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바뀌고 뒤따라오던 차가 경적을 울려서야 나는 추억에서 빠져나와 고태오에 대한 마지막 감정까지 털어냈다.차를 운전해 앞으로 달리는데 눈 부신 햇살이 나를 비췄다. 마치 아름다운 미래가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3년 후, 나는 글로벌 다큐멘터리 대회의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축하해주러 온 팬들에게 사인까지 해줬다.3년간 나는 자선 사업과 다큐멘터리 작업에 몰두했고 동료들과 함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을 기록했다.업무를 마치고 나니 늦은 시간이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손에 든 전기충격기를 꺼내 들었다.몇 년간 외국에서 모험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그때 가로등이 켜졌고 소리를 들은 남자가 몸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이미 출소한 고태오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고태오는 여전히 준수했지만 외눈이 되었고 심하게 다쳤는지 볼이 푹 꺼진 채 눈썹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게다가 한쪽 다리를 살짝 절었고 제대로 서지 못해 비스듬했다.고태오도 이제 내가 그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은지야.”갈라진 고태오의 목소리에서 죄책감이 잔뜩 묻어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태오를 바라봤다.고태오는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주머니에서 금으로 만든 돼지 모양의 펜던트 하나를 꺼냈다. 만약 우리 아이가 예정대로 태어났다면 아마 띠가 돼지였을 것이다.고태오가 거칠어진 손으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더니 슬프게 웃었다.“이런 선물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지만, 아이, 아이는 좋아해. 짐승 같은 내가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을 졌어. 그래도 구치소 들어가기 전에 아이를 위해 납골당을 마련했어. 이건 내가 출소한 다음에 공사장에서 벽돌을 날라서 번 깨끗한 돈이야. 은지야,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냥 네가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비를 맞으며 한옥 마을에서 50미터 떨어진 계단에 서서 내 약혼자인 고태오와 의붓동생의 전통 혼례를 지켜봤다. 고태오가 입에 옥으로 만든 패물을 물고 전통 혼례복을 입은 어여쁜 엄정아에게 전해주자 엄정아가 얼굴을 붉히며 입으로 받았다. 고태오는 엄정아가 입에 문 패물을 꺼내기도 전에 냉큼 엄정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두 사람은 하객의 호응과 축복 속에 서로를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눴다. 그렇게 20분간 지속된 키스는 엄정아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가을바람에 장식으로 걸어둔 비단들이 휘날려서야 나는 어두운 불빛 아래 환호하는 사람 중에 내 가족과 친구들도 있음을 알아챘다.내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동생 이진욱은 한복을 입고 결혼식 사회를 보며 주인공인 엄정아만 신경 썼다. 전에 엄정아와 엄정아의 어머니에 의해 게임 중독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학교에 보내져 죽을 뻔한 기억은 이미 지워버린 것 같았다.“누나, 형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알콩달콩 잘살길 바라요.”이진욱이 큰소리로 축복하자 옆에 있던 하객이 미리 준비한 불꽃을 터트렸다. 터지는 불빛과 함께 고태오가 엄정아를 번쩍 안아 들었고 흥분한 이진욱이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하객 여러분, 결혼식은 여기서 마칩니다. 신랑, 신부 이제 합방해도 좋습니다.”현장은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이진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원히 내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던 내 친동생에게 말이다.이진욱은 핸드폰 화면을 한번 쓱 훑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쉬지 않고 고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건 전화임을 확인한 고태오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고 그대로 끊어버리려는데 엄정아가 한 말을 듣고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어디야?”내가 가벼운 목소리로 묻자 고태오는 하객이 보는 앞에서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또 조사질이야? 임신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애정 결핍이야, 뭐야.”
