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할머니도 일단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진짜 네가 넘겨받으려면 적어도 몇 년은 더 걸릴 거야. 아무리 총명하고 대단한 맏며느리라 해도 몇 년이란 시간을 공들여야 완벽하게 이어받을 수 있거든. 시간 날 때 짬짬이 장부 보면서 어느 지역에 어떤 산업이 있고 어떤 걸 운영하는지부터 숙지해. 다른 건 천천히 해도 돼.”하예정은 머리를 끄덕였다.“어머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2, 3년 정도 배우면 이어받을 수 있대요.”“그 점포들, 부동산의 수가 그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역대 큰 사모님들의 공로야. 번 돈을 다 쓰지 못하면 또 상가나 부동산을 샀고 다른 재테크에도 투자해서 아무튼 결국 돈이 돈을 낳은 거야.”하예정이 말했다.“태윤 씨가 이렇게 말하니까 부담이 안 될 수가 없네요. 난 투자 쪽에 감히 안목이 있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괜찮아. 점포 몇 개 사는 것뿐이야. 위치가 좋고 전망만 좋으면 바로 사면 돼. 우리 비상금으로 부동산을 매입해도 돼. 우리 집은 딴 집들과 달라. 여자는 절대 투자나 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그런 편견은 없어.”다른 재벌가에서 여자들은 보통 집에서 사모님 노릇만 하고 절대 밖에 얼굴을 내밀며 가게를 운영하지 못하게 한다.그들은 제집 마누라가 얼굴을 내밀고 가게를 열어 장사하는 건 본인들의 무능함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전씨 일가에는 이런 룰들이 없다.장소민네 동서 3인방도 사람들 앞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지만 실은 암암리에 수많은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각계각층으로 돈 버는 장사만 된다면 그녀들은 전부 도전하고 있다.전씨 일가의 미성년자 전지율 도련님은 본인의 이름 하에 몇 개의 부동산밖에 없는데 이는 그가 매년 예금 금리로 매입한 것이다. 또래에 비해 전지율은 이미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분투해도 고작 집 한 채만 사니까.전지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부업도 모두 훌륭한 편이고 전태윤은 더 말할 것도 없다.전태윤 소속의 크
하예정은 그의 어깨에서 일어나 오지랖 넓은 표정으로 물었다.“역술인은 뭐래요? 소지훈 씨 치료 가능하대요? 아니면 그냥 거짓말하는 거래요?”“소지훈 씨 아버님이 조사한 바로 지훈 씨는 거짓말한 게 아니래. 그런 거짓말을 할 엄두가 없대. 소지훈 씨가 아무리 대단해도 아직 세대주는 아버님이라 완전히 방임한 건 아니라서 지훈 씨도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거든.”“그럼 진짜 감정이 없는 병에 걸린 거예요?”전태윤은 머리를 끄덕였다.전태윤은 소지훈에 관한 뒷이야기를 할머니께 매달려 물어봤었다.“그럼... 역술인은 뭐래요?”소지훈처럼 훌륭한 남자가 감정이 없는 병에 걸렸으니 실로 아쉬울 따름이다.이런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진짜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독신의 삶을 끝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안 그러면 소지훈은 그저 남자의 너울을 쓴 내시에 불과할 것이다.모든 면에서 정상인데 유독 여자한테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역술인은 소지훈 씨가 인연이 닿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했어. 다만 그 사람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조금 더 기다려야 한대.”“소지훈 씨랑 동명 씨가 나이대가 비슷하죠?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고요? 그럼 40이 다 돼서야 결혼하고 애 낳는 거 아니에요?”“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필요는 없을걸. 아마 1, 2년 안으로 나타날 거야. 동명이가 지훈 씨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아. 난 왠지 지훈 씨가 동명이보다 일찍 결혼할 것 같은데.”그의 처형은 노동명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게다가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 마음을 얻기가 더 힘들다.심지어 둘 사이에 윤미라가 가로막고 있다.하예정은 언니와 노동명의 일을 떠올리더니 아무 말도 못 했다.“여보, 그 역술인 정말 그렇게 대단해요?”“아무 실력 없이 어찌 감히 할머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겠어?”하예정이 가볍게 웃었다.“헛소리는 무슨, 저번에 만났을 때 당신 그분한테 엄청 깍듯하던데요?”전태윤은 그녀의 볼에 입맞춤하며 눈웃음을 지었다.“그건 역술인이 우리
