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저택에는 가정부와 경호원을 제외하면 이윤미 혼자뿐이었다.어머니와 오빠 내외는 외출 중이었고 어디로 갔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두꺼운 외투를 걸친 이윤미는 방을 나섰다.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계단을 내려가며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하예진 씨, 시간 되세요? 점심 같이 드시죠.”이윤미는 시원하게 웃으며 상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덧붙였다.“노 대표님이 우빈이 데리고 예진 씨 만나러 왔다면서요? 저도 우빈이 너무 보고 싶어요. 제가 세 사람한테 밥 살 테니까 나오세요. 거절은 안 됩니다. 방 비서님한테 이미 하루 호텔로 예약해달라고 했어요. 점심 때 뵙죠.”“이게 무슨 의논이에요? 통보잖아요.”“설마 거절하실 건가요? 제가 그래도 연장자인데, 어른이 점심 먹자고 하면 동생이 따라야죠. 안 그래요?”“거절한다고 한 적 없어요. 원래 호텔에서 점심 먹으려 했는데, 이윤미 씨가 사주신다니 사양 안 할게요.”“오전엔 뭐 하셨어요?”“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이제야 일어났어요. 우빈이랑 놀 틈도 없었고요. 점심 먹고 나서 한참 놀아줘야 해요. 그나저나 이 두 부자는 언제 관성으로 돌아가요?”하예진이 자연스럽게 이윤미의 말을 정정했다.“저랑 노동명 씨 아직 결혼 안 했어요.”“그건 시간문제 아닌가요? 설마 마음 바뀌어서 노동명 씨랑 결혼 안 하실 건 아니죠?”“노동명 씨가 우빈이를 친자식처럼 챙긴다는 건 저도 알아요. 두 사람 벌써 부자지간 같더라고요.”“남자 친구도 없으면서 남의 연애사에 관심은 많으시네요. 그러지 말고 얼른 좋은 분 찾아서 형부 만들어 주세요.”이윤미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마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결혼 안 할 거거든요. 그냥 적당한 남자랑 상의해서 아이만 가질 생각이에요. 후계자만 있으면 되니까요.”하예진은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어머니께서 아시면 기절하시겠어요.”“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어머니랑 아버지도
“그러게요, 정말 부러워요. 저도 예전부터 여행 가고 싶었는데.”하예진은 주형인과 결혼한 이후로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평소 출장으로 바쁘게 오가느라 제대로 된 휴식은커녕, 짧은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현 도련님은 호영 도련님을 만나더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요.”이윤미가 감탄하며 말했다.“사랑에 빠진 고현 씨는 조금 더 여성스러워진 것 같아요.”고현에게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를 비워도 고빈이 남아 있었기에 비교적 마음 편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하지만 이윤미는 달랐다. 아직도 이씨 가문의 암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사려야 했고 출장을 가더라도 멀리 떠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길어야 오늘 떠나 내일 돌아오는 정도였다.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간 힘겹게 쌓아 올린 위엄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이윤정이 없더라도 세 명의 오빠는 여전히 그녀를 견제하고 있었고 회사에는 아직도 꺾지 못한 가시 같은 존재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그녀는 이씨 가문의 진짜 딸이었고 그들 역시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며 그녀의 노력을 인정했다.그들은 오랫동안 이씨 그룹을 위해 일해왔고 그 공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지만 결국 이씨 그룹은 이씨 가문의 것이었다.현명한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법이다.이윤미가 회사를 물려받게 되고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지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윤미 씨는 언제쯤 사랑에 빠져서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실 건가요?”이윤미는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저보다 어른이면서 이런 농담 함부로 하시네요. 자세히 보세요. 제가 얼마나 여성스러운데요. 이제 운전해야 하니 장난은 그만할게요.”“네. 난폭운전은 하지 마세요.”“알겠어요.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네요. 밖에서 운전 좀 하셨다고 어린애한테 잔소리를 듣다니요.”“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우리 아직 승부를 보지 않았잖아요.”이윤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건 형식적인 거죠. 저는 싸우고 싶지 않거든요.”“오늘은 그
이윤미는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린 뒤, 방윤림에게 물었다.“우빈이와 노동명 씨 선물은 준비되었나요?”방윤림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하는 일인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직접 운전해서 가실 건가요?”“문제라도 있나요?”방윤림은 조용히 말했다.“아가씨께서 술이라도 드시면 운전을 못 하시잖아요. 제가 모시고 가면 어떨까요? 그러면 마음껏 드실 수도 있고요.”“술은 마시지 않을 거예요. 어젯밤에 충분히 마셨고 하예진 씨도 술을 마시지 않을 겁니다. 우빈이는 아직 어리고 노동명 씨는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하예진 씨가 술을 못 마시게 할 거예요.”이윤미의 말에 방윤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윤미가 차를 몰고 먼저 출발한 뒤, 방윤림은 그녀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차에 올라 그녀를 따라갔다.30분 후, 하루 호텔에 도착했고 하예진은 우빈이를 데리고 이미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노동명은 몸이 불편해 내려오지 못한 모양이었다.이윤미는 하예진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르고 차를 세운 후, 방윤림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다가 조수석 뒤쪽 문을 열어 방윤림이 준비한 선물들을 챙기고 있었다.노동명을 위한 좋은 담배와 술, 그리고 몇 가지 영양제가 있었고 우빈이를 위한 장난감과 새 옷, 금팔찌와 장수 목걸이가 있었다.새 옷은 아마 한두 치수 크게 산 듯했다.우빈이의 정확한 사이즈를 몰랐기에 방윤림은 옷 가게 직원에게 ‘3~4살 남자아이’라고 설명하고 직원이 추천한 옷들로 구매했다.크게 사면 나중에 입혀도 되고 오래 입을 수 있지만 반면 작으면 다시 반품해야 하니 그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사실 방윤림은 처음으로 아이 옷을 사 보는 것이었기에 그런 경험이 없는 만큼 일일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예전에 노동명도 우빈이를 처음 돌볼 때는 많이 서툴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빈이에게 바람개비만 계속 사다 주었었다.우빈이가 바람개비를 좋아하긴 했지만 너무 많이 받
