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참.”“우리 부부가 너와 효진 씨를 이어줬잖아?”그에 소정남은 응했다.“맞아.”“그러니까 주선해 준 값으로 내 계좌번호를 주는 거야, 무슨 생각하는 거야? 신혼 선물로는 돈 말고 선물을 준비해 줄게. 돈을 주는 건 너무 촌스러워서 말이야. 하지만 주선해 준 값으로는 돈을 받는 게 좋아. 난 속물이라 돈이 좋거든.”소정남은 침묵에 잠겼다.하예정은 전태윤을 그와 따지면서 돈을 요구하는 남자로 만들었다.이 성대한 연회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과거에는 참가해도 기껏해야 10분 정도 있다가 떠나던 전씨 집안 도련님이었는데, 오늘 저녁에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있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전태윤은 그의 실제 행동으로 그가 얼마나 아내를 총애하는지 증명했다.연회는 또한 사람들에게 전씨 가문에서 하예정의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보여주었다. 외부 소문처럼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시댁의 미움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시부모님은 그녀를 딸처럼 여겼고 시동생들은 그녀에게 전태윤을 대하듯 존경했다.하예정이 오늘 밤 몸에 치장한 액세서리들은 시어머니가 준 것인데,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 보석의 가치가 수억 원에 달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장소민이 이 며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귀중한 보석을 줄 수가 없다.오늘밤이 지난 후로부터, 하예정이 시댁에서의 지위가 불안정하고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점차 사라졌다.이런 것들에 대해 그녀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별생각 없이 남편과 같이 연회에 참석했을 뿐이다.전태윤의 차에 오른 후, 그녀는 몸을 옆으로 기울더니 남편의 몸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나 안 취했어...”그는 그녀의 예쁜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주량이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이 정도로 마신 거야? 처형이 알면 또 내가 당신을 잘 지켜보지 못했다고 나무랄걸.”처형은 그에게 그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않도록 잘 지켜보라고 했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
전태윤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그녀가 자기 아내라는 것이 매우 좋았다.하예정은 곧 잠에 들었다.잠이 든 것을 본 전태윤은 그녀를 껴안으며 양복 점퍼를 벗어 그녀의 몸에 걸쳐줬다.“피크 별장으로 돌아가요.”전태윤은 낮은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기사는 공손히 그에 응했다.전태윤은 아내와 함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여 눈을 감았다.피크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전태윤도 잠이 들었다.기사가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 부부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기사는 옆에 있는 강일구에게 물었다.“일구 씨, 도련님을 깨워야 할까요?”“당연하죠. 도련님과 사모님을 차에서 자게 할 수는 없잖아요? 내일 도련님께서 차 안에서 깨어나면 기사님을 해고할 수도 있어요.”그러자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일구 씨가 깨우면 안 될까요.”“당신은 운전기사이고, 저는 경호원일 뿐인데요.”“도련님께서 일구 씨와 사이가 좋잖아요. 사모님도 일구 씨를 좋아하시고요. 일구 씨가 깨우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것 같은데... 도련님께서 화낼까 봐 두려워서 그래요.”“그건 제가 도련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고 사모님에게 잘 보였기 때문인걸요.”그는 하예정의 호감을 사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예전에 전씨 가문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어르신과 큰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은 사모님이니 사모님의 호감을 사게 되면 승진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전태윤의 주변에 경호원이 그렇게 많았지만, 사모님은 강일구의 이름만 기억했다.“형님...”“됐어요, 제가 깨울게요.”그는 지체하지 않고 공손히 불렀다.“도련님, 집에 도착했어요.”전태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러다 또 한 번 부르니 비로소 반응하기 시작했다.기사도 때맞춰 같이 입을 열었다.“도련님, 집에 도착했습니다.”강일구가 자신을 쳐다보자, 기사는 멋쩍은 듯 웃었다.이에 강일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직업을 위해서니까.전태윤이 깨어나자, 강일구와 운전기사는 급히 차 문을 열