하예정의 현재 급선무는 시댁의 모든 산업을 파악하는 것이다.나중에 이 집안을 책임질 큰 사모님으로서 미리 준비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다른 데로 주의력을 분산하면 임신에 관한 일로 더는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이다.전태윤은 또다시 그녀를 포옹하며 잠긴 목소리로 몇 마디 속삭였다.하예정은 순간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의 다리를 꼬집었다.전태윤은 맞장구를 쳐주며 큰소리로 외쳤다.“여보, 지금 남편을 암살하는 거야?”“됐네요. 힘도 안 줬는데 뭘 그렇게 오버해요?”전태윤은 박장대소했다.그 시각 성씨 일가.이경혜가 집사와 낯선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이제 막 외출하려던 성소현은 이 광경을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던지고 냅다 앞으로 달려가며 초조하게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엄마가 방금 나가서 바람 좀 쐬겠다고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이경혜는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은 후에야 입을 열었다.“부주의로 넘어지는 바람에 발을 삐끗했어. 다행히 장연준 씨가 제때 발견해서 날 집으로 데려왔어.”성소현은 엄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더러워진 엄마의 옷을 훑어보았다. 이는 영락없이 넘어진 흔적이었다. 게다가 발목이 삐끗하여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그녀는 집사에게 얼른 가서 연고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낯선 남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마워요 장연준 씨.”서른 초반의 장연준은 꽤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 성소현은 그가 눈에 익었지만 두 사람은 진짜 서로 초면이었다. 별장 구역에서 발목을 접질린 엄마를 구해줬다면 장연준도 이 별장 구역에 지낼 것이다.성소현은 우연히라도 그를 마주친 적이 없지만 왜 이렇게 눈에 익은지 모를 일이었다.장연준이 대답했다.“괜찮습니다. 누가 마주쳤어도 다 마찬가지로 아주머니를 집까지 모셔다드렸을 겁니다.”“소현아, 장연준 씨는 태윤의 사촌 동생이야. 태윤이랑 동갑이고.”이경혜가 한마디 보탰다.알고 보니 장연준은 장소민의 친정 쪽 조카였다.장씨 일가는 재벌 가문이지만 매
성소현은 그를 배웅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이에 장연준이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도와야 할 일을 도운 것뿐입니다. 우리 두 집안은 친척이나 다름없으니 소현 씨도 너무 이러실 필요 없어요.”별장 입구에서 장연준은 걸음을 멈추고 성소현을 바라보더니 정장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제 명함이에요.”성소현은 명함을 받아 들고 자세히 들여다봤다.이름 장연준, 현재 장안 그룹 부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대표님은 그의 친형이다.성소현은 장연준의 명함을 챙기고 그에게 말했다.“저희 엄마를 집까지 바래다줘서 너무 고마워요 연준 씨. 나중에 시간 되실 때 꼭 한 번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장연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소현 씨.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성소현은 그를 차까지 바래다준 후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고하고 차가 멀어져갈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지켜봤다.이때 옆 별장에서 나오던 예준하가 마침 이 광경을 지켜봤다.휴가 동안 그는 예진 리조트에 돌아가지 않았다. 가족들에겐 새로 산 별장을 리모델링하는데 옆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일꾼들이 실수를 범할 수 있다면서 공휴일 3일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사실 이 휴가를 빌어 성소현에게 대시하며 제대로 데이트할 생각이었다.그녀에게 고백했지만 거절도, 허락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이에 예준하는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걸 짐작했다.또한 그녀와 한동안 함께 지내면서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예진 리조트는 그의 집이기에 돌아가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돌아갈 수 있다.만약 성소현을 데리고 함께 돌아간다면 가족들이 더 기뻐할 것이다.예준하는 성소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큰형에게만 알렸다. 예준성은 동생이 성소현에게 구애하는 걸 매우 찬성하며 일부러 관성의 사업을 확장하여 동생을 관성에 오래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되면 미래의 아내가 될 성소현에게 대시할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까.예준하는 별장 입구에 서서 장연준의 차가 떠나가는 것도