“자, 이모할머니가 안아줄게. 우빈이를 위해 장난감도 사고 새 옷도 사고 금팔찌도 준비했어.”이윤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하예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빈이 장난감은 이미 넘쳐나서 둘 곳도 없어요. 안 사주셔도 되는데. 옷도 너무 많아서 다 못 입어요. 애들은 금방 자라니까 옷도 금방 작아지고요.”“그 많은 장난감은 제가 산 게 아니잖아요. 처음으로 이모할머니가 되었는데 당연히 우빈이에게 선물해야죠.”그러자 하예진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빈이 옷이 많아서 아직 못 입은 것도 많을 텐데, 입기도 전에 작아졌다면 두 분 빨리 결혼하셔서 둘째 낳으시면 되겠네요. 둘째가 물려 입으면 되잖아요.”이윤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첫째는 새 옷, 둘째는 첫째가 입던 옷, 셋째와 넷째도 계속 둘째가 입던 옷으로 때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빈이 옷은 아직 새 옷이니까 둘째가 입어도 괜찮을 거예요.”하예진은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이 말을 들은 노동명은 아주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그도 사실 하예진과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고 그에게는 이미 우빈이가 있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워오면 바르게 잘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노동명 씨, 이건 노동명 씨 선물이에요.”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눈짓하자 그는 준비한 선물을 노동명에게 건넸다.노동명은 살짝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제 나이에 선물이라니요.”이윤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촌수로는 제가 어른이니까 선물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방 비서님이 좋은 담배와 술, 그리고 영양제를 준비했어요. 빨리 다리 나으셔서 하예진 씨와 결혼하셔야죠. 빨리 두 분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요.”그러자 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급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윤미 씨는 올해 스물아홉인데 남자 친구부터 만나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좋은 남성분 몇 분 소개해 드릴까요?”이윤미는 손
하예진은 아들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곧이어 노동명에게도 음식을 내밀었다.노동명의 눈빛에는 은근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그 옆에 앉은 방윤림은 자연스럽게 공용 젓가락을 들어 이윤미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그의 손길은 세심했다. 생선을 덜어줄 때는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내어 담아주었고 뼈가 있는 고기도 먼저 손질한 후 내놓았다. 해산물 역시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손질해 주었다.이윤미는 하예진과 우빈이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그런 세세한 배려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자기 접시에 좋아하는 음식이 담겨 있고 따로 뼈를 발라내거나 가시를 걱정할 필요 없이 한입 베어 물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이윤미가 국을 다 마시면 어느새 그릇에 국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으로 하예진은 이씨 가문 가주의 모습처럼 이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이윤미에게 방윤림은 그야말로 ‘만능 비서’였기에 그의 세심한 손길도 그녀는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다. 이윤미의 삶에서 방윤림은 일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을 챙겨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후, 노동명과 방윤림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예진은 아들과 이윤미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이어갔다.우빈이는 이윤미가 선물한 새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하예진은 다정하게 이윤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둘 사이에는 친밀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하예진은 이윤미를 향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윤미 씨, 전에 남자는 필요 없고 결혼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그냥 딸 하나만 낳고 싶다고 했잖아요? 제가 좋은 제안 하나 해드릴까요?”이윤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뭔데요?”“딸이 똑똑했으면 좋겠죠? 윤미 씨도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방윤림 씨는 더 뛰어난 사람이잖아요. 만약 윤미 씨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방윤림 씨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어떨까요? 두 분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엄
