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얼른 가서 맛있는 거 드세요. 가게는 저희가 볼게요.”점원이 웃으며 여운초와 전이진을 배웅했다.전이진은 차에서 여운초를 기다렸다. 그녀는 익숙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다닌다. 시각장애인이라고 전혀 여겨지지 않을 만큼.여운초는 전이진의 차를 몇 번 타봐서 익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은 후 지팡이를 옆에 두고는 벨트까지 맸다.뒷좌석은 전이진이 못 앉게 해서 그냥 포기했다. 뒤에 앉으면 아예 그를 기사 취급하는 거라나 뭐라나.여운초가 어찌 감히 전이진 도련님을 기사 취급하겠는가. 그녀는 두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조수석은 아주 위험한 자리이지만 전이진이 일정한 속도로 안전운행하여 그녀도 마음이 놓인다.“뭐 먹지?”전이진이 운전하며 넌지시 물었다.“난 평소에 배달 음식 시켜 먹는데 서진 반점이 괜찮더라. 우리 거기 가서 먹자.”그곳은 음식 가격이 비싸지 않아 전이진이 많이 시켜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다.명색이 재벌 집 도련님인데 요리 네 개에 국 한 그릇은 여운초가 생각해도 너무 조촐해 보였다.“그래.”서진 반점은 멀지 않아 차 타고 5분 만에 도착했다.전이진이 연회에 관한 일을 묻기도 전에 이미 식당에 도착해버렸다.“우리 그냥 1층에서 먹자.”여운초가 계단을 오르내리기 불편하여 자상하게 챙겨주었다. 덥석 안고 위층에 올라가면 그녀가 놀랄 게 뻔하니 잘하면 뺨까지 얻어맞고 한바탕 질책을 당할 것이다.여운초가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알아서 정해.”전이진은 그녀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며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이진아, 오늘 밤엔 많이 시켜도 돼.”여운초는 바지 주머니를 툭툭 치며 이번엔 돈을 푼푼이 챙겨왔다는 식으로 말했다.전이진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우리 어차피 많이 먹지도 못해. 저번처럼 요리 네 개에 국 하나면 돼.”그녀에게 오더를 소개해 준 건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한심하게 뜯어낼 전이진이 아니지. 그녀가 달콤한 맛을 봐야 앞으로도 쭉 달갑게 그
“너 좀 보이지?”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바로 옆에 앉은 전이진이 선글라스를 벗겼을 때 아주 정확하게 선글라스를 가져갈 순 없다.“네가 내 옆에 앉아있어서 네 기운을 느낄 수 있어. 그걸로 우리 사이의 거리를 확정하고 정확하게 선글라스를 가져간 거야. 나도 조금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는데 전혀 안 보여.”그녀의 세계는 어둠뿐이다.“선글라스 벗어도 예뻐.”전이진이 그녀의 외모를 칭찬했다.“엄마가 내 얼굴 이용해서 뭐라도 할 거라고 짐작하는 거야?”“너도 비슷한 생각이잖아. 이래서 똑똑한 사람들과는 대화가 홀가분하다니까. 굳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듣잖아.”할머니가 골라주신 신붓감이니 IQ가 낮을 리 없다.할머니는 손주며느리를 고르실 때 출신은 중시하지 않지만, IQ는 매우 중시한다. 바보 며느리를 들였다가 자식 세대까지 영향을 미칠까 봐.“걱정 마, 내일 저녁 연회에 나도 가고 형수님도 가실 거야. 형수님이 널 엄청 좋아하시고 친구처럼 대하잖아. 너한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어머님 함께 가.”전이진이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여씨 일가 큰따님인데 연회 장소에도 자주 참석하고 그 사람들 사교 모임에 스며들어야지 않겠어.”나중에 전씨 일가의 둘째 사모님이 돼도 사교 모임은 필수이다.하예정도 전태윤을 위해 일부러 이경혜와 함께 각종 모임에 참석하며 상류사회에 스며들려고 노력한다.“난 그 무리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끼어들 필요도 없어. 여씨 일가 큰따님? 듣기만 좋지, 그 속내를 누가 알아. 난 사람들의 동정 따위 필요 없어.”사람들은 그녀에게 동정의 눈길만 보낸다.여운초는 그들의 동정 따위 필요 없다. 아빠도 없고 엄마도 매정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잘살고 있다.돈을 엄청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고 적금도 둔다. 많은 편은 아니고 한 달에 기껏해야 60에서 80만 원이다. 이 또한 근검절약하는 전제하에서지만 그녀는 여전히 만족한다.시각장애인이니까.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
