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야, 나 한번 생각해 보고.”성소현은 거절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저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그래 알았어. 천천히 생각해 봐. 급하지 않으니까. 당장은 내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해도 괜찮아. 네가 날 받아줄 날을 기다릴 테니까.”성소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냥 좀 갑작스러워서 그래.”“미안. 갑자기 이런 말 해서.”예준하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는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가 성소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고백을 미루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러다 마침 성소현이 묻자 바로 고백했다.사랑하는 성소현에게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아주 무뎌 주동적으로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으면 죽어도 눈치채지 못한다.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잠시 앉아 있다가 성소현이 먼저 일어섰다.“이제 그만 돌아갈까?”“그래, 그러자.”산책하러 나갈 때, 두 사람은 웃고 떠들었지만 돌아갈 때 두 사람은 별로 말하지 않았다. 주요하게는 성소현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성씨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준하는 인사를 하고 아직 인테리어 중인 옆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리고 5분도 안 되어 성소현이 스포츠카를 몰고 집을 나서 곧장 관성 중학교로 향했다.두 친구를 찾아간 것이다.성소현이 서점에 도착했을 때, 가게에는 심효진의 모습만 보였고 하예정은 어데 갔는지 없었다.“예정이는 어데 갔나요?”성소현이 가게에 들어서며 심효진에게 물었다.“꽃필무렵에 갔는데 곧 돌아올 거예요. 예정이를 찾아온 거예요? ”심효진은 배즙을 짜며 말을 이었다. “배즙 짜고 있는데 한잔할래요? 짜는 김에 같이 짜면 돼요.”“그럼 한 잔 줘요. 올 때마다 밍밍한 물이어서 맛없었거든요.”“물이야 원래 아무 맛도 없죠. 맹물이 싫다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요, 설탕이라도 좀 넣어드리게요. 단맛이 나고 좋잖아요. 여기는 서점이라 책 말고는 문구밖에 없거든요.”성소현은
심효진의 말에 성소현은 웃음이 나왔다.“하하, 효진 씨 입에서나 이런 말을 듣죠, 다른 사람들이 날 뭐라 하는지 알아요? 야만인 아가씨래요. 재벌 집 사모님들도 결코 날 며느릿감으로 고려하지 않는대요. 아무래도 나와 같은 며느리는 억누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성소현은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데다 강한 친정 식구가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따라서 웬만한 부잣집 사람들은 정말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비슷한 레벨의 가문 도련님들은 이미 결혼을 하였거나 그녀보다 어리다.성소현은 자신보다 어린 남자는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그건 다 안목이 없어서예요. 소현 언니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문을 믿었기 때문이죠. 나와 예정이는 언니를 처음 봤을 때, 진실하고 솔직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어요.”심효진은 다시 주방에 가서 주스를 짜며 말했다.“소현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건 우리가 언니랑 친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성소현도 주방에 따라 들어와 심효진이 주스를 짜는 것을 지켜보았다.“누가 고백했는지 말해봐요. 혹시 예씨 가문의 다섯째 도련님인가요?”심효진이 물었다.“...어떻게 알았어요”예준하가 성소현에 대한 마음을 성소현 본인 외에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그에 심효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준하 씨가 소현 언니한테 너무 잘해줘서요. 언니랑 만날 기회를 더 만들고자 거금을 들여 언니 집 옆의 별장을 샀잖아요, 예씨 집안 도련님이 집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관성에는 좋은 별장이 많은데, 하필이면 중고 집을 사겠어요? 다 그 목적이 있어서죠.”“...그러니까 준하가 그 별장을 샀을 때부터 그 마음을 짐작한 거였네요. 나는 그때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요. 단지 그 별장은 우리 집에서도 사고 싶어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이 사들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리모델링 시안에 대해서도 나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것도 별생각 없이 의견을 말해줬거든요.”“그거야 소현 언니랑 가까운 데서 살려고 바로 옆집을