이윤미가 관성에 차린 가게와 식당은 모두 장사가 잘되었다.이윤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지만 매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사업의 성공에 동생 부부의 영향도 컸다.“관성에서는 하예정 부부가 윤미 씨를 보호해 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잘 되다 보니 성취감이 없을 거예요. 저는 자기 집안 회사에서도 어려움은 끝이 없고, 성과를 내도 사람들은 제가 남의 공로를 가로챘다고 말해요.”“남들이 뭐라고 하든 윤미 씨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윤미 씨만 알면 돼요.”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이런 것까지 신경 쓰면 이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어떻게 앉아요.”하예진은 이윤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힘내세.!”“우리 모두 힘내요.”두 사람은 경쟁자이지만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하예진과 이경혜는 모두 이윤미가 이씨 가문을 이끌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들은 전임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전임 이씨 가문 가주가 사고로 죽었는지, 아니면 이윤미의 어머니가 진짜로 죽였는지 밝혀내야 했다.그들은 진실을 원했다.만약 전임 이씨 가문 가주가 이윤미의 어머니에게 살해당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조상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 했다.다음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되찾을 수 있다면 되찾고, 되찾고 싶지 않다면 이윤미에게 넘겨도 괜찮았다.이경혜는 이씨 가문을 되찾아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도록 하고 싶었기에 하예진과 이윤미의 싸움은 하루아침에 결판 날 일이 아니었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을 원하지 않았지만 이씨 가문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이윤미는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기를 바라면서도 두려웠다.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이 밝혀지고 자신의 친엄마가 하예진의 외할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친척 관계였던 두 사람이 원수가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전임 이씨 가문 가주 가족은 두 딸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너무 비극적이라 만약 자신이 전임 이씨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우빈이는 여전히 추웠다.“오전에 엄마랑 노동명 아저씨랑 같이 쇼핑도 다녀왔어요.”이것이 우빈이가 거절한 주된 이유였다.이윤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모할머니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줄게.”“네, 좋아요.”우빈이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윤미는 호텔에 두세 시간 머무르다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차에 오르자, 방윤림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방 비서님, 강성에서 가장 큰 실내 놀이터로 가 주세요.”방윤림이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놀이공원에 가고 싶으신가요?”이윤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놀이기구를 타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아이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순수한 미소를 보면 상처투성이인 제 마음도 조금은 나아질 것 같거든요.”“아가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젊으신데 마치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많은 걸 겪었으니까요. 나이는 젊어도 마음은 어리지 않아요.”방윤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놀이공원에 가시면 아가씨도 한 번 신나게 놀아 보세요. 제가 같이 놀아 드릴게요.”“좋아요.”“아가씨, 안전벨트 매세요. 출발합니다.”이윤미는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고 잠시 후, 방윤림을 올려다보며 갑자기 물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방 비서님의 아이를 낳고 싶다면... 어떨 것 같아요?”막 출발하려던 방윤림은 순간적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그대로 시동을 껐다.그는 놀란 눈으로 이윤미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어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웠다.“아가씨, 오늘 점심때 술 안 드셨죠?”방윤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안 마셨어요. 정신 말짱해요. 이건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예요. 전 결혼은 할 수 없어요. 보통 여자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않아야 하거든요.”.”“아가씨께서는 충분히 좋은 남성을 만나실 수 있을 텐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죠. 아가씨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방윤림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방 비서님, 연애해 본 적 없으시죠?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뿐인데 귀까지 빨개지셨네요.”“연애라면 이윤미 씨야말로 백지나 다름없죠.”방윤림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키며 덧붙였다.“우리는 모든 것을 배우지만 감정에는 관여하지 않아요.”사랑이란 본능적인 감정이라 배울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방윤림은 다른 여성들에게는 항상 철벽을 쳤지만 이윤미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아마도 그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주인에게만 향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윤미에게만큼은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매일 함께 지내다 보니 방윤림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이윤미의 모습이 깊이 자리 잡았다.