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이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일단 지켜보죠. 소현 언니도 예준하 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두 사람 서로 마음만 확인하면 이모도 허락하실 거예요.”성소현은 제 감정에 솔직한 편이다.전태윤을 사랑할 때 그가 마음이 없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구애했다.예준하와 서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가족들도 반드시 허락해 줄 것이다.“여보, 그 사람들 걱정 마. 다들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니 알아서들 할 거야. 늦었어, 얼른 자자.”전태윤은 고개 숙여 그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앞으론 내가 절제할게. 네 몸도 쉬어야지. 오늘 밤엔 안고만 잘게. 절대 안 건드려.”하예정은 고개 들어 그에게 입맞춤하고는 함께 단잠에 빠졌다.그녀는 항상 빨리 자는 편이라 몇 분도 채 안 돼 바로 꿈나라로 들어갔다.그 시각 전태윤은 소정남에게 전화가 걸려 오자 하예정이 깰까 봐 일단 끄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은 팔을 빼냈다.이어서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로 걸어갔다.인기척을 느낀 숙희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아주머니, 전화 좀 받으려고요. 예정이 깰까 봐 나왔어요. 괜찮아요.”숙희 아주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다시 방문을 닫았다.전태윤이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소정남의 문자가 도착했다.「지훈 형 집으로 와.」소정남의 문자 내용은 전태윤더러 소지훈 만나러 가라는 뜻이다.전태윤은 더 묻지도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알았어.」그리곤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잘자.”몇 분 후 강일구가 다른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집 아래에서 대기했다. 전태윤이 내려오자 다들 묵묵히 그를 차로 모셨다.“소지훈 씨 댁으로 가.”전태윤의 분부에 경호원들은 머리를 끄덕였다.소씨 일가 저택에 도착하니 소정남이 문 앞에서 기다렸다.“태윤아.”그는 전태윤을 보자 자연스럽게 활짝 웃었다.전태윤은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마찬가지예요. 전에는 이 시간대에 집에 돌아가지도 않은걸요.”그는 결혼하고 나서야 정상적인 생활 패턴으로 돌아왔다.“앉아요.”소지훈이 그를 자리로 모셨다.“술 한잔하시죠. 내가 좋은 술 저장해뒀거든요.”탁자 위에 술 한 병과 술잔 두 개가 놓였고 두 형제가 마셨는지 잔에 술까지 있었다.전태윤이 완곡하게 거절했다.“좋은 술 권해줘서 고맙지만, 와이프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해요. 술 냄새가 너무 독해서요. 이젠 술자리에 가도 별로 안 마셔요.”소지훈은 흠칫 놀라더니 곧장 크게 웃었다.“정남이가 사랑의 힘이 너무 커서 태윤 씨를 변하게 했다던데 인제야 조금 믿어지네요. 태윤 씨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전태윤은 전에 술자리에서 술을 얼마나 많이 퍼마신 지 모른다.그는 소정남을 힐긋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정남이도 이젠 술도 줄이고 담배는 아예 끊었잖아요.”소정남이 재빨리 말했다.“우리 효진 씨가 담배 냄새 싫어하거든.”소지훈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두 사람 사랑 타령할 때 이 외로운 싱글도 좀 고려해야죠. 난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고요.”둘은 나란히 소지훈을 바라봤고 소정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야, 형. 내가 태윤이한테 사랑 타령한 게 아니라 태윤이가 아내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거든. 난 그저 태윤이한테 아내 다스리는 법을 배울 뿐이야.”이에 소지훈이 단호하게 반박했다.“됐어, 네가 다스리긴, 제수씨가 널 다스리면 모를까.”소정남은 이제 곧 심효진과 약혼한다. 소씨 일가에서는 그녀를 이미 제집 사람으로 여기고 소지훈도 그녀를 제수씨라고 부른다.“형, 나랑 태윤이는 솔로 탈출했으니, 형도 이젠 슬슬 다그쳐야지. 큰아버지랑 큰어머니가 애가 타서 흰머리까지 나셨어. 형 이상형 뭐야? 우리한테 말해봐 봐. 평소에 눈여겨 봐줄게.”소정남이 소지훈의 감정 문제에 열정적인 원인은 심효진이 아주 궁금해하기 때문이다.그녀는 미래 아주버님이 될 소지훈이 너무 신비주의이고 또 겸손한 데
