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영은 이내 대답했다.“가격은 상관없어요. 집이 좋고 저한테 적합하면 돼요. 고 대표는 언제 편하세요? 저와 같이 그 집 보러 가요.”“지금 시간이 늦었으니 제가 전 대표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남겨 드릴게요. 전 대표가 내일 시간 나면 그 번호로 연락해 주시면 그분이 구경시켜 드릴 거예요.”“네. 정말 고마워요.”전호영은 고현에게 인사했다.고현은 자신의 집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전호영에게 주며 말했다.“전 대표, 이것이 바로 우리 집사의 휴대전화 번호에요. 여기로 연락하시면 그분이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전 대표를 안내해 드릴 거예요.”“그 집주인이 자신의 집을 팔려고 이웃에게 연락처를 남기면서 집을 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거든요.”“네, 내일 고 대표의 집사에게 연락할게요. 고 대표,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고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별말씀을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전영호도 그 집을 꼭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비록 상대방의 별장은 실내장식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중고로 양도한 것이었다.여의 팰리스에서 집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돈이 부족하지 않은 부유한 사람들이기에 여간해서는 중고 집을 사지 않았다.이번 집주인이 만약 부동산 투기꾼이라면 자연스레 집값도 상대적으로 비쌀 것이다.전호영은 돈이 모자라지 않지만 투기꾼한테 당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전 씨 호텔에 도착한 고현은 운전 기사더러 차를 세우게 하고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전 대표, 도착했어요.”전호영은 '하루 호텔'이라는 글자를 보고 고현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고 대표, 들어가 보시겠어요?”고현은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호텔을 바라보았고 전호영은 고현의 시선으로 따라서 따라가 보더니 그제야 이해한 듯 웃으며 말했다.“제가 나중에 집을 사고 실내장식을 끝내면 그때 고 대표를 초대할게요.”“전 대표, 제가 아직 처리할 일들이 많아서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웃으며 고현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전호영은 호텔에 들어가 급하게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1층 휴게실로 가서 앉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할머니는 그의 전화를 받고 바로 말했다.“호영아, 할머니 생각이 나기는 나던? 이 자식아, 몇 마디 했다고 가출을 해!”“할머니, 가출이라니요. 출장 왔어요. 강성으로 출장 왔어요. 지금은 하루 호텔에 있어요.”할머니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기왕 강성에 갔으니 고현이랑 잘 지내고 와. 지내다 보면 감정도 생길 테니까. 할머니 안목을 믿어. 고현은 너에게 너무 잘 어울려.”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말이 너무 많고 다른 한 사람은 너무 과묵해서 마침 장점을 취하여 단점을 보충할수 있었다.전호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어보았다.“할머니, 고현 씨가 여자라는 건 어디서 알셨어요? 제가 보기엔 고현 씨는 여자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데요. 같이 걸어 다닐 때면 저보다도 더 남성스러워서 형제라고 착각을 할 때도 있다니까요.”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은 틀림없이 여자야.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네 인생을 가지고 장난치지는 못해. 할머니가 어떻게 알아봤든 상관하지 마. 어쨌든 고현은 매우 훌륭한 여자 인 것만 알면 돼.”“고현 씨가 훌륭하다는 것을 압니다만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훌륭한 여인을 할머니는 형님께 소개해주셔야죠. 형님과 결혼한다면 그야말로 강자와 강자의 혼합체로 천하무적일걸요.”“네 형은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고현 역시 남자에게 애교 쓰는 성격이 아니잖아. 만약 같이 있게 된다면 그 둘의 냉랭한 성격에 게다가 각자 가족의 가장이라서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승부욕이 자극될 거야.”“성격이 맞지 않아 심지어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사업에까지도 영향을 미쳐 싸움이 크게 벌어질 수도 있어. 너는 네 형보다 남을 잘 달래고 말재주도 있기에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어.”“게다가 형처럼 오만하지도 않고 고현에게 잘 어울릴 거야.”전호영은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할머니께 따졌다.“할머니는 고현 씨