남동생도 그녀를 보호했지만, 그 또한 몇 년뿐이다. 친엄마라는 자는 제 아들이 여운초를 챙기는 게 눈꼴사나워 매정하게 그를 기숙사학교로 보냈다.무릇 여운초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추미자가 일일이 쫓아낸다.“이 꽃다발 네 약혼녀 준다고 했잖아.”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약혼했다는 말 들은 적 있어? 없지. 아까는 대충 핑계를 둘러대서 너희 엄마 속인 거야.”여운초는 비록 앞이 안 보이지만 갑부 전씨 일가에 관한 일은 유심히 새겨듣는다.둘째 도련님 전이진은 확실히 약혼한 적이 없다.큰 도련님 전태윤이 결혼했고 아내가 바로 하예정이란 것만 알고 있다.하예정이 그녀를 도와준 후 전태윤은 그녀의 계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예정이는 운초 씨가 꼭 오랜 친구 같대요.”그 말을 들은 이후로 계부는 여운초에게 전보다 훨씬 친절하게 대했다.계부도 전에는 그녀를 막 대했지만, 친엄마 추미자처럼 학대하고 괴롭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추미자와 여운별이 그녀를 괴롭힐 때 계부는 아무 말도 없었다.그는 바로 냉담하게 방관이나 하는 공범이다.“꽃 산 돈... 나 안 돌려줄 건데.”전이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알았어. 너 가끔 보면 백옥처럼 맑고 순수한데 또 가끔은 돈에 눈먼 노예 같아.”“돈은 만능이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해. 너 같은 재벌 집 도련님들이 어떻게 나처럼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겠어. 내가 돈에 미친 게 이해 안 되지?”“...”사실 전이진도 돈 버는 데 엄청 관심이 많다.다만 그가 버는 돈은 죄다 거액이라 몇만 원, 몇십만 원 따위는 안중에 없다....저녁 시간은 전태윤 부부가 알콩달콩하게 보내는 시각이다.하예정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전태윤은 이미 다 씻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침대에 올라와 그에게 바짝 달라붙어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여보, 나보다 더 빨리 씻었네요.”“네 방 가서 씻었어.”전태윤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서 몸 아래에 내리깔고 이제 막 남편의
전태윤의 집에서도 그녀에게 압력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이경혜는 하예정의 이모이자 친정 어르신이라 응당 하예정을 더 아껴야 한다.“이모도 재촉하는 건 아니고 그냥 관심 차 물은 거예요. 우리가 진짜 부부가 된 지도 몇 달은 됐는데 내가 줄곧 임신 소식이 없으니, 이모가 관심 조로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하예정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살짝 꼬집고 눈썹도 어루만졌다.“인상 좀 펴요. 찌푸리고 있으니까 너무 무섭잖아요. 당신 아내 겁쟁이라서 자꾸 이러면 제대로 겁먹는단 말이에요. 오밤중에 당신 이대로 나가면 다들 귀신인 줄 알겠어요.”전태윤은 그녀의 말에 실소를 터트리며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내리쳤다.“이렇게 잘생긴 귀신 봤어? 당신이 겁쟁이면 이 세상에 무모한 사람이 없을 거야. 알았어, 화 안 낼게. 어차피 아이 낳는 건 우리 둘만의 일이니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어. 엄마, 아빠도 아이 낳으라고 다그치지 않아. 그저 할머니가 가끔 증손녀 안고 싶다고 말씀하실 뿐이지. 할머니는 진심으로 증손녀를 바라셔. 손녀가 없으니 증손녀를 기대하는 수밖에.”하예정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그건 나도 알아요. 여보, 내가 이 얘기 꺼낸 건 우리가 아들 낳을지 딸 낳을지가 아니에요. 나 여태껏 임신 못 한 게 혹시 내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아무 문제 없어 보여요. 아참, 누가 그러는데 부부가 잠자리를 너무 많이 가져도 임신하기 어렵대요.”“...”전태윤은 말문이 막혔다.“당신 아무 문제 없어.”그는 일단 잠자리가 잦은 점을 무시하고 아주 확고하게 말했다.“우리 둘 다 아무 문제 없어. 아직 임신 안 한 건 아이와 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이는 올 때 되면 다 오게 돼 있어. 아기는 하늘에서 엄마를 고른다잖아. 우리 아기가 아직 당신을 안 고른 거야. 나중에 고르면 무조건 임신 될 테니 너무 걱정 마.”