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전태윤을 향해 확신하지 않는 듯한 어투로 인사를 건넸다.“전태윤 씨인가요?”전태윤의 눈은 반짝였다. 여운초는 발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아냈다.“운초 씨.”그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운초 씨는 이진에게 꽃을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여운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진 도련님이 제 가게에서 꽃을 주문해서 지금 가져다주러 왔어요.”전태윤은 그녀에게 물었다.“혼자 왔어요?”“네.”전태윤은 순간 전이진이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운초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꽃을 가져오라고 하다니... 하지만 그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이건 전이진의 일이기에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었다.“제가 위층으로 데려다줄까요?”“고마워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는 두 번이나 온 적이 있기에 길을 기억했다. 다른 사람의 안내 없이도 전이진의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전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사무실 빌딩으로 들어갔다.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서야 여운초는 비로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두 명의 프런트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미소로 회답하였다.10분 후.여운초는 전이진의 사무실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그녀는 잠시 서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이번에는 문이 열렸다.전이진은 그녀의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진아.”그녀는 전이진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웃으며 말했다.“자, 여기 네가 산 꽃다발. 6만 원이야.”그는 꽃다발을 받지 않고 안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녀에게 말했다.“들어와.”여운초는 잠시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닫을 수 있으면 닫아줘.”그녀는 말에 따라 문을 손으로 더듬어 만진 후 그를 도와 문을 닫아주었다.“이리 와서 앉아.”전이진은 소파로 가서 앉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소파 등받이를 더듬으며 자리를 찾았는데 갑자기 따뜻한 큰
“아니.”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들이 상의한 대책은 나한테 안 알려줘.”그녀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날 밤 엄마가 지팡이를 방구석에 내팽개쳤고 다음 날 도우미가 그녀에게 돌려줬다.사모님 방문 입구에서 주웠다고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지팡이를 내던진 듯싶었다.여운초가 지팡이를 건네자 전이진은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칠 줄 알고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덥석 잡았는데 뜻밖에도 여운초가 손을 놓았다.전이진은 그제야 그녀가 지팡이를 그에게 건넨다는 걸 알아챘다.“이 지팡이 속에 빈 부분이 있는데 그 안에 녹음 펜이 숨겨져 있어.”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전이진은 두 눈을 반짝였다. 달라진 그녀의 눈빛을 발견하고 나서야 장난기를 거두었다.그는 지팡이를 높게 들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다가 텅 빈 부분을 힘껏 비틀고 아래로 향하자 정말 안에서 녹음 펜 한 대가 떨어졌다.“그 별장은 원래 내 건데 아직 내가 통제할 순 없어. 내 집이지만 내겐 위험한 존재야. 꽃필무렵도 내 가게이긴 하지만 가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위험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네 사무실이 제일 안전한 것 같아.”그래서 전이진이 또 전화해 그녀에게 직접 꽃 배달을 시켰을 때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곧바로 지팡이를 챙기고 온 거였구나.전이진 앞에서 까밝히기로 한 것도 그녀가 전이진을 믿고 있단 표현이다.어쨌거나 그가 여운초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어떤 의도로 그녀에게 접근하는지는 몰라도 목하 그녀가 두 번째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전이진이다.또 믿을만한 한 명은 바로 하예정이다.“이 녹음 펜에 다 뭐가 녹음됐어? 지팡이에 넣어둔 지는 얼마나 됐어?”여운초는 잠시 침묵한 후 그에게 대답했다.“연회에 가기 전에 엄마가 날 데리고 참석할 걸 알고 몰래 지팡이에 넣어뒀어. 뭐가 녹음됐는지는 나도 몰라. 집에서도, 가게에서도 감히 녹음 펜을 꺼낼 엄두가 안 났거든.”전이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너 뭐 아는구나.”“아빠의