성소현은 웃으며 말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효진 씨가 네가 곧 돌아올 거라고 배 주스를 한 잔 준비해 줘야겠다고 하자마자 네가 들어왔어. 우리 둘이 몰래 네 험담을 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효진이가 내 발소리를 들은 게 분명해요.”심효진은 주스를 그녀들에게 건넸다.하예정은 주스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가서 내려놓고는 평소에 심효진과 밥을 먹을 때 쓰던 작은 테이블을 옮겨와 세워놓았다.세 사람은 각자 주스를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예정아, 꽃필무렵에 운초 씨를 찾아간 거야?”성소현은 물었다. “어땠어? 운초 씨도 참 대단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도 계부와 친어머니를 고소할 수 있다니.”“꽃다발을 사서 태윤 씨에게 보냈는데 운초 씨는 못 봤어요. 하루 종일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점원이 운초 씨가 돌아오면 전화할 거라고 하던데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네요. 전화번호까지 바꿨고요.”하예정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큰형수 노릇 하기 어렵네요.”그녀가 여운초를 찾아간 것은 전이진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였다.전이진은 자신이 실수한 것 때문에 대신 한번 가봐달라고 부탁했다. 성소현은 웃으며 말했다.“어쩔 수 없지 뭐. 할머니가 여운초 씨를 아내감으로 선택한걸. 그나저나 구애하는 건 이진 씨의 일인데 왜 네가 갔어?”“이진 도련님이 운초 씨에게 진실을 말한 후부터 온초 씨가 계속 피해 다녀서 나에게 도움을 청한 거예요. 그저 몇 마디 설득하면 될 거로 생각하고 승낙했죠.”하예정은 또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운초 씨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카톡으로 연락할 수도 없고, 전화번호가 바뀌어 찾을 수도 없어요. 언니는 오늘 어쩌다가 여기에 올 시간이 생겼어요?”성소현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하예정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성소현이 얼굴을 붉히다니.“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빨개요.”하예정은 곧 성소현에게 다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예요?
성소현이 하루라도 시집가지 않으면 하예정은 자신이 그녀의 행복을 빼앗은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성소현이 그렇게 좋아한 전태윤에게 시집간 사람은 하예정이었으니.그래서 하예정은 성소현이 빨리 자신의 짝을 찾기를 바랐다. 그녀가 행복한 모습을 보아야 하예정의 마음도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 테니까.비록 성소현은 한 번도 하예정을 탓한 적이 없었고 하예정이 전태윤을 빼앗아 간 것으로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그래서 성소현도 이건 둘 사이에 인연이 없는 것일 뿐, 하예정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었다.전태윤은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고, 하예정이 아니라도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났을 것이라고 했다.다른 사람이 아닌 하예정이 전태윤의 아내가 된 것이 다행이었다.오히려 도도하고 차갑던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한 후로부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처형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며 즐거울 따름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예정아.”성소현은 하예정의 손을 잡았다.“나한테 미안하다는 생각 마. 넌 나한테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으니까.”그녀는 하예정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나 꼭 행복할 거야. 난 결혼에 관해서는 절대 소홀하지 않아. 꼭 좋은 남자에게 시집갈 거야. 그러니 걱정 마.”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성소현은 주스를 마시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후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저녁 무렵, 그녀는 떠났다.같은 시각, 전씨 그룹.퇴근 시간이 되자 전태윤은 큰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이건 아내가 오후에 보내온 꽃다발이었다.비록 남자로서 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선물한 거라면 풀 한 포기라도 보배처럼 여겼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려 할 때 마침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소정남을 만났다.소정남을 보고 전태윤은 일부러 꽃다발을 꼭 끌어안았다. 그가 빼앗을까 봐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주의를 끌려고 한 것이다.“예정 씨가 보낸 거지? 참 이쁘네.”전태윤은 도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맞아, 예정이