강일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괜찮아요, 사모님이 알아서 도련님을 달래줄 테니. 도련님은 막무가내로 성질을 부릴 때마다 사모님에게 져요. 사모님이 도리를 따지기만 하면 도련님은 질 게 분명해요.”박 집사는 그를 노려보았다.강일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사실이잖아요. 걱정 마세요, 사모님만 계시면 하늘이 무너져도 버틸 수 있어요. 도련님이 화나실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사모님만 찾으면 돼요.”어쨌든 아무리 화를 내도 사모님을 다치게 할 리는 없을 테니.“늦었으니 일찍 쉬세요. 저도 이젠 돌아가서 쉴 거예요.”강일구는 하품하고는 박 집사에게 인사하고 돌아갔다.박 집사는 그가 한 말을 되새기며 웃었다.“어쩐지 저 자식 사모님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쓴다 했더니. 참 볼 줄 알아.”‘강일구: 그래서 내가 가장 빨리 월급이 올라가는 거예요.’한편 관성 호텔.여씨 집안의 세 식구는 거의 마지막으로 호텔을 떠났다.앞이 안 보이는 여운초가 걸음이 너무 느린 탓이었다.사람이 점점 적어지자, 여 씨 사모님은 연기하기도 귀찮은지 아예 여운초를 놔두고 먼저 호텔에서 나갔다.지팡이가 없는 여운초는 밖으로 나가려고 더듬으며 걸었지만, 방향을 잘못 잡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녀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전이진?”전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응하고는 물었다.“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길래.”전이진의 눈에 웃음기가 돌았다.“뭐 빠뜨린 물건이라도 있어? 왜 다시 돌아왔어? 나한테 말해봐, 내가 찾아줄게.”그녀는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밖으로 나가기 전, 엄마가 선글라스를 끼지 말라고 분부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은 표정을 읽기 쉬웠다.“...길을 잘못 집었어. 원래는 나가려고 했거든. 어느쪽으로 가야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있어?”전이진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의 행동에 놀란 여운초는 재빨리 손을 빼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어떻게
전이진은 멀리서 여씨 집안의 경호원 차를 따라갔다.처음에는 그 차가 별로 수상한 곳은 없었다.약 10분 정도 지나자, 여씨 일가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빠지기 시작했다.전이진은 불안해졌다.대체 여운초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전이진은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티를 내지 않고 여전히 천천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로 따라갔다. 목적지에 도착해야 상대방의 목적을 알 수 있다.여운초는 전이진이 따라오는 것을 몰랐다. 경호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녀는 바깥의 기척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옆에서 달리는 자동차가 많았는데, 한참 지나니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많이 잦아졌다.그녀는 빌라 구역으로 돌아가는 그 길로 접어들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 길은 빌라 구역으로 가는 길이어서 바깥 도로에 비해 차가 적었다.낮에도 적지만 밤이 되면 거의 차가 다니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자고 싶었지만, 감히 잠들지 못했다.익숙한 환경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경호원이 그녀를 도중에 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 잠도 못 잤다.차가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멈추었다.경호원은 차를 세운 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여운초는 경호원이 차에서 내리는 기척을 듣고 서둘러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다.차 문이 열리자, 그녀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낯선 사람이었다.걸음걸이를 들어보니 낯선 걸음이었다. 상대방이 다가오자 그녀는 그의 몸에서 짙은 담배 냄새를 맡았다.“누구세요?”그녀는 경계하면서 물었다.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 서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상대방이 그녀를 매우 자세히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에 그녀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바로 차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발 늦었다. 상대방은 발로 차 문을 막더니 이어 차에 올라탔다.그녀는 몸을 돌려 반대편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그 남자는 그