전씨 가문의 남자는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할머니는 너희들을 잘 키워왔다고 생각해. 너희들은 인품이 좋고 능력이 뛰어나고 책임감 있는 젊은 인재들로 키웠으니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믿어.”“네가 정말 그런 일을 했다면 난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할머니는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하지는 못했고 행동도 젊었을 때만큼 민첩하지 못하지만 너 하나만큼 이길 자신 있어.”전호영은 할머니의 말에 끼어들려고 했다.“...할머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그래, 말해봐. 네가 말을 절반만 했잖아. 말을 한꺼번에 못 한 네 탓이야. 이제야 와서 할머니 탓하긴. 내가 너의 할머니라서 너를 용납할 수 있는 거야.”“할머니, 저 내일 집 보러 가는데 풍수 선생 한 분 필요해요. 재주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사람을 속일 수 있으면 돼요. 하늘도 땅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재주 말이에요.”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신 채 다시 말했다.“집을 사려 할 때 풍수 선생을 청하는 것은 이해해. 집을 사는 것은 평생의 큰일이지. 풍수 구조가 좋지 않은 집을 사면 사는 것이 순조롭지 않을 테니까.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집 구조가 형편없는 집을 사는 것이지.”“일이 순조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집안이 무너질수도 있지. 그런데 가짜 선생을 청하다니. 할머니가 진짜 풍수 선생을 청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할머니는 연세가 있으셔서 세상 밖의 고수들을 많이 만나보신 분이다.풍수학에 대해 어르신은 많이 믿는 편이었다.전씨 가문의 본가가 바로 가장 대단한 풍수 선생을 청하여 풍수를 보았기 때문에 전씨 가문이 이토록 가정이 화목했고 사업도 번창하게 되었다.심지어 점점 재부가 쌓였고 마침내 재벌 순위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풍수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유일하게 유감인 것이 바로 전씨 가문의 풍수는 전씨 가문의 조상 풍수와 결합해야 만이 재산과 자손들이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게다가 전씨 가문에서 딸이 태어나기가 매우 어렵다고 덧붙였다.전씨 가문
어르신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셨다,금방 한 말은 전호영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전호영이 전화를 끊은 뒤 노부인은 풍수 선생에게 연락해 선생의 제자더러 강성으로 가도록 부탁했다.왕복 비행깃값과 숙식 모두 지급하기로 했고 그 제자가 전호영에게 연락하도록 안배했다.강성으로 도착해 전호영을 찾아 그의 요구에 따르면 되었다.선생은 흔쾌히 허락하셨다.전호영의 일을 해결하고 난 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져 밤중에 장손의 집으로 달려갔다.집사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박 씨 아저씨가 어르신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면서 물었다.“어르신, 여기 오 시기 전에 전화를 미리 하시지 그러셨어요. 우리가 모시러 가면 될 것을 택시 타고 오신 거예요?”전 씨 할머니는 운전할 실력이 있었지만 나이가 드셨기 때문에 몸이 정정하셔도 자손들은 차를 운전하는 것을 결코 반대했고 대신 운전기사를 청해 태워드리곤 했다.“기사한테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내리자마자 돌아가라고 지시했거든요.”할머니는 대답했다.“데리러 오라고 전화할 필요도 없어요. 태윤과 예정인 돌아왔어요?”한밤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겨우 밤 9시 정도였다.박 씨 아저씨는 대답했다.“평소에는 9시 반에 도착해요. 사모님은 도련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도착하는데 오늘 밤 사모님이 도련님과 함께 연회에 가신 바람에 빨리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할머니는 별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부부가 점점 바쁘게 지내나 보네요.”“예전보다 도련님은 아주 편해졌어요. 사모님은 점점 바빠지고 있고요. 사모님은 사업도 바쁘시고 도련님의 사유 자산도 관리해야 하거든요.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 당분간은 좀 바쁘실 거예요.”노부인 “네” 하고 대답했다.집안으로 들어서자 박집사는 전 씨 할머니께 물었다.“어르신, 마실 것 좀 드시겠어요?”“따뜻한 물 한 잔만 줘요.”박집사는 전 씨 할머니께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드렸다.“박 집사, 너무 심심해서 여기로 온 거예요. 아무 일도 없으니 우리 같이 여
