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오빠, 우리 언니가 오빠를 많이 걱정하세요. 집을 나서기 전까지도 저와 태윤 씨에게 자주 오빠 보러 오라고 거듭 당부했어요. 저도 오빠가 무슨 생각인지 잘 알지만, 자꾸 외곬으로만 생각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자신감을 잃게 될 거에요.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겠어요?”“동명 오빠가 우리 언니를 돕고 싶어 하는 것도 저는 다 이해해요. 그런데 오빠가 빨리 나아져야 앞으로 우리 언니와 함께 많은 일을 겪어나갈 수 있는걸요. 오빠는 우리 언니랑 함께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 언니는 늘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노동명은 전태윤 부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고마워요. 사실 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너무 속상해서... 날 위해서,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할거에요. 언젠가 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예진이한테 약속했거든요. 무슨 일이 있든지 예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모든 곤란을 막아주고 예진이와 손을 맞잡고 함께 앞날을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요. 걱정 끼쳐서 너무 죄송하네요.”노동명은 자책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교통사고가 난 후로 제가 엄청 예민해졌거든요. 예진 씨와 태윤이는 이런 일을 당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꾸준히 재활했지만, 다리는 여전히 힘을 쓸 수 없고 일반적인 사람처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힘이 빠지거든요.”우빈은 노동명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아저씨, 다 잘 될 거예요. 아저씨 다리가 좋아지면 저를 안고 높이 들어주셔야 해요.”노동명은 우빈을 번쩍 들어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좋아. 아저씨 다리가 나아지면 우리 우빈을 높이 들고 빙글빙글 돌게 해줄게.”“그럼 빨리 나으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커서 무거워지면 아저씨가 저를 들 수 없어요.”“알았어.”“우리 약속해요. 약속을 어기면 안 돼요.”노동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녀석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이때
“우빈아, 할머니랑 잠깐 놀러 가지 않을래? 아저씨가 이모랑 얘기 좀 하시겠대.”철이 든 우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윤미라는 눈물을 닦으며 전태윤 부부에게 말을 건넸다.“태윤아, 예정 씨, 고마워요.”하예정은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다.전태윤이 말했다.“아주머니, 저희가 동명을 설득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동명이가 모레부터 평소와 같이 출근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내일 일요일인지 휴일인지 윤미라는 기억이 잘 안 났다.윤미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건넸다.“너한테 너무 폐만 끼치는구나.”“괜찮아요. 저와 동명은 좋은 친구잖아요. 이 일은 동명의 일이자 제 일이죠.”윤미라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했다.다행히 아들 노동명의 곁에는 전태윤과 소정남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어 주었다.노동명이 사고가 났을 때 전태윤과 같은 좋은 친구들의 관심과 도움덕분으로 노동명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우빈아, 가자, 할머니랑 같이 놀러 내려가자. 뭐 하고 싶어? 나랑 같이 가자.”윤미라는 우빈의 작은 손을 잡고 방을 나서면서 물었다.“할머니, 집에 연 있어요?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서 연 날리러 가고 싶어요.”윤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우리 같이 찾아보자. 오빠랑 언니가 어렸을 때 연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그들의 장난감 방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할머니가 우리 우빈을 데리고 장난감 방에 가서 찾아볼까?”“네, 그런데 오빠 언니가 화내지 않을까요? 우리가 오빠와 언니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그들의 물건을 가지러 가잖아요.”윤미라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말을 이었다.“그럼 할머니가 사람을 시켜 물어보라고 할게. 오빠와 언니가 동의하면 우리 연 가지러 가자.”우빈은 교육을 잘 받은 아이였다.어쩐지 아들 노동명이 그렇게 좋아하더라니!노동명은 처음에 하예진에게 마음이 없었다.노동명이 하예진을 처음 알았을 때 하예진이 아직 이혼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우빈을 좋아했을 뿐이다.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예진과 만남이 잦아지게 되면서 노동명도