전태윤은 세 번 훑어본 후 묵묵히 자료를 원상 복귀해서 봉투에 넣고는 소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소지훈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서현주가 그 인간들에게 이용당할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이 차갑게 말했다.“나도 우리 누나가 이상하다고 말한 덕에 의심이 일었는데 정말 수상하더라고요. 서현주는 전에 주형인이 아이 보러 가는 것도 싫어했는데 이젠 선뜻 주형인과 함께 가고 우빈이를 달래기까지 하잖아요.”그들은 여태웅 부부가 한때 전태윤에게 저격당해서 그런 거로 의심할 뿐 서현주가 이용당할 줄은 아예 몰랐다.주씨 일가는 주우빈의 가족이니 아이한테 접근해도 굳이 의심을 사진 않는다.“상대의 타깃은 태윤 씨가 아니라 사모님이에요. 그런데 태윤 씨가 아내분께 경호원도 안배하고 또 태윤 씨 아내분이 주먹질을 하다 보니 태윤 씨 신분이 신분인지라 놈들이 대놓고 예정 씨를 저격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조카를 이용하는 비겁한 수단을 썼죠. 우빈이는 예정 씨 손에 커서 이모 조카 사이가 남다를 거예요. 조카가 놈들 손에 잡히면 예정 씨는 단독으로 나오라고 해도 나갈 거예요.”소지훈은 일의 실마리가 풀리자 상대의 영악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예정 씨 고향 식구들을 이용하면 되던 일도 망칠 것 같았나 보죠. 그래서 서현주를 이용한 거죠.”하예정의 고향 식구들은 인간쓰레기 인성이라 조금만 세력이 있는 사람을 봐도 쩔쩔맨다.가짜 하예정을 만들어 전씨 일가 사모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했는데 허점투성이라 하예정에게 계획을 들키고 결국 전태윤이 망가뜨렸다.성형한 하소진은 큰 사촌 언니와 똑 닮아 형부가 잘못 알아보고 큰 소란이 일어났다. 두 자매는 원수처럼 등졌고 하소진은 마지못해 다시 성형했다.어찌 됐든 하씨네 사람들은 큰일을 못 한다.그런 인간들을 이용하는 건 일을 망치는 거나 다름없다.“이 사람들 자료는 내일 경찰 측에 제출할 겁니다. 나쁜 놈 잡는 건 경찰이 해야 할 일이죠. 다만 이 인간들이 워낙 교활해서 단번에 다 체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태윤 씨,
“이참에 반년 쉬는 건 어때?”“반년 좋지. 그렇게 하는 거다.”소지훈이 웃으며 말했다.“차라리 출산휴가까지 쓰지 그래. 태윤 씨, 얘 그냥 결혼 휴가 두 달만 주면 돼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달이에요. 두 달 후에 회사 안 나오면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이놈 회사로 끌고 갈 테니.”“형, 대체 누가 형 동생인데.”“친동생도 인정사정없는 세월에 넌 심지어 사촌 동생이야.”“이젠 형도 날 안 도와주네.”물론 소정남도 농담일 뿐이다.결혼 휴가는 두 달로 충분하니까.심효진과 하예정이 동업한 창업 프로젝트도 한창 불티나게 진행 중이라 심효진의 머릿속엔 오직 투자에 성공하여 큰돈을 벌 생각이다.소지훈은 잔에 담긴 술을 다 마시고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전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고마움을 표하고 소정남과 함께 집을 나섰다.몇 분 후 전태윤의 전용차가 소씨 일가 저택을 나섰다.밤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가장 어두운 이 순간을 거쳐 밝은 햇살이 곧 찾아올 것이다.해가 뜨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하예정은 오늘 하루 휴식이라 아침 일찍 언니네 가게로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하루 토스트에 오니 조카가 걸상 두 개로 이어놓은 ‘미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하예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언니에게 말했다.“언니 그냥 우빈이 데리고 우리 집으로 이사와. 그럼 아침 일찍 깨나도 우빈이가 더 잘 수 있잖아. 매일 아침 언니랑 함께 애가 너무 지쳐 보여. 한창 키 클 나이인데 잠이 부족하면 영향을 미친단 말이야.”하예진은 토스트 재료를 한창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가게로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종류대로 토스트 재료를 정리하는 일이다.“거기 가도 일찍 깨어나니 너희까지 방해돼. 우빈이랑 얘기해 볼게. 얘가 그리로 가겠다면 보내고 난 안 갈래.”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깨어나 아무리 조심해도 인기척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동생네 부부까지 방해하면 안 된다. 특히 제부 전태윤은 업무가 다망하여
“알았어.”동생이 먹고 싶다고 하니 하예진은 얼른 베이컨을 구웠다. 그녀도 베이컨을 싫어해 하예정의 토스트에만 베이컨을 듬뿍 놓았다.“다 됐어.”하예진은 동생에게 토스트를 가져가라고 했다.하예정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깨끗이 씻고는 토스트를 가져왔다.두 자매는 나란히 식탁 앞에 앉았고 하예정이 습관대로 휴대폰을 꺼내 뉴스를 보며 토스트를 먹으려 했다.“음식 먹을 때 누가 휴대폰 보래? 얼른 집어넣어.”하예진은 그녀가 먹으면서 휴대폰을 만지는 걸 싫어했다.“뉴스 좀 보려던 것뿐이야.”하예정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얌전히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앞으론 밥 먹을 때 휴대폰 하지 마.”“알았어.”언니 앞에서 하예정은 꼼짝도 못 한다. 게다가 밥 먹을 때 휴대폰 보는 건 원래 좋은 습관이 아니다.“언니, 오늘 저녁에 정말 나랑 함께 연회 안 갈래?”“응, 안 가.”“언니, 나가서 바깥세상도 구경 좀 해.”하예진은 따끈따끈한 토스트를 먹으며 대답했다.“난 지금 세상 구경할 필요 없어. 아직 그런 단계에 오르지 못했어. 넌 달라. 넌 이젠 전씨 일가의 사모님이니 그런 모임에 적응해야 해.”하예정은 언니의 고집을 못 이겨 바로 포기했다.이모가 함께 가자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언니니까.“언니, 차 언제 온대?”어제 오후 하예진은 2천만 원 남짓의 차를 한 대 뽑았다. 성소현이 좀 더 비싼 거로 골라보라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며 국산 차로 선택했다.“며칠 더 걸릴 거야.”“그렇구나.”두 자매가 얘기를 나누며 아침 먹을 때 노동명이 가게로 들어왔다.그는 이젠 가게의 두 점원보다 더 빨리 온다. 그가 도착한 후에야 점원들도 들어섰다.“대표님, 빨리 오셨네요.”하예진은 토스트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동명을 맞이했다.“오늘 쉬는 날 아니에요? 뭐 드실래요?”노동명은 먼저 하예정에게 인사하더니 하예진이 다 못 먹은 토스트를 보며 자상하게 말했다.“일단 토스트 마저 먹어. 맞아, 나 오늘 쉬는 날이야. 늘 먹던 대로