전태윤은 사랑스러운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임신 때문에 자책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하예정이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일단 지켜보죠. 소현 언니도 예준하 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두 사람 서로 마음만 확인하면 이모도 허락하실 거예요.”성소현은 제 감정에 솔직한 편이다.전태윤을 사랑할 때 그가 마음이 없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구애했다.예준하와 서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가족들도 반드시 허락해 줄 것이다.“여보, 그 사람들 걱정 마. 다들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니 알아서들 할 거야. 늦었어, 얼른 자자.”전태윤은 고개 숙여 그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앞으론 내가 절제할게. 네 몸도 쉬어야지. 오늘 밤엔 안고만 잘게. 절대 안 건드려.”하예정은 고개 들어 그에게 입맞춤하고는 함께 단잠에 빠졌다.그녀는 항상 빨리 자는 편이라 몇 분도 채 안 돼 바로 꿈나라로 들어갔다.그 시각 전태윤은 소정남에게 전화가 걸려 오자 하예정이 깰까 봐 일단 끄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은 팔을 빼냈다.이어서 방에서 나와 거실 소파로 걸어갔다.인기척을 느낀 숙희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아주머니, 전화 좀 받으려고요. 예정이 깰까 봐 나왔어요. 괜찮아요.”숙희 아주머니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다시 방문을 닫았다.전태윤이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소정남의 문자가 도착했다.「지훈 형 집으로 와.」소정남의 문자 내용은 전태윤더러 소지훈 만나러 가라는 뜻이다.전태윤은 더 묻지도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알았어.」그리곤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잘자.”몇 분 후 강일구가 다른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집 아래에서 대기했다. 전태윤이 내려오자 다들 묵묵히 그를 차로 모셨다.“소지훈 씨 댁으로 가.”전태윤의 분부에 경호원들은 머리를 끄덕였다.소씨 일가 저택에 도착하니 소정남이 문 앞에서 기다렸다.“태윤아.”그는 전태윤을 보자 자연스럽게 활짝 웃었다.전태윤은 차에서 내려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마찬가지예요. 전에는 이 시간대에 집에 돌아가지도 않은걸요.”그는 결혼하고 나서야 정상적인 생활 패턴으로 돌아왔다.“앉아요.”소지훈이 그를 자리로 모셨다.“술 한잔하시죠. 내가 좋은 술 저장해뒀거든요.”탁자 위에 술 한 병과 술잔 두 개가 놓였고 두 형제가 마셨는지 잔에 술까지 있었다.전태윤이 완곡하게 거절했다.“좋은 술 권해줘서 고맙지만, 와이프가 술 마시는 걸 싫어해요. 술 냄새가 너무 독해서요. 이젠 술자리에 가도 별로 안 마셔요.”소지훈은 흠칫 놀라더니 곧장 크게 웃었다.“정남이가 사랑의 힘이 너무 커서 태윤 씨를 변하게 했다던데 인제야 조금 믿어지네요. 태윤 씨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전태윤은 전에 술자리에서 술을 얼마나 많이 퍼마신 지 모른다.그는 소정남을 힐긋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정남이도 이젠 술도 줄이고 담배는 아예 끊었잖아요.”소정남이 재빨리 말했다.“우리 효진 씨가 담배 냄새 싫어하거든.”소지훈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두 사람 사랑 타령할 때 이 외로운 싱글도 좀 고려해야죠. 난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고요.”둘은 나란히 소지훈을 바라봤고 소정남이 먼저 말을 꺼냈다.“아니야, 형. 내가 태윤이한테 사랑 타령한 게 아니라 태윤이가 아내 말이라면 꼼짝도 못 하거든. 난 그저 태윤이한테 아내 다스리는 법을 배울 뿐이야.”이에 소지훈이 단호하게 반박했다.“됐어, 네가 다스리긴, 제수씨가 널 다스리면 모를까.”소정남은 이제 곧 심효진과 약혼한다. 소씨 일가에서는 그녀를 이미 제집 사람으로 여기고 소지훈도 그녀를 제수씨라고 부른다.“형, 나랑 태윤이는 솔로 탈출했으니, 형도 이젠 슬슬 다그쳐야지. 큰아버지랑 큰어머니가 애가 타서 흰머리까지 나셨어. 형 이상형 뭐야? 우리한테 말해봐 봐. 평소에 눈여겨 봐줄게.”소정남이 소지훈의 감정 문제에 열정적인 원인은 심효진이 아주 궁금해하기 때문이다.그녀는 미래 아주버님이 될 소지훈이 너무 신비주의이고 또 겸손한 데
