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혜는 직접 하예정를 집 밖으로 배웅했다. 그녀가 차를 몰고 별장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시야에서 멀어진 후에야 돌아섰다.하예정이 가게에 돌아오자마자 서현주가 찾아왔다.그녀의 등장은 하예정을 꽤 놀라게 했다.“네 언니는?”서현주는 들어오자마자 물었다.“우리 언니는 무슨 일로 찾아?”하예정은 차 키를 내려놓고는 차갑게 서현주에게 되물었다. 옆에 있던 심효진도 서현주가 소란을 피우기만 하면 빗자루를 들고 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서현주의 얼굴에는 퍼런 멍이 들어있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있어 아주 초췌해 보였다.그녀는 올해 겨우 스물다섯 살로 하예정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지금의 컨디션으로 보면 몇 살 더 되어 보였다.‘결혼 후에 주형인이 비싼 스킨케어을 사주는 걸 아까워했나 보네. 언니보다 더 늙어 보여.’서현주의 컨디션을 보고도 하예정은 고물만치의 동정심도 못 느꼈고 되레 속이 시원했다.“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서현주는 주서인과 김은희에게 얻어맞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비록 지금 얼굴은 붓지 않았지만, 퍼런 멍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친정에 가면 부모님과 형수님한테 혼날 뿐이라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호적을 훔쳐서 먼저 주형인과 혼인신고를 했기에 조금의 예물밖에 못 받게 되었으니까.그녀의 부모들도 주형인과 혼인신고를 한 이상 앞으로 주씨 집안에서 괴롭힘을 당하게 돼도 친정에 돌아와 울며 하소연할 생각을 하지도 말라고 했다.그녀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을 찾고 싶었다.카톡을 열어보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형인과 하예진 부부의 내연녀로 된 탓에 진심으로 사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게다가 그녀는 지인들에게 본인이 시댁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그러다 문뜩 하예진이 떠올랐다.내연녀가 본처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다니, 웃길 노릇이었다.하필 하예진만이 주씨 일가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잘 알고 있다.“언니랑 무슨 할 얘기가 있는데? 만약 우리 언니
서현주는 안색이 어두워졌다.한참 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서현주.”하예정이 서현주를 불러세우자, 그녀는 하예진의 행방을 알려주려는 줄 알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하예정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네 얼굴의 멍 말이야, 아직 엄청 뚜렷하거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바르면 빨리 나을 수 있을 거야. 너희들 곧 결혼식을 올린다고 들었는데, 만약 멍이 계속 남아있으면 결혼식을 올릴 때 네 미모에 영향 있지 않겠어?”서현주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가게를 나섰다.마치 이렇게 하면 그녀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듯이.이때, 배달원이 도착했다.심효진이 주문한 밀크티가 왔다.그녀는 밀크티 두 잔을 받아 그중 한 잔을 하예진에게 건네주며 깨고소하다는 듯 말했다.“집에서 얻어맞은 거지? 전에는 그렇게 센 척하더니. 주씨 일가의 그 모녀에게 잘도 대들었잖아.”하예정은 밀크티를 마시며 말했다.“만약 주씨 일가 온 가족이 함께 상대한다면 아무리 세봤자 질 게 뻔해. 이런 폭력은 한번 있게 되면 후에도 계속될 거야. 처음 싸운 결과가 이렇게 비참하게 진 거라면 앞으로 더 비참해질 거야. 주형인과 이혼하지 않는 한 말이야.”하예정은 서현주를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그녀는 서현주가 재수가 없게 변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결혼식을 아직 올리지도 않았는데 싸움이 일어난 걸 보면 앞으로 서현주의 고생문이 열릴 게 분명했다.“처음에 언니가 싸움에 말렸을 때 언니는 칼을 들고 주형인을 쫓아다녀 주씨 일가를 놀라게 했어. 비록 그 사람들은 여전히 쓰레기 같은 본성 그대로였지만 다시는 감히 언니에게 손찌검하지 못했어.”사람은 모두 약자를 괴롭히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면이 있다.“지난번에 주씨 일가가 감사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난 그 가족이 마침내 본성을 고친 줄로만 알았어.”심효진도 밀크티를 마시며 말했다.“사람은 절대 쉽게 바뀌지 않아.”“아무튼 이건 현