그는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물론 만약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사랑은 참 아름답죠. 하지만 사람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감정이기도 해요.”“하예정 씨와 전태윤 씨, 그리고 하예진 씨와 노동명 씨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분명 행복할 거예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아가씨도 언젠가 온 마음으로 아가씨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이윤미는 방윤림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윤림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담담하게 운전을 계속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그래도 제 곁에 있어 줄 건가요?”“아가씨,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세요? 우리 같은 사람은 한 번 주인을 섬기면 평생 모시는 법이에요.”이윤미가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든 되지 못하든 방윤림은 언제나 그녀의 곁을 평생토록 지킬 것이다.설령 이윤미가 모든 걸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그 또한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사진 속 정일범과 이윤정은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정일범의 두 동생도 종종 명지 빌리지를 찾았는데 올 때마다 크고 묵직한 짐을 들고 갔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윤정을 위해 사 온 물건들이었다.이은화는 화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윤정이 싫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이은화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윤정이 저택 안에 머무르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동안 이윤정에게 베푼 모든 것이 되려 돌아와 상처가 되었다.이윤정이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윤정은 어디까지나 남이었다. 이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사건이 터졌을 때, 만약 이윤정이 조용히 관성을 떠났다면 이은화는 비서를 통해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돈을 보내 앞날을 보장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이윤정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복수를 꿈꾸며 날을 세웠다.이은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이윤정, 난 네게 살길을 열어주려고 했어. 하지만 네가 그걸 걷어차고 스스로 지옥으로 가려 한 거야, 날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이은화는 친자식도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물며 이윤정 따위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이윤정을 제거하고도 자신에게 어떤 책임도 돌아오지 않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정일범, 너희 형제들 자꾸 여자 못 만나본 사람들처럼 굴 거야?”이은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세 아들의 행동이었다.그들은 이씨 가문을 이끌 재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절대 박대하진 않았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회사에서 돈을 빼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게다가 그들에게 골라준 아내들은 정씨 가문과도 격이 맞았다. 오히려 정씨 가문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문이었다.그들도 정씨 가문의 핏줄이었으니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정씨 가문과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야 했다.강성에서는 누구나 이씨 가문이 딸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은화의 표정이 살짝 풀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아이는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을 거야. 이제야 처음 가보는 거지.”친딸이 그 집안에서 어떤 괴롭힘과 학대를 당했는지 떠올리며 이은화는 갑자기 이윤정이 미워졌다.613하지만 이윤정은 오히려 그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윤정 부모님이 이윤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모른단 말인가?이윤정은 어릴 때부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놀이공원은 물론이고 해외여행도 셀 수 없이 많이 다녔다.하지만 이윤미는 이제야 놀이공원에 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613비서는 조용히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예전에 너무 고생하셨습니다.”그 말에는 이윤미를 향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비서는 애초부터 이윤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가짜 딸이라는 걸 몰랐기에 미래의 후계자로 여기며 억지로라도 예의를 차렸고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하지만 진짜와 가짜가 밝혀진 후에야 깨달았다. 이윤정이은화님의 친딸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싫어했던 것이라는 것을.613”그래, 그 아이는 참 힘들게 살아왔지. 하지만 그 덕에 강인한 성격을 갖게 됐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야. 이윤미는 이윤정보다 훨씬 낫다.”비서는 그저 가주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이윤미가 이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 이미 사업을 성공시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역시 이씨 가문의 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613그녀는 자신에게 불리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일어섰다.비서는 가주가 먼저 묻지 않는 이상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613”이윤정은 지금 어디에 있지?”“명지 빌리지에 있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거기에 이윤정 씨를 위한 아파트를 구매하셨습니다.”이은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613”아주 훌륭한 아들을 뒀어.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큰 도련님께서 요 며칠 그곳에서 지냈습니다.”비서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뭉치를 꺼
