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평소에 자기 의견도 내세우지 않으며 투명 인간처럼 살아왔다. 가끔 몇 마디 할 때도 조곤조곤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가장 독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저는 한 대표님을 100% 믿습니다! 저는 내 편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의심되는 사람을 내 편으로 들이지도 않아요.”그들은 입을 벌리고 또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신들이 했던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운초가 한동호를 통해 여씨 그룹을 빠르게 장악한 걸 보면 어쩌면 정말 그들이 부당 수익을 챙기고 탐낸 증거가 있을지도 모른다.“운초야... 앞으로 후회하지 않길 바랄게. 만약 여씨 그룹이 네 손에서 망하면 우리 모두 죽어서 하늘에 계신 작은 외삼촌을 볼 면목이 없다.”최씨 도련님은 그렇게 한마디 내던지고 일행들에게 말했다.“가자.”그러자 여운초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촌 오빠들 그러면 안녕히 가세요. 배웅하지 않겠습니다.”그들은 씩씩거리며 가게를 떠났다.그리고 전이진은 직원과 경호원들에게 말했다.“저 화분들을 다시 선반 위에 놓아.”그들은 400만 원 넘게 배상금을 지불하면서 이 화분들을 가져가는 것을 까먹었다.‘쌤통이다!’전이진은 여운초에게 말했다.“만약 저 사람들이 또다시 소란을 피우러 오면 전화해. 내가 사람을 데리고 와서 때려줄게. 그러면 얌전해질 거야.”“도련님, 저희 두 명이면 제대로 혼 내줄 수 있습니다!”한 경호원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전이진이 자기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다. 사실 전씨 집안 경호원들은 모두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이때 옆에 있던 다른 경호원이 그를 잡아당겼다.멍청이!‘도련님 매력 어필 시간이잖아. 왜 끼어들어?’그제야 그 경호원은 눈치를 챙기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화분을 옮기면서 전이진의 시선을 피했다.이때 여운초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나 혼자 있는 줄 알고 들어오면서 화분을 깨뜨렸어. 만약 네가 있는 걸 알았다면 저
전씨 그룹.전태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퇴근 준비를 하였다. 하예정이 그를 데리러 올 것을 알고 그는 일찌감치 건물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가 계단을 내려갈 때 마침 퇴근 시간이라 오가던 직원들은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그가 문 앞에 서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고위층 직원들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다가가서 물었다.“대표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아니야. 예정이를 기다리는 중이야.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얼른 퇴근해.”“...”그들은 전태윤이 이상하게도 일찍 내려간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하예정을 마중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꽃필무렵에 먼저 가서 꽃을 샀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다. 그녀가 전씨 그룹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거의 모두 퇴근했다.그녀의 차가 천천히 전씨 그룹에 들어서자 꼿꼿하게 서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거리는 꽤 멀었고 전태윤은 경호원도 없이 홀로 서있었지만 하예정은 그를 첫눈에 알아봤다.그는 어디에 있든 빛났다. 키 크고 잘생기고 카리스마가 넘쳤다.평소에 하예정은 차를 주차장에 세웠지만 퇴근 시간이 지나자 오늘은 아예 건물 입구까지 몰고 갔다. 전태윤은 하예정의 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방긋 웃더니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달려갔다.그 모습을 본 하예정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전태윤더러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그는 조수석에 놓인 장미 꽃다발을 보고 꽃다발을 안더니 웃으면서 물었다.“내꺼야?”“내가 만약 다른 남자를 위해 산 거라면 당신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 꽃다발을 뺏어올 거예요?”그러자 전태윤이 카리스마 넘치게 대답했다.“그럼! 너는 내 와이프야. 나에게만 꽃을 줄 수 있어. 다른 남자에게 선물하면 뒤져.”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선물할 남자가 없는데.”전태윤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면서 계속 말했다.“나 하나로 만족해. 왜 이제야 왔어? 다음에 꽃 선물 할 거면 일찍 와. 그러면 내가 꽃다발을 들고 퇴근할 수 있잖아. 회사 사람들
