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우빈이는 여전히 추웠다.“오전에 엄마랑 노동명 아저씨랑 같이 쇼핑도 다녀왔어요.”이것이 우빈이가 거절한 주된 이유였다.이윤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모할머니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줄게.”“네, 좋아요.”우빈이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윤미는 호텔에 두세 시간 머무르다가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차에 오르자, 방윤림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방 비서님, 강성에서 가장 큰 실내 놀이터로 가 주세요.”방윤림이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놀이공원에 가고 싶으신가요?”이윤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놀이기구를 타지는 않을 거예요. 그냥 아이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순수한 미소를 보면 상처투성이인 제 마음도 조금은 나아질 것 같거든요.”“아가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젊으신데 마치 세상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많은 걸 겪었으니까요. 나이는 젊어도 마음은 어리지 않아요.”방윤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놀이공원에 가시면 아가씨도 한 번 신나게 놀아 보세요. 제가 같이 놀아 드릴게요.”“좋아요.”“아가씨, 안전벨트 매세요. 출발합니다.”이윤미는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고 잠시 후, 방윤림을 올려다보며 갑자기 물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방 비서님의 아이를 낳고 싶다면... 어떨 것 같아요?”막 출발하려던 방윤림은 순간적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그대로 시동을 껐다.그는 놀란 눈으로 이윤미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어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웠다.“아가씨, 오늘 점심때 술 안 드셨죠?”방윤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안 마셨어요. 정신 말짱해요. 이건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예요. 전 결혼은 할 수 없어요. 보통 여자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않아야 하거든요.”.”“아가씨께서는 충분히 좋은 남성을 만나실 수 있을 텐데요.”“
“그럼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죠. 아가씨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방윤림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방 비서님, 연애해 본 적 없으시죠?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뿐인데 귀까지 빨개지셨네요.”“연애라면 이윤미 씨야말로 백지나 다름없죠.”방윤림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키며 덧붙였다.“우리는 모든 것을 배우지만 감정에는 관여하지 않아요.”사랑이란 본능적인 감정이라 배울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방윤림은 다른 여성들에게는 항상 철벽을 쳤지만 이윤미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아마도 그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주인에게만 향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윤미에게만큼은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다.매일 함께 지내다 보니 방윤림의 마음속에는 어느새 이윤미의 모습이 깊이 자리 잡았다.그는 아무 보답도 바라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물론 만약 보답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사랑은 참 아름답죠. 하지만 사람을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감정이기도 해요.”“하예정 씨와 전태윤 씨, 그리고 하예진 씨와 노동명 씨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분명 행복할 거예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아가씨도 언젠가 온 마음으로 아가씨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거예요.”이윤미는 방윤림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윤림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담담하게 운전을 계속했다.“방 비서님, 만약 제가 이씨 가문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그래도 제 곁에 있어 줄 건가요?”“아가씨,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세요? 우리 같은 사람은 한 번 주인을 섬기면 평생 모시는 법이에요.”이윤미가 이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든 되지 못하든 방윤림은 언제나 그녀의 곁을 평생토록 지킬 것이다.설령 이윤미가 모든 걸 잃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그 또한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씨 가문의 가주가 수십 년 동안 그를 찾지 않았을 리 없다.“내가 전태윤 씨에게 말해서 소씨 가문 쪽에 연락할게. 거기서 사람을 보내 이씨 가문의 가주를 미행하게 하면 돼. 소씨 가문 쪽 사람들은 이런 일에 능숙하잖아.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니까, 우리 쪽 사람들보다 들키지 않고 더 능숙하게 잘 해낼 거야.”만약 이씨 가문의 가주가 정말로 전임 가주의 비서를 만나러 간다면 미행당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일반 탐정이나 경호원이 뒤를 쫓으면 금방 들킬 게 뻔했다.그리고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윤미가 행적을 누설했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이 일은 오직 친딸에게만 전해진 것이었다.