비록 그가 그녀에게 소개한 두건의 비즈니스로 돈을 좀 벌게 되었다고 해도, 그에게 사주는 밥 한 끼에 다 쓸 수는 없었다.“그래, 어디 가서 먹을지는 네가 정해. 네가 직접 만들어 줘도 좋아.”전이진은 어디서 먹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초대한 사람이 자기 약혼녀이기만 하면 되었다.‘쳇, 누가 네 약혼녀라는 거야?’‘할머니께서 네가 내 아내감이라고 하셨어. 내 약혼녀는 바로 너인걸.’“이진아, 나는 눈이 안 보여서 직접 요리할 수 없어.”여운초는 전이진에게 자신이 장님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익숙한 환경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만 요리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였다.만약 그녀가 장님만 아니었다면 요리를 할 수 있었겠는데... 비록 여씨 일가의 아가씨이지만, 항상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순간 전이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래, 눈이 보이지 않으니, 요리를 못하지.’만약 그들이 결혼한 후에도 눈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내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맛볼 기회가 없을 것이고, 형님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가 요리할 수 없으면 그가 하면 되었다.“신의라고 불리는 의사가 있다고 들었어. 그 의사가 너의 눈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신의를 못 찾더라도 그의 유능한 제자를 찾으면 마찬가지일 거야.”그는 아직 예준하에게 신의나 그의 제자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 묻지는 않았다.아직 여운초의 신임을 얻지 못했기에.여운초에게 두 건의 비즈니스를 소개해 줬다고 그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라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의 경계심은 매우 강했다. 비록 사람을 대할 때에는 부드러웠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어 그 속으로 들여보낼 생각은 하지 않는 듯싶었다었다.“알아, 우리 고모도 말한 적이 있어. 신의가 내 눈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하지만 그건 전설일 뿐이야, 신의가 아직 살아있는지 누가 알겠어? 신의의 제자는 행방조차도 알 수 없는걸.”여운초
여운초와 고모는 그저 증거가 없었을 뿐 누가 그녀에게 독을 먹였는지 짐작이 갔다. 10년 전, 그녀는 열여섯 살의 소녀였고 고모도 멀리 시집가서 친정에 거의 오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독살하려 한 사람을 증명할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그녀는 나중에 고모가 계부를 찾아가 말다툼하다가 뺨을 맞고는 울면서 떠났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그 후 고모는 관성으로 돌아올 때면 호텔에만 묵었고 다시는 여씨 일가의 저택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멘탈이 좋네.”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멘탈이 무너져서 하늘이 무너질 듯 울어도 내 눈이 회복될 수는 없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해.”전이진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운초 너의 이런 마음가짐,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전이진에게 물었다.“이진아, 지금 몇 시야? 식사 시간이 되었으면 같이 식사하러 가”두 점원 중의 한 명은 손님에게 꽃을 주러 갔고 한 명은 남아서 가게를 봐야 했다.점원은 가끔 참지 못하고 힐끗힐끗 전이진을 쳐다보았다.전이진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후 그녀들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다 미남이라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고 소곤댔다.전이진은 여운초의 가게를 매우 잘 돌봐주었다. 그녀는 점원들에게 전이진이 비록 가게엔 두세 번밖에 들르지 않았지만, 두 건의 큰 비즈니스를 소개해 주었다고 말해주었다.그 두 점원은 여운초에게 이건 전이진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농담 조로 말하곤 했다. 여운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점원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전이진이 진심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시각장애인을 처음 접한 것이 신기해서인 줄로만 생각했다.많은 사람이 그녀가 장님인 것을 안 후 신기해했다.전이진은 시간을 보고 말했다.“아직 이르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나에게 밥을 사주기까지 30분이나 있는걸.”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밖에서 차 두 대가 꽃필무렵의 문 앞에 멈춰 섰다.점원은 마중을