하예진은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손에 쥔 채로 돌아서자 우빈이와 함께 놀고 있는 노동명이 시야에 들어왔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하예진과 노동명을 놀리길 좋아했다.그녀는 우빈이와 노동명 옆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빈아, 우리 올해 설날은 동명 아저씨랑 같이 보내는 게 어때?”그러자 우빈이는 태연하게 되물었다.“그럼 우리랑 안 보내고 누구랑 보내요?”하예진은 할 말을 잃었다.아들은 이미 노동명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고 어느새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하예진은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노동명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설 전, 구청에서 휴가 내기 전에 제가 관성으로 돌아갈 테니까 우리 먼저 혼인 신고하고 동명 씨 다리 괜찮아지면 그때 결혼식 올리는 거 어때요?”하지만 노동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예진아, 나는 몰래 혼인 신고를 하고 싶지 않아. 정식으로 너에게 청혼하고 네가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혼인 신고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지금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순 있지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건 아직 어렵겠지.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해. 올해 안에는 힘들겠지만 내년 상반기에는 무조건 가능할 거야.”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아무리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해도 그때까지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어려울 터였다.하예진을 조금 더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노동명은 그녀에게 조금의 서운함도 주고 싶지 않았다.남들이 가질 수 있는 건 그녀도 당연히 가질 것이고 그녀가 가진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하예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국 이혼녀예요. 재혼인 만큼 많은 절차는 생략해도 괞찮아요.”“아니, 난 네가 몇 번 결혼했는지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나와 결혼하면, 그 순간부터 넌 내게 평생 소중히 여기며 함께할 사람이 되는 거야. 난 네가 조금의 서운함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씨 가문의 가주가 수십 년 동안 그를 찾지 않았을 리 없다.“내가 전태윤 씨에게 말해서 소씨 가문 쪽에 연락할게. 거기서 사람을 보내 이씨 가문의 가주를 미행하게 하면 돼. 소씨 가문 쪽 사람들은 이런 일에 능숙하잖아.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니까, 우리 쪽 사람들보다 들키지 않고 더 능숙하게 잘 해낼 거야.”만약 이씨 가문의 가주가 정말로 전임 가주의 비서를 만나러 간다면 미행당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일반 탐정이나 경호원이 뒤를 쫓으면 금방 들킬 게 뻔했다.그리고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윤미가 행적을 누설했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이 일은 오직 친딸에게만 전해진 것이었다.“네, 그럼 큰이모, 빨리 전태윤 씨한테 말해줘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 시켜 미행하거나 조사하지도 않을 거예요.”“그래,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일단 모르는 척해야 해.”“이건 어쩌면 이씨 가문의 가주가 이윤미를 시험하는 걸 수도 있어. 친딸이라고 해도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이경혜는 이씨 가문의 가주가 이윤미를 시험하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이윤미가 친딸인 건 사실이지만 그의 곁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양심 있고 올곧은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이씨 가문의 가주는 친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만약 이윤미가 이씨 가문의 가주가 언니를 죽였다는 증거를 손에 넣는다면 높은 확률로 정의를 택하고 주저 없이 직접 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낼 사람이었다.하예진은 그 생각까지 미처 닿지 못하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럼 이윤미 씨 지금 위험한 거 아니에요?”“이윤미는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발설하지 않았어. 그러니 괜찮을 거야.”이경혜는 하예진을 안심시켰다.“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고 하잖아. 이모에게는 딸이 이윤미 하나뿐인데 아무리 독하더라도 딸을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아마 후계자가 되는 걸 막으려 하겠지. 그러니까 일단 우린 아무것도 하지 말자.”이경혜가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그럼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죠. 아가씨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방윤림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방 비서님, 연애해 본 적 없으시죠?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뿐인데 귀까지 빨개지셨네요.”“연애라면 이윤미 씨야말로 백지나 다름없죠.”