성소현이 대답했다.“그런 것 같아. 근데 난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그 집 사람들은 너무 겸손하고 조용히 지낸다니까.”예준하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실은 그도 장씨 일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장씨 일가는 관성에 사업을 늘여놓은 게 아니라서 예진 그룹과도 별다른 협력이 없고 온 가족이 너무 겸손하고 조용하게 지내다 보니 예준하는 당연히 그 집안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다.하지만 지금부터는 장연준이라는 사람을 눈여겨봐야 한다.그는 왠지 모르게 장연준이 라이벌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성소현은 예준하가 이미 경계심을 품고 장연준이 라이벌이 되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다는 걸 아예 몰랐다.그녀가 물었다.“3일 공휴일 동안 집에 안 갔네?”예준하가 답했다.“고작 3일이라 다녀오기 귀찮아서 안 갔어. 여기 인테리어도 지켜봐야 하고.”그는 그윽한 눈길로 성소현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될 수 있다면 너랑 함께 가고 싶어.”성소현은 가볍게 웃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두 사람은 아직 연인 사이를 확정한 것도 아닌데 부모님을 뵙는 건 너무 이른 일이다.“나 먼저 들어가서 우리 엄마 연고 발라줘야 해.”“그래.”예준하는 이번에 의외로 뻔뻔스럽게 그녀와 함께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그는 별장 입구에 서서 성소현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천천히 제집으로 돌아갔다.몇 분 후.예준하는 홀로 차를 몰고 나갔다.30분 남짓 지난 후 그는 곧장 돌아왔다.차를 아예 성씨 일가의 별장 입구에 세우고 경적을 울렸다.곧이어 성씨 일가의 도우미가 나와서 그를 보더니 별장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예준하는 차를 몰고 별장으로 들어갔다.그는 주차한 후 방금 사 온 영양제를 가득 들고 도우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예비 장모님이 발목을 접질렸다는데 빈손으로 보러 와서는 안 되지. 이래서 아까 뻔뻔스럽게 성소현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거였다. 영양제쯤은 챙겨와야 하는 법이다.이경혜는 발목에 연고를 다 바르고 아
다만 유청하도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멀리 시집보내는 걸 속상해하시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예준하가 아무리 우수해도 결국 A시 사람이다. A시와 관성은 거리가 너무 멀어 비행기를 타도 두세 시간이 걸린다.만약 예씨 일가가 관성에 거주하고 있고 예준하도 성소현을 좋아한다면 성씨 일가는 이 혼사를 만장일치로 찬성할 것이다. 장연준과 같은 이런 에피소드를 만들 리도 없다.성기현은 아내의 손을 문지르며 어떤 일은 알고만 있으면 된다고, 절대 입밖에 내뱉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일단 묵묵히 경과를 지켜보는 게 상책이다.성기현은 동생 성소현을 제일 아낀다. 그도 예준하가 참 괜찮은 남자란 걸 알고 있지만 여동생을 멀리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 만약 동생이 관성에서 다른 선택권이 생긴다면 성기현은 절대 예준하에게 제 동생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예준하의 압력은 이만저만이 아니다.서로 마음이 통해도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구나.한편 성소현은 아예 생각을 못 했다. 장연준이 엄마를 집까지 모셔 왔으니 온 가족이 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줄로 여겼다.엄마의 말을 들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엄마, 장연준 씨가 엄마를 도와줬고 집까지 바래다줬으니 우리도 무척 고마워하고 있어요. 제가 이미 얘기했어요. 나중에 연준 씨가 시간 되실 때 꼭 밥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고요. 엄마를 도와줬으니 식사라도 대접해야죠 제가.”이경혜가 말했다.“그래, 당연하지. 그때 가서 우리 집으로 식사 초대해. 그렇게 해야 우리 성의를 더 잘 보여주지 않겠어? 나도 한 번 더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할 수 있고. 그런 무기력함이 얼마 만인지 몰라. 수십 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무기력함이었어. 그 당시 정말 속수 무책해지더라고.”“다행히 마침 장연준 씨를 만났지 뭐야. 딴사람들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거만하게 스쳐 지나갔을 텐데 장연준 씨는 바로 차를 세우고 안에서 내려와 내게 괜찮냐며 물으면서 관심해 주더라. 날 집까지 바래다줬고.”이경혜는