여운초는 카운터에서 돌아 나와 직접 전이진을 도와 장미꽃을 가지러 가려고 했다.그러다 방금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멈추고는 사모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담담하게 불렀다.“엄마.”사모님은 먼저 전이진을 훑어보고는 낯이 익다고 느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전이진에게 물었다.“낯이 익으신데, 누구시죠?”마이바흐를 운전할 수 있는 남자의 신분이 간단할 리 없었다.전이진은 허리를 곧게 펴고는 돌아서서 사모님과 마주하고 말하였다.“전이진입니다.”“전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시군요.”전씨 일가의 아홉 아들들은 연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적었다.만약 그들이 비즈니스 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면, 외부인들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전씨 일가는 항상 아이들을 잘 보호해 왔다.사모님은 전이진의 이름을 듣고 웃음이 더 환해졌다.그녀는 막내딸을 전씨 집안에 시집보내고 싶어 그 집안의 도련님들에게는 항상 친절하게 대했다.비록 전이진이 여운초의 가게에 나타나 꽃을 산다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지금 사모님은 그 점에 대해 깊이 연구할 마음이 없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전이진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사모님은 웃으며 전이진에게 물었다.“제가 들어왔을 때 약혼녀에게 줄 꽃을 사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약혼녀는 어느 집안의 아가씨죠? 약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어서 말이에요.”‘전씨 집안 큰 도련님이 하예정 그 촌년과 결혼한 것이 참 아쉽긴 하지만 다행히 전태윤 아래 친동생과 사촌 동생이 8명이나 있으니...’여씨 사모님은 전태윤 외에도 여운별에게 어울리는 신랑감이 전씨 가문에 다섯이나 된다고 생각했다.전이진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사모님은 약혼녀가 어느 집안의 아가씨인지 알고 싶어졌다.여운별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데다 하예정이 또 고소한 것에 그들 부부는 여전히 딸아이를 위해 바삐 달아 다녔다. 딸을 대신해서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 반드시 승소해야 한다.비록 여
“사모님, 안녕하세요. 운초 데리고 집에 가서 식사하시려고요? 아니면 또 다른 볼일 있어요? 제가 혹시 두 분 방해했나요?”전이진은 아직 여운초가 집에서 어떤 처지인지 몰라 다정하게 추미자에게 물었다.한편 추미자도 이번엔 여운초를 괴롭히려고 온 게 아니다.내일 저녁 관성 호텔에서 공세호 어르신이 대규모 비즈니스 연회를 여는데 추미자는 여운초를 데리고 갈 예정이다. 물론 이 아이로 막내딸 자리를 대체하려는 건 아니다.실은 여씨 그룹과 상업적인 왕래가 있는 회장님이 한 분 계시는데 여운초를 소개해 줄 생각이다.비록 눈이 멀긴 했지만 나름대로 예쁘게 생겨 외모는 여운별보다 낫다. 말투도 다정하고 온화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하니 그 회장님께 소개해주면 무조건 홀딱 반해버릴 것이다.“아니요, 저는 그냥 운초랑 몇 마디 얘기하고 바로 갈 겁니다.”전이진 앞에서 추미자는 매우 친절한 태도였다.“운초야, 내일 오후에는 가게 문 닫거나 점원에게 맡기고 일찍 집에 돌아와. 엄마가 화장 예쁘게 해주고 드레스도 준비해놨으니 저녁에 함께 연회 참석해야지.”여운초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전이진이 웃으며 되물었다.“사모님 혹시 공세호 어르신이 주최한 연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맞아요, 이진 씨도 참가하시죠? 공 어르신이 주최하는 연회라면 다들 참석하지 못해 안달이잖아요.”여씨 일가의 자산이 200억을 돌파한 이후로 추미자는 연회에 참석하는 데 아주 열정적이다.이젠 드디어 상류사회에 들어선 것만 같았고 막내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운별이가 얼마나 괜찮은 아이인지 알리고 싶었다.원래 계획은 운별이를 전씨 일가에 시집보내는 것인데 플랜B도 있어야 하는 법이니.그도 그럴 것이 전씨 일가 도련님들이 워낙 까다로워 운별이가 그 집안에 발 들일 거라는 보장이 없다. 관성에는 부자가 많아 딸을 데리고 이런 연회에 자주 참석하면 딸에게 좋은 배필을 찾아줄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보배 따님을 알릴 수 있다.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으니까.