노동명과 하예정은 딱히 할 말이 없다.그녀가 있으니 노동명은 하예진과도 얘기 나누기 불편했다.노동명의 아침 메뉴까지 다 만든 후 손님들이 속속들이 들어왔고 다행히 다들 토스트를 주문하여 점원들이 알아서 서빙했다. 사장 하예진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그녀는 자리에 앉아 다시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동명 오빠.”앙칼진 목소리에 노동명의 식욕이 다 떨어졌다.하예진 자매는 유리창 너머로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하예정은 손은경을 모르지만, 하예진은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뻤고 노동명과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은경 씨, 아침 드시려고요?”하예진이 토스트를 내려놓고 또 한 번 손님을 맞이했다.손은경은 노동명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하예진을 넌지시 바라봤는데 몰래 숨어서 지켜볼 때보다 이렇게 마주 보니 훨씬 더 예뻤다.“여기 토스트가 맛있다고 소문났잖아요. 나도 오빠랑 같은 거로 주세요. 고마워요.”손은경은 노동명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정판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티슈 몇 장 뽑아서 의자를 깨끗이 닦은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하예정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예정 씨.”“네, 안녕하세요.”하예정은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녀가 선뜻 이름까지 부르니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언니가 방금 이 미인분을 ‘은경 씨’라고 부르던데 대체 언제 알고 지낸 거지?’이경혜와 함께 많은 연회에 참석하며 부잣집 사모님과 따님들을 수없이 봐왔고 사람 보는 안목도 키웠지만 손은경을 본 순간 그녀야말로 진정한 재벌가 따님이란 걸 느꼈다. 제스처 하나하나에 아우라를 내뿜었으니까.“손은경이에요.”그녀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은경 씨.”손은경은 가볍게 웃을 뿐 더는 하예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줄곧 하예정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아직 어색한 사이이고 이런 장소에서는 가볍게 자기소개만 하여 상대에게 이름 석 자만 알리면 된다.나중에 만날 기회가 더 많을 테니까.노동명이
손은경도 화내진 않았다.두 사람은 일찌감치 알고 지냈지만 왕래가 드물어 그다지 친하지 않으니까.노동명이 그녀의 과거를 모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은경 씨, 토스트 다 됐어요.”하예진이 토스트를 들고 오더니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천천히 드세요.”손은경도 웃음으로 받아쳤다.하예진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언니, 언제 알게 된 분이야?”하예정이 나지막이 물었다.“노 사모님이 그날 지나가다가 가게로 와서 얘기 좀 나눴는데 나보고 은경 씨랑 동명 씨 이어주라고 하셨어. 사진도 보여줘서 은경 씨 바로 알아봤지.”하예진도 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대답했다.“두 사람 잘 어울리지? 은경 씨는 참 편한 느낌이 들어 재벌가 따님 같은 거만함이 없어.”하예정은 짙은 눈길로 언니를 쳐다보곤 계속 토스트를 먹었다.“어울리긴 해.”이모는 노씨 일가 사모님이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태윤 씨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그런 윤미라가 며느릿감을 물색하고 두 사람을 부추기니 하예정도 다행이었다. 예진 언니가 괜히 말려들어 갈 일은 없으니까.“엄마.”우빈이가 깨어나 자리에 앉아서 습관처럼 엄마를 찾았다.하예정은 마침 토스트를 다 먹고 언니에게 말했다.“우빈의 아침은 내가 차릴게. 언니는 얼른 아침 먹고 가게 일 봐.”그녀는 조카를 번쩍 안았다.“이모.”금방 깬 아이는 비몽사몽이어서 하예정의 목을 끌어안고 그녀 어깨에 머리까지 파묻었다.“우빈이 쉬 마려워요.”하예정은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나올 땐 우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노동명을 보더니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손은경은 처음 보는 얼굴이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결국 깍듯이 인사했다.“누나, 안녕하세요.”손은경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우빈이구나. 너무 귀엽네. 누나는 손은경이야. 너희 동명 삼촌 친구야.”“안녕하세요, 은경 누나.”우빈이가 또다시 그녀에게 인사했다.