“이번에는 어느 집안의 여자가 도련님을 마음에 들어 했어요?”어르신이 물었다.“예정이는 알고 있어요? 예정이가 돌아오면 연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겠어요.”전 씨 할머니도 젊었을 때 연적이 많았다.전태윤은 그의 할아버지를 닮은 것이다.“도씨 집안의 딸이에요. 연성인가 하는 곳에서 사모님을 찾아간 적 있었어요.사모님은 그 여자와 맞설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그녀가 갑자기 전날 밤에 관성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죠.”“도 씨네 딸이? 도 씨 그룹의 외동딸 도차연일거예요. 도차연이 태윤에게 반할 만도 해요. 도차연은 능력도 있고 게다가 외동딸이라서 이변이 없다면 도 씨 그룹을 맡게 될 거예요.”“도 씨네 아가씨 성격이 오만하니 당연히 도차연 자신의 조건으로는 태윤 같은 남자만이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할 거예요.”“다만 도 대표는 똑똑한 사리가 밝은 분이라 자신의 딸이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어 제삼자가 되는 것을 반드시 막을 겁니다.”박 씨 아저씨는 말을 하지 못했다.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박집사는 단지 아까 말한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몰랐다.“도 씨네 아가씨가 여기로 왔었다고요? 문 앞까지 찾아오다니 간이 정말 부었네요. 태윤이가 도차연을 내쫓지 않던가요?”“여기 별장의 보안 수준이 매우 높아서 그녀가 들어오지 못할 텐데. 누가 나가서 도차연을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박 씨 아저씨는 황급히 대답했다.“저희가 도차연을 데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 마음씨 고운 188호 집주인이 데리고 들오셨더라고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태윤 부부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으니 어르신께서 상관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전 씨 할머니는 이미 결혼 적령기의 손주들에게 짝을 지어 주었고 언제 가정을 이룰지는 관여하지 않고 결과만 보았다.나머지 몇 명의 손자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급해 하지 않으셨다.여섯째 도련님 이하의 손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홉째 도련님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께
박 씨 아저씨는 경험이 많은 분이었다.예정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챘다.그와 동시에 박 씨 아저씨의 얼굴도 이내 진지해졌다.전씨 가문의 사모님에게 수를 쓸 생각을 하다니 정말 담도 큰 사람이다.더군다나 사모님은 도련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 사람은 도련님의 코앞에서 사모님에게 손을 댄 셈이다.도련님의 안색이 무척 어두워 질 수밖에 없었다.전태윤을 안고 바삐 들어오는 것을 본 어르신도 깜짝 놀랐다.“태윤아, 예정이한테 무슨 일 있었던거야?”“할머니, 이따가 말씀드릴게요.”할머니가 자기 집에 계신 것을 보고 전태윤은 놀라워하지 않은 눈빛이었다.어르신은 지금 매우 한가하셔서 종종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기에 그들 형제는 할머니의 자상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전태윤은 어르신과 말하면서 예정이를 안고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어르신은 계단 입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박 씨 아저씨는 어르신 곁으로 다가가서 소리 낮춰 말했다.“어르신, 사모님께서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진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사모님의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혼미해 진 것을 보았거든요.”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다시 물었다.“계략에 놀아났다고요? 예정이가 태윤을 따라 연회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태윤의 코앞에서 예정이한테 손을 댄 거예요?”“제가 보기에는 사모님께서 다른 사람의 계략에 놀아난 것 같아요. 대체 어찌 된 일인지는 도련님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제가 지금 강일구에게로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게요.”박 씨 아저씨는 말을 마치고 바로 강일구 등 사람에게 물어보러 나갔다.박 씨 아저씨는 금방 들어왔다.“뭐래요?”어르신이 물었다.어르신은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정이에게 수를 써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지 몹시 궁금했다.“일구가 말하기를 연회에서 김씨 가문 도련님을 만났대요. 김씨 가문의 도련님은 사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한참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도련님