그는 여운초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고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여운초도 곧 차에서 내렸다.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당연히 계속해 상대방을 쫓으면서 팰 수는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다른 한쪽 신발도 벗어 양손에 든 채 뛰었다.그녀도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고 있는지 몰랐다.겨우 몇 걸음 뛰고는 온몸이 담배 냄새인 그 남자에게 잡혔다. 그가 거칠게 그녀를 뒤로 잡아당기자, 그녀는 바로 차 앞부분에 부딪혀 넘어졌다. 그는 곧 그녀를 자기 몸으로 덮으려고 다가갔다.여운초는 다시 하이힐로 상대를 패려다가 신발을 빼앗겼다. 하이힐이 손에 없자 그녀는 무릎을 세워 힘껏 찼다.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을 누르는 무게감이 사라졌다.급소를 정곡으로 찌른 듯했다.여운초는 그 틈을 타서 몸을 옆으로 굴리고는 얼른 다시 일어나 쏜살같이 도망쳤다.담배 냄새가 나는 그 남자는 여운초에게 급소를 찔려 한동안 쫓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이곳은 외진 곳이라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부하들에게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여씨 집안의 경호원도 그가 요구한 대로 지정한 장소까지 여운초를 데려다준 후 조용히 떠났다.그는 여 대표 부부가 몰래 동영상이라도 찍어 앞으로 계속 그들을 위해 일하도록 협박할까 봐 무서웠다.그래서 경호원에게 여운초를 데려온 후 바로 떠나라고 했다.2분 정도 추스른 뒤에야 담배 냄새가 나는 그 남자가 일어났다. 여운초는 이미 100여 미터 도망쳤다. 앞이 안 보이는 그녀는 비틀거리며 뛰었다. 낯선 환경에서 그녀는 앞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때때로 나무에 부딪혔다.그녀는 지금 어느 공원에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그 남자는 그녀를 쫓아갔다.이 장님은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냥 도망치게 놔둬도 멀리 갈 수 없었고, 게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산기슭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더욱 조용할 뿐만 아니라, 정자도 하나 보였다.‘저 장님을 제압한 다음 정자에 있는 석탁 위에서...’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그의
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전이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전이진은 재빨리 그의 주먹을 피했고 그가 휘두른 것과 같이 주먹을 되날렸다. 상대방은 머리를 살짝 비켜 주먹을 피했다.차 안의 공간이 좁은 탓에 행동이 제한받은 남자는 비록 격렬하게 반항하며 전이진과 싸웠지만 열세에 처했다. 또한 그 남자는 앉아있었고 전이진은 서 있었다.분노에 휩싸여있는 전이진은 무자비했다.몇 분 후, 그 남자를 얼굴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할 지경으로 때린 후 그를 차에서 끌어 내려 가로등의 불빛을 빌려 상대방의 모습을 보려 했다.방금 미친 듯이 때리는 데만 집중하느라 상대방의 생김새를 홀시한 데다가 지금은 또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코가 퉁퉁 부을 정도로 패놓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이는 대충 40에서 50세 정도인 것 같았다.“감히 운초를 건드려?”전이진은 상대방을 걷어차며 차갑게 말했다.“운초는 내 형수의 친구야, 우리 전씨 가문이 지키는 사람이란 말이야.”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이진은 차 키를 뽑고 문을 닫아 남자가 차를 몰고 도망갈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그 남자의 사진을 찍었다. 이 남자가 혹시라도 도망친다고 해도 사진을 소정남에게 넘겨주면 이 사람의 신원을 말끔히 밝혀낼 수 있다.사진을 찍은 후, 전이진은 다시 한번 상대방을 걷어찬 다음 여운초가 도망친 방향으로 달려갔다.여운초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앞에 길이 있으니 달릴 수 있는 한 계속 달렸다.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 남자가 쫓아오는 줄 알고 더 빨리 뛰다가 또 나무를 들이받고 넘어졌다.그녀는 앞길을 똑똑히 보려고 애써 눈을 부릅떴다.눈앞은 흐릿했고 무엇을 봐도 겹친 실루엣 뿐이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억지로 앞길을 똑똑히 보려고 하니 머리가 따끔거리기까지 했다.“운초야.”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일어나서