“네, 그럼 큰이모, 빨리 전태윤 씨한테 말해줘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 시켜 미행하거나 조사하지도 않을 거예요.”“그래,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일단 모르는 척해야 해.”“이건 어쩌면 이씨 가문의 가주가 이윤미를 시험하는 걸 수도 있어. 친딸이라고 해도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이경혜는 이씨 가문의 가주가 이윤미를 시험하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이윤미가 친딸인 건 사실이지만 그의 곁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녀는 양심 있고 올곧은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이씨 가문의 가주는 친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만약 이윤미가 이씨 가문의 가주가 언니를 죽였다는 증거를 손에 넣는다면 높은 확률로 정의를 택하고 주저 없이 직접 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낼 사람이었다.하예진은 그 생각까지 미처 닿지 못하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럼 이윤미 씨 지금 위험한 거 아니에요?”“이윤미는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발설하지 않았어. 그러니 괜찮을 거야.”이경혜는 하예진을 안심시켰다.“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고 하잖아. 이모에게는 딸이 이윤미 하나뿐인데 아무리 독하더라도 딸을 해치지는 않을 거야. 아마 후계자가 되는 걸 막으려 하겠지. 그러니까 일단 우린 아무것도 하지 말자.”이경혜가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하예진은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손에 쥔 채로 돌아서자 우빈이와 함께 놀고 있는 노동명이 시야에 들어왔다.주변 사람들은 모두 하예진과 노동명을 놀리길 좋아했다.그녀는 우빈이와 노동명 옆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우빈아, 우리 올해 설날은 동명 아저씨랑 같이 보내는 게 어때?”그러자 우빈이는 태연하게 되물었다.“그럼 우리랑 안 보내고 누구랑 보내요?”하예진은 할 말을 잃었다.아들은 이미 노동명을 가족처럼 여기고 있었고 어느새 서로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하예진은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노동명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설 전, 구청에서 휴가 내기 전에 제가 관성으로 돌아갈 테니까 우리 먼저 혼인 신고하고 동명 씨 다리 괜찮아지면 그때 결혼식 올리는 거 어때요?”하지만 노동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예진아, 나는 몰래 혼인 신고를 하고 싶지 않아. 정식으로 너에게 청혼하고 네가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혼인 신고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지금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순 있지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건 아직 어렵겠지.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해. 올해 안에는 힘들겠지만 내년 상반기에는 무조건 가능할 거야.”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아무리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해도 그때까지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어려울 터였다.하예진을 조금 더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무엇보다 노동명은 그녀에게 조금의 서운함도 주고 싶지 않았다.남들이 가질 수 있는 건 그녀도 당연히 가질 것이고 그녀가 가진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하예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결국 이혼녀예요. 재혼인 만큼 많은 절차는 생략해도 괞찮아요.”“아니, 난 네가 몇 번 결혼했는지 신경 쓰지 않아. 네가 나와 결혼하면, 그 순간부터 넌 내게 평생 소중히 여기며 함께할 사람이 되는 거야. 난 네가 조금의 서운함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이은화의 표정이 살짝 풀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아이는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가본 적이 없었을 거야. 이제야 처음 가보는 거지.”친딸이 그 집안에서 어떤 괴롭힘과 학대를 당했는지 떠올리며 이은화는 갑자기 이윤정이 미워졌다.613하지만 이윤정은 오히려 그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윤정 부모님이 이윤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모른단 말인가?이윤정은 어릴 때부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놀이공원은 물론이고 해외여행도 셀 수 없이 많이 다녔다.하지만 이윤미는 이제야 놀이공원에 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613비서는 조용히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예전에 너무 고생하셨습니다.”그 말에는 이윤미를 향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비서는 애초부터 이윤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녀가 가짜 딸이라는 걸 몰랐기에 미래의 후계자로 여기며 억지로라도 예의를 차렸고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하지만 진짜와 가짜가 밝혀진 후에야 깨달았다. 이윤정이은화님의 친딸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싫어했던 것이라는 것을.613”그래, 그 아이는 참 힘들게 살아왔지. 하지만 그 덕에 강인한 성격을 갖게 됐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야. 이윤미는 이윤정보다 훨씬 낫다.”비서는 그저 가주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이윤미가 이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 이미 사업을 성공시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역시 이씨 가문의 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613그녀는 자신에게 불리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일어섰다.비서는 가주가 먼저 묻지 않는 이상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613”이윤정은 지금 어디에 있지?”“명지 빌리지에 있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거기에 이윤정 씨를 위한 아파트를 구매하셨습니다.”이은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613”아주 훌륭한 아들을 뒀어.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큰 도련님께서 요 며칠 그곳에서 지냈습니다.”비서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사진 한 뭉치를 꺼