아이는 쑥스러운지 하예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가게에서 분주한 시간을 보낼 때 전태윤은 푹 자고 일어나 눈도 못 뜬 채 몸을 기울이고 팔을 뻗어 아내를 끌어안으려 했는데 옆자리가 텅 비었다.그제야 눈 떠보니 아내가 집에 없었다.해가 중천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자본 적은 없다.어젯밤에 너무 늦게 돌아와서 그런 걸까?전태윤은 부랴부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일부러 하예정이 사준 옷으로 입었다.방문을 열자 숙희 아주머니가 고양이와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문 여는 소리에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깨셨어요 도련님. 아침 준비해 드릴까요?”“벌써 아홉 시네요.”전태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그래도 아침은 드셔야죠. 사모님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도련님 깨시면 무조건 아침 차려드리라고요.”“예정이는요? 언제 깨난 거죠? 언제 나갔대요?”전태윤은 기분이 살짝 언짢았다.주말에 집에서 휴식하는데 아내가 아침 일찍 가버렸으니.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서 함께 아침 먹는 게 정상 아닌가?왠지 아내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숙희 아주머니가 대답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하예정이 돌아왔다.“깼어요 태윤 씨?”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며 남편과 인사했는데 의외로 전태윤이 시큰둥한 얼굴로 몸을 홱 돌리고는 방에 돌아갔다.아침 댓바람부터 남편을 내팽개치고 나가더니 돌아와서 문 열자마자 또 이름을 부르다니, 남편이라고 해야지!아내에게 버림받아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인제 더 불쾌해져서 방에 돌아갔다.전태윤이 삐졌다.하예정은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진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아주머니께 물었다.“아주머니, 저이 왜 저런대요? 누가 잘못 건드렸어요?”숙희 아주머니는 전태윤이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걸 보더니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사모님 때문에 삐지신 것 같네요.”“네?”하예정은 이해가 안 갔다.“난 아침 일찍 나가서 태윤 씨 심기를 건드릴 새도
전호영은 꽃다발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직원이 밖으로 나가면서 전호영이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보습을 보았지만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만약 전호영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상한 일로 여길 것이다.“전 대표님.”다들 마음속으로 아무리 전호영을 비웃을지라도 겉으로는 여전히 공손하게 대했다.전호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 그는 고씨네 남매에게 다가갔다.“현이 씨, 퇴근하시죠. 제가 데리러 왔어요.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자, 받아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 앞으로 내밀었다.고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말했어요. 제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매번 올 때마다 꽃다발을 사 오지 마세요. 제 사무실이 곧 꽃집이 될 것 같으니까요.”전호영은 심지어 하루에 꽃다발을 여러 번 선물한 적도 있었다.고현은 전호영이 보낸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전호영은 보복으로 그녀에게 더 많은 꽃을 보냈다.고현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곧 먹혀 죽을 것만 같았다.“꽃병을 더 사서 사무실로 보내드릴게요.”“저를 꽃병이라고 비아냥거리시려는 거에요? 제 사무실에는 꽃병이 가득 놓여 있거든요.”전호영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잘못했네요. 다음에는 이런 꽃들을 보내지 않고 다루기 쉬운 꽃들로 보낼게요. 현이 씨 사무실에 있는 그 꽃병들을 집으로 몇 개 가져가면 사무실이 꽃병이 줄어들 거 아니에요.”옆에 서 있던 고빈이 말을 이었다.“우리 형은 꽃다발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무척 좋아해요. 저에게 주세요. 제가 이 꽃들을 저의 여성 지인들이게 줄 테니까요. 돈도 절약할 수 있으니 너무 좋을 것 같아요.”“고빈 씨는 아직 퇴근 안 하셨군요.”전호영은 꽃다발을 고현의 품에 안겨주며 자연스럽게 고현의 손을 잡았다.고빈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설마 이제야 저를 보신 건 아니죠? 혹시 시력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잘 고려해 보고 짝을 찾으셔야지 아니면 시각장애인을 고를 수도 있어요.”“그건 제 눈에 현이 씨만