그녀가 친아빠의 죽음을 의심하니 그들도 여운초를 죽이려는 것이다. 어차피 여 씨네 저택에서 큰딸 여운초는 투명인간과도 같으니 아파서 죽었다 해도 끝까지 추궁할 사람은 없다.멀리 시집간 고모가 갑자기 친정집 식구들을 뵈러 집에 오지 않았다면 중병에 걸린 여운초는 병원에 실려 가지도 못한 채 10년 전에 이미 친엄마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여태웅 부부가 전이진이 여운초를 책임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까지 낱낱이 녹음되었다.전이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었다.여운초는 두 손을 꼭 잡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친아빠의 죽음이 그들과 연관 있을 거라고 줄곧 의심하긴 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의심에서 그쳤다.이제 두 귀로 직접 여태웅 부부의 대화를 듣자 머리가 백지장이 되고 손발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추미자는 대체 왜 제 남편의 친형과 짜고 들어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간 걸까? 설마 두 사람이 진작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그렇다면 이혼하면 될 것이지...“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야?”전이진이 대뜸 질문을 건넸다.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전이진은 안쓰러워하며 온수 한 잔 따라주었다.여운초는 물을 한 모금에 다 마셨다.“이진아, 이 녹음 펜만으로 그 사람들 유죄판결 내릴 수 있을까?”전이진이 대답했다.“좀 힘들어. 분명 홧김에 한 말이라고 변명할 거야. 네가 무슨 의도로 녹음했는지 의심할 거고. 다만 증거가 더 있으면 이 녹음 펜도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어. 그 사람들 유죄판결도 내릴 수 있지. 너 또 다른 증거는 있어?”여운초가 머리를 내저었다.친아빠가 죽을 때 그녀는 고작 두 살이라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여태껏 커오면서 엄마와 여동생에게 모진 괴롭힘을 당한 것 외에 제일 이해되지 않는 건 다름 아닌 엄마였다. 친엄마라는 자가 왜 딸을 예뻐하지 않고 안아준 적도 없으며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던 걸까?그 뒤론 여운초도 마음이 무뎌져 더는 친엄마의 사랑을 애원하지 않았다.열심히 공부하고 스스로 능력이 있을 때 이 집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전이진은 그녀의 눈을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우리 형수님 말이 맞아. 증거를 찾으려면 눈부터 고쳐야 해. 이 녹음 펜은 일단 내가 보관할게.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네 목숨도 위험해질 테니까.”“고마워, 전이진.”여운초도 녹음 펜을 다시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전이진의 말처럼 가져갔다가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그들이 만약 계속 날 이용해서 네 동생 구해주려고 한다면 내가 그 꼼수에 넘어가 주는 건 어때?”여운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꼼수에 넘어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너희 새아빠가 널 내게 맡기고 싶어 하잖아. 다들 내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조건을 내걸겠지. 그걸 빌미로 네 동생을 구하는 거고. 거참 야무진 생각이긴 하지만 다들 잘못 짚었어.”전이진이 호락호락하게 통제될 사람이 아니지. 그는 무려 전씨 일가의 도련님이니까!여태웅 부부도 확실히 안달이 났나 보다. 감히 이런 꼼수까지 부리다니.두 사람이 여운별에 대한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내가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자, 운초야.”여운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너 혼자 증거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사위 신분으로 너희 집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고 널 위해 증거도 찾아줄 수 있어. 조만간 두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우리 장인어른을 위해 이 한을 풀어드려야지.”아내는 친형의 여자가 됐고 딸은 또 친형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하늘에 계실 장인어른이 억울해서 두 눈이나 감으셨을까? 오밤중에 찾아와 여태웅에게 복수하고도 남을 것을!사위로서 장인어른의 원한을 풀어주는 건 마땅한 일이다. 여운초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미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 시각.하예진의 토스트 가게는 보통 오전 10시 좌우에 마감하고 깨끗이 청소한 후 문을 닫는다.가게에 손님들이 다 빠진 후 그녀와 두 직원이 뒷정리하기 시작했다.하예진이 한창 바삐 돌아칠 때 찰거머리 같은 전남편이 또다시 찾아왔다.여전히 옆에
