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씨.”몇 걸음 가지 않아 여씨 사모님이 여운초를 데리고 길을 막았다.하예정은 여운초가 여씨 사모님에게 끌려 자칫 넘어지려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운초 씨, 조심해요.”하예정은 여운초를 부축하고 나서야 추미자를 바라보았다.추미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운초를 부축해 주셔서 감사해요. 얘가 눈이 보이지 않아 쉽게 넘어지거든요.”성소현이 옆에서 불쑥 말했다.“눈도 보이지 않는 애를 왜 그렇게 빨리 끌고 다니는 거죠?”추미자의 웃음이 굳어져 버렸다.성소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비웃는 듯 말했다. “큰딸을 데리고 연회에 온 것이 처음이죠?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에요,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요.”추미자는 성소현의 비꼬는 말에 화가 났지만 얼굴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우리 운초가 눈이 보이지 않아 연회에 데려오지 않은 거예요. 내가 옆에서 계속 지켜줄 수도 없고, 그러다 일이라고 생길까 봐 걱정돼서요. 게다가 운초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다만 이제 운초도 나이가 적지 않고, 이런 자리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여 인사도 나눌 겸 데리고 나왔어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추미자의 말 속 깊은 뜻을 알아들었다.여태 키웠으니 이젠 시집보낼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한껏 치장한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여운별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눈만 멀지 않았다면... 상류층 사모님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성소현은 여운초가 좋은 시댁에 시집가기 힘들거로 생각했다. 단지 장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친어머니인 추미자 때문이기도 하다. 누가 추미자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 할까?추미자가 작은딸을 지나치게 편애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전씨 할머니는 왜 여운초를 전이진에게 골라준 걸까?성소현은 궁금해서 하예정에게 물었지만 그녀도 답을 몰랐고, 심효진도 그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무슨 일 있으신가요?”하예정
하예정은 여운초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재벌 집 도련님에게 소개시켜 주려는 거 맞죠?”여운초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똑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나를 재벌 집 도련님에게 시집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나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겠죠. 엄마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을 거예요.”하예정은 이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그녀의 분노를 알아차린 여운초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요, 난 내 자신을 지킬 자신이 있어요.”여운초는 언제나 칼을 지니고 다녔다.하예정은 또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여운초가 손바닥을 쿡쿡 찌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추미자는 비교적 조용하고 외진 곳을 골라 하예정에게 앉으라고 권했다.“예정 씨, 뭐 드실래요? 내가 먹을 것 좀 가져다드릴게요.”“고맙지만 괜찮아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그러자 추미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예정 씨가 우리 운초랑 친구인 걸 알고 있어요. 운별이는 운초 동생인데, 예정 씨가 우리 운초를 봐서라도 운별이를 고소하지 말아 줄래요? 나도 운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알지만, 운별이도 이제 잘못을 깨달았어요. 걔가 아직 어려서 철이 덜 들어서 그래요, 앞으로 내가 꼭 잘 가르쳐서 다시는 예정 씨의 미움 사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할게요.”“...”“운별이가 망가뜨린 차는 동일한 거로 두 대 배상해 드릴게요. 그리고 또 다른 요구 사항이 있으시거든 편히 말씀주세요. 내가 만족시킬 수 있는 한, 다 만족시켜 드릴게요. 같은 사교 모임 안에서 앞으로 마주칠 일도 많을 텐데, 너무 어색하면 보기 좋지 않잖아요. 내 마음 받아들이고, 이번 일은 쿨하게 넘어가는 게 어때요?” 추미자는 또 몰래 여운초를 꼬집었다.“추미자 씨, 운초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하예정은 여운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관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물었다.“운초 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하예정 씨! 운초는 내 친딸인데 내가 친딸
하예정은 엄숙하게 말했다.“추미자 씨, 내가 당신 딸더러 형을 선고받도록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당신 딸이 저지른 일이란 걸 알아요. 난 단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여운별 씨가 잘못을 깨달았다고요? 앞으로 다시는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고요? 이 말 추미자 씨는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믿지 못하겠네요.”여씨 사모님은 어두운 얼굴로 하예정을 노려보았다.남편도 늘 그녀에게 하예정과 친하게 지내며 딸을 대신해서 사정하라고 했다.그녀도 몇 번이나 딸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사죄하고, 사정하였지만, 이 시골뜨기는 조금도 용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여운초에게도 대신 사정하라고 시켰지만, 하예정은 여전히 여운별을 고소하겠다고 고집하고 있다,추미자는 이가 근질근질할 정도로 미웠고, 속으로 절대 하예정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별렀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예정 씨, 실례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여운초를 잡아당기려 했다. 큰딸이 하예정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큰딸이 아니었다면, 작은딸도 하예정과 원한을 맺지 않았을 테니까.“운초야, 가자.”하지만 여운초는 추미자의 손을 뿌리치고 담담하게 말했다. “난 앞이 보이지 않아 엄마와 함께 주위를 둘러볼 수 없을 것 같으니 여기 앉아서 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러자 추미자는 쌀쌀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집에도 돌아가지 마! 다시 한번 묻겠는데, 같이 갈 거야 말 거야?”여운초가 여전히 꿈쩍않자 추미자는 하예정을 힐끗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새로운 백이라도 생겼나 보지?”추미자가 떠나자, 하예정은 걱정스럽게 물었다.“운초 씨, 정말 집에 못 들어가면 어쩌죠?”“그 집, 들어가든 말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나는 그 집에서 늘 투명인간이었는걸요.”여운초는 비웃는 듯 말하더니 이내 평온한 기색을 되찾고는 하예정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전씨 사모님.”“예정이라고 불러요.”“예정 씨, 난 상
