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씨네도 방금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하예정은 마음이 복잡해 저녁 식사 후 심효진을 끌고 근처를 걸었다.“너 전에 시댁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너 스스로 자신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는 거 아니야?”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다. 심효진은 또한 하예정과 전태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녀는 하예정으로부터 전씨 집안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재촉은 하지 않았어. 그냥 이렇게 오랫동안 임신 못 한 게 내 몸에 문제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닌지 걱정돼서 말이야.”하예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도 난 너무 신경 쓰여. 시댁이 재벌이 아니라 보통 가정이라도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어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걱정하기 마련이야. 피임하지도 않았는데...”심효진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보니 대부분은 결혼 후 바로 임신 소문이 돌았고 더욱이는 임신하고서야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한 지 반년이 넘어서도 임신하지 않은 데다 피임 조치도 하지 않은 걸 알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그녀는 친구의 스트레스를 이해한다.“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너무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는 건 알아. 너 스트레스가 심하면 임신하기가 더 힘들 거야. 난 네 문제가 아니란 걸 믿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하예정은 또 한숨을 쉬었다.“효진아, 난 지금 임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게 아니야. 아까 태윤 씨랑 싸웠는데 글쎄 날 제쳐놓고 혼자 가버리는 거 있지. 떠나기 전 태윤 씨의 표정과 말투를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심효진은 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위로했다.“태윤 씨의 태도를 보면 네가 화낼 만도 해. 내가 듣기만 해도 너 대신 화가 나. 오늘 밤엔 우리 집에서 자는 거다. 태윤 씨가 데리러 와도 바로 같이 돌아가지 말고. 한번 속 태워봐라 그래. 내가 엄마 아빠한테 집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
따르릉!심효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의 이름을 본 그는 하예정에게 말했다.“정남 씨에게서 전화가 왔어. 내 생각엔 너희 집 태윤 씨가 또 정남 씨에게 도움을 청한 것 같아.”하예정은 담담하게 말했다.“도움을 청해도 상관 안 해. 자기만 성깔이 있는 줄 알아? 나도 성깔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심효진은 당연히 친구의 편이다. 그녀도 친구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고 명랑하기만 했던 친구가 지금 자신이 불임일까 봐 걱정하고 있다. 이건 시집간 상대가 전태윤이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무형 스트레스 때문이다.심효진은 그런 친구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이참에 친구가 남편을 잘 다스리도록 도우려 했다.따르릉!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심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효진 씨, 뭐 해요? 나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이제야 내 전화를 받아요? 난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만약 전화를 계속 안 받으면, 바로 운전해 효진 씨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소정남의 웃음이 섞인 말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고 두 사람은 성격도 잘 맞아 소개팅부터 약혼까지 한 번도 갈등을 겪은 적이 없다.때때로 심효진은 자신의 사랑이 너무 순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친구 부부가 항상 작은 갈등으로 기분 나빠하고 억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또 본인과 남친의 평온한 감정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휴대폰을 곁에 두지 않았어요. 샤워하려고 하던 참에 전화가 와서 바로 욕실에서 뛰쳐나와서 받은 거라 속도가 늦었어요.”그녀는 거짓말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나도 보고 싶어요. 매일 24시간 동안 정남 씨만 생각하는걸요. 잠들어 꿈을 꿔도 정남 씨 꿈을 꿔요.”소정남은 전화 건너편에서 이 말을 듣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하예정은 친구가 소정남과 통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그녀와 남편은 금슬이 좋지만 두 사람 모두 달콤한 말을 잘 못하는 타입이다.“효진 씨, 이젠 와이프라고 불러도 돼
“조사하지 않았어요?”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조사하지 않았어요. 효진 씨가 말했잖아요, 효진 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손에 쥐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따로 조사하지 않아요. 그저 예정 씨가 당신 집에 있을 거로 추측했어요. 예정 씨는 효진 씨와 가장 친한 사이라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효진 씨를 찾아가곤 하잖아요.”“예정이 우리 집에 있는 건 맞아요. 태윤 씨에게 말해줘요, 예정이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있을 거라고.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소정남은 대답했다.“알겠어요. 내가 곧 전할게요. 여보, 나한테 할 말 또 없어요?”“태윤 씨의 일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따라 배우지 말고요.”그는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반면 소재로 삼고 있어요. 태윤이는 예정 씨를 화나게만 하는걸요. 난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해요.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안심이에요. 정남 씨, 사랑해요. 죽을 만큼 사랑해요.”“저도요.”심효진은 말했다.“먼저 태윤 씨에게 전해요. 조급해 안달이 나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예정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항상 작은 일로 다툰다니까요. 나 이만 샤워하러 갈게요.”소정남은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고는 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자 그는 입을 열었다.“네 와이프가 또 내 와이프를 독차지하고 있어.”“당장 우리 예정 씨를 데리러 갈게. 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말이야.”전태윤도 하예정이 심씨 집안에 있을 거로 추측했다.처형에게 먼저 물어봤는데 동생이 집에 없다고 하니 무조건 심효진의 집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성소현 쪽에는 묻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우리 효진 씨가 말하는데 자기 집에서 며칠 묵을 거라고 했어. 일 없으면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 와이프인데 당연히 내 옆에 같이 있어야지. 나 당장 데리러 갈 거야.
