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의 조각 같은 얼굴이 심하게 어두워졌다.“엄마, 아빠도 손주를 안길 바라고 계시는 거죠?”장소민은 입을 열었다.“우리가 손자를 안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재촉한 적 없어. 이 일을 우리 탓으로 돌리지 마. 우리는 예정이 앞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한 적이 없어.”“예정이가 스트레스가 커요.”전태윤도 본인이 아내가 건강검진을 받자고 했을 때 조금 예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아내가 아이를 가지는 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해 걱정이 앞선 나머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예정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면 예정이에게 운명에 맡기라고 말해줘. 우리는 재촉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임신이 어려워지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고 해. 너희 둘이 같이 있은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잖아. 2, 3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도 임신하지 못하면 그때 다시 검사를 받으면 돼.”“맞아요. 그래서 저도 따로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저와 예정의 몸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래도 예정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거예요. 저도 예정이와 말했어요, 정남과 효진 씨의 약혼식에 참가한 후에 기분 전환할 겸 함께 여행 가자고.”장소민은 아들이 2~3년이 지난 후에도 임신하지 못해도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말라는 말뜻을 알아차렸다.‘이 녀석, 속셈은 많아서.’그들은 시부모로서 아이에 대해 재촉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들 부부는 아직 결혼식도 치르지 않았기에 아이를 급하게 낳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됐어. 너희 부부의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 엄마가 약속할게, 10년 동안 재촉하지 않겠다고. 아이를 낳든 말든 너희 마음대로 해.”얼굴이 한껏 밝아진 전태윤은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엄마, 고마워요.”“고맙긴, 빨리 돌아가서 예정이에게 사과해. 앞으로 그렇게 성질부리고 그냥 가버리면 안 돼. 예정이가 너한테 이러면 넌 미쳐버릴걸? 하도 예정이의 성격이 좋아서 너를 양보하는 거야.”장소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그럼 이만
심씨네도 방금 저녁을 먹고 난 뒤였다. 하예정은 마음이 복잡해 저녁 식사 후 심효진을 끌고 근처를 걸었다.“너 전에 시댁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하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너 스스로 자신에게 너무 스트레스 주는 거 아니야?”두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다. 심효진은 또한 하예정과 전태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녀는 하예정으로부터 전씨 집안에서 아이에 대해 재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재촉은 하지 않았어. 그냥 이렇게 오랫동안 임신 못 한 게 내 몸에 문제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닌지 걱정돼서 말이야.”하예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도 난 너무 신경 쓰여. 시댁이 재벌이 아니라 보통 가정이라도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어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걱정하기 마련이야. 피임하지도 않았는데...”심효진이 주변 사람들을 돌이켜보니 대부분은 결혼 후 바로 임신 소문이 돌았고 더욱이는 임신하고서야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한 지 반년이 넘어서도 임신하지 않은 데다 피임 조치도 하지 않은 걸 알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뻔했다.그녀는 친구의 스트레스를 이해한다.“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아 이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지만, 너무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는 건 알아. 너 스트레스가 심하면 임신하기가 더 힘들 거야. 난 네 문제가 아니란 걸 믿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하예정은 또 한숨을 쉬었다.“효진아, 난 지금 임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게 아니야. 아까 태윤 씨랑 싸웠는데 글쎄 날 제쳐놓고 혼자 가버리는 거 있지. 떠나기 전 태윤 씨의 표정과 말투를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심효진은 친구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위로했다.“태윤 씨의 태도를 보면 네가 화낼 만도 해. 내가 듣기만 해도 너 대신 화가 나. 오늘 밤엔 우리 집에서 자는 거다. 태윤 씨가 데리러 와도 바로 같이 돌아가지 말고. 한번 속 태워봐라 그래. 내가 엄마 아빠한테 집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
따르릉!심효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의 이름을 본 그는 하예정에게 말했다.“정남 씨에게서 전화가 왔어. 내 생각엔 너희 집 태윤 씨가 또 정남 씨에게 도움을 청한 것 같아.”하예정은 담담하게 말했다.“도움을 청해도 상관 안 해. 자기만 성깔이 있는 줄 알아? 나도 성깔이 꽤 있는 사람이라고.”심효진은 당연히 친구의 편이다. 그녀도 친구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고 명랑하기만 했던 친구가 지금 자신이 불임일까 봐 걱정하고 있다. 이건 시집간 상대가 전태윤이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무형 스트레스 때문이다.심효진은 그런 친구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이참에 친구가 남편을 잘 다스리도록 도우려 했다.따르릉!휴대폰이 계속 울리자 심효진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효진 씨, 뭐 해요? 나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이제야 내 전화를 받아요? 난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만약 전화를 계속 안 받으면, 바로 운전해 효진 씨 집으로 가려고 했어요.”소정남의 웃음이 섞인 말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고 두 사람은 성격도 잘 맞아 소개팅부터 약혼까지 한 번도 갈등을 겪은 적이 없다.때때로 심효진은 자신의 사랑이 너무 순탄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친구 부부가 항상 작은 갈등으로 기분 나빠하고 억울해하는 것을 보고는 또 본인과 남친의 평온한 감정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휴대폰을 곁에 두지 않았어요. 샤워하려고 하던 참에 전화가 와서 바로 욕실에서 뛰쳐나와서 받은 거라 속도가 늦었어요.”그녀는 거짓말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나도 보고 싶어요. 매일 24시간 동안 정남 씨만 생각하는걸요. 잠들어 꿈을 꿔도 정남 씨 꿈을 꿔요.”소정남은 전화 건너편에서 이 말을 듣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하예정은 친구가 소정남과 통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깨달은 것 같았다.그녀와 남편은 금슬이 좋지만 두 사람 모두 달콤한 말을 잘 못하는 타입이다.“효진 씨, 이젠 와이프라고 불러도 돼