장 대표가 전호영의 차를 얼핏 보더니 말을 이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군요. 셋째 도련님은 정말 매일 고씨 그룹에 가서 고 대표님을 귀찮게 하는군요. 저는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사실이에요. 고 대표님은 우리 장성에서 가장 젊고 우수한 대기업 대표님이죠. 그의 잘생긴 외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로잡았는지 몰라요. 고 대표님은 강성의 모든 젊은 여자들의 이상형일걸요. 여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호영 도련님이 해내게 될 줄은 몰랐네요.”“하지만 외모로 보면 전호영 도련님과 고현 대표님은 참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면 정말 천생연분이죠.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 모두 남자네요. 너무 아쉬워요.”두 사람의 만남은 수많은 얼마나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자아냈는지 모른다.강성의 명문 아가씨들도 전호영이라는 남자에게 진 것이 자못 못마땅했다.“두 분이 이미 서로 남녀 관계를 확정하셨나요?”장 대표는 계속해서 물었다.“제가 듣기로는 전호영 도련님이 아직도 고현 대표님께 구애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의 일방적인 짝사랑 아닐까요? 사실 고현 대표님이 정상적인 남자인데 전호영 도련님이 게이일 수도 있죠.”“저도 잘 몰라요. 진실한 사실이 어떠할지 누가 알겠어요. 고 대표님은 냉담한 분으로서 수많은 대표님과 접촉하시지만 진정으로 친한 친구는 얼마 없어요. 고 대표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거든요.”“하지만 고현 대표님께서 전호영 도련님을 점점 더 포용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전호영 도련님이 고 대표님을 위해 여성 옷을 입으며 여자로 분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두 사람 중에서 아마 전호영 도련님이 더 비정상인 것 같아요. 고 대표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전호영 도련님이 여성 옷을 입었을 거라고 봐요.”전호영은 여성 옷차림으로 고씨 그룹에 왔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전호영을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소문을 퍼뜨리고 그렇게 일파
멀리 장성에 있는 전호영도 전이진이 보낸 카카오 스토리를 보았다. 그는 여운초와 전이진이 혼인 신고서를 받은 모습을 보고 무척 부러워했다.그는 결국 다시 자리를 떠나 호텔 사무실을 나오더니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이때 고현이 사업에 관한 얘기를 방금 마쳤을 때였다.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 고객과 악수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장 대표님, 수고하셨어요.”장 대표도 이내 대답했다.“즐거운 협력이 되길 바랍니다.”고현은 예의 바르게 말했다.“벌써 식사 시간이 되었네요. 우리 함께 식사하는 건 어때요?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제가 이번에도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곧 비행기를 타야 할 시간이거든요. 다음에요. 다음에 제가 고 대표님께 음식 대접해 드릴게요.”고현은 이해하며 말했다.“장 대표님께서 오신다면 당연히 제가 음식 대접해 드려야죠. 다음에 오시면 꼭 저에게 대접할 기회를 주셔야 해요.”“당연하죠. 약속드릴게요.”장 대표는 웃으며 대답했다.고현이 고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자 고빈은 눈치껏 일어나사 미리 준비한 특산품을 장 대표에게 가져다주었다.“장 대표님, 이것은 우리가 장 대표님을 위해 준비한 강성의 특산품이에요. 귀한 물건은 아니고 우리 강성의 특색이에요. 한 번 맛보세요.”장 대표는 사양하다가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고 대표님, 고마워요.”고현과 사업해 본 사람들은 비록 고씨 그룹의 오더를 따내기가 쉽지 않지만, 고현의 인품은 흠잡을 데가 없다고 했다.고현은 사람이 엄숙하고 차갑지만, 그녀와 사업을 해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칭찬하곤 했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청년 인재가 동성애자라니... 아깝기만 했다.고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많은 대표가 아마 정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고현이 게이가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딸과 고현을 맞세워주고 싶어 했다.고현 남매와 고위층 몇 명 인사들이 함께 장 대표를 고씨 그룹 앞까지 배웅하고 장 대표 일행을 미리 준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엄마가 관성 호텔에 예약해 놓았어. 가서 축하할 겸 밥 먹자. 그리고 모두한테도 관성 호텔에 오라고 전화해 놨어. 할머니께서도 너희 두 사람이 혼인 신고한 일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운초야, 내가 방금 네 고모도 초대했어. 너와 이진이 결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아직 설이 몇 달 남았는데 그 전에 결혼식 좀 올리자.”