하예정도 소설이나 TV에서 다른 사람한테 약을 타 먹이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게다가 친동생이 친언니에게 약을 먹여 언니의 인생을 망치게 하려 한다니... 여운초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운별이가 내게 약을 먹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게 무슨 가족이에요? 운초씨, 그냥 따로 나와 살아요.”그런 가족과 같이 살기에는 너무 위험해 보였다.여운초는 또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증오가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그 집, 아빠가 물려준 집인데 내가 왜 이사를 해야 하는 거죠? 이사 가야 할 사람은 그들이에요! 예전에는 내가 어리다고 괴롭혔고, 나중에는 또 장님이라고 괴롭혔어요.”하예정은 아름다운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전태윤도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여운초의 친아빠가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운초는 16살쯤에 큰 병에 걸려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 여씨 일가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병원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분명히 그녀를 죽게 놔두고 싶었던 것이다.여운초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뭔가를 발견하고 미리 유언을 남겨 재산을 딸에게 물려준 건 아닐까?그래서 여운초가 물려받은 재산을 노리고 그녀를 죽이려 한 건 아닐까?아니면 그녀가 아빠의 진짜 사망원인을 알고 아빠를 대신해서 복수할까 봐 두려워서 죽이려고 한 건가? 그때 마침 멀리 시집간 고모가 친정에 돌아왔다가 여운초가 병이 난 것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보내 다행히 목숨을 건지긴 하였지만, 그 뒤로 장님이 되고 말았다.여운초가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온 건, 장님이 돼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할 수 없기에 그들이 살려둔 건 아닐까?하예정은 여운초의 드라마 같은 스토리에 관심이 끌렸고, 그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싶어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여운초의 손을 잡고 달랬다.“운초 씨, 만약 말 못 할 사정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라면 잠시 더 버텨요. 살아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먼저 눈부터 치료해요.”마음
전이진은 낯이 가렵지도 않은 듯 말했다.“언젠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인데요 뭐. 나중에 우리 형처럼 입밖에 꺼내지도 못할까 봐 미리 부르며 연습하는 거예요.”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이진 씨, 형을 반면 소재로 삼은 거예요?”“형이 앞에서 경험을 많이 쌓아 감정에서의 갈등을 많이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하예정은 침묵에 잠겼다.‘태윤 씨가 처음으로 여보라 부른 게 언제였지?’하예정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 별다른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다행히 전태윤은 그때의 하예정의 생각을 몰랐으니 말이지... 아니면 밤새도록 그 생각만 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자리를 떠나 프로젝트 파트너가 될 사람을 찾아갔다.성소현은 심효진을 데리고 자신의 절친 문가희를 만난 후 그녀의 사촌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하예정이 오자 성소현은 그녀의 팔짱을 끼고 문가희에게 소개했다.“가희야, 내 외사촌 동생 하예정이야. 전태윤 씨의 마음을 가져간 여자.”그녀는 전태윤의 마음을 가질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사촌 동생이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문가희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사모님의 명성은 이미 자자한걸요. 오늘 밤 보니까 정말 천사 같으시네요. 전 대표의 마음을 얻은 건 당연한 일이죠.”하예정도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에요. 가희 씨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로맨틱하지만은 않아요. 누가 누구의 마음을 얻은 일 없어요. 우리 둘은 차차 서로에게 끌린 것뿐이에요.”사람들은 같이 웃었다.성소현의 소개로 하예정과 심효진은 많은 집안의 아가씨들을 알게 되었고 협업 정보도 많이 얻었다.이로써 이후의 야채와 과일을 수출할 길을 열게 되었다.전태윤은 비록 아내가 자유롭게 교제하도록 내버려두었지만, 사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그와 함께 있던 소정남은 하예정을 바라보고 있는 전태윤에게 말했다.“부인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자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누구를 상대하든 조금도 겁내지 않아. 이런 자리가 바다라면 꼭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