고태오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린 듯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이진욱이 핸드폰을 앗아갔다.“누나, 이제 그만 좀 해. 난 누나처럼 의부증이 심한 사람은 처음 봤어. 억지 부리지 마. 그러다 태오 형 업무 진척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데. 누나가 질 거야? 미련한 짓은 누나가 다 하고 뒤처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거 미안하지도 않아?”이진욱이 이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엄정아는 고태오의 품에 기댄 채 부드럽게 웃으며 이진욱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렇게 달랬다.“됐어. 언니 성격 한두 날이야? 오늘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야. 그러니까 너도 화내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해.”말 한마디에 이진욱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하객들은 시끌벅적하게 신혼 방이 마련된 방향으로 향했다.깜깜한 밤, 결혼식이 끝난 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자 마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더 서 있던 나는 핸드폰을 꺼내 중절 수술을 예약하고는 자리를 떠났다.15년을 노력해도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이제 버릴 때도 된 것 같았다.시내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시간이라 대충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어렴풋이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방송국에서 걸려 온 전화였는데 목소리가 초조하면서도 흥분에 차 있었다.“은지 씨, 은지 씨가 있는 한옥 마을에 5.3급 지진이 일어났대요. 얼른 인터뷰 따러 가요.”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생각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엄정아가 올린 인스타가 보였다. 하얗고 작은 엄정아의 손에 고태오의 뼈마디가 선명한 큰 손이 올려졌고 커플링을 나눠 끼고 있었다.나는 고태오 손등에 난 칼자국을 보며 싸늘하게 식었던 마음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18살 되던 해 고태오는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 날아온 맥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깍지를 낀 고태오와 엄정아의 손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이제 필요 없어.”예상 밖의 반응에 세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뒤따라온 이진욱이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만해. 태오 오빠 졸라서 임신까지 하더니 이젠 밀당하려고? 꼴이 너무 우습다. 근데 임신하면 뭐 해? 정아 누나 시중들기도 변변치 않은데.”이진욱은 여전히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지나치게 덤덤한 내 표정에 고태오도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은지야. 나 미행하면서 내 업무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심술까지 부리는 거야?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정아도 조용히 몸조리해야 하는데 네가 나타나면 오히려 기분이 영향 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태오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현장에서 끌어내려 하는데 여진이 시작되었고 고태오와 이진욱은 동시에 공터에 서 있는 엄정아에게로 달려갔다. 고태오는 많이 급했는지 나를 바닥에 넘어트리기까지 했다. 내 뒤로 콘크리트 전봇대가 무너지는 걸 분명 봤을 텐데 말이다.전봇대는 내 다리로 떨어졌고 극심한 고통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고 왼쪽 다리에 깁스한 상태였지만 옆엔 아무도 없었다.간호사는 내가 잠에서 깨자 얼른 링거 바늘을 뽑아주며 걱정스레 말했다.“다리를 다쳤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아이까지 위험할 뻔했어요.”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애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중절 수술 예약하게 도와주실래요?”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병실을 나서서야 나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온 게 이 마을 이장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작 나를 다치게 한 장본인은 고태오는 문자 하나만 딸랑 보내왔다.[정아가 너 다친 거 보고 놀라서 쓰러지는 바람에 구조용 헬기를 신청해서 진욱이랑 같이 정아를 해성시로 데려왔어.]내가 다친 것에 대해서는 걱정 한마디 없었다. 이제 더 실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