방윤림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키며 덧붙였다.“우리는 모든 것을 배우지만 감정에는 관여하지 않아요.”사랑이란 본능적인 감정이라 배울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방윤림은 다른 여성들에게는 항상 철벽을 쳤지만 이윤미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아마도 그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주인에게만 향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윤미에게만큼은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매일 함께 지내다 보니 방윤림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이윤미의 모습이 깊이 자리 잡았다.그는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물론 만약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사랑은 참 아름답죠. 하지만 사람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감정이기도 해요.”“하예정 씨와 전태윤 씨, 그리고 하예진 씨와 노동명 씨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분명 행복할 거예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아가씨도 언젠가 온 마음으로 아가씨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이윤미는 방윤림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윤림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담담하게 운전을 계속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그래도 제 곁에 있어 줄 건가요?”“아가씨,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세요? 우리 같은 사람은 한 번 주인을 섬기면 평생 모시는 법이에요.”이윤미가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든 되지 못하든 방윤림은 언제나 그녀의 곁을 평생토록 지킬 것이다.설령 이윤미가 모든 걸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그 또한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우빈이는 여전히 추웠다.“오전에 엄마랑 노동명 아저씨랑 같이 쇼핑도 다녀왔어요.”이것이 우빈이가 거절한 주된 이유였다.이윤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모할머니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줄게.”“네, 좋아요.”우빈이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윤미는 호텔에 두세 시간 머무르다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차에 오르자, 방윤림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방 비서님, 강성에서 가장 큰 실내 놀이터로 가 주세요.”방윤림이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놀이공원에 가고 싶으신가요?”이윤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놀이기구를 타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아이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순수한 미소를 보면 상처투성이인 제 마음도 조금은 나아질 것 같거든요.”“아가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젊으신데 마치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많은 걸 겪었으니까요. 나이는 젊어도 마음은 어리지 않아요.”방윤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놀이공원에 가시면 아가씨도 한 번 신나게 놀아 보세요. 제가 같이 놀아 드릴게요.”“좋아요.”“아가씨, 안전벨트 매세요. 출발합니다.”이윤미는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고 잠시 후, 방윤림을 올려다보며 갑자기 물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방 비서님의 아이를 낳고 싶다면... 어떨 것 같아요?”막 출발하려던 방윤림은 순간적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그대로 시동을 껐다.그는 놀란 눈으로 이윤미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어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웠다.“아가씨, 오늘 점심때 술 안 드셨죠?”방윤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안 마셨어요. 정신 말짱해요. 이건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예요. 전 결혼은 할 수 없어요. 보통 여자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않아야 하거든요.”.”“아가씨께서는 충분히 좋은 남성을 만나실 수 있을 텐데요.”“
이윤미가 관성에 차린 가게와 식당은 모두 장사가 잘되었다.이윤미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지만 매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사업의 성공에 동생 부부의 영향도 컸다.“관성에서는 하예정 부부가 윤미 씨를 보호해 주니까 무슨 일을 해도 잘 되다 보니 성취감이 없을 거예요. 저는 자기 집안 회사에서도 어려움은 끝이 없고, 성과를 내도 사람들은 제가 남의 공로를 가로챘다고 말해요.”“남들이 뭐라고 하든 윤미 씨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윤미 씨만 알면 돼요.”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이런 것까지 신경 쓰면 이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 어떻게 앉아요.”하예진은 이윤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힘내세.!”“우리 모두 힘내요.”두 사람은 경쟁자이지만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하예진과 이경혜는 모두 이윤미가 이씨 가문을 이끌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들은 전임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전임 이씨 가문 가주가 사고로 죽었는지, 아니면 이윤미의 어머니가 진짜로 죽였는지 밝혀내야 했다.그들은 진실을 원했다.만약 전임 이씨 가문 가주가 이윤미의 어머니에게 살해당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조상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 했다.