명해은이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전이진과 여운초가 혼인 신고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관한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여운초의 새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아직 감옥에 있는데다 여운초가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명해은은 혼례 문제에 관해서 여준희와 상의하려 했다.하지만 추미자는 결국 여운초의 친어머니였기에 명해은은 여운초의 뜻을 물었다.“운초야, 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되지 않을까?”명해은은 추미자한테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그냥 결혼 사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여운초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이진 씨와 함께 감옥으로 만나러 가서 말할게요. 저와 이진 씨 결혼에 대한 모든 일은 저의 작은 고모와 상의하면 돼요. 여씨 가문에 사람들이 수많지만,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건 제 작은고모뿐이거든요.”여천우도 여운초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아직 어리기에 이런 일에 관해 잘 모를 것이다.명해은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래. 알았어. 네 작은고모도 너희들이 혼인 신고한 사실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어.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여운초 전이진이 약혼한 뒤로 전씨 가문은 여운초의 배후에 서 있게 되었고 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준희는 이 가엽고 운이 좋은 조카를 전이진에 맡기게 되니 매우 안심했다.여준희도 그녀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친정집에 가는 횟수가 예전보다 줄었다.여운초 남매는 서로 자주 연락했다.여운초는 작은고모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그녀는 친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모성애를 여준희에게서 느꼈다.“언제 면회를 하러 가려고?”“오후에 가려고요. 감옥에 가서 보고
전현민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이건 세상에 둘도 없는 경사야. 우리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이진아, 이미 이르지 않으니 어서 운초랑 들어가 절차부터 밟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간다.”부모님의 재촉을 받은 전이진은 여운초의 손을 잡고 어머니 손으로부터 가족관계등록부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아서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명해은 부부는 돌아가지 않고 밖에 서서 두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전현민은 아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이러고 있으니 32년 전에 우리 둘이 이곳에 와서 결혼 증명서를 받던 날이 생각나네. 마치 어제 발생한 일과 같은데, 벌써 우리 큰아들이 이곳에 오다니... 세월이 참 빠르긴 빨라. 우리도 늙을 때가 되긴 됐나 보네.”그는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난 당신과 백년해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명해은도 감격해서 말했다.“그러게요,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딱 맞아요. 난 아직도 자신이 18살인가 하는데 우리 큰아들이 벌써 서른이네요. 우린 정말 늙었나 봐요.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네요.”“당신은 조금도 안 늙었어. 내 눈에는 당신이 관음보살과 같이 해마다 18살이야.”명해은은 몸 관리를 잘해서 전이진과 함께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남매로 착각할 정도였다.전현민도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젊은 시절에 전씨 가문의 사업에 몰두했기에 심신이 많이 상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다.은퇴한 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번 염색은 했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같이 서면 아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였다. 사실, 두 내외는 불과 한 살 차였다. 명해은은 남편의 칭찬에 웃음보를 터뜨렸다.“나도 해마다 18살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네요. 내가 아무리 몸 관리를 잘한다 해도 늙기 마련인걸요.”“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 갈 테니 두려워하지 마. 내가 당신보다 훨씬 늙어 보여.”명해은은 웃으면서 말했다.“전 두려울 것 없어요. 당신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하늘이 무너