전태윤은 세 번 훑어본 후 묵묵히 자료를 원상 복귀해서 봉투에 넣고는 소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소지훈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서현주가 그 인간들에게 이용당할 줄은 몰랐어요.”전태윤이 차갑게 말했다.“나도 우리 누나가 이상하다고 말한 덕에 의심이 일었는데 정말 수상하더라고요. 서현주는 전에 주형인이 아이 보러 가는 것도 싫어했는데 이젠 선뜻 주형인과 함께 가고 우빈이를 달래기까지 하잖아요.”그들은 여태웅 부부가 한때 전태윤에게 저격당해서 그런 거로 의심할 뿐 서현주가 이용당할 줄은 아예 몰랐다.주씨 일가는 주우빈의 가족이니 아이한테 접근해도 굳이 의심을 사진 않는다.“상대의 타깃은 태윤 씨가 아니라 사모님이에요. 그런데 태윤 씨가 아내분께 경호원도 안배하고 또 태윤 씨 아내분이 주먹질을 하다 보니 태윤 씨 신분이 신분인지라 놈들이 대놓고 예정 씨를 저격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조카를 이용하는 비겁한 수단을 썼죠. 우빈이는 예정 씨 손에 커서 이모 조카 사이가 남다를 거예요. 조카가 놈들 손에 잡히면 예정 씨는 단독으로 나오라고 해도 나갈 거예요.”소지훈은 일의 실마리가 풀리자 상대의 영악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예정 씨 고향 식구들을 이용하면 되던 일도 망칠 것 같았나 보죠. 그래서 서현주를 이용한 거죠.”하예정의 고향 식구들은 인간쓰레기 인성이라 조금만 세력이 있는 사람을 봐도 쩔쩔맨다.가짜 하예정을 만들어 전씨 일가 사모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했는데 허점투성이라 하예정에게 계획을 들키고 결국 전태윤이 망가뜨렸다.성형한 하소진은 큰 사촌 언니와 똑 닮아 형부가 잘못 알아보고 큰 소란이 일어났다. 두 자매는 원수처럼 등졌고 하소진은 마지못해 다시 성형했다.어찌 됐든 하씨네 사람들은 큰일을 못 한다.그런 인간들을 이용하는 건 일을 망치는 거나 다름없다.“이 사람들 자료는 내일 경찰 측에 제출할 겁니다. 나쁜 놈 잡는 건 경찰이 해야 할 일이죠. 다만 이 인간들이 워낙 교활해서 단번에 다 체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태윤 씨,
“이참에 반년 쉬는 건 어때?”“반년 좋지. 그렇게 하는 거다.”소지훈이 웃으며 말했다.“차라리 출산휴가까지 쓰지 그래. 태윤 씨, 얘 그냥 결혼 휴가 두 달만 주면 돼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달이에요. 두 달 후에 회사 안 나오면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이놈 회사로 끌고 갈 테니.”“형, 대체 누가 형 동생인데.”“친동생도 인정사정없는 세월에 넌 심지어 사촌 동생이야.”“이젠 형도 날 안 도와주네.”물론 소정남도 농담일 뿐이다.결혼 휴가는 두 달로 충분하니까.심효진과 하예정이 동업한 창업 프로젝트도 한창 불티나게 진행 중이라 심효진의 머릿속엔 오직 투자에 성공하여 큰돈을 벌 생각이다.소지훈은 잔에 담긴 술을 다 마시고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시간이 늦었네요. 이만 돌아가서 쉬세요.”전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고마움을 표하고 소정남과 함께 집을 나섰다.몇 분 후 전태윤의 전용차가 소씨 일가 저택을 나섰다.밤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가장 어두운 이 순간을 거쳐 밝은 햇살이 곧 찾아올 것이다.해가 뜨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하예정은 오늘 하루 휴식이라 아침 일찍 언니네 가게로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하루 토스트에 오니 조카가 걸상 두 개로 이어놓은 ‘미니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하예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언니에게 말했다.“언니 그냥 우빈이 데리고 우리 집으로 이사와. 그럼 아침 일찍 깨나도 우빈이가 더 잘 수 있잖아. 매일 아침 언니랑 함께 애가 너무 지쳐 보여. 한창 키 클 나이인데 잠이 부족하면 영향을 미친단 말이야.”하예진은 토스트 재료를 한창 정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가게로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종류대로 토스트 재료를 정리하는 일이다.“거기 가도 일찍 깨어나니 너희까지 방해돼. 우빈이랑 얘기해 볼게. 얘가 그리로 가겠다면 보내고 난 안 갈래.”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깨어나 아무리 조심해도 인기척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동생네 부부까지 방해하면 안 된다. 특히 제부 전태윤은 업무가 다망하여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