윤미라가 우빈을 데리고 간 뒤 노동명은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진이가 떠나기 전에 정말 예정 씨한테 저를 보러 오라고 부탁했어요? 예진이 기분은 어때 보였어요? 제가 너무 민감하고 감정적이어서 예진이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예정 씨도 제가 생떼 부리는 것 같죠? 제가 서른일곱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어린애처럼...”노동명은 자신이 억지를 부리는 것만 같아 자책했다.“오빠, 우리 언니는 정말 오빠를 걱정하고 계세요. 단지 시간이 너무 급해서 오빠 보러 가지 못한 것뿐이에요. 언니가 떠나기 전에 저한테 오빠를 찾아와서 반드시 설득하라고 신신당부했어요. 우빈이가 얼마나 착한 아이예요. 우빈이 말도 못 믿으세요?”“오빠, 오빠가 속상해하실 수도 있는데 제가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어요. 이번에 오빠가 정말 억지를 부리고 계신 거 맞아요. 보세요. 오빠는 지금 종일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시잖아요. 우리 언니가 출장 가면서 얼마나 오빠를 걱정하시고 계시는지 아세요? 아주머니도 걱정하고 계실뿐더러 오빠도 기분이 안 좋잖아요. 곁에 있는 우리도 얼마나 오빠를 걱정하고 있어요...”노동명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전태윤도 노동명을 꾸지람했다.“동명아, 내가 어떻게 널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난번부터 넌 이미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잖아. 만약 처형이 널 싫어한다면 아마 너에게 관심도 주지 않을걸. 사실 우리 처형은 요즘 점점 훌륭해지고 있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처형은 지금 아무 남자도 만나지 않잖아. 처형이 너의 여자 친구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희 두 사람이 지금 연인처럼 지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처형이 지금 너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말 노력하고 있거든. 넌 네가 처형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처형은 오히려 자신이 너와 어울리지 못할까 봐, 네가 휠체어에 앉아 있다고 해도 너와의 차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까 봐 걱정하고 있어. 너희 두 사람 지금 서로 사랑
“그래, 나 혼자 내려갈 테니 부축해 주지 않아도 돼.”노동명의 마음은 이미 폭설에서 맑은 날로 바뀌었다.카멜레온과도 같았다.그는 소파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 한 걸음 걸어가 휠체어 위에 앉았다.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알았어. 너 혼자 해.”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태윤은 휠체어의 방향을 바꾸어 주었고 그제야 노동명이 휠체어를 조종하게 헸다.세 사람은 함께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 입구로 향했다.“너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나와 예정은 계단으로 내려갈 거야.”노동명이 대답했다.“그래. 난 당분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할 것 같아.”노동명의 다리가 회복되어 걸을 수 있게 되면 그의 집 엘리베이터도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노동명이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전태윤은 하예정을 끌고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동명이는 우리 처형을 너무 의식해서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오빠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언니는 사실 마음속으로 오빠를 이미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동명 오빠가 지금 자신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있거든요. 동명 오빠는 자신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 언니와 함께하려고 하세요.”“늦어도 내년 말에는 형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휴, 내 절친이 내 형부로 되다니! 차마 형부라고 부르지 못할 것 같아.”하예정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소현이도 누나라고 부르면서 왜 동명 오빠한테는 그렇게 부르지 못하세요?”전태윤이 대답했다.“그건 다르지. 내가 누나라고 부르지 않으면 소현 누나는 늘 네 앞에서 내 흉을 보는데, 난 정말 어쩔 수 없었어. 그런데 동명이는 내가 형부라고 부르지 않아도 날 괴롭히지 못할걸. 우리 부부의 감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전태윤이 하예정을 위해 누나라고 불렀을 때, 성소현은 무척 놀랐고 그 모습을 본 하예정도 그 장면이 너무 웃기기만 했다.“동명 오빠는 이 정도 일로 태윤 씨와 따지지 않을 거예요.”노동명의 성격은 외향적이었다.그러나 요즘은 교통사고로 인해 불구