사진 속 정일범과 이윤정은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정일범의 두 동생도 종종 명지 빌리지를 찾았는데 올 때마다 크고 묵직한 짐을 들고 갔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윤정을 위해 사 온 물건들이었다.이은화는 화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윤정이 싫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이은화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윤정이 저택 안에 머무르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동안 이윤정에게 베푼 모든 것이 되려 돌아와 상처가 되었다.이윤정이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윤정은 어디까지나 남이었다. 이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사건이 터졌을 때, 만약 이윤정이 조용히 관성을 떠났다면 이은화는 비서를 통해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돈을 보내 앞날을 보장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이윤정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복수를 꿈꾸며 날을 세웠다.이은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이윤정, 난 네게 살길을 열어주려고 했어. 하지만 네가 그걸 걷어차고 스스로 지옥으로 가려 한 거야, 날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이은화는 친자식도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물며 이윤정 따위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이윤정을 제거하고도 자신에게 어떤 책임도 돌아오지 않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정일범, 너희 형제들 자꾸 여자 못 만나본 사람들처럼 굴 거야?”이은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세 아들의 행동이었다.그들은 이씨 가문을 이끌 재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절대 박대하진 않았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회사에서 돈을 빼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게다가 그들에게 골라준 아내들은 정씨 가문과도 격이 맞았다. 오히려 정씨 가문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문이었다.그들도 정씨 가문의 핏줄이었으니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정씨 가문과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야 했다.강성에서는 누구나 이씨 가문이 딸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장 어린 두 아이만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셋째의 자녀들이었는데 평소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셋째 며느리의 친정이 유치원과 가까웠기 때문에 아이들은 친정에서 머물며 유치원을 다니는 게 훨씬 수월했다.어린 두 손주는 친정에서 생활했고 이은화는 매달 빠짐없이 손주들의 생활비를 보냈다. “큰 며느리가 돌아오면 서재로 오라고 해.”“네, 가주님. 곧 식사 시간입니다.”집사가 조심스럽게 알렸고 이은화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입맛이 없구나.”남편도, 자식들도 곁에 없는 밥상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란 그저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 일일 뿐이었다.게다가 마음도 편치 않았기에 애써 먹고 싶지도 않았다.“가주님, 점심도 거의 안 드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세요.”“안 먹겠다니까.”딱 잘라 말하고 이은화는 내선 전화를 끊었다.그 모습에 집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윤미가 집으로 돌아왔다.그녀를 데려다준 건 방윤림이었다.그녀는 한 손에는 커다란 솜사탕을, 다른 손에는 엿장수 엿 두 개를 들고 있었고 방윤림의 차는 이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곧장 들어와 본채 앞에 멈춰 섰다.“아가씨, 도착했습니다.”운전석에 앉은 방윤림이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실내 놀이터에서 몇 시간 동안 실컷 놀고 난 이윤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이었다.어릴 적, 놀이공원은커녕 동물원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양부모는 단 한 번도 이윤미를 데리고 나들이를 간 적이 없었고 늘 친아들만 데리고 다녔기에 이윤미는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야 하나씩 해 나가는 중이었다.아이들이 좋아하는 솜사탕도 사 먹고 엿장수 엿도 사서 손에 쥐었다.“들어와서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갈래요? 아니면 저녁 먹고 가요.”이윤미가 물었다.방윤림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저는 들어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 돼요. 괜찮습니다.”그가 시선을 돌리자, 마당 한쪽에 주차된 이은화의 전용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이은화가