여운초는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감히 전이진을 붙잡지는 못하고 두 손을 어색한 자세로 들고 있었다.전이진은 그녀를 안고 걸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작고 여리여리해 보여서 엄청 가벼운 줄 알았는데 안아보니 꽤 무겁네. 만약 몇 킬로미터를 다시 안고 돌아와야 하는 거였으면 힘들어서 두 팔도 못 들었을 거야.”“...너한테 안아달라고 한 적 없어.”‘혼자 갈 수 있다니까.’신발도 신지 않아 걷는 게 너무 느리다고 하면서 안고 가겠다고 한 건 전이진이였다.“내려줄 테니까 그냥 날 잡고 가는 건 어때?”“그래.”그를 잡고 가는 것이 안겨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전이진은 바로 그녀를 내려놓았다.몇 분 정도는 안고 갈 수 있지만 오래 안기에는 무리였다. 그녀가 무겁다는 그의 말도 사실이었다.‘여운초: ...난 성인이라고!’성인은 적어도 40, 45킬로는 족히 된다. 그녀는 뚱뚱하지는 않지만, 마른 편은 아니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그녀를 도와 키와 체중을 잰 적이 있는데, 163센티미터에 체중은 41킬로였다.전이진은 그녀를 내려놓고는 양팔을 휘둘렀다.그녀가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언짢았을지도 모른다.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자, 아직 몇백 미터 남았어.”그녀는 꽤 멀리 달렸다.“고마워.”“고마워할 필요 없어. 나도 형수님이 부탁해서 따라온 거야. 형수님이 꼭 집에 데려다 주라고 했거든. 네가 거절했다 해도 무사히 집에 갔는지 확인하려고 따라온 거야.”여운초는 마음속으로 하예정에게 감사했다.그녀는 항상 자기가 스스로를 잘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의 일을 통해 그녀는 매우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령 그녀가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다고 해도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게다가 그녀는 싸움에 능한 사람도 아니다.몸에 칼을 지니고 다닌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반격은 못 할망정,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너 말이야, 제일 중요한
“걱정 마, 언젠가는 정 의사가 너의 눈을 치료해 줄 거야.”전이진은 그녀를 위로했다.“신의 어르신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르신은 연세가 많으셔서, 찾았다고 해도 병을 봐주진 않으실 것 같아. 듣자 하니 지금은 모두 정 의사가 병을 본다고 해. 정 의사는 신의의 의술을 아주 잘 물려받았어.”전이진이 보기엔 정 의사를 모셔 여운초의 눈을 치료해 줄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감히 신의가 손수 치료하길 바라지도 않았다.전태윤은 정 의사가 매우 대단한 사람이라 했다. 의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독도 잘 쓴다고 했다. 당연히 독으로 사람을 해칠 리는 없고 그저 독을 잘 쓴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두려워하게 할 뿐이다.게다가 높은 무술 솜씨로 일찍이 남씨 가문 사모님과 함께 남씨 가문 가주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어쨌든 전이진의 눈에 정 의사는 제2의 신의였다.“너 신의에 대해 잘 알아?”전이진은 솔직히 말했다.“아니, 난 형에게서 들었을 뿐이야. 예씨 집안의 다섯째 도련님이 우리 전씨 그룹과 사업상의 왕래가 있어 깊이 협력하고 있거든.”예준성이 결혼할 때 전태윤이 직접 A시에 가서 결혼식에 참가하기까지 했다.“아, 그래.”여운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한참을 걷다가 전이진의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차에 태운 후 다시 그에게 맞아 얼굴이 심하게 부은 그 남자를 보러 갔다. 상대방은 이미 기회를 틈타 도망친 후였다.전이진은 다시 차에 올라타 물었다.“널 해친 그 남자, 아는 사이야?”“낯선 사람이야. 온몸에서 담배 냄새가 났어. 담배 없이는 살 수 없는 남자인 것 같아.”여운초는 그 남자에게서 담배 냄새밖에 맡지 못했다.“내가 그 사람을 때릴 때 누구인지 정확히 보지 못했어. 때리고 나서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맞아서 얼굴이 부은 후라 알아보지 못했고. 그렇지만 괜찮아. 그 사람의 얼굴을 찍어놨어. 내일 소정남에게 조사를 맡기면 돼. 네 엄마가 너를 그 사람에게 보낼 정도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