하예정은 몸을 돌려 심효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말했다.“이제 진짜 잘 거야. 안 뒤척일게.”심효진은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했다.“너흰 부부잖아. 태윤 씨도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 이 정도의 모순은 곧 풀릴 거야. 마음 편히 자. 잠을 잘 자야 삶의 우여곡절을 마주할 힘이 생기잖아.”“네가 있어 다행이야. 기분이 나쁠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아.”“우리 얼마나 오랜 친구인데. 나도 기분 안 좋으면 너한테 하소연하잖아. 빨리 자, 너무 생각하지 말고.”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친구의 위로에 하예정은 천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전태윤이 심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고요했다. 모두 이미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그는 심씨네 집 앞에 차를 세웠다.차를 세운 후 그는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하예정은 이미 잠든 데다 휴대폰도 무음 모드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누구에게서 온 건지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누구시죠? 무슨 생각이에요 도대체? 한밤중에 웬 전화죠? 당신은 안 자도 난 자야겠어요! 잠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몰라요?”“...효진 씨, 저예요.”“누구라고요? ...태윤 씨?”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저예요.”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하예정을 향해 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금살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정말로 전태윤의 차가 자기 집 앞에 멈추어 있었다.“한밤중에 쉬지 않고 웬 전화에요?”“지금 효진 씨 집 앞이에요.”“아, 그래요?”“효진 씨, 예정이 잠들었어요? 불러줄 수 있어요?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어요.”심효진은 말했다.“지금이 몇 시인데요. 예정인 이미 잠들었어요. 이틀 후에 다시 데리러 와요.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내 약혼식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씨 일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예정은 반드시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갈 테니까.전태윤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문 넘을 준비를 했다.심씨 집안의 개 두 마리가 구석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모른 채.그가 문 위로 올라가 문을 넘어가려고 밑을 바라보자 큰 개 두 마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놀란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질 뻔했다.그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개를 키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차를 몰고 집 문 앞을 지나갈 때 다른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심씨네 집에서도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생각 못 했다.그가 차를 심씨 집안의 문 앞에 세울 때 다른 집 개들은 짖는 것을 멈추었고 심씨네 집에서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그래서 심씨 집의 개가 소리 없이 잠복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개가 사람을 문다고... 그가 밑을 보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면 두 개한테 물렸을지도 모른다!멍멍!녀석들은 전태윤이 뛰어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짖어대기 시작했다.전태윤은 집안의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차 앞으로 돌아와 차에 기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를 찾아 피려다가 담배를 찾지 못했다.그는 하예정이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 담배를 거의 끊은 탓에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누구세요?”심효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와 정원의 불을 모두 켰다. 개들이 문밖을 향해 정신없이 짖어대는 것을 보고 계단을 내려가 살펴보려 했다.전태윤은 그제야 대문 가까이 다가가 나은서에게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저예요, 태윤이에요.”나은서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예정이를 집에 데려가려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그녀는 문으로 다가갔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예정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누웠어요.