강성 공항.전호영은 일찍 공항에 도착해 하예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큰형 전태윤이 맡긴 임무인데 전호영이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전태윤이 전호영에게 부탁하지 않았어도 하예진이 온 것을 알게 되면 공항으로 마중 나왔을 것이다. 하예진은 전호영 형수님일 뿐만 아니라 우빈의 엄마이기도 했다.그들은 모두 전씨 가문의 친척이었다.전호영은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았다.바깥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졌고 어두움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뒤에야 하예진이 강성에 도착했다.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한 뒤 하예진은 휴대전화의 비행 모드를 끄고 하예정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예정아, 나 강성에 도착했어. 금방 공항에 착륙했거든. 좀 이따가 하루 호텔에 도착하면 내가 다시 전화할게.”하예진은 강성의 하루 호텔에 묵을 예정이었다.지난번에 이경혜를 따라왔을 때도 호텔에서 묵었다.이번에 강성에 왔을 때 이경혜는 하예진에게 집을 고르라고 말했다.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이경혜가 사주겠다고 하면서 좋은 집을 고르라고 했다.강성에 오래 묵을 예정이기 때문에 자꾸 호텔에 묵으면 불편한 점이 많다면서 말이다.관성에 있는 하예진의 집도 전태윤이 최저가로 하예진에게 판 것이다.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하예진이 고집부리는 바람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돈을 조금 받았다.그래도 하예진의 개인 적금은 거의 다 털렸다.강성에서 집을 사려면 하예진의 능력으로는 아직 사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하예진은 이경혜가 나중에 집을 사주게 되면 부동산 소유증에 이경혜의 이름을 쓰려고 했다.앞으로 하예진과 이경혜가 강성에 자주 와야 했기에 강성에 집이 있는 것이 훨씬 편했다.사실 이번에 이경혜도 오려고 했지만 데, 유청하가 산후조리 중이라서 하예진이 먼저 강성으로 오게 되었다.이경혜도 하예진 자매와 성소현에게 하예진을 배양해 이씨 가문을 이어받게 하려는 계획을 알려주었다.하여 현재 하예진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가장 무거웠다.하예정은 곧 회답했다.[알았어. 호텔에 도착하면 밥부터
전호영은 하예진의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누나, 제가 우리 호텔에 좋은 룸을 남겨두었어요. 요리도 주문했으니, 우리가 호텔에 도착하면 곧 식사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먼저 호텔에 가서 식사해요.”그가 여의 팰리스에 사놓은 집은 아직 실내장식이 끝나지 않아 하예진을 그의 집으로 초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예진도 전호영의 개인 별장에 들어가서 지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하여 하루 호텔에 하예진 일행을 묵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호영 씨, 제가 신세를 많이 지게 되네요.”“신세라니요. 다 한 가족인데. 앞으로 강성에서 누나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도울 거예요. 제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제가 사람을 찾아서라도 누나를 도와드리게 할게요.”하예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는 시장을 조사하러 왔는걸요. 호영 씨의 조언과 의견을 물어보고 싶네요.”“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누나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어제든지 저한테 말씀해주세요.”전호영이 하예진 일행을 데리고 공항을 나서는 모습을 파파라치들이 몰래카메라로 찍어두었다.연예 기자에게는 이런 장면도 뉴스로 쓸 수 있었다.전호영은 줄곧 고현에게 매달려 있었기에 고현도 동성애자로 뒤바뀌는 줄 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호영이 지금 젊은 여성과 함께 웃으며 걸어갔고 심지어 자상하게도 그 여자의 캐리어도 끌어주었다. 그 여자가 얼굴도 예쁘고 기품도 좋은 것으로 보면 어느 가문의 딸일 수도 있다.그 연예 기자는 전호영의 신분을 알아보고 몰래 그 장면을 찍은 후 전호영 일행을 미행하여 하예진의 얼굴을 가까이서 몰래 찍으려 했지만, 전호영이 눈치챌까 봐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전호영이 틀림없다는 사실만 확인해도 재미있는 뉴스로 될 것이다.절대 틀릴 리가 없다.강성에서 전호영은 많은 젊은 여성들의 공동의 적수이기도 했고 고현과 자주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전호영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전호영이 하예진을 태우