여운초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그녀는 다만 전이진을 대신하여 은행카드만 보관할 뿐일 것이었다. 그가 돈 쓰는 것을 제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그의 돈을 쓸 일이 없을 테였다.전이진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기만 했다.“왜 계속 날 보면서 웃어요?”“좋으니까. 운초 씨, 나 지금 너무 좋아. 그냥 웃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이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또 웃었다.그러는 전이진을 지켜보는 여운초도 참지 못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둘이서 한참 동안 알콩달콩한 후 전이진이 시계를 보니 어머니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는 약혼녀를 보면서 말했다.“운초 씨, 엄마가 곧 도착할 것 같으니 우리 지금 출발해. 우리가 구청에 도착하면 아마 엄마도 도착하실 거야.”그는 꽃집에 가서 장미꽃 한 다발을 사야 했다.여운초가 불시에 결혼 신고하자는 바람에 그가 아직 준비는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서둘러야 했다.꽃다발, 다이아몬드 반지 둘 중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한평생 소중히 여길 여자임으로 절대로 서운하게 할 수 없었다.“그래요.”그가 일어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자, 여운초도 편안하게 자신의 손을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이끌려 일어섰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고로‘그대의 손만 잡고 이생의 끝까지 살아간다.’라고 했다.그녀는 전이진과 백년해로하고 평생 금실이 좋기를 원했다. 시부모님처럼 애들이 부러울 정도로 몇십 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첫 사람처럼 달콤하게 지내길 원했다.여운초는 저의 집에 있는 차를 안 타고 전이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기로 했다.그녀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그녀가 16살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기에 운전면허를 딸수 없었던 것이었다.집에 있는 운전기사는 전이진이 그녀에게 보낸 경호원인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운전도 해줄 수 있었다.20분 뒤.구청 입구명해
“운초씨, 잠깐만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당장 전화할게.”전이진은 약혼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바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명해은은 전화벨이 한참 울린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엄마, 오늘 시간 돼요?”“이제 방금 일어났어. 오늘은 별일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 왜? 아들, 엄마 도움이 필요해?”명해은이 잠기가 채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들이 다 크니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적어졌다.애들한테 더는 필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명해은은 너무 일찍 맛봤다.“저와 운초 씨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를 마치려 하는데 제가 가족관계등록부를 안 가져왔어요. 엄마 혹은 아버지가 지금 저한테 가져다줄 수 있어요? 혹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보내줘도 되고요. 제가 돌아가서 가져오면 시간이 지체되어 아마도 오후나 돼야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오후까지 못 기다리겠어요.”가족관계등록부만 손에 가지고 있다면, 전이진은 지금이라도 여운초를 데리고 혼인 신고하러 갔을 테였다.진정으로 여운초가 좋아진 그 시각부터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때의 여운초는 앞을 보지 못했기에 훌륭한 전이진을 앞두고 자비감에 모대기었다. 전이진의 사랑마저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받아들인 것이었다.그녀는 전이진이 자신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정 선생을 찾으러 여러 번 예진 리조트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하기로 하고 약혼을 한 것이었다.그래도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때 가서 결혼하기를 원했다.그녀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고 싶다고 했다.전이진이 곧 시어머니로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을 들은 여운초의 얼굴은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이 사람 뭐가 그리 급해...’이 반가운 소식을 들은 명해은은 순식간에 잠기가 싹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시간이 있고말고, 엄마 시간은 남아돌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줄게. 넌 지금 여씨 저택에 있니? 아니면 회사에 있니?” “저는 지금