그 말을 들은 하예정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도련님들이 아부를 떤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큰형수인 자기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다.전태윤과 할머니가 그녀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가족들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하예정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전혀 거만해하지 않았다.“운초 씨와 이진이는 아직 그대로예요. 진도가 너무 느린 것 같던데.”그러자 전태윤이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다 나보다 못하지. 나는 한 방에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하예정은 그를 째려보면서 말했다.“혼인신고 할 때 당신 표정이 그게 뭐예요. 굳어 있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내가 총을 들이밀면서 강제로 혼인신고 하러 끌고 간 줄 오해하겠어요.”“...”사실 전태윤은 그때 혼인신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 결정을 후회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급히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전태윤은 할머니한테 자기 은혜를 대신 갚아달라고 강요받았기 때문이다.은혜를 갚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꼭 하예정과 결혼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하예정이 할머니에게 애교를 쓰고 달래면서 자기를 손자며느리로 인정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혼인신고를 한 후에야 그는 진정한 이유를 알았다.물론 지금 전태윤은 하예정과 결혼했기에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소현 언니와 상의했어요. 투자를 확대할 것이라고. 본가 쪽에 많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상태가 다 비슷비슷해요. 젊은이들은 밖에서 일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노인과 아이들뿐이라서 일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밭이 대부분 황폐해졌더라고요. 내일 소현 언니와 함께 내려가 보려고요. 계약할 수 있는 건 계약하고 땅을 좀 더 구해야겠어요.”전태윤이 자상하게 대답했다.“둘이 알아서 결정해. 어떤 결정을 하던 나는 당신을 응원할 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랑 말하고. 투자에 필요한 본전은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어.”“먼저 빌리는 거로 할게요. 돈을
전태윤의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성소현과 전태윤은 가문 실력으로 놓고 보면 어울리나 전씨 가문 며느리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요? 당신 이따가 손님 접대도 해야 하는데 집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어요.”“그래.”그러자 하예정은 해맑게 웃었다. 비록 두 사람 사이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였지만 전태윤은 점점 더 그녀를 존중하고 그녀의 뜻을 따라줬다. 여느 부부들처럼 평범하고 충실한 삶을 살면서 가끔 낭만도 즐길 줄 알았다.전태윤은 항상 다음 생에도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전태윤에게 시집가서 다시 부부가 되고 싶었다....노씨 저택.윤미라는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맞은편에 앉은 노진규는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지만 계속 윤미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윤미라와 노동명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또 뭔 일인데? 요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매일 이렇게 화내면 빨리 늙어. 화내지 마. 내일 피부과 예약하고 같이 관리받으러 가줄게.”윤미라는 무능력한 노진규를 보더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줌마가 늙으면 늙었지 뭐가 어때서요. 아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화가 안 나요? 매일 앉아서 신문이나 보고. 당신 아들한테나 좀 신경 써요. 혼 내지도 않고 계속 제멋대로 하게 놔두니깐 얘가 이렇게 된 거잖아요.”그녀는 모든 잘못을 노진규에게 덮어씌웠다. 그러자 노진규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래. 좋은 건 다 자기를 닮아서 그렇다고 하고 나쁜 건 다 내 탓이야? 동명이는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손자야. 어머니가 동명이를 응석받이로 키워서 이렇게 된 건데 왜 내 탓이야. 아들이 크면 다 말을 잘 안 듣기 마련이야. 그리고 이젠 나이도 거의 40이 되어가는데 왜 계속 동명의 일에 참견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동명이가 한 적이 있어? 싫다는데 계속 그러니깐 당신만 화나는 거 아니야. 시어머니가