한참을 생각하던 고현은 전호영이 돌아온 뒤 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일을 알려주기로 했다.고현은 이미 비서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시켰으니 그 실시간 검색어는 곧 내려갈 것이다.고현의 비서뿐만 아니라 전호영의 비서도 그 소식을 알자마자 바로 실시간 검색에 관한 일을 처리했다.결국, 그 실시간 검색어는 순위권에 얼마 오르지도 못하고 이내 사라졌다.관성에 있는 하예정 부부와 우빈은 사실 노씨 가문에 남아서 밥을 먹고 있었고 하예진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노동명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언니가 호텔에 돌아가면 동명 오빠한테 연락할 거예요.”휠체어를 탄 채 전태윤에게 밀려가던 노동명이 대답했다.“알아요. 아까 예진이가 저한테 회답했어요.”하예정은 웃었다.“잘됐네요. 오빠들의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세요. 우빈아, 내려와서 좀 걸어. 아저씨한테 자꾸 안기지 말고.”“괜찮아요. 저는 우빈이가 제 품에 앉아 있는 느낌이 좋아요.”노동명은 우빈을 친자식처럼 여길 것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우빈이는 노동명의 허벅지에서 뛰어내리더니 물었다.“이모, 식사 후에 걸어 다니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아흔아홉 살까지 살 수 있다고 했지.”“맞아요. 맞아요. 저는 뚱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설날에 용정이와도 만나는데 제가 뚱뚱해지면 용정이도 저를 비웃을 거예요.”우빈이 녀석도 체면을 중시하는 아이였다.“만약 네가 뚱뚱해진다면 용정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네 체중으로 용정을 제압할 수도 있거든.”우빈이 바로 되물었다.“이모, 그렇게 하면 정말 제가 이길 수 있어요?”만약 용정을 이길 수 있다면 우빈은 온 겨울방학 동안 자랑거리가 생길 것이다.전태윤도 웃었다.“당연히 거짓말이지. 네가 뚱뚱한 사람이 되어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면 처참하게 질 거야. 체중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것은 상대방의 실력이 약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거야. 그런데 용정의 실력은 매우 강하잖아.”늙은 신의의 옛 친구들 중 아무나 용정을 가르치게 된다면 용정은 일반적인 사람
정원을 한 바퀴 산책한 하예정은 지쳤고 그 상황을 본 전태윤은 그녀와 우빈을 데리고 노씨 가문의 별장을 떠나 결혼하기 전에 살던 큰 별장으로 돌아갔다.결혼 휴가가 곧 끝나기 때문에 전태윤 부부는 모두 예전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야 했고 편하기 출퇴근하기 위해 서원 리조트에 살지 않기로 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전씨 할머니의 언성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전태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집에 돌아가서 전씨 할머니를 볼 줄은 전혀 몰랐다.“증조할머니!”우빈은 전씨 할머니를 보더니 무척 기뻐하며 이모와 이모부를 남겨두고 전씨 할머니에게 달려갔다.전씨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우빈이가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렸다.“형, 형수님.”방안에는 전씨 할머니 말고도 전이혁이 있었다.하예정이 들은 전씨 할머니의 언성 높은 소리는 전씨 할머니가 전이혁을 욕하고 있는 소리였다.그들은 전이혁이 왜 어르신을 화나게 했는지 몰랐다.전태윤은 전씨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뒤 하예정과 함께 앉으며 전이혁에게 물었다.“할머니를 화나게 했어? 우리가 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할머니께서 욕하시는 소리를 들었거든.”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 상황을 보더니 무슨 일인지 짐작한 전태윤은 손을 뻗어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빈이가 오자 전씨 할머니는 전이혁을 더는 욕하지 않으셨다.전이혁은 그 틈을 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할머니도 그를 붙잡아 두지 않고 콧방귀만 뀌었다.전이혁은 할머니의 콧방귀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챘다.그가 전씨 가문의 손자인 이상 어디로 도망가던지 소용없을 것이다.전이혁은 분명 불효자가 아니었으니까.전씨 할머니가 조금 전에 전이혁을 호되게 욕하긴 했지만,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감정은 더없이 두터웠다.그들은 가끔 전씨 할머니를 화나게 만들어 할머니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할머니한테 꾸지람 듣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다.......이씨 가문.이윤정은 쟁반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