주형인은 하예진이 점점 더 잘 사는 모습에 배알이 꼬여 자꾸 그녀를 귀찮게 굴고 싶었다.이번 일만 해도 그냥 그가 알아서 아들의 정장을 사주면 될 텐데 서현주의 이간질에 가스라이팅을 당했는지 하예진이 일부러 부자 사이를 떼어놓는 거라고 우긴다.그래서 기어코 가게까지 찾아와 우빈이를 데리고 정장 고르러 가겠다고 고집했다.하예진이 동의 안 하면 그녀와 난리 칠 작정이다.“우빈이 어디 있어? 아이 어디로 숨겼냐고?”주형인은 가게 안을 쭉 둘러보았지만 아이가 안 보였다.“예정이네로 숨긴 거야?”하지만 하예정의 서점도 요 이틀 문을 닫았다.주형인이 미리 가봐서 안다.“우빈이 수업하러 갔어. 돌아오려면 아직 좀 더 걸려.”하예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주형인, 나 당신 우빈이 못 만나게 막은 적 없어. 정말 우빈이 데리고 정장 고르러 가고 싶다면 오케이, 나도 곧 청소 마무리하니까 이따가 우빈이 수업 끝나고 돌아오거든 나도 같이 가.”주형인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서현주가 살며시 그를 꼬집더니 말을 가로챘다.“예진 씨, 정말 우리 따라가려고? 나 아직 드레스도 못 골랐는데 그럼 이따가 예진 씨가 건의 좀 내줄래?”하예진에게 본인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주형인의 아름다운 신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한다.그녀가 과연 무슨 심정일까? 기분이 확 잡치겠지.“난 우빈이만 책임져.”하예진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서현주의 속내를 하예진이 모를 리 있을까.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다.주형인 같은 남자와 일찍 끝내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선택인 것을.서현주도 이젠 주형인과 주 씨네 가족이 어떤 인성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기어코 결혼식을 치르겠다니 앞으로 눈물 흘릴 일만 남을 것이다.“우빈이가 무슨 수업을 해? 아이 유치원 보냈어?”주형인이 물었다. 하예진은 계속 청소하며 대답했다.“제부가 우빈이한테 무술 선생님을 찾아주셨어. 우빈이 지금 무술 선생님이 운영하는 무관에서 기본기를 배우는 중이야. 유치원은 9월에 보내기로 했어.”“누가 돈 냈는데
“엄마.”우빈이는 오 선생님이 나눠준 무관의 통일 복장을 갈아입고 쪼르르 달려왔다.“우빈이 왔어.”하예진은 활짝 웃으며 아들을 안았다.“어때? 힘들어? 안 울었어 우빈이?”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안 울었어요. 근데 너무 힘들었어요.”“그래. 엄마가 뽀뽀해 주면 금방 다 나을 거야. 우빈이 끝까지 버텨야 해.”하예진은 아들이 중도 포기할까 봐 뽀뽀한 후 아이에게 당부했다. 전태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반드시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고 말이다.아이는 너무 힘들어 더는 안 가고 싶지만 이모부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무술을 배우면 나중에 나쁜 놈도 안 두렵고 엄마도 지켜줄 수 있다는 그 말, 우빈이는 엄마를 지켜주는 용감한 사나이가 되고 싶었다.엄마의 말을 들은 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엄마. 우빈이 끝까지 버틸 거예요.”이때 강일구가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예진 씨.”그는 하예진에게 인사했다.“고마워요, 일구 씨.”강일구는 웃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괜찮습니다.”그는 지금 우빈의 무술 수업을 책임지고 데려다주고 있다.주형인 부부가 가게 안에 앉아 있자 강일구는 순간 경계심을 일으켰다. 우빈이를 하루 토스트로 데려다주면 바로 도련님 곁으로 돌아가는데 오늘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형인 부부만 노려보고 있다.“우빈아.”주형인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으며 아이에게 두 팔을 벌렸다.“우빈이 일로 와, 아빠 안아보자.”하예진이 아들을 내려주고 주형인이 다시 안아 올렸다.“아빠, 나 보러 왔어요? 나 오늘 수업하러 갔어요. 오 선생님이 무술을 가르쳐줘요. 나 너무 열심히 배워서 몸이 힘들어요.”아이가 어른 말투로 말하자 주형인이 실소를 터트렸다.전에는 아들이 종일 울기만 하여 우는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었다.그게 아니면 집안에 온통 아이 장난감뿐이다.그랬던 우빈이가 크면서 점점 철이 들었고 주형인도 아들이 너무 귀엽고 총명해서 양육권을 뺏어올 충동까지 생겼다.다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바