전태윤은 나은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심씨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차로 돌아왔다.차에 돌아와서도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있더니, 결국 차를 몰고 떠나갔다.다음 날 아침 일찍 전태윤은 심씨 집으로 달려갔다.심씨 집 마당의 대문은 열려있었고 개 두 마리는 목줄에 묶여있었다.전태윤은 조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늦게 온듯싶다.그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을 청소하던 효진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효진이랑 예정이, 예진이 가게로 갔어요.”“...간 지 얼마나 됐죠?”“20분 정도 될 거예요. 예정이가 일어나자마자 예진이 가게에 가서 우빈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해서 일찍 나갔어요.”전태윤은 나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말했다.“당장 처형의 가게로 가겠어요.”나은서는 가볍게 응했다.전태윤은 곧 심씨네 집을 떠났다.그는 가는 길에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처형,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이죠? 아, 예정이를 찾는 거예요? 예정이랑 효진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요.”하예진은 그들 부부가 또 다퉜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일이 바빠 바로 휴대폰을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태윤이한테서 전화가 왔어.”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준 후 그녀는 또 서둘러 일하러 갔다.하예정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전태윤은 전화 저편에서 급히 말했다.“여보, 전화 끊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어! 당신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나 피하지 말아줘 제발. 우리 이따가 얘기 좀 해. 고향에 내려가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 싶으면 내가 같이 갈게.”하예정은 마침내 담담하게 말했다.“전 도련님께서는 바쁘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전 도련님의 시간을 허비하겠어요? 저와 함께 가줄 필요 없어요.”“여보, 내가 잘못했어.”아내의 비꼬는 말을 들
그녀는 전태윤을 향해 확신하지 않는 듯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전태윤 씨인가요?”전태윤의 눈은 반짝였다. 여운초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아냈다.“운초 씨.”그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운초 씨는 이진에게 꽃을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여운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진 도련님이 제 가게에서 꽃을 주문해서 지금 가져다주러 왔어요.”전태윤은 그녀에게 물었다.“혼자 왔어요?”“네.”전태윤은 순간 전이진이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초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꽃을 가져오라고 하다니... 하지만 그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이건 전이진의 일이기에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었다.“제가 위층으로 데려다줄까요?”“고마워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는 두 번이나 온 적이 있기에 길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도 전이진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전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사무실 빌딩으로 들어갔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서야 여운초는 비로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두 명의 프런트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미소로 회답하였다.10분 후.여운초는 전이진의 사무실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서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이번에는 문이 열렸다.전이진은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진아.”그녀는 전이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자, 여기 네가 산 꽃다발. 6만 원이야.”그는 꽃다발을 받지 않고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녀에게 말했다.“들어와.”여운초는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닫을 수 있으면 닫아줘.”그녀는 말에 따라 문을 손으로 더듬어 만진 후 그를 도와 문을 닫아주었다.“이리 와서 앉아.”전이진은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소파 등받이를 더듬으며 자리를 찾았는데 갑자기 따뜻한 큰