“조사하지 않았어요?”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조사하지 않았어요. 효진 씨가 말했잖아요, 효진 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모든 것을 낱낱이 손에 쥐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신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따로 조사하지 않아요. 그저 예정 씨가 당신 집에 있을 거로 추측했어요. 예정 씨는 효진 씨와 가장 친한 사이라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효진 씨를 찾아가곤 하잖아요.”“예정이 우리 집에 있는 건 맞아요. 태윤 씨에게 말해줘요, 예정이는 우리 집에서 한동안 있을 거라고.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그러자 소정남은 대답했다.“알겠어요. 내가 곧 전할게요. 여보, 나한테 할 말 또 없어요?”“태윤 씨의 일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따라 배우지 말고요.”그는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반면 소재로 삼고 있어요. 태윤이는 예정 씨를 화나게만 하는걸요. 난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해요.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안심이에요. 정남 씨, 사랑해요. 죽을 만큼 사랑해요.”“저도요.”심효진은 말했다.“먼저 태윤 씨에게 전해요. 조급해 안달이 나고 있을 거예요. 분명히 예정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항상 작은 일로 다툰다니까요. 나 이만 샤워하러 갈게요.”소정남은 아쉬워하며 전화를 끊고는 바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가 전화를 받자 그는 입을 열었다.“네 와이프가 또 내 와이프를 독차지하고 있어.”“당장 우리 예정 씨를 데리러 갈게. 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말이야.”전태윤도 하예정이 심씨 집안에 있을 거로 추측했다.처형에게 먼저 물어봤는데 동생이 집에 없다고 하니 무조건 심효진의 집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성소현 쪽에는 묻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녀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다.“우리 효진 씨가 말하는데 자기 집에서 며칠 묵을 거라고 했어. 일 없으면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전태윤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내 와이프인데 당연히 내 옆에 같이 있어야지. 나 당장 데리러 갈 거야.
하예정은 몸을 돌려 심효진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말했다.“이제 진짜 잘 거야. 안 뒤척일게.”심효진은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했다.“너흰 부부잖아. 태윤 씨도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 이 정도의 모순은 곧 풀릴 거야. 마음 편히 자. 잠을 잘 자야 삶의 우여곡절을 마주할 힘이 생기잖아.”“네가 있어 다행이야. 기분이 나쁠 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 좋아.”“우리 얼마나 오랜 친구인데. 나도 기분 안 좋으면 너한테 하소연하잖아. 빨리 자, 너무 생각하지 말고.”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친구의 위로에 하예정은 천천히 꿈나라로 들어갔다.전태윤이 심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 사방은 고요했다. 모두 이미 꿈나라로 들어간 모양이다.그는 심씨네 집 앞에 차를 세웠다.차를 세운 후 그는 아내에게 다시 전화했다.하예정은 이미 잠든 데다 휴대폰도 무음 모드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누구에게서 온 건지도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누구시죠? 무슨 생각이에요 도대체? 한밤중에 웬 전화죠? 당신은 안 자도 난 자야겠어요! 잠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몰라요?”“...효진 씨, 저예요.”“누구라고요? ...태윤 씨?”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저예요.”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하예정을 향해 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금살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정말로 전태윤의 차가 자기 집 앞에 멈추어 있었다.“한밤중에 쉬지 않고 웬 전화에요?”“지금 효진 씨 집 앞이에요.”“아, 그래요?”“효진 씨, 예정이 잠들었어요? 불러줄 수 있어요?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어요.”심효진은 말했다.“지금이 몇 시인데요. 예정인 이미 잠들었어요. 이틀 후에 다시 데리러 와요.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내 약혼식을 마친 후에 집에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전태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직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씨 일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예정은 반드시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갈 테니까.전태윤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문 넘을 준비를 했다.심씨 집안의 개 두 마리가 구석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모른 채.그가 문 위로 올라가 문을 넘어가려고 밑을 바라보자 큰 개 두 마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놀란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떨어질 뻔했다.그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개를 키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차를 몰고 집 문 앞을 지나갈 때 다른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심씨네 집에서도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은 생각 못 했다.