수술을 마치고 해성시로 돌아왔지만 고태오는 여전히 전화 한 통 없었다. 아마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인스타 스토리를 연속 몇 개나 올렸다.엄정아를 데리고 드레스를 입어보는 사진, 웨딩 촬영을 하는 사진, 예물로 쓸 액세서리를 고르는 사진 등등이었다.나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방송국으로 돌아와 남극에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지질 탐사팀에 자진 합류하는 김에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이장님이 몰래 내 가방에 넣어둔 자료까지 보도국에 전달했다.지진의 원인을 알아낸 나는 고태오에게 남은 마지막 미련까지 털어버렸고 그 자리에 역겨움이 가득 찼다.이 모든 걸 완성한 나는 졸업 후 살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15년간 고태오가 내게 선물한 저렴한 선물과 지금까지 조사한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학교에 관한 자료가 담긴 메모리 카드를 이혼 서류와 함께 결혼식장에 보냈다.이진욱은 그 학교로 보내졌을 때 나이가 어렸고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극심한 후유증을 앓으면서 기억을 잃었고 지금까지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비행기에 오르기 전 나는 고태오와 이진욱의 모든 연락처를 지우고 유심칩을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나는 이제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결혼식 현장.고태오는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도 엄정아가 폐암 말기를 앓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천사처럼 순박한 엄정아가 언젠간 시들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고태오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그때마다 왜 병에 걸린 사람이 이은지가 아닌지 원망했다. 분명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은 이은지인데 말이다.이진욱도 그렇게 생각했고 여러 번 입 밖으로 내뱉었다.“정아 누나처럼 착한 사람이 왜... 은지 누나가 대신 죽어야 하는 건데.”고태오는 이를 떠올릴 때마다 이은지에 대한 원망이 깊어만 갔다. 곧 결혼식을 시작하는데도 이은지가 나타나지 않자 고태오는 임신이 뭐 대수냐고 생각해 오랫
정아라는 두 글자를 듣고 나서야 고태오는 정신을 조금 차리며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시선을 상자에서 떼고는 이진욱과 함께 엄정아의 호텔 방으로 향했다.호텔로 가기 전 이진욱은 특별히 고태오에게 꽃 한 다발 사라고 귀띔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엄정아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려 했다.하지만 두 사람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잠기지 않은 문틈 사이로 고태오가 아는 폐암에 걸려 연약하기 그지없는 엄정아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엄정아의 부모님은 표정은 과할 정도로 의기양양했다.특히 엄정아의 어머니 엄애리는 고태오가 보낸 함에 담긴 돈을 세고 있었다.“역시 우리 정아가 총명하다니까. 폐암에 걸린 척하니까 고태오가 마음 아파서 쩔쩔매잖아. 교수가 돼서 진단서의 진위도 구별하지 못하는 게 웃기지 않아?”엄애리가 얍삽한 말투로 엄정아의 아버지 이성용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고태오도 참 모자라. 15년이나 따라다닌 이은지를 두고 하필 우리 딸에게 반했으니. 쯧쯧. 역시 우리 딸 매력은 무시 못 한다니까.”이성용이 와인을 홀짝이더니 오만하게 지적했다.“이은지는 팔자가 딱 그 정도인 거예요. 자기 엄마 닮아서 복이 없는 거지 뭐. 애초에 유산만 내놓으라는 대로 고분고분 내놓았으면 투신자살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연기하면서 이진욱 그 병신 같은 놈을 속일 필요도 없었고.”엄정아가 짜증스럽게 눈을 흘기더니 역겨움을 그대로 토해냈다.“아, 이은지 그년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도망치기만 해봐. 내가 가만두나. 내가 애만 낳을 수 있어도 그년이 고태오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결혼만 하면 다시 기회 잡아서 그년 그 학교에 다시 집어넣어요. 이번에는 여덕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때 가서 내가 눈물 좀 흘려주면서 이은지가 나 괴롭혔다고 하면 고태오가 바로 믿어줄 거예요. 그러면 이은지가 낳은 그 잡것 명의로 이은지 엄마의 유산을 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거죠.”작당을 꾸민
이를 들은 고태오가 멈칫하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은지를 괴롭힌 건 짐승만도 못한 우리 둘이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고태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저승길에 당신들 꼭 데리고 갈 거예요.”이진욱이 버렸던 상자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가 엄애리와 이성용이 억울하다고 아우성치는 걸 보고 우습다는 듯 메모리 카드를 꺼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나 다 기억났어요. 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호해 준 사람이었어요.”메모리 카드에 적힌 학교 이름을 보고 엄정아네 가족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반년 후,나는 남극의 빙하에 서서 카메라 감독과 함께 펭귄이 이동하는 모습을 녹음했다. 일상 업무를 마치고 기지에 돌아왔는데 방송국에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은지 씨, 남극 프로젝트도 곧 마감인데 언제 돌아와요?”