그는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도 믿었다. 그는 그녀와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의 인품, 일하는 스타일 등을 천천히 알게 되었다.“혼인신고를 하고 나면 한평생 같이 살아야 해요. 나는 이혼 따위는 할 마음이 없으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당신처럼 훌륭한 남자는 앞으로도 나보다 더 좋고, 당신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때 가서 이 결혼은 할머니가 강요하셔서 한 거라고 하면서 그 여자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사랑이니 어쩌니 해도 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면서 말했다.“넌 아직도 바깥사람들이 우리 전씨 집안 남자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몰라? 전씨 집안 남자들은 모두 아내한테 일편단심이야. 전씨 집안의 가훈에는 결혼 후 한평생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혼인에 충실해야 하며 바람을 피워선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어.”“누구든 가훈을 어기는 즉시, 전씨 가문에서 쫓겨나서 더는 전씨 일가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돼버려.”“그리고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은 할머니가 당신을 선택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할머니가 강요하셔도 소용없어.”전이진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걸었다.“누구한테 전화하려고요?”여운초는 그가 할머니에게 전화 드리려나 싶어서 한마디 물었다.“내가 가족관계등록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 우리가 혼인신고를 하려면 내 가족관계등록부도 필요할 거 아니야. 내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급히 가져다 달라 하면 우리가 점심 전에 혼인신고 절차를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결혼 증명서를 받고 나면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가 될 것이었다.전이진은 여태 자기가 한시 급히 여운초랑 결혼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애초에 여운초는 시력이 회복되어 그를 볼 수 있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는 이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다. 끝내 그녀의 눈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또 법을 어기는 일까지 했다.비록 모든 불법적인 장사는 이미 압류당했고 관련된 금액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여씨 그룹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액이 바닥을 쳤으며 여씨 그룹의 재산도 많이 수축했다.큰누나가 여씨 그룹을 이어받은 후, 한동호 형님과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여씨 그룹을 이끌고 이 힘든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이런 얘기를 큰누나는 그한테 한 적 없었지만, 그는 한동호 형님과 매형을 통해서 알게되었다.비로소 그는 큰누나의 홀가분해 보이는 말투 속에 얼마나 많은 쓰라림이 숨겨져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비록 큰누나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감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부모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큰누나의 대의멸친을 받아들이긴 힘들었지만, 이해만은 할 수 있었다.현재 여씨 그룹은 큰누나가 통제하고 있지만, 큰누나가 그에게 한 말이 있었다. 자기가 가져야 할 재산은 한 푼도 양보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지지 말아야 할 재산은 한 푼도 탐하지 않는다고. 그가 물려받아야 할 재산은 언젠가는 돌려줄 것이었다.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그와 둘째 누나 단둘의 소송일 것이었다.큰누나는 단지 여천우 부모님에게 속하는 재산만 그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자식이라곤 그와 둘째 누나밖에 없으니 설사 둘째 누나가 소송을 일으킨다 해도 상대는 그일 수밖에 없었다.“누나, 나 먼저 수업 들으러 들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휴가 내서 돌아갈 테니 그때 천천히 얘기해.”“알았어, 얼른 가서 수업 봐.”동생과의 통화를 마친 여운초는 동생의 말대로 그의 부모님의 물건들을 그의 방으로 옮겨 놓았다.여운별 방의 물건은 여운초가 기분을 봐서 언제든 연락하여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앞으로 그와 여운별은 남남일 것이었다.“아가씨, 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여운초는 알았다고 하면서 핸드폰을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