“우빈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용기 내어 싫다고 말해.”하예진은 아들을 강요하지 않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우빈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아빠를 쳐다보다가 한참 생각한 후에야 물었다.“엄마도 가요?”“가지 그럼. 아빠가 저번에 우빈의 엄마한테 청첩장 보냈잖아.”주형인의 말에 아이는 알겠다며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우빈이 할게요.”주형인은 활짝 웃었다.‘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화동도 해주고.’“그럼 우리랑 함께 정장 고르러 갈래?”아이는 또 엄마를 바라봤다.주형인은 마지못해 하예진에게 말했다.“가려면 얼른 준비하던가.”하예진은 그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일단 가게 전원과 가스를 다 껐는지 체크하고 안전을 재점검한 후에야 두 직원을 퇴근시키고 강일구에게 말했다.“일구 씨, 난 우빈이 데리고 정장 맞추러 가야 해요. 일구 씨는 먼저 돌아가세요.”우빈이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다.아이가 아직 어려 오수혁은 감히 하루를 풀로 수업하지 않았다. 버티지 못하고 울며 포기할까 봐...매사에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비록 무술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건 아니지만 견지하다 보면 호신술 정도의 실력은 키울 수 있다.강일구는 하예진이 따라간다는 말에 안심하며 하루 토스트를 나왔다.서현주는 하예진 모자를 경호하는 사람이 없자 한숨을 돌렸다. 오늘 계획대로 움직이면 미션에 성공할 것만 같았다.하예진은 가게 문을 닫고 전남편의 품에서 아들을 안아오며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 앞에서 가. 내가 우빈이 태우고 뒤에서 따라갈게.”주형인은 이리로 올 때 문 앞에 세운 새 차를 보고 다른 사람 차인 줄 알았는데 하예진의 차였다.“차는 언제 뽑았어?”“최근에.”주형인은 그녀의 새 차를 훑어보더니 저렴한 국산 차인 걸 확인하고 기분이 내켰다.하예진이 몇억 대의 차를 몬다면 주형인은 배 아파 죽을 지경일 것이다.하예진의 말대로 주형인 부부가 앞에서 가고 그녀와 우빈이는 뒤따라갔다.하예진 모자가 주형인 부부와 함께 출발할 때
주형인은 후회했다. 실은 진작 후회했다.서현주와 공개적으로 함께한 이후로 그는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원만하지 못한 삶에 후회가 밀려왔다.특히 가족들이 사사건건 서현주와 부딪히고 쉴 새 없이 다툴 때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치고 바닥을 치며 후회했다.애인이 아내로 되니 결국 다 똑같았다.애초에 하예진을 잘해줬더라면, 그녀를 다이어트도 시켜주고 예쁘게 꾸미는 것도 신경 써줬더라면 애인 서현주에게 뒤처지지 않았을 텐데...“오빠, 왜 멍하니 서 있어?”서현주는 주형인이 하예진의 차를 보며 멍하니 넋 놓고 있자 그를 툭 치며 물었다. 주형인은 얼른 정신을 다잡고 그녀에게 대답했다.“아니야, 아무것도.”그는 감히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서현주가 길 한복판에서 그와 대판 싸울 테니까.주형인은 체면을 챙겨야 한다. 여기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그렇게 되면 하예진도 비웃을 것이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아들을 차에서 안아 내렸다.하예진이 내린 후 그는 우빈이를 내려주며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바로 이 샵이야.”하예진은 힐긋 볼 뿐 아무 말 없었다.이 웨딩드레스 샵은 그녀와 주형인이 결혼할 때 드레스를 대여한 곳이다.서현주는 참 그녀와 모든 걸 비기려 한다.하예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서현주, 너 대체 뭐가 그렇게 자신 없는 거야?’주형인과 하예진이 우빈의 손을 잡고 마치 한 가족 세 식구처럼 나란히 걸어갔다. 물론 한때 한 가족이긴 했지만서도...이를 본 서현주가 성큼성큼 다가가 하예진의 자리를 비집고 차지했다. 그녀는 다정하게 주형인의 팔짱을 끼며 하예진을 한쪽 옆으로 내팽개쳤다.하예진은 이 상황이 실로 우스울 따름이었다.이제 막 에돌아서 아들의 손을 잡으려 하는데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낀 덩치 큰 남자가 나타나더니 재빨리 허리 숙여 주형인의 손을 잡은 우빈이를 낚아채 갔다.주형인이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남자는 이미 아이를 안고 잽싸게 도망쳤다.“우빈아.”하예진은 몸이 바로 반응했다. 그녀는