“아니.”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들이 상의한 대책은 나한테 안 알려줘.”그녀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날 밤 엄마가 지팡이를 방구석에 내팽개쳤고 다음 날 도우미가 그녀에게 돌려줬다.사모님 방문 입구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지팡이를 내던진 듯싶었다.여운초가 지팡이를 건네자 전이진은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칠 줄 알고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덥석 잡았는데 뜻밖에도 여운초가 손을 놓았다.전이진은 그제야 그녀가 지팡이를 그에게 건넨다는 걸 알아챘다.“이 지팡이 속에 빈 부분이 있는데 그 안에 녹음 펜이 숨겨져 있어.”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전이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 달라진 그녀의 눈빛을 발견하고 나서야 장난기를 거두었다.그는 지팡이를 높게 들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다가 텅 빈 부분을 힘껏 비틀고 아래로 향하자 정말 안에서 녹음 펜 한 대가 떨어졌다.“그 별장은 원래 내 건데 아직 내가 통제할 순 없어. 내 집이지만 내겐 위험한 존재야. 꽃필무렵도 내 가게이긴 하지만 가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위험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네 사무실이 제일 안전한 것 같아.”그래서 전이진이 또 전화해 그녀에게 직접 꽃 배달을 시켰을 때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곧바로 지팡이를 챙기고 온 거였구나.전이진 앞에서 까밝히기로 한 것도 그녀가 전이진을 믿고 있단 표현이다.어쨌거나 그가 여운초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어떤 의도로 그녀에게 접근하는지는 몰라도 목하 그녀가 두 번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전이진이다.또 믿을만한 한 명은 바로 하예정이다.“이 녹음 펜에 다 뭐가 녹음됐어? 지팡이에 넣어둔 지는 얼마나 됐어?”여운초는 잠시 침묵한 후 그에게 대답했다.“연회에 가기 전에 엄마가 날 데리고 참석할 걸 알고 몰래 지팡이에 넣어뒀어. 뭐가 녹음됐는지는 나도 몰라. 집에서도, 가게에서도 감히 녹음 펜을 꺼낼 엄두가 안 났거든.”전이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너 뭐 아는구나.”“아빠의
그 뒤로 이윤미가 그녀의 오빠들과 내연녀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몇 명의 형수님들이 속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형수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 후로 이윤미의 오빠들과 형수님들이 말다툼하기 시작했다.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고현은 이윤미가 잘했다고 생각했다.바람을 피운 사람이 자기 오빠라고 감싸면서 오빠들을 도와 형수님들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자기 남편이 바람피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지만, 본인만 모른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때 전호영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군호 씨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걸요. 이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면 정군호 씨는 틀림없이 나가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이 대표님을 도와야 한다고 봐요. 못 봤으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현장을 목격했잖아요. 이 대표님을 만나면 알려줘야 해요. 어쨌든 우리 형수님의 이모시기 때문에 우리 형수님의 친척이나 다름없죠. 안 그래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호영 씨도 정말 나쁘네요. 이씨 가문에서 난리가 났으면 좋겠죠? 그런데 저도 호영 씨를 지지할 거에요. 이러고 보니 저도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봐요.”“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이죠. 정군호 씨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보세요. 정군호 씨가 잘못한 것을 우리가 바로잡아준 거죠. 이 대표님을 위한 것이지 모함하거나 억울하게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저처럼 일편단심인 남자는 정군호 씨의 이런 행동이 너무 부끄러워요. 만약 집안의 아내가 싫으면 이혼할 것이지... 이혼하기는 싫고 또 밖에서 예쁜 여자들이랑 놀고는 싶고... 두 마리 토끼는 다 잡을 수 없는 법이죠. 하늘 아래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이 있겠어요?”전호영은 정군호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영상을 찍었다. 그리고 하루 호텔도 카메라가 있었기에 정군호가 내연녀를 껴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이 꼭 찍혔을 것이다.전호영이 정군호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아니었다.“이 대표님이 그토록 기가 센데
“저는 배려심이 깊은 신사에요.”고현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면서 전호영의 신사다운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호영이 고현의 손을 잡고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자 고현은 거절했다.전호영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시종 전호영과 연인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고현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전호영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앞으로나란히 몇 걸음 걷더니 고현이 갑자기 멈추었다.“왜 그러세요?”전호영이 물었다.‘설마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만났나?’전호영은 앞을 보았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여자들을 보지 못했다.“정군호 씨예요.”고현은 낮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뒤 전호영을 잡아당겨 차 뒤로 숨었다. 그녀의 경호원 팀은 고현이 위험한 줄로 알고 본능적으로 최대한 빨리 고현의 앞으로 돌진하며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얼른 숨으세요. 저를 막지 마시고!”고현은 나지막이 경호원 팀에게 말했다.고현이 누군가의 가십거리를 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고현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 늙은 남자는 천가 같은 얼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그 여성의 곁을 지나가는 남자라면 모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번 더 쳐다보았다.“저 남자는 이윤미의 친아버지이자 이 대표님의 남편인 정군호 씨예요.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저도 잘 몰라요. 놀랍게도 밖에서 내연녀를 만나고 있었네요. 만약 이 대표님께 들킨다면 정말 정군호 씨를 죽여놓을지도 몰라요.”이은화의 남편이라는 말을 들은 전호영은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정군호와 내연녀의 동영상을 찍었다.그리고 말했다.“이 대표님은 우리 큰형의 결혼식에 가신 뒤로 계속 관성에 남아계시거든요. 아마도 정군호 씨는 이 대표님이 없는 틈을 타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네요”고현도 말을 이었다.“이 대표님께서 남편을 너무 엄격하게 단속하니까 정군호 씨도 아마 진짜로 바람 피우지는 못할 거에요. 기껏해야 지