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박 집사 통해 일구네한테 물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았어. 너희 부부 운이 참 좋아.”할머니는 웃으시며 전태윤에게 물었다.“이 할미가 보양식으로 국 끓여줄까?”전태윤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날씨가 더워요. 저 코피 흘리기 싫어요 할머니.”“김진우 만났어?”전태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김씨 집안에서 저랑 예정이가 감정이 안정되고 김진우도 체념한 걸 보고 지사에서 전근시켜 다시 김씨 그룹으로 돌아오게 했어요. 현재는 김 대표님 비서로 일하면서 종일 대표님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회장님이 직접 이끌고 가르치는 중이에요.”김씨 그룹은 앞으로 김진우에게 넘겨줄 것이다.김씨 집안의 방계 친척들은 넘볼 생각을 말아야 한다.김진우는 심미란의 아들이자 심효진의 사촌 동생이다. 심효진이 소씨 일가에 시집간 이후로 김씨 집안의 방계 친척들은 아예 마음을 접고 감히 더는 김씨 그룹을 넘보지 못했다.소정남이라는 사촌 매형이 있는 한 누가 감히 김진우와 김씨 그룹을 다툴 수 있을까?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다. 차라리 얌전히 있으면 제 밥그릇은 챙길 수 있다.김진우가 오너 자리에 오른 후 여씨 그룹의 큰따님처럼 반대자를 제거하게 되면 방계 친척들은 득보다 실이 많은 꼴이 된다.“김 대표에겐 아들 한 명, 딸 한 명뿐이야. 아들이 실력 좋고 회사를 이어받을 능력이 되는데 뭣 하러 조카들을 육성하겠어? 김진우 그 아이는 원래 괜찮은 아이인데 예정이를 좋아하는 바람에 너한테 제압을 당했을 뿐이야.”전태윤이 변명을 둘러댔다.“할머니, 저는 김진우 제압한 적 없어요. 걔네 부모님이 지사로 보낸 거라고요.”할머니는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전태윤은 확실히 김진우를 제압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김씨 그룹을 제압했었다. 김종헌 부부는 하예정의 남편이 전태윤인 걸 알았고 또한 제 아들이 하예정을 짝사랑하는 걸 알게 되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매정하게 아들을 가장 외딴 지사로 보내버렸다.아들의 심성을 단련하는 동시에 하예정과
전태윤은 할머니 손에서 빨간 종이를 건네받았다.“고를 거 없어요. 제일 가까운 날로 하면 돼요.”그는 이미 하예정에게 줄 예물을 다 준비했는데 집안 어르신들이 자꾸 더 보태다 보니 여태껏 그녀에게 정식으로 못 주고 있다.전태윤은 결국 할머니가 골라주신 몇몇 날짜를 다 본 후 제일 가까운 날로 정했다.예물을 주면 결혼식도 슬슬 준비해야 한다.그는 하예정에게 가장 성대한, 관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소정남과 심효진의 결혼식을 뛰어넘는 그런 웨딩을 선사해주고 싶었다.하예정이 그의 아내라는 걸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고 전태윤은 이젠 임자 있는 몸이니 다른 여자들은 더 이상 들러붙지 말라고 전하고 싶었다. 그는 밖에서 자신에게 대시하는 여자들이 썩 반갑지 않았다.“예정이랑 요즘 잘 지내?”할머니는 무심한 척 질문을 건넸다.“네, 저희 아주 잘 지내요. 예정이가 그냥 좀 바빠서 저를 자꾸 소홀히 하네요. 제가 하루가 멀다 하게 예정의 앞에서 알짱대지 않으면 아마 남편이 있다는 사실도 새까맣게 잊을걸요.”“할머니는 몰라요. 예정이는 출장 가면 진짜 몇 날 며칠을 전화도 안 하고 문자도 없어요. 아예 일에만 푹 빠져 산다니까요. 예전의 저보다 더 일 중독이에요.”“예정이가 출장만 가면 할머니 손자는 외롭게 독수공방해야 해요. 긴 밤, 잠도 안 오고 하루가 다 지나도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 없으니 입맛도 안 난다고요.”전태윤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저 자신이 가여웠다.할머니는 피식 웃으시며 그가 전에 했던 말로 비꼬았다.“아이고, 예전에 누가 아내 따위 필요 없다고 했었나. 그 말 한 사람 지금쯤 껌딱지처럼 아내한테 달라붙고 싶어 하는데, 꼴이 참 우습지 그래.”전태윤이 말했다.“할머니... 언제적 얘기를 아직도 하시는 거예요. 저 그만 놀려요.”“이 할미는 놀릴 수 있을 때까지 놀릴 거다, 하하. 네가 전에 했던 말과 상반되게 나오는 게 난 제일 웃겨.”전태윤은 속절없이 할머니를 쳐다봤다.이 세상에 감히 그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할머니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