노동명은 하예진이 가슴 아파할까 봐, 또 격려의 말들을 늘어놓을까 봐 자신이 폐인이라는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하예진은 호텔에 비치된 주전자를 씻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그리고 컵을 씻어 녹차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녹차 한 잔을 타서 가져다주었다.하예진은 찻잔을 침대 머리맡 카운터에 놓고 노동명에게 말했다.“지금은 물이 뜨거워서 좀 이따가 마셔요.”따르릉...하예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더니 노동명에게 말했다.“예정이에요.”그녀는 하예정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며 서둘러 받았다.“예정아, 뭔 일 있어?”“엄마.”전화기 건너편에서 앳된 어린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빈아, 우빈이가 드디어 엄마가 생각났나 보네. 엄마한테 전화할 줄 다 알고.”하예진은 웃으며 우빈을 조롱했다.우빈이 입을 삐죽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다시 엄마를 불렀다.아들의 억울한 어조를 알아챈 하예진이 물어보았다.“왜? 기분이 안 좋아? 친구랑 싸웠어?”“아니요. 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정말 나빠요. 저 몰래 아무 말도 없이 엄마 보러 갔어요. 제가 제 친구를 아저씨한테 소개해 주려고 이모한테 부탁해 아저씨 찾으러 왔는데 글쎄 노 할머니께서 아저씨가 엄마 찾으러 가셨다고 한 거 있죠?”우빈 녀석은 너무 서러서 계속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말도 없이... 제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저하고 말 좀 하시지. 그럼 저도 아저씨 따라서 엄마한테 갔을 텐데.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나쁜 사람이에요.”하예진이 출장을 간 후 노동명은 분명히 우빈에게 나중에 하예진이 보고 싶으면 노동명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강성으로 하예진을 보러 가자고 약속했었다.우빈은 그 당시 노동명이 그의 친아버지보다도 더 잘해준다고 생각했다.주형인은 매번 우빈을 볼 때마다 잘 대해주지만, 우빈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우빈은 주형인이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여겼다.노동명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주형인과 주경진 부부 그리고
노동명은 하예진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하예진의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좋아했다.“예진아.”노동명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까이 가면서 떠보았다.“나... 뽀뽀해도 돼?”하예진은 얼굴이 갑자기 노을처럼 붉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처녀가 아닌 결혼도, 이혼도 해본 아이가 있는 여자였지만, 이런 물음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결국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그 모습을 본 노동명의 마음은 더욱 설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더 깊은 접촉을 해보지 못했다.“예진아, 뽀뽀 해도 돼?”노동명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면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도록 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노동명이 다가가니 그의 숨결이 하예진의 얼굴에 닿았다.하예진의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했다.그들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부터 거친 키스까지 이르렀다.하예진은 문득 눈을 뜨면서 노동명을 밀치고 일어나 말했다.“물이 끓었어요. 따뜻한 물을 드시겠어요? 아니면 차 한잔하실래요?”하예진은 애써 숨을 골랐다.노동명은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녹차 한 잔 줘. 비행기에서 잠시 쉬었으니 더는 쉴 필요 없어. 녹차 한 잔 마시면서 기운 내야겠어.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른 해. 내가 따라갈게.”“제가 할 일은 오전에 다 처리했어요. 이따가 이씨 가문에 가서 저 대신 돌아가신 경호원의 유가족을 보러 가려고 해요. 어쨌든 저 대신 차를 몰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테니까요.”설령 이은화의 계략이 맞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 한 당분간은 사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씨 가문 경호원의 죽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하예진을 도와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였다.하예진이 가족을 찾아뵙고 고인을 방문해야