다음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되찾을 수 있다면 되찾고, 되찾고 싶지 않다면 이윤미에게 넘겨도 괜찮았다.이경혜는 이씨 가문을 되찾아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도록 하고 싶었기에 하예진과 이윤미의 싸움은 하루아침에 결판 날 일이 아니었다.이윤미는 이씨 가문을 원하지 않았지만 이씨 가문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이윤미는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기를 바라면서도 두려웠다. 하예진이 이씨 가문을 이끌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실이 밝혀지고 자신의 친엄마가 하예진의 외할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친척 관계였던 두 사람이 원수가 될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전임 이씨 가문 가주 가족은 두 딸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너무 비극적이라 만약 자신이 전임 이씨
하예진은 아들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곧이어 노동명에게도 음식을 내밀었다.노동명의 눈빛에는 은근한 애정이 배어 있었다.그 옆에 앉은 방윤림은 자연스럽게 공용 젓가락을 들어 이윤미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그의 손길은 세심했다. 생선을 덜어줄 때는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내어 담아주었고 뼈가 있는 고기도 먼저 손질한 후 내놓았다. 해산물 역시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손질해 주었다.이윤미는 하예진과 우빈이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 그런 세세한 배려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자기 접시에 좋아하는 음식이 담겨 있고 따로 뼈를 발라내거나 가시를 걱정할 필요 없이 한입 베어 물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이윤미가 국을 다 마시면 어느새 그릇에 국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으로 하예진은 이씨 가문 가주의 모습처럼 이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이윤미에게 방윤림은 그야말로 ‘만능 비서’였기에 그의 세심한 손길도 그녀는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다. 이윤미의 삶에서 방윤림은 일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을 챙겨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후, 노동명과 방윤림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예진은 아들과 이윤미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이어갔다.우빈이는 이윤미가 선물한 새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하예진은 다정하게 이윤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둘 사이에는 친밀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하예진은 이윤미를 향해 장난스럽게 속삭였다.“윤미 씨, 전에 남자는 필요 없고 결혼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그냥 딸 하나만 낳고 싶다고 했잖아요? 제가 좋은 제안 하나 해드릴까요?”이윤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되물었다.“뭔데요?”“딸이 똑똑했으면 좋겠죠? 윤미 씨도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방윤림 씨는 더 뛰어난 사람이잖아요. 만약 윤미 씨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방윤림 씨의 도움을 조금만 받으면 어떨까요? 두 분의 유전자가 합쳐지면 엄
“자, 이모할머니가 안아줄게. 우빈이를 위해 장난감도 사고 새 옷도 사고 금팔찌도 준비했어.”이윤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하예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빈이 장난감은 이미 넘쳐나서 둘 곳도 없어요. 안 사주셔도 되는데. 옷도 너무 많아서 다 못 입어요. 애들은 금방 자라니까 옷도 금방 작아지고요.”“그 많은 장난감은 제가 산 게 아니잖아요. 처음으로 이모할머니가 되었는데 당연히 우빈이에게 선물해야죠.”그러자 하예진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빈이 옷이 많아서 아직 못 입은 것도 많을 텐데, 입기도 전에 작아졌다면 두 분 빨리 결혼하셔서 둘째 낳으시면 되겠네요. 둘째가 물려 입으면 되잖아요.”이윤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첫째는 새 옷, 둘째는 첫째가 입던 옷, 셋째와 넷째도 계속 둘째가 입던 옷으로 때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빈이 옷은 아직 새 옷이니까 둘째가 입어도 괜찮을 거예요.”하예진은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이 말을 들은 노동명은 아주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그도 사실 하예진과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고 그에게는 이미 우빈이가 있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워오면 바르게 잘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노동명 씨, 이건 노동명 씨 선물이에요.”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눈짓하자 그는 준비한 선물을 노동명에게 건넸다.노동명은 살짝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제 나이에 선물이라니요.”이윤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촌수로는 제가 어른이니까 선물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방 비서님이 좋은 담배와 술, 그리고 영양제를 준비했어요. 빨리 다리 나으셔서 하예진 씨와 결혼하셔야죠. 빨리 두 분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요.”그러자 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저희는 급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윤미 씨는 올해 스물아홉인데 남자 친구부터 만나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좋은 남성분 몇 분 소개해 드릴까요?”이윤미는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