점 더 나빠지셔. 매달 의사의 진료를 받으셔야 하고, 주사 맞고 약도 드셔야 하기에 돈이 많이 들어.”정지훈은 뻔뻔스럽게 그들이 이곳에 온 진정한 의도를 이윤미에게 말했다.“맞아, 나와 형은 수입이 높지 않고 또 가족도 부양해야 해.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지출을 아빠가 내셨어, 네가 돈을 벌고 나서 너도 돈을 좀 가져왔었지. 지금은 아빠가...엄마는 수입이 없으시고 너는 또 우리 집을 떠났어.”.“나와 형이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어려운데 엄마를 부양할 돈이 어디 있겠어? 엄마는 주사를 맞고 약도 드셔야 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우리도 부담하기 힘들어.”이윤미는 김현미를 바라보았다.김현미는 이윤미의 눈길을 피하며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이윤미에게 돈을 요구하러 온 것은 두 아들의 뜻이었다.사실 김현미는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미가 그들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릴 때 이윤미가 그들의 집으로 온 후 잘 대해주지 않았었다. 예전에 이윤미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미워도 돈을 벌면 생활비를 조금 주었다.나중에 진실이 드러나고 이윤미는 자신이 어릴 때 학대당한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들 가족에 대한 정이 사라졌다.남은 것은 원망과 미움뿐이었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돌아간 후 김현미는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윤미가 점점 강해지고 이은화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윤미의 강세는 이윤정의 약세를 예시한다.그렇게 된다면 이윤정은 이씨 가문에서의 삶이 점점 힘들어진다.이윤정이 다시는 가주 자리에 앉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이 일을 알게 된 김현미는 마음속으로 이윤미를 원망하고 미워했으며 그녀가 자신의 딸을 열세에 몰리게 했다고 생각했다.오늘날 이윤정이 사고로 추락해 죽은 것도 그들과 관련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이윤정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흥분해서 실수로 추락해 죽지 않았을 것이다.두 아들은 이윤정이 죽었고 그들의 희망도 사라졌기에 이윤미에게 어떻게든 돈을 달라고 해야
“비켜, 아니면 경비원 불러 끌어내라고 할 거야.”이윤미는 엄숙하게 말했다.‘나한테 기대어 피를 빨아먹으려고, 어림도 없어!’이윤미는 그 집안의 자식이 아닌 것은 물론 그 집안의 자식이었다고 하여도 그들이 마음대로 피를 빨아 먹을 수 있는 흡혈귀가 되고 싶지 않았다.“윤미야, 이렇게 무정하게 굴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는 너의 양모이고 너를 키워줬어, 너와 이씨 가문에서는 우리 집안에 양육비를 줘야 해.”이윤미는 그들에게 되물었다.“우리 이씨 가문에서 윤정이를 키워줬는데 당신들은 우리 가문에 양육비를 준 적 있어? 우리 가문에서 윤정이에게 심혈을 더 많이 기울였고, 쓴 돈도 더 많아. 두 집안끼리 애를 키우는 데 쓴 돈을 정산한다면 당신들이 되려 큰돈을 보태서 돌려줘야 할 거야.”“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 나와 윤정이를 바꾼 건 당신들의 아빠야. 당신들의 아빠가 저지른 잘못인데 누구를 원망하겠어? 지나친 욕심을 가진 당신들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지.”그들은 이윤정이 이씨 가문 후계자가 되어 이씨 가문을 물려받으면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그녀를 통제해 이씨 가문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바랐다.그들은 바둑을 아주 크게 두었다.이윤미는 이은화가 총명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전임 집사의 계략에 당했다.이윤미는 기가 막혔다.‘윤정이는 이씨 가문 사람들과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엄마는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셋 셀 테니 가지 않으면 경비원 부를 거야.”말을 마친 이윤미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윤미야, 너에게 폐를 끼쳐서 미안해.”김현미는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두 아들이 꼭 가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들도 단념할 것이다.이윤미가 십 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더 이상 그녀를 협박하지 못했다.예전에도 이윤미를 협박하지 못했던 그들이었기에 지금은 더 할 수가 없었다.이윤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들이 아이를 바꿔 쳐서 이윤미가 그 집
이은화는 가끔 정윤혁에게 물건을 보내 이윤미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다.예전에 이씨 가문 대저택에 있을 때 정윤혁은 이은화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이은화는 무조건 도움을 줄 것이다.그래서 고민을 거듭한 그들은 이윤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그러나 그들은 이윤미에게 잘해주지 않았다. 이윤미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이 단단하고 운이 좋았기 때문이고 또 이웃집 할머니와 삼촌들이 관심해 줬기에 그녀는 굶어 죽지 않았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돌아갔을 때 어린 시절 그녀를 돌봐줬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자녀들이 살아 있었기에 이윤미는 그들에게 큰 금액의 돈을 주었다.그리고 자신의 명의 아래 있는 회사에서 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어릴 때 그녀를 지켜주고 돌봐주며 먹을 것을 줬던 그들의 어머니에게 보답한 셈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키워줬잖아요! 엄마는 지금 연세도 있으시고 돈도 없는데. 윤미는 돈도 많으면서 일전 한 푼도 주려고 하지 않아요.”큰오빠인 정지훈은 불만을 터뜨렸다.작은오빠인 정현호도 불만을 터뜨리며 말했다.“윤미는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서 주지 않는다고 해요. 그러나 윤정은 우리가 가족이란걸 알면서 우리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돈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에게 일자리도 마련해주지 않았어요.”“우리에게 편안하고 수입이 높은 일자리를 마련해 줬더라면 형과 나도 매일 삼시세끼를 위해 이렇게 뛰어다니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잖아요.”김현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정이는 어릴 때부터 이씨 가문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랐어. 줄곧 자신이 후계자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우리가 진짜 가족이란 걸 알았어. 이 사실을 윤정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야.”“이 가주는 윤정이를 떠나보내기 아쉬워했어. 그래서 윤정이를 둘째 딸로 받아들였지. 윤정이는 이 가주에게 잘 보이기도 바쁠 텐데 언제 우리까지 돌볼 겨를이 있겠어?”“이젠 윤정이 유골함을 가지고 돌아가자.”자신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