“너도 참.”“우리 부부가 너와 효진 씨를 이어줬잖아?”그에 소정남은 응했다.“맞아.”“그러니까 주선해 준 값으로 내 계좌번호를 주는 거야, 무슨 생각하는 거야? 신혼 선물로는 돈 말고 선물을 준비해 줄게. 돈을 주는 건 너무 촌스러워서 말이야. 하지만 주선해 준 값으로는 돈을 받는 게 좋아. 난 속물이라 돈이 좋거든.”소정남은 침묵에 잠겼다.하예정은 전태윤을 그와 따지면서 돈을 요구하는 남자로 만들었다.이 성대한 연회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과거에는 참가해도 기껏해야 10분 정도 있다가 떠나던 전씨 집안 도련님이었는데, 오늘 저녁에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있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전태윤은 그의 실제 행동으로 그가 얼마나 아내를 총애하는지 증명했다.연회는 또한 사람들에게 전씨 가문에서 하예정의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보여주었다. 외부 소문처럼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시댁의 미움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시부모님은 그녀를 딸처럼 여겼고 시동생들은 그녀에게 전태윤을 대하듯 존경했다.하예정이 오늘 밤 몸에 치장한 액세서리들은 시어머니가 준 것인데,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보석의 가치가 수억 원에 달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장소민이 이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귀중한 보석을 줄 수가 없다.오늘밤이 지난 후로부터, 하예정이 시댁에서의 지위가 불안정하고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점차 사라졌다.이런 것들에 대해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별생각 없이 남편과 같이 연회에 참석했을 뿐이다.전태윤의 차에 오른 후, 그녀는 몸을 옆으로 기울더니 남편의 몸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나 안 취했어...”그는 그녀의 예쁜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주량이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이 정도로 마신 거야? 처형이 알면 또 내가 당신을 잘 지켜보지 못했다고 나무랄걸.”처형은 그에게 그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않도록 잘 지켜보라고 했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
전태윤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그녀가 자기 아내라는 것이 매우 좋았다.하예정은 곧 잠에 들었다.잠이 든 것을 본 전태윤은 그녀를 껴안으며 양복 점퍼를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줬다.“피크 별장으로 돌아가요.”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기사는 공손히 그에 응했다.전태윤은 아내와 함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여 눈을 감았다.피크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전태윤도 잠이 들었다.기사가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 부부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기사는 옆에 있는 강일구에게 물었다.“일구 씨, 도련님을 깨워야 할까요?”“당연하죠. 도련님과 사모님을 차에서 자게 할 수는 없잖아요? 내일 도련님께서 차 안에서 깨어나면 기사님을 해고할 수도 있어요.”그러자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일구 씨가 깨우면 안 될까요.”“당신은 운전기사이고, 저는 경호원일 뿐인데요.”“도련님께서 일구 씨와 사이가 좋잖아요. 사모님도 일구 씨를 좋아하시고요. 일구 씨가 깨우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것 같은데... 도련님께서 화낼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그건 제가 도련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고 사모님에게 잘 보였기 때문인걸요.”그는 하예정의 호감을 사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예전에 전씨 가문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어르신과 큰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은 사모님이니 사모님의 호감을 사게 되면 승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전태윤의 주변에 경호원이 그렇게 많았지만, 사모님은 강일구의 이름만 기억했다.“형님...”“됐어요, 제가 깨울게요.”그는 지체하지 않고 공손히 불렀다.“도련님, 집에 도착했어요.”전태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러다 또 한 번 부르니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했다.기사도 때맞춰 같이 입을 열었다.“도련님, 집에 도착했습니다.”강일구가 자신을 쳐다보자, 기사는 멋쩍은 듯 웃었다.이에 강일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직업을 위해서니까.전태윤이 깨어나자, 강일구와 운전기사는 급히 차 문을 열
강일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괜찮아요, 사모님이 알아서 도련님을 달래줄 테니. 도련님은 막무가내로 성질을 부릴 때마다 사모님에게 져요. 사모님이 도리를 따지기만 하면 도련님은 질 게 분명해요.”박 집사는 그를 노려보았다.강일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사실이잖아요. 걱정 마세요, 사모님만 계시면 하늘이 무너져도 버틸 수 있어요. 도련님이 화나실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사모님만 찾으면 돼요.”어쨌든 아무리 화를 내도 사모님을 다치게 할 리는 없을 테니.“늦었으니 일찍 쉬세요. 저도 이젠 돌아가서 쉴 거예요.”강일구는 하품하고는 박 집사에게 인사하고 돌아갔다.박 집사는 그가 한 말을 되새기며 웃었다.“어쩐지 저 자식 사모님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 했더니. 참 볼 줄 알아.”‘강일구: 그래서 내가 가장 빨리 월급이 올라가는 거예요.’한편 관성 호텔.여씨 집안의 세 식구는 거의 마지막으로 호텔을 떠났다.앞이 안 보이는 여운초가 걸음이 너무 느린 탓이었다.사람이 점점 적어지자, 여 씨 사모님은 연기하기도 귀찮은지 아예 여운초를 놔두고 먼저 호텔에서 나갔다.지팡이가 없는 여운초는 밖으로 나가려고 더듬으며 걸었지만, 방향을 잘못 잡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녀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전이진?”전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응하고는 물었다.“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길래.”전이진의 눈에 웃음기가 돌았다.“뭐 빠뜨린 물건이라도 있어? 왜 다시 돌아왔어? 나한테 말해봐, 내가 찾아줄게.”그녀는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밖으로 나가기 전, 엄마가 선글라스를 끼지 말라고 분부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은 표정을 읽기 쉬웠다.“...길을 잘못 집었어. 원래는 나가려고 했거든. 어느쪽으로 가야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있어?”전이진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의 행동에 놀란 여운초는 재빨리 손을 빼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어떻게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