“아가씨, 아직도 그런 걸 드세요?”이윤미는 되물었다.“왜요? 이런 거 먹으면 안 돼요?”“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잖아요.”“저는 어른 아이예요.”집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세요?”집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가씨, 가주님께서 점심도 조금밖에 안 드셨는데 저녁도 드시기 싫다고 하시네요. 아가씨가 돌아오셨으니 위층에 올라가서 가주님을 설득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셔야죠.”“엄마가 입맛이 없으시다고요?”“네, 가주님께서 그러셨습니다.”“누가 다녀갔어요?”이윤미가 물었다.“가주님의 비서가 다녀갔고 비서가 떠난 뒤 가주님께서 저녁을 드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기분이 상하셔서 식사가 안 넘어가시는 것 같아요. 알겠어요. 위층에 올라가 볼게요. 엄마는 서재에 계시죠?”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재에 계십니다. 그리고 큰 사모님께서 돌아오시면 위층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 가주님께 음식을 가져다드릴까요?”‘큰 형수님과 관련된 일인가?'문득 이윤정이 큰오빠를 유혹하려 한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이미 행동을 취했고 성공한 걸까?’‘그렇다면 큰오빠는 너무 쉽게 넘어간 게 아닐까?’“음식은 준비해 주세요. 저는 먼저 올라가서 엄마한테 여쭤볼게요. 나중에 드시겠다고 하시면 가져다드릴게요.”“네, 알겠습니다.”이윤미는 솜사탕과 엿장수 엿을 들고 위층으로 향했다.곧 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한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다른 손으로 계속 솜사탕을 떼어 먹었다.솜사탕은 너무 달았는데 맛있다고 하긴 어려운 단맛이었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과 오빠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늘 동경했었지만 직접 사 먹을 수는 없었다.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되었지만 바쁜 생활 속에서 솜사탕을 사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그런데 오늘 오후 놀이공원에서 커다란 솜사탕을 파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하나 사서 집에 가져왔지만 정작 입에 넣어 보니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하지만
무엇보다 시부모님은 이윤정을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했고 심지어 이윤미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이씨 가문에 시집와서 큰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시어머니가 이윤정을 그토록 아꼈으니 조윤은 마음속으로 불편해도 겉으로는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됐어.”이은화는 며느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예전에 이윤정을 너무 아꼈어.”이 큰 저택에서는 모두가 이은화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먼저 이은화의 잘못이었다.조윤은 조용히 말했다.“어머님은 윤정이가 가짜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아끼신 거잖아요. 저도 엄마가 된 사람이고 딸이 하나뿐이라,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이은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들은 학교까지 잘 바래다줬어?”그녀는 손주들을 무척 아꼈다.사실, 이윤미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손녀를 키울 생각도 했었다. 처음엔 그녀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이씨 가문에서는 가주에게 딸이 없으면 손녀를 돌봐야했다. 가주 자리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네, 다 잘 도착했어요.”“아이들 성적은 어때?”조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 중간 정도예요.”이은화는 며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조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덧붙였다.“아이들 성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머리는 똑똑해요. 절대 멍청한 애들이 아니에요.”이은화는 한숨을 쉬었다.“아들이 바람피웠으니, 난 네 편에 있기로 했다. 네가 뭘 하든, 어떻게 화내든, 난 네 편이야.”그녀는 다시 아들의 외도 이야기를 꺼냈다.손주들이 여러 명 있지만 모두 성적이 썩 좋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키우려 했던 장손녀조차 마찬가지였다.아마도 역대 가주들이 딸을 낳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아들도 후손이고 손녀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들들은 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했고 손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맙습니다, 어머님.”시어머니의 지지를
이윤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조윤을 바라보며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조윤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사진? 누구의 사진일까?’“형수님, 빨리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요.”이윤미는 조용히 재촉하며 자리를 떴다.조윤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쳐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조윤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들어서자 바닥에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고 위엄 있는 시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손에 사탕 엿을 들고 조용히 먹고 있었다.조윤은 순간 당황했다. 위엄 넘치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사탕 엿을 먹고 있다니. 아마도 작은 시누이가 사다 준 것이 분명했다.