노진규가 말했다.“나도 동의 안 해. 근데 뭘 어쩌겠어? 이건 오롯이 동명이가 결정할 일이야. 그 녀석은 줄곧 우리 말을 안 듣잖아.”“만약 내가 예진이 찾아가서 얘기하면 그 애가 예정이한테 말할까요?”윤미라가 갑자기 물었다.“예진이는 뭣 하러 찾아가? 동명이한테 아예 마음이 없다잖아! 문제는 당신 아들이야.”윤미라는 잠시 침묵한 후 말을 이었다.“알아요, 나도. 예진이 문제가 아니란 걸. 하지만 동명이가 고집만 부리며 도통 말을 안 듣잖아요. 일단 예진이부터 손을 쓸 수밖에요. 예진이더러 그 가게 빼고 다른 곳에 가서 토스트 가게를 운영하게 하려고요. 동명이랑 멀리 떨어지게요. 나중에 동명이가 전씨 일가에 갈 때면 예진이는 못 가게 해야 해요. 두 사람 또 마주칠라.”“물론 예진이가 관성을 떠나 동명이가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겠다면 더 좋고요. 그 아이가 동명이를 안 만난다면 나도 거액의 보상금을 줄 예정이에요.”윤미라는 진작 생각을 마쳤지만 하예진의 뒤에는 성씨 일가와 전씨 일가가 뒷받침해주고 있고 하예정과의 자매의 정이 깊어 그녀의 일이라면 하예정도 절대 방관할 리가 없다.하예정이 일단 간섭하면 전씨 일가도 함께 뛰어든다.전태윤은 아내 사랑이 지독한 팔불출이니까.윤미라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전씨 일가의 어르신은 대체 왜 전태윤에게 하예정이라는 신붓감을 정해줬을까.전이진이 말하길 여운초도 어르신이 정해준 신붓감이라고 한다.어르신의 안목 한번 참 독특할 따름이다.손주 녀석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조건을 타고났는데 어르신은 왜 그들에게 이런 조건의 신붓감을 정해준 걸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르신이 전태윤 일행의 친할머니가 맞을지 의심할 지경이다.재벌가에서 서로 조건이 대등한 집안끼리 결혼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까!“당신 지금 우리 집안과 전씨 일가의 관계를 무너뜨릴 생각이야?”노진규가 윤미라를 힐끔 째려봤다.이에 윤미라가 다급히 대답했다.“그럼 나더러 어쩌라고요? 아무튼 오늘은 싫은 소리부터 할게요. 죽는 한이 있어도
아내가 사고 칠까 봐 걱정된 노진규는 더는 막을 수 없자 마지못해 아내와 함께 문밖을 나섰다.그는 계속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기사더러 운전하라고 했다.부부는 뒷좌석에 앉아서 가는 길 내내 노진규가 아내를 타일렀다.“당신 예진이 찾으러 간 거 동명이가 알면 분명 당신이랑 대판 싸울 거야. 모자지간의 감정만 상하지 뭐. 예정이가 알면 태윤이도 알게 돼. 태윤이가 아내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당신도 잘 알지? 예진이는 태윤의 처형인데 그런 사람을 관성에서 떠나라고 하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거나 다름없어. 우리 집안과 전씨 일가의 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고.”윤미라는 머리를 기웃거리고 남편을 째려보며 말했다.“그냥 예진이 찾아가서 얘기만 한다고요. 누가 관성 떠나라고 협박한대요? 잔소리 좀 그만해요. 귀찮아 죽겠어. 우리 집안과 전씨 일가는 대대로 내려오며 돈독한 사이로 지냈어요. 내가 예진이 찾아간 걸 그 집안에서 알면 또 어쩌게요? 내가 욕을 한대요 때리기를 한대요? 그냥 얘기 좀 하겠다잖아요. 전씨 일가는 부모를 다 여의고 아무런 가정 배경도 없는 여자를 며느릿감으로 들일 순 있지만 우리 집안은 절대 안 돼요.”“모두가 전씨 일가 사람들처럼 그러지 못해요. 관성 상류층 사모님들 중 99퍼센트가 나랑 똑같은 생각일 거예요. 제 아들이 조건이 대등한 집안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길 바란다고요. 집안 조건은 예로부터 정말 중요해요. 나도 예진이를 겨냥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단지 서로 조건이 안 맞으면 이 결혼도 오래가지 못하고 트러블이 잦을 거예요. 나도 다 애들을 위해서 이런 거잖아요. 나중에 이혼하겠다고 소란을 피우면 꼴이 얼마나 흉해요.”“...”노진규는 할 말을 잃었다. 아내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까.“그래 그럼 좋게 얘기해. 너무 강압적인 말투로 예진이 다그치지 말고. 그 아이 속상할라.”윤미라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성씨 일가와 전씨 일가가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강압적으로 나오겠어요? 속상하긴 누가 속상해? 당신