고현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저는 어른이 된 후로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어요. 바빠서 미치겠는데 언제 시간을 내서 놀러 가겠어요? 하지만 출장 다니면서 많은 곳은 가봤어요.”“신혼여행은 어디 가고 싶어요?”전호영이 그녀에게 물었다.고현이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말을 이었다.“저는 물이 맑고 공기가 좋은 산을 좋아해요. 조용하거든요.”“제가 잘 연구해서 산 좋고 물이 맑은 조용한 곳을 찾아볼게요.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우리 둘만의 세상을 잘살아 봐야죠.”알고 보니 고현은 산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곳을 좋아했다.전씨 가문의 서원 리조트가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고 평소에도 매우 조용한 곳이었다.“서원 리조트를 좋아해요?”“좋아하죠.그럼 서원 리조트에서 신혼여행을 즐기려고요?”전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고요. 그곳은 우리 미래의 집이고 신혼여행은 당연히 딴 곳으로 가야죠.”이때 고현이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지금 시집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데 벌써 신혼여행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네요. 호영 씨와 함께하면 쉽게 호영 씨 의도대로 따라간단 말이죠. 저의 총명함과 자제력 모두 호영 씨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니까요.”“현이 씨가 아직도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니. 제가 아직도 부족한가요?”전호영은 자신이 고현을 오랫동안 쫓아다녔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고현을 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시집을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하여 전호영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는지 알고 싶었다.“아니에요. 충분히 잘하셨어요. 우리 데이트도 별로 안 하고 평소에도 일하느라 바빴던 것 같아요. 아직 결혼까지 할 정도로 감정이 깊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말처럼 하루 못 보면 일 년을 못 본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저는 몰라요.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 제가 호영 씨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아요. 어
경호원 팀은 그들의 전 대표님이 전호영에게 떠밀려 마이바흐 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버젓이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차는 곧 고씨 그룹을 빠져나왔다.고빈이 중얼거렸다.“호영 씨는 정말 내가 본 형부 중 가장 오만방자한 형부였어. 처남인 나에게 조금도 아부하지 않고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다니.”고빈은 중얼중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만약 고빈이 정말 친형이 있다면 그는 전호영이 그의 친형을 해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따라갔을 것이다.하지만 그의 친형은 사실 여자였다. 그의 누나 고현은 시집가야 하는 여자였다. 전호영은 그의 누나와 어울리는 남자였기 때문에, 또 전호영이 고빈의 부모님께 고빈이 너무 방해한다고 고자질하면 안 되었기에 고빈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지금 고씨 가문에서 전호영은 고현 남매보다 체면이 훨씬 섰다.“고빈 씨가 안 따라왔죠?”전호영은 차를 몰면서 조수석에 앉은 고현에게 물었다.고현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이내 말을 이었다.“고빈이는 입만 살아서 그렇지 정말 따라오지는 않을 거예요. 호영 씨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고빈의 고자질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고빈은 저보다 10분 먼저 태어났지만 지금 정해진 여자친구가 없거든요.”“저도 호영 씨랑 짝을 지으니 저희 부모님의 눈길도 자연스레 고빈의 몸으로 옮겨졌어요. 호영 씨가 제 동생의 고자질하면 저희 부모님은 그를 욕하다가 결국 결혼 재촉 문제로 돌아가거든요. 제 동생은 결혼 재촉을 엄청 무서워하거든요.”고빈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고정된 여자친구를 찾지 못한 일에 관해 고현도 마음이 조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녀에게는 전호영이 있었지만, 고빈의 짝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예전에는 고현은 고빈과 이윤미를 맞세워주려고 했지만, 고빈은 이윤미가 재미없다고 느꼈고 이윤미 또한 고빈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이윤미 곁에 방윤림이 있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었다.“저도 항상 고빈 씨의 고자질하고 싶지 않아요.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