이은화는 며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지막 사탕을 다 먹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바닥에 있는 사진들 모두 주워.”“네, 어머님.”큰며느리는 서둘러 다가가 들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놓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사진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조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분노가 치솟았다.사진 속 인물은 남편 정일범과 작은 시누이 이윤정이었다. 아니, 이제는 작은 시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여자였다. 이미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몸이니 그냥 막된 여자일 뿐이었다.“어머님!”조윤은 화가 치밀어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어머님, 일범 씨랑 저 막된 여자를 보세요. 둘이...”조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남편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과거, 남편이 외도했을 때, 시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난 후 관계를 정리했다고 믿었다.조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외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씨 가문 큰며느리 자리를 절대 다른
이윤정과 정군호의 일 이후로, 이은화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예전에는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칠십 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오십 대 중반이라 해도 손색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팔십이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이윤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모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어. 맞아, 나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바람을 피운 적은 없어. 그건 다 과거의 일이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잖아? 네 아버지도 이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곁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해. 이씨 가문에 들어온 후,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어. 그런데 감히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이윤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엄마,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분, 분명 엄청난 분이겠죠?”“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네 아버지보다 백 배는 뛰어나. 엄마가 며칠 후에 먼 여행을 떠나는데, 만나러 간다던 옛 친구가 바로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이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데, 아직도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남아 있는 감정으로 보면 그 남자는 이은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큰언니만 있을 테니까.하지만 남아 있는 증오로 본다면 이은화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그는 기억할 것이다. 그를 살아 있게 만든 것은 이은화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었으니까.“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가주님, 큰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서재 밖에서 집사가 말하자 이은화는 딸에게 말했다.“윤미야, 너는 먼저 나가거라. 아직 밥 안 먹었다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먹고 와. 엄마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고.”“엄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몸 상하면 안 돼요.”이윤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
이윤미가 다시 사진을 집어 들려 하자, 이은화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사진들 보지 마. 눈만 버려.”“저 곧 서른이에요. 봐도 괜찮아요. 하지만 솜사탕이랑 사탕 엿은 다 먹고 볼게요. 혹시 토할 수도 있으니까.”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엄마, 저 방금 힐끗 봤는데, 사진이 이렇게 선명하게 찍힌 걸 보니 이윤정이 일부러 그런 것 같아요. 창문을 열어두고 누군가 몰래 찍도록 한 거죠. 아마도 엄마가 자기 뒤를 캘 거라는 걸 예상하고 일부러 선명하게 찍히게 만든 거 아닐까요?”이윤미는 이은화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죄다 꽁꽁 숨기잖아요. 이윤정은 일부러 들키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복수하고 싶으니까. 만약 몰래 했다면 엄마는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예요.”이은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의든 아니든, 이런 짓을 벌였으니 용서할 수 없어. 네 아버지는 아직도 이윤정을 잊지 못하시는 것 같구나.”이은화는 분노에 차 말했다.“나는 이윤정이 이런 사람이 될 줄 몰랐어. 스무 해 넘게 아끼고 사랑했는데... 예전엔 이윤정이 내 친딸이 아니란 걸 모르고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어. 물론, 나랑 닮은 구석이 별로 없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키웠는데 늘 기대에 못 미쳐서 나는 내가 물려준 유전자가 문제라고만 생각했어. 우리 집안 여자들은 다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던 거야.”이은화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했다.“처음부터 내쫓아야 했어. 우리 집에 둬선 안 됐어. 엄마가 잘못했어.”이윤미가 조용히 말했다.“엄마가 그렇게 하신 것도 이해해요. 어쨌든 20년 넘게 키우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모녀의 정이 사라질 수는 없죠.”“윤미야,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겉으로 잘해주지 못했어. 엄마 많이 원망했니?”이윤미는 솜사탕을 반쯤 먹다 말고 입가에 묻은 설탕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이은화는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