소정남이 말했다. 그는 전태윤이 계속 꽃다발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도록 화제를 바꾸었다.“...저녁에 약속 있는 거 잊지는 않았지?”친구가 자랑하는 모습이 마치 꽃다발을 처음 받아보는 듯싶었다.“지금 와이프 마중 갈 거야. 오늘 밤 나랑 함께 가기로 했거든.”소정남은 가볍게 응했다.“한 주만 더 근무하면 난 휴가야.”소정남과 심효진의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다.“결혼식 날까지 보름이나 남지 않았어?”소정남은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그는 결혼식 전날까지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보름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말하면 두 주일밖에 안 되잖아. 미리 휴가 내면 안 돼?”이에 전태윤은 따로 할 말이 없었다.“전 대표님, 소 이사님.”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가자 모두 그들을 보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같이 갈까?”전태윤은 자신의 차 앞에서 소정남을 향해 눈짓하며 한마디 물었다.“좋아. 나도 마침 내 와이프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 밥을 먹을 생각이야. 결혼 후 함께 살 집도 구경시켜 줄 겸.” 소정남은 결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 계획이 아니었다.심효진과 둘만의 생활을 즐길 생각이었다.다행히 부모님도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그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생각만 있다면 부모님은 다른 어떤 일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너 피크 별장을 신혼집으로 하려고?”두 사람은 함께 전태윤의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소정남이 몰고 온 포르쉐는 전태윤의 경호원 한 명에게 부탁해 운전하게 했다.“응. 피크 별장은 네 집에서도 멀지 않잖아. 효진이와 예정 씨는 친한 친구니까 피크 별장에서 살면 둘이 만나기도 편리할 거야.”소정남은 집을 살 때면 언제든지 전태윤을 따라 샀다.전태윤이 어디에 집을 사면 그도 따라서 한 채를 사곤 했다. 가까이에서 살면 밥을 얻어먹기도 편리하니까.“난 네가 다른 집을 신혼집으로 정하면 너랑 같은 곳에 사 놓은 집을 리모델링해서 신혼집으로 삼을 생각이었어. 네가 피크 별장에서 살겠다고 하니 잘됐네. 나 그 집에서 거의 10년이나 살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누구인지 보지도 않고 먼저 소정남에게 말했다.“예정이한테서 온 전화가 틀림없어.”소정남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나도 지금 아주 행복하거든. 내 결혼식은 네 앞에 있으니까 내 앞에서 자랑해도 나한테 자극 줄 수 없어.”전태윤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자랑한 거 아닌데? 부부간의 일상일 뿐이야.”그가 하예정을 데리러 가거나 하예정이 그를 데리러 오는 건 그들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휴대폰을 꺼낸 전태윤은 ‘예준하'라고 뜨는 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하예정의 전화인 줄 알았는데, 예준하였다.눈치가 빠른 소정남은 전화 온 사람이 예준하인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전태윤이 노려보자 아예 얼굴을 돌리고 계속 웃었다.전태윤은 결국 예준하의 전화를 받았다.“전 대표님.”전태윤은 나지막이 그에 응했다.상대방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예준하가 웃으며 사과했다.“제가 이 시간에 전화를 드려 식사를 방해했죠? 정말 죄송합니다.”“아직 식사 전이어서 괜찮아요.”전태윤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응하고 있다.“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죠?”분명 공적인 일은 아니다.공적인 일이라면 먼저 비서에게 연락했을 것이다.전태윤의 개인 번호로 직접 연락했다는 것은 사적인 일이란 뜻이다.사적인 일이라면 아마도 성소현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그저 오늘 저녁에 따로 약속이 없어 한가하던 참이라 식사를 청하고 싶어서요. 아직 식사하지 않으셨다니 이따가 좀 뵐 수 있을까요?”전태윤은 조용히 말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제가 다른 식사 약속이 있어서요. 다음에는 미리 말씀 주시면 시간 비워놓을게요.”예준하는 아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참 공교롭군요. 그럼 언제쯤 시간 되실까요? 함께 식사 자리를 한번 가지고 싶은데...”“준하 씨는 요즘 A 시로 돌아갈 생각이 있으신가요? 다음 주에 와이프를 데리고 A 시로 여행을 갈 예정인데, 그때 기회가 있다면 시간 잡아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예준하는