나는 눈보라를 막아주는 고글을 벗으며 가볍게 웃었다.“내일요.”다음 달에 엄마 기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했다.“그래요. 전에 보도국에 제보한 한옥 마을 무허가 개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뜨거워요. 용의자가 잡혔고 재판에서 3년 형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약간 익숙한데 고... 태오라고 했나? 은지 씨 전 약혼자와 같은 성인데 역사학 박사라고 하더라고요. 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처음 듣는 사람인데요.”그렇게 잠깐 수다를 떨다 전화를 끊었다....짐 정리를 마치고 동료들과 인사한 나는 귀국행 크루즈에 올랐고 한 달간의 항해를 거쳐서 해성시로 돌아왔다.나는 남극에 반년 동안 있으면서 모든 걸 내려놓았고 앞으로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살리라 다짐하고는 방송국 근처에 방을 하나 얻었다.이튿날 방송국으로 돌아온 나는 동료와 인수인계를 마치고 꽃 한 다발을 사서 공원묘지로 향했다. 엄마의 묘비 앞에 선 나는 깨끗하게 청소된 묘비와 묘비 앞을 가득 메운 생화, 그리고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 한가득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나는 묘비에
이 말에 이진욱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더니 온몸을 파르르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푹 꺼져 들어간 눈동자는 절망과 후회만이 남아있었다.이진욱은 신경질적으로 건조해서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마구 뜯었다. 나는 더는 이진욱과 엮이기 싫어 몸을 돌렸지만 이진욱이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괜찮아. 누나. 이제 누나는 내 유일한 가족이야. 누나가 나 용서하지 않아도 나는 누나 영원히 지켜줄 거야. 누나만 지킬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이진욱이 전에 엄정아 편을 때와 똑같은 말투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았다.월세방으로 돌아온 나는 대충 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고등학교부터 쭉 우정을 이어온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시절 친구들이 엄정아에게 세뇌되어 나를 멀리할 때 이 친구만이 내 곁을 지켰다.귀국한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엄정아, 엄애리,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이성용의 최후를 듣게 되었다.애초에 이성용이 우리 있는 집 장녀인 우리 엄마와 결혼한 건 엄마의 재산을 노려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성용은 바로 엄마를 갈구기 시작했고 이진욱이 5살이 되던 해 엄마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엄애리는 바로 이때 엄정아를 데리고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날부터 아빠는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와 나, 그리고 이진욱에게 차려진 건 이성용의 냉대와 엄애리의 비아냥이었다.나와 이진욱을 위해 5년을 더 버티던 엄마는 나의 17살 생일에 엄애리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이성용이 엄정아의 병을 치료해야 한다며 내 골수를 빼가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엄마가 재산을 모두 내 명의로 돌려놓고는 이성용에게 내가 죽으면 일전 한 푼도 얻지 못할 거라고 말했고 이에 잔뜩 화가 난 이성용은 다음날 나와 이진욱을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학교로 보내버렸다. 내가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와 증거를
신호등이 바뀌고 뒤따라오던 차가 경적을 울려서야 나는 추억에서 빠져나와 고태오에 대한 마지막 감정까지 털어냈다.차를 운전해 앞으로 달리는데 눈 부신 햇살이 나를 비췄다. 마치 아름다운 미래가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3년 후, 나는 글로벌 다큐멘터리 대회의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대회가 끝나고 축하해주러 온 팬들에게 사인까지 해줬다.3년간 나는 자선 사업과 다큐멘터리 작업에 몰두했고 동료들과 함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을 기록했다.업무를 마치고 나니 늦은 시간이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손에 든 전기충격기를 꺼내 들었다.몇 년간 외국에서 모험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그때 가로등이 켜졌고 소리를 들은 남자가 몸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이미 출소한 고태오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고태오는 여전히 준수했지만 외눈이 되었고 심하게 다쳤는지 볼이 푹 꺼진 채 눈썹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게다가 한쪽 다리를 살짝 절었고 제대로 서지 못해 비스듬했다.고태오도 이제 내가 그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은지야.”갈라진 고태오의 목소리에서 죄책감이 잔뜩 묻어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고태오를 바라봤다.