“네 작은 이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나날이 흐려지더니 결국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그렇게 가문의 모든 짐을 내가 지게 됐지.”이윤미는 어머니가 큰이모와 작은이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어머니 자매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어머니의 표정이 이토록 복잡한 걸 보면 큰이모와 작은이모의 죽음이 어머니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묻는다 한들 어머니가 대답해 줄 리 없었다.오히려 화를 내며 친딸인 자신조차 믿지 않는다며 꾸짖을 것이다.“엄마, 큰이모랑 작은이모 사진 있어요?”이윤미는 엿사탕을 천천히 씹으며 자연스레 물었다.“엄마가 예전에 하예진은 큰이모랑 많이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전 큰이모 사진을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외손녀가 외할머니를 닮으면 얼마나 닮을 수 있겠나 깊었어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전엔 사진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 망가져서 결국 버렸어. 지금은 내 손에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하예진은 큰이모를 좀 더 닮았어. 하예진은 아무래도 어머니를 많이 빼닮은 것 같아. 그 애 엄마도 어릴 때 큰언니랑 많이 닮았었거든. 경혜는 아버지를 닮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 경혜를 보면 옛날 언니 모습이 떠오르더라. 말투며 행동,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말이야.”잠시 말을 멈춘 이은화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만약 큰언니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경혜가 앉아 있었겠지. 그랬다면 우리 이씨 그룹도 전성기를 유지했을 거야. 난 큰언니나 이경혜만큼 뛰어나지 못해.”이은화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작은조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그 아이들도 뛰어나긴 하지만, 얼마나 능력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그때, 이은화는 돌
혹시 이윤정이 창문과 커튼을 일부러 열어두어 사람들이 보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몰래 하는 게 무슨 복수란 말인가? 모두가 알아야만 이씨 가문을 향한 진정한 복수가 되지 않을까?“엄마, 식사를 아직 안 하셨다고 하던데, 무슨 일 있어요? 저도 안 먹었어요. 저랑 같이 먹어요.”이윤미는 맞은편에 앉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엿 하나를 건넸다.“엄마, 엿장수 엿 샀어요. 드셔 보세요. 솜사탕은 한 개만 샀는데, 벌써 먹었어요. 그건 못 드려요.”이은화는 딸이 내민 엿을 보다가 손에 들린 솜사탕을 힐끗 바라보았다.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분홍색이었다.딸은 이제 스물을 넘겨 곧 서른인데, 아직도 이런 걸 좋아하다니.다른 사람이야 뭘 먹든 말든 관심 없었지만 딸은 이씨 가문의 후계자다.“왜 이런 걸 사 먹었니?”집사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며 눈살을 찌푸리자 이윤미가 웃으며 대답했다.“어릴 때, 남들이 먹는 걸 보고 부러웠어요. 엄청 맛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런 솜사탕을 자주 볼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계속 못 먹었죠. 그런데 오늘 오후 놀이공원에서 딱 보이길래 사 먹어 봤어요.”이은화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딸은 타고난 천재였다. 그런데 이윤정의 친아버지 때문에 고작 솜사탕 하나도 제대로 못 먹고 남들 것만 부러워해야 했던 걸까?이은화는 스무 해가 넘도록 이윤정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자신의 남편과 얽혔고 이제는 아들까지 유혹해 복수를 감행하고 있었다.그 생각이 미치자 이윤정에 대한 증오는 더욱 깊어졌다.그럼에도 딸이 내민 것을 받아 들고 물었다.“솜사탕, 맛있었니?”이윤미는 커다란 한입을 베어 물었다. 그 바람에 솜사탕 조각이 입가에 묻고 하얀 설탕 결정이 얼굴에 달라붙었다.“어휴, 너 좀 봐. 얼굴이 엉망이 되었잖아.”이은화는 혀를 차며 휴지를 건넸다.“고양이 얼굴 같네.”이윤미는 쿡쿡 웃으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너무 달아서 맛없어요.
“아가씨, 아직도 그런 걸 드세요?”이윤미는 되물었다.“왜요? 이런 거 먹으면 안 돼요?”“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잖아요.”“저는 어른 아이예요.”집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세요?”집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가씨, 가주님께서 점심도 조금밖에 안 드셨는데 저녁도 드시기 싫다고 하시네요. 아가씨가 돌아오셨으니 위층에 올라가서 가주님을 설득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셔야죠.”“엄마가 입맛이 없으시다고요?”“네, 가주님께서 그러셨습니다.”“누가 다녀갔어요?”이윤미가 물었다.“가주님의 비서가 다녀갔고 비서가 떠난 뒤 가주님께서 저녁을 드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기분이 상하셔서 식사가 안 넘어가시는 것 같아요. 알겠어요. 위층에 올라가 볼게요. 엄마는 서재에 계시죠?”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재에 계십니다. 그리고 큰 사모님께서 돌아오시면 위층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 가주님께 음식을 가져다드릴까요?”‘큰 형수님과 관련된 일인가?'문득 이윤정이 큰오빠를 유혹하려 한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이미 행동을 취했고 성공한 걸까?’