“아무튼 내일 오후에 집에 안 오면 엄마가 사람 불러서 너 데려오게 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저녁엔 반드시 엄마랑 함께 가!”여운초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엄마, 난 앞이 안 보이는데 무슨 세상 구경을 해요? 이 세상은 내게 오직 흑백이라 더 볼 필요도 없어요.”“너!”추미자는 화가 나서 이를 박박 갈았다. 마음 같아선 뺨 한 대 갈기고 싶었다.“난 분명 말했다. 듣고 안 듣고는 네 문제야. 내일 오후에 내가 직접 데리러 올게. 볼일 있어서 그럼 이만.”추미자는 여운초와 안 맞는다. 이 딸만 생각하면 증오와 미움뿐이다. 용건을 다 말한 후 그녀는 전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진 씨, 누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얘가 이래요. 실명한 이후로 자신감도 잃었어요.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운초를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인데, 어휴. 저는 또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전이진이 대답했다.“네, 들어가세요.”추미자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여운초를 째려본 후 경호원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엄마가 문밖을 나서는 발걸음 소리에 여운초는 점원에게 말했다.“그만해도 돼요.”점원은 어리둥절했다.‘이건 전이진 씨가 사려던 꽃다발이잖아? 약혼녀에게 선물할 거라고 했는데.’“계속해 주세요. 나 진짜 꽃 사러 왔다고요.”전이진이 점원에게 계속 꽃다발을 만들라고 했다.그가 이렇게 말한 이상 가게 장사하는 여운초도 별수 없이 그의 요구를 만족해 주며 꽃다발을 팔았다.다 완성된 후 전이진이 돈을 내고 꽃다발을 받으며 여운초에게 말했다.“가자, 운초야.”“?”여운초는 어안이 벙벙했고 전이진은 그런 그녀가 재미있었다.“왜? 나 밥 안 사줄 거야? 엄청 배고픈데.”“하하, 미안, 내가 깜빡했어.”여운초는 정말 새까맣게 잊었다.친엄마의 등장에 그녀가 또 무슨 계략을 피워 자신을 함정에 빠트릴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연회에서 망신 주려는 걸까 아니면 본인들에게 도움 될만한 늙은 남자에게 팔아치우려는 걸까?엄마의 사랑은 바라
“사장님, 얼른 가서 맛있는 거 드세요. 가게는 저희가 볼게요.”점원이 웃으며 여운초와 전이진을 배웅했다.전이진은 차에서 여운초를 기다렸다. 그녀는 익숙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다닌다. 시각장애인이라고 전혀 여겨지지 않을 만큼.여운초는 전이진의 차를 몇 번 타봐서 익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은 후 지팡이를 옆에 두고는 벨트까지 맸다.뒷좌석은 전이진이 못 앉게 해서 그냥 포기했다. 뒤에 앉으면 아예 그를 기사 취급하는 거라나 뭐라나.여운초가 어찌 감히 전이진 도련님을 기사 취급하겠는가. 그녀는 두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조수석은 아주 위험한 자리이지만 전이진이 일정한 속도로 안전운행하여 그녀도 마음이 놓인다.“뭐 먹지?”전이진이 운전하며 넌지시 물었다.“난 평소에 배달 음식 시켜 먹는데 서진 반점이 괜찮더라. 우리 거기 가서 먹자.”그곳은 음식 가격이 비싸지 않아 전이진이 많이 시켜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다.명색이 재벌 집 도련님인데 요리 네 개에 국 한 그릇은 여운초가 생각해도 너무 조촐해 보였다.“그래.”서진 반점은 멀지 않아 차 타고 5분 만에 도착했다.전이진이 연회에 관한 일을 묻기도 전에 이미 식당에 도착해버렸다.“우리 그냥 1층에서 먹자.”여운초가 계단을 오르내리기 불편하여 자상하게 챙겨주었다. 덥석 안고 위층에 올라가면 그녀가 놀랄 게 뻔하니 잘하면 뺨까지 얻어맞고 한바탕 질책을 당할 것이다.여운초가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알아서 정해.”전이진은 그녀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며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이진아, 오늘 밤엔 많이 시켜도 돼.”여운초는 바지 주머니를 툭툭 치며 이번엔 돈을 푼푼이 챙겨왔다는 식으로 말했다.전이진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우리 어차피 많이 먹지도 못해. 저번처럼 요리 네 개에 국 하나면 돼.”그녀에게 오더를 소개해 준 건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한심하게 뜯어낼 전이진이 아니지. 그녀가 달콤한 맛을 봐야 앞으로도 쭉 달갑게 그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