그가 차를 심씨 집안의 문 앞에 세울 때 다른 집 개들은 짖는 것을 멈추었고 심씨네 집에서도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그래서 심씨 집의 개가 소리 없이 잠복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조용한 개가 사람을 문다고... 그가 밑을 보지 않고 바로 뛰어내렸다면 두 개한테 물렸을지도 모른다!멍멍!녀석들은 전태윤이 뛰어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짖어대기 시작했다.전태윤은 집안의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문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차 앞으로 돌아와 차에 기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를 찾아 피려다가 담배를 찾지 못했다.그는 하예정이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 담배를 거의 끊은 탓에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누구세요?”심효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와 정원의 불을 모두 켰다. 개들이 문밖을 향해 정신없이 짖어대는 것을 보고 계단을 내려가 살펴보려 했다.전태윤은 그제야 대문 가까이 다가가 나은서에게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저예요, 태윤이에요.”나은서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예정이를 집에 데려가려고 이렇게 늦은 시각에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그녀는 문으로 다가갔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예정이는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 누웠어요.
전태윤은 나은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심씨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차로 돌아왔다.차에 돌아와서도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있더니, 결국 차를 몰고 떠나갔다.다음 날 아침 일찍 전태윤은 심씨 집으로 달려갔다.심씨 집 마당의 대문은 열려있었고 개 두 마리는 목줄에 묶여있었다.전태윤은 조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늦게 온듯싶다.그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을 청소하던 효진의 어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다가왔다.“효진이랑 예정이, 예진이 가게로 갔어요.”“...간 지 얼마나 됐죠?”“20분 정도 될 거예요. 예정이가 일어나자마자 예진이 가게에 가서 우빈이를 데리러 가겠다고 해서 일찍 나갔어요.”전태윤은 나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말했다.“당장 처형의 가게로 가겠어요.”나은서는 가볍게 응했다.전태윤은 곧 심씨네 집을 떠났다.그는 가는 길에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처형,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이에요. 무슨 일이죠? 아, 예정이를 찾는 거예요? 예정이랑 효진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요.”하예진은 그들 부부가 또 다퉜다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일이 바빠 바로 휴대폰을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태윤이한테서 전화가 왔어.”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준 후 그녀는 또 서둘러 일하러 갔다.하예정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전태윤은 전화 저편에서 급히 말했다.“여보, 전화 끊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잘못했어! 당신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보, 나 무시하지 마. 나 피하지 말아줘 제발. 우리 이따가 얘기 좀 해. 고향에 내려가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고 싶으면 내가 같이 갈게.”하예정은 마침내 담담하게 말했다.“전 도련님께서는 바쁘실 텐데, 제가 어찌 감히 전 도련님의 시간을 허비하겠어요? 저와 함께 가줄 필요 없어요.”“여보, 내가 잘못했어.”아내의 비꼬는 말을 들
그녀는 전태윤을 향해 확신하지 않는 듯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전태윤 씨인가요?”전태윤의 눈은 반짝였다. 여운초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아냈다.“운초 씨.”그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운초 씨는 이진에게 꽃을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여운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진 도련님이 제 가게에서 꽃을 주문해서 지금 가져다주러 왔어요.”전태윤은 그녀에게 물었다.“혼자 왔어요?”“네.”전태윤은 순간 전이진이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초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꽃을 가져오라고 하다니... 하지만 그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이건 전이진의 일이기에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었다.“제가 위층으로 데려다줄까요?”“고마워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는 두 번이나 온 적이 있기에 길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도 전이진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전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사무실 빌딩으로 들어갔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서야 여운초는 비로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두 명의 프런트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미소로 회답하였다.10분 후.여운초는 전이진의 사무실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서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이번에는 문이 열렸다.전이진은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진아.”그녀는 전이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자, 여기 네가 산 꽃다발. 6만 원이야.”그는 꽃다발을 받지 않고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녀에게 말했다.“들어와.”여운초는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닫을 수 있으면 닫아줘.”그녀는 말에 따라 문을 손으로 더듬어 만진 후 그를 도와 문을 닫아주었다.“이리 와서 앉아.”전이진은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소파 등받이를 더듬으며 자리를 찾았는데 갑자기 따뜻한 큰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