‘그렇다면 큰오빠는 너무 쉽게 넘어간 게 아닐까?’“음식은 준비해 주세요. 저는 먼저 올라가서 엄마한테 여쭤볼게요. 나중에 드시겠다고 하시면 가져다드릴게요.”“네, 알겠습니다.”이윤미는 솜사탕과 엿장수 엿을 들고 위층으로 향했다.곧 서재 문 앞에 도착하자 한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다른 손으로 계속 솜사탕을 떼어 먹었다.솜사탕은 너무 달았는데 맛있다고 하긴 어려운 단맛이었다. 어릴 적, 다른 아이들과 오빠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늘 동경했었지만 직접 사 먹을 수는 없었다.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되었지만 바쁜 생활 속에서 솜사탕을 사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그런데 오늘 오후 놀이공원에서 커다란 솜사탕을 파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하나 사서 집에 가져왔지만 정작 입에 넣어 보니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하지만
가장 어린 두 아이만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셋째의 자녀들이었는데 평소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셋째 며느리의 친정이 유치원과 가까웠기 때문에 아이들은 친정에서 머물며 유치원을 다니는 게 훨씬 수월했다.어린 두 손주는 친정에서 생활했고 이은화는 매달 빠짐없이 손주들의 생활비를 보냈다. “큰 며느리가 돌아오면 서재로 오라고 해.”“네, 가주님. 곧 식사 시간입니다.”집사가 조심스럽게 알렸고 이은화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입맛이 없구나.”남편도, 자식들도 곁에 없는 밥상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란 그저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 일일 뿐이었다.게다가 마음도 편치 않았기에 애써 먹고 싶지도 않았다.“가주님, 점심도 거의 안 드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드세요.”“안 먹겠다니까.”딱 잘라 말하고 이은화는 내선 전화를 끊었다.그 모습에 집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윤미가 집으로 돌아왔다.그녀를 데려다준 건 방윤림이었다.그녀는 한 손에는 커다란 솜사탕을, 다른 손에는 엿장수 엿 두 개를 들고 있었고 방윤림의 차는 이씨 가문의 저택 안으로 곧장 들어와 본채 앞에 멈춰 섰다.“아가씨, 도착했습니다.”운전석에 앉은 방윤림이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실내 놀이터에서 몇 시간 동안 실컷 놀고 난 이윤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이었다.어릴 적, 놀이공원은커녕 동물원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양부모는 단 한 번도 이윤미를 데리고 나들이를 간 적이 없었고 늘 친아들만 데리고 다녔기에 이윤미는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야 하나씩 해 나가는 중이었다.아이들이 좋아하는 솜사탕도 사 먹고 엿장수 엿도 사서 손에 쥐었다.“들어와서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갈래요? 아니면 저녁 먹고 가요.”이윤미가 물었다.방윤림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저는 들어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 돼요. 괜찮습니다.”그가 시선을 돌리자, 마당 한쪽에 주차된 이은화의 전용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이은화가
사진 속 정일범과 이윤정은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정일범의 두 동생도 종종 명지 빌리지를 찾았는데 올 때마다 크고 묵직한 짐을 들고 갔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윤정을 위해 사 온 물건들이었다.이은화는 화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윤정이 싫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이은화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윤정이 저택 안에 머무르는 걸 견딜 수 없었다.그동안 이윤정에게 베푼 모든 것이 되려 돌아와 상처가 되었다.이윤정이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윤정은 어디까지나 남이었다. 이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사건이 터졌을 때, 만약 이윤정이 조용히 관성을 떠났다면 이은화는 비서를 통해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돈을 보내 앞날을 보장해 줬을 것이다.하지만 이윤정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복수를 꿈꾸며 날을 세웠다.이은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이윤정, 난 네게 살길을 열어주려고 했어. 하지만 네가 그걸 걷어차고 스스로 지옥으로 가려 한 거야, 날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이은화는 친자식도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물며 이윤정 따위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이윤정을 제거하고도 자신에게 어떤 책임도 돌아오지 않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정일범, 너희 형제들 자꾸 여자 못 만나본 사람들처럼 굴 거야?”이은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든 건 세 아들의 행동이었다.그들은 이씨 가문을 이끌 재목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절대 박대하진 않았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회사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회사에서 돈을 빼가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게다가 그들에게 골라준 아내들은 정씨 가문과도 격이 맞았다. 오히려 정씨 가문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문이었다.그들도 정씨 가문의 핏줄이었으니 며느리를 맞이할 때도 정씨 가문과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야 했다.강성에서는 누구나 이씨 가문이 딸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