“우리 전씨 일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랑 네가 없어도 회사가 영향받을 일 없어. 게다가 나도 그저 며칠만 외출하는 것뿐이야. 전씨 그룹은 성숙한 대기업이고 나름대로 성숙한 관리 모드가 있어 너와 내가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거야.”이때까지 다스려온 중상층 관리자들이 회사를 잘 지킬 것이다.소정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웃었다.“날 계속 회사에 남겨 일을 시킬 생각만 아니면 돼.”전태윤은 웃음이 나왔다.“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널 그 정도로 부려 먹었다고 그래?”“그래, 그래. 넌 절대 날 부려 먹은 적 없어, 모두 내가 자원해서 한 거야.”“...”소정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널 위해 일하기 잘한 것 같아. 넌 행복을 얻은 후에도 날 잊지 않고 효진 씨랑 선을 이어줬잖아. 역시 우리는 좋은 친구야.”“넌 입도 참 꿀 바른 것처럼 말은 잘해. 어쩐지 효진 씨가 네 말에 홀딱 넘어가 빨리도 네 프러포즈를 받아줬다고 하더라니.”“빠르지도 않아. 나도 효진 씨랑 반년 동안 사귀어서야 결혼했잖아. 난 당장이라도 아내와 아이를 품에 안고 싶은걸.”소정남은 혼인신고를 하고도 아직 결혼생활을 누려보지 못했다.심효진은 계속 심씨 집에서 살고 있다. 소정남은 매일 같이 있기를 원했지만 처가에서 묵을 담은 없었다. 다행히 결혼식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혼식 후에는 어찌해도 좋았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금세 관성 중학교에 도착했다.수업이 끝난 지도 한참 되었지만 교문 앞에는 여전히 많은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부모가 아이들을 데리러 온 것이라 차도, 사람도 많았다.전태윤의 차량 행렬은 묵묵히 다른 차들을 피해 가장 외진 곳에 차를 세웠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서이다.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 분부했다. 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차에서 기다려. 따라올 필요 없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따라오면 너무 눈에 띄어.”둘은
소정남은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이어 심효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태윤이랑 함께 왔어요. 태윤이는 자기가 너무 차가워서 손님들이 놀라서 달아난다며 가게 문 앞에 서있어요. 저렇게 서있으면 카메라 설치하는 것보다 더 효과 좋을걸요.”심효진은 피식 웃었다.하예정도 효진 부부의 대화를 듣고서야 전태윤도 왔다는 것을 알았다.고개를 내밀고 밖을 보니 크고 건장한 모습의 전태윤이 눈에 들어왔다.두 사람은 퇴근 후에 왔기 때문에 가게가 가장 바쁠 때는 이미 지났다.전태윤은 가게 앞에 몇분 서있다가 들어왔다.“여보, 이젠 퇴근하는 거야?”전태윤이 다정하게 묻자 하예정은 시간을 보더니 대답했다.“네, 거의 다 됐어요.”그러고는 또 심효진에게 말했다.“효진아, 나 먼저 갈 테니까 잠시 후에 가게 문을 닫고 가줄래?”심효진은 시원히 대답했다.“그래.”하예정은 카운터를 돌아서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며 옅은 화장을 한 후에야 나왔다.가방을 들고 앞으로 나가 전태윤의 팔을 잡고는 말했다.“여보, 우리 가요.”그녀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심효진과 소정남도 하예정 부부를 향해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배웅했다.두 사람이 멀리 가자 심효진은 시선을 돌려 소정남에게 말했다.“예정이는 항상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어요. 태윤 씨의 정체를 처음 알았을 때 잠시 열등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점점 더 자신감이 생기고 있네요.” “맞아요, 전씨 일가 사모님이라는 신분에도 적응했고 태윤이의 사교 영역에도 적응했네요. 태윤의 사랑을 받고 있고 시댁 식구들의 사랑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없을 리가 없죠.”소정남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예정을 얕본 적이 없다.그리고 언니 하예진에 대해서도 감히 얕보지 못했고 오히려 존경했다. 하예진은 열다섯 살 때부터 여동생을 데리고 혼자 살았고 비록 첫 번째 혼인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걸어 나왔다.하예정 자매는 모두 훌륭했다.자기의 두 친구가 모두 이들 자매에게 푹 빠진 사실에 대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