예준하는 이경혜의 태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내를 얻으려면 이 정도쯤의 뻔뻔함은 필수니까.그는 여전히 관심 조로 이경혜에게 물었다.“다치신 데 연고는 발랐어요? 저도 약국 가서 발목 접질렸을 때 바르는 약들로 이렇게 사 와봤어요.”그의 말을 들은 성소현이 봉투를 열자 안에 정말 약국 종이봉투가 있었다. 펼쳐보니 낙상 치료와 접질렸을 때 바르는 연고가 가득 들어있었다.“준하야, 우리 집에도 평소에 자주 쓰는 약들을 항상 쟁여두고 있어. 엄마도 이미 약을 다 발랐고.”성소현은 말은 이렇게 해도 예준하가 엄마를 위해 약까지 챙겨오니 나름 마음이 따뜻해졌다.예준하가 그녀의 가족을 중시한다는 것은 그녀를 중시한다는 것과 다름없다.이성에게 소중히 다뤄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전에 전태윤을 짝사랑할 땐 자신을 중시하기는커녕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약을 발랐으면 됐어요. 만약 바르는 약이 아무 효과도 없으면 꼭 병원 가서 뼈를 다쳤는지 CT 사진을 찍어봐야 해요.”이경혜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살짝 접질린 것뿐이니 휴식을 취하고 매일 제때 약을 바르면 돼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준하 씨.”예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소현이 자리에 앉은 후 나란히 그녀 옆에 앉았다.이를 지켜본 이경혜는 그야말로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준하 씨네 별장은 한창 인테리어 할 때라 매우 바쁘시죠? 난 괜찮으니 이만 볼일 보러 가세요. 일부러 보러 와줘서 감사해요. 영양제까지 이렇게 많이 사 오시고, 우리 집에 차고 넘치는 게 영양제인데 아무튼 고마워요 준하 씨, 마음만은 잘 받을게요. 기현아, 준하 씨 배웅해 드려.”예준하가 성소현의 옆에 나란히 앉자 이경혜는 곧바로 축객령을 내렸다.예준하는 줄곧 친절한 미소만 지었다. 이경혜는 그의 강인한 멘탈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아무리 재벌가의 귀한 아들이라고 하지만 올 때마다 이경혜의 쌀쌀맞은 표정을 마주해야 하고 그녀의 눈치도 살
예준하의 큰형 예준성은 애초에 형수님과 혼인신고를 마친 후 형수님이 큰형의 진짜 신분을 알고 이혼을 요구했고 장모님도 줄곧 이혼을 부추겼지만 큰형은 전혀 자존심에 타격을 입지 않았고 실제 행동으로 형수님께 진심을 보여주었다.또한 장모님이 걱정하시는 모든 것들을 해소해 주었고 오늘날 형수님과 이토록 애틋하게 보내고 있다.예준하는 이경혜의 날카로운 눈빛을 처음 마주하는 것도 아니다. 이경혜는 그의 본심을 알아챈 이후로 웃는 얼굴로 대한 적이 없다.그래도 평상시에는 성소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각별히 주의하시더니 지금은 아예 대놓고 째려보고 있다. 예준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아주머니가 이젠 나랑 소현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하셨구나.’성소현을 아내로 들이는 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예준하는 우아한 제스처로 온수를 한 모금 마시고 아주머니에 대한 관심과 걱정도 끊이지 않았다.그는 온수 한 잔을 30분 동안 마셨다.그리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이경혜에게 말했다.“아주머니, 제가 귀찮게 굴었죠. 저는 이만 집안 인테리어를 보러 가야겠어요.”성소현은 엄마가 갑자기 싸늘한 태도로 예준하를 대해서 그가 속상해할까 봐 덜컥 걱정되어 배웅해주려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엄마, 나 준하 배웅하고 올게.”이경혜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결국 말을 아끼고 굳은 표정으로 딸아이가 예준하를 배웅하는 걸 지켜봤다.예준하가 사 들고 온 영양제와 바르는 연고는 그가 집 밖을 나선 후 아들 부부에게 명령했다.“기현아, 청하야, 예준하가 갖고 온 물건들 싹 다 버려. 보기만 해도 열불 나니까.”유청하가 대답했다.“어머님, 준하 씨는 좋은 마음으로 사 온 거잖아요. 소현 씨랑 친구 사이이고 또 우리랑도 새로운 이웃으로 지내서 어머님이 발을 다친 소식을 듣고 이웃으로서 약을 챙겨온 건데 버리는 건 좀 지나친 것 같아요.”성기현도 한마디 보탰다.“소현이랑 준하 씨가 꽤 친해 보이던데요. 아까 준하 씨 편도 들고. 엄마가 이 물건들 버리라고 했다가 소현이가 보기라도 하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