노동명은 고개를 돌려 하예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나도 예전에 공원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거든. 비록 사춘기 때 저지른 일이지만...”하예진은 노동명이 10대 때 반항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따라 사회에 뛰쳐 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그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잘못을 뉘우치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창업하여 노씨 그룹을 설립했다.이미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그는 할머니가 그리울까 봐 하예진 앞에서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듣자니 노동명은 형제중 막내라 할머니는 그를 가장 아꼈다.우빈은 노동명의 얼굴에 난 칼자국을 처음에 무척 무서워했다. 그는 당시 수술을 받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받지 않았다.칼자국을 남겨놓은 이유는 그의 반항 때문에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명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할머니에게 미안했다.“난 안 가려. 이런 룸도 얼마나 좋아.”노동명은 자신의 평소 출장할 때 로얄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그는 싱글이고 재산도 많기에 마땅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니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이제 쉬시려고요?”“나 소파에 앉으면 돼.”노동명은 창가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하예진이 그를 밀고 소파 앞으로 다가가서 멈추었다.그녀는 노동명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두 걸음은 걸을 수 있거든.”매일 재활을 하고 몇 걸음 걷다 보니 그의 다리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고 하면 두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지끈 아파 났고 고통스러워 똑바로 서지 못하고 땅으로 넘어지게 된다.노동명의 두 다리는 넘어지고 부딪혀 멍이 들었다.그는 주위 사람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상처를 가리려고 매일 긴 바지를 입고 있고 다녔다.노동명은 누구의 동정심도 필요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결국 부축하는 것을 포기했다.노동명은 스스로 일어서서 한 발짝 앞
하예진이 관성을 떠나던 날, 노동명이 심술부린 탓으로 하예진을 공항까지 배웅조차 하지 않았다.심지어 하예진의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아 그녀가 걱정을 안고 강성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강성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예진은 여전히 노동명을 걱정했고 전태윤 부부에게 우빈을 데리고 노동명의 집에 가서 그를 위로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그날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노동명은 얼굴이 붉어졌다.하예진은 그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저는 화도 안 났어요. 앞으로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동명 씨를 싫어하고 저를 힘들게 할 것 같다면 저는 진작에 동명 씨를 멀리했을 거예요. 이렇게 가까이 지내지도 동명 씨를 믿지도 않을 거란 말이에요.”지난번 노동명이 하예진에게 고백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물처럼 유유하게 감정을 교류했다.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면서 지내왔고 두 사람 마음도 점점 가까워졌다.지금 노동명은 하예진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그녀도 노동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되였다.다른 사람은 이미 두 사람을 커플로 여기고 있다.요리가 나오자 하예진은 잘 먹지 않고 노동명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미인 옆에서 자신을 잘 보살펴 주는 것을 본 노동명은 너무 행복했고 하마터면 배가 터질 뻔했다.노동명은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왔기에 하예진은 그를 호텔에서 쉬게 한 다음 저녁에 그에게 호텔 근처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다.강일구는 노동명 일행에게 룸 세 개를 예약해 주었고 노동명이 하예진의 룸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하자 강일구는 흔쾌히 노동명과 룸을 바꾸었다.어차피 노동명은 강성에서 하룻밤만 묵고 내일 오후 관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연말이 다가오면 노씨 그룹도 정신없이 바쁘기에 노동명은 회사 대표로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쌓인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하예진은 노씨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