거리가 가까워지자 하예진도 그녀를 더 똑똑히 볼 수 있었다.서현주는 전보다 훨씬 야위고 혈색도 안 좋아 보였다. 박시한 옷차림이다 보니 예리한 눈썰미가 아니면 그녀가 임신한 걸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형인 씨, 우리 가요.”서현주가 주형인에게 말했다.그녀는 이젠 주형인이 우빈이와 가까이하는 모습을 매우 꺼린다. 부자지간의 감정이 너무 애틋해 나중에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전념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서현주가 아들을 낳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만약 딸이라면 주 씨네 가족들은 틀림없이 우빈을 편애할 것이다.그녀는 나중에 계속 징역을 집행해야 하니 아이 곁에 머무를 수가 없다. 만약 딸아이가 시댁 식구들의 예쁨을 못 받고 엄마인 그녀조차 옆에 없다면 애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당할까?친아빠인 주형인만이 아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주우빈은 그녀의 아이보다 훨씬 행운아였다.우빈이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너무 많고 든든한 버팀목도 많아서 아이가 속상해할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된다.“우빈이 엄마랑 함께 뭐 사러 왔어?”주형인이 아들에게 물었다.“그냥 쇼핑하러 왔어요. 아빠는 뭐 샀어요?”아이는 서현주를 보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줌마.”서현주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도 이제 막 와서 아무것도 못 샀어. 우빈이 뭐 사고 싶어? 아빠가 사줄게.”주형인은 서현주의 일도 있고 하 영감 부부가 계속 막고 있어서 오랫동안 전처를 만나지 못했고 아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오랜만에 보는 아들이기에 뭐라도 사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서현주는 겨우 짓던 억지 미소마저 사라졌다.다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이때 하예진이 이리로 걸어왔다.그녀를 본 서현주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다.마땅히 하예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그녀가 하예진을 죽음의 관문을 넘나들게 한 간접적인 가해자이니까.“예진아.”주형인이 그녀를 불렀다.오랜만에 만난 전 와이프가 딴 사람으로 바뀐 것만 같
“동명 아저씨.”우빈은 노동명과 친아빠인 주형인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았다.노동명을 보자마자 하예진의 손에서 벗어나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달려갔다.이에 주형인의 안색이 더 음침해졌다.부모님과 누나가 항상 그의 앞에서 잔소리를 해댔었다. 지금 하예진에게 구애하는 사람이 있으니 당장 서현주와 이혼하고 하예진과 재결합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의 아빠도 딴사람으로 변할 거라고 했다.노동명은 우빈의 새아빠로 강 유력한 후보이다.주형인은 하예진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고 서현주에게도 미련과 죄책감이 남아있다.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해 두 여자를 해쳤다.하예진은 이미 그와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하여 제법 잘살고 있다. 주형인은 더는 서현주를 해치고 싶지 않고 특히 그녀가 감방에 있을 동안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서현주가 석방되어 나왔을 때 돌아갈 집조차 없기 때문이다.서현주의 친정집 오빠와 새언니들은 그녀가 체포된 이후로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부모님은 비록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연세가 있고 아들, 며느리에게 노후를 맡겨야 하니 딱히 어찌할 수가 없다.주형인마저 서현주와 이혼하면 그녀는 정말 갈 곳이 없을 것이다.주서인은 그가 하예진에겐 그토록 매정하면서 서현주에겐 뭘 이렇게 정의롭냐고 질책했다.“우빈아.”노동명은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우빈을 번쩍 안고 몇 바퀴 돌았다. 신난 아이는 깔깔대며 웃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며 부자 사이로 착각할 지경이었다.노동명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다정하게 웃으며 우빈에게 물었다.“우빈이 좋아?”“네, 너무 신나요.”아이는 너무 웃어서 작은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노동명은 아이의 앙증맞은 빨간 볼이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아이의 작은 볼에 입맞춤했다.이때 우빈이도 의외로 그에게 뽀뽀했다.노동명은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우빈이가 뽀뽀를 해주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오늘 밤엔 세수도 하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