고태오는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주머니에서 금으로 만든 돼지 모양의 펜던트 하나를 꺼냈다. 만약 우리 아이가 예정대로 태어났다면 아마 띠가 돼지였을 것이다.고태오가 거칠어진 손으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더니 슬프게 웃었다.“이런 선물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지만, 아이, 아이는 좋아해. 짐승 같은 내가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을 졌어. 그래도 구치소 들어가기 전에 아이를 위해 납골당을 마련했어. 이건 내가 출소한 다음에 공사장에서 벽돌을 날라서 번 깨끗한 돈이야. 은지야,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냥 네가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엄애리는 지금까지 이성용에게 기생해 살았기에 생활 능력도 없고 업무 능력도 꽝이라 몇천만 원이나 되는 엄정아의 치료비를 물기 위해 젊었을 적 만났던 남자들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엄애리는 젊었을 적 예쁘장한 외모를 무기 삼아 여러 유부남을 홀리고 다녔지만 빈털터리가 된 지금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능멸과 모욕부터 날아왔다. 결국 손 벌릴 곳이 없었던 엄애리는 고태오에게 배상을 요구했지만 그들을 끌어내리려고 작정한 고태오는 일이 터진 날 바로 소유한 모든 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내게 증여했기에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는 일전 한 푼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였다.더는 방법이 없었던 엄애리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엄애리는 원래도 모성애가 별로 없었기에 치료를 포기하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엄정아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정신을 차린 엄정아는 망가진 얼굴을 보고 망연자실하며 엄애리를 비겁하고 역겨운 사람으로 몰아가다 엄애리와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 화가 난 엄정아가 엄애리를 13층 베란다에서 실수로 미는 바람에 그대로 떨어져 죽었다.엄정아는 그때부터 완전히 미쳐버렸고 옷도 입지 않은 채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워 먹는데 보다 못한 경비가 경찰에게 연락해 엄정아를 정신병원에 넣어버렷다.보잘것없는 이성용은 도주한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연락을 주고받던 사악한 장사꾼이 소식을 듣고 이성용에게 돈을 갚으라고 했지만 이성용이 그대로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 구치소에 몸을 담근 적이 있는 그 장사꾼은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개인 탐정에게 의뢰해 이성용이 숨은 곳을 찾아냈고 10명 남짓 되는 보디가드까지 불러와 이성용을 잡아 공해에 넘겨버렸다.장기만 소소하게 팔아도 이성용은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들어오자마자 그를 노리고 있던 경찰에 의해 소탕되어 전부 연행되고 말았다. 경찰에게 끊임없이 증거를 제출한 고태오는 결국 3년 형을 받았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친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이 말에 이진욱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더니 온몸을 파르르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푹 꺼져 들어간 눈동자는 절망과 후회만이 남아있었다.이진욱은 신경질적으로 건조해서 각질이 일어난 입술을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마구 뜯었다. 나는 더는 이진욱과 엮이기 싫어 몸을 돌렸지만 이진욱이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괜찮아. 누나. 이제 누나는 내 유일한 가족이야. 누나가 나 용서하지 않아도 나는 누나 영원히 지켜줄 거야. 누나만 지킬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이진욱이 전에 엄정아 편을 때와 똑같은 말투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았다.월세방으로 돌아온 나는 대충 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고등학교부터 쭉 우정을 이어온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시절 친구들이 엄정아에게 세뇌되어 나를 멀리할 때 이 친구만이 내 곁을 지켰다.귀국한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엄정아, 엄애리,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이성용의 최후를 듣게 되었다.애초에 이성용이 우리 있는 집 장녀인 우리 엄마와 결혼한 건 엄마의 재산을 노려서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성용은 바로 엄마를 갈구기 시작했고 이진욱이 5살이 되던 해 엄마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엄애리는 바로 이때 엄정아를 데리고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그날부터 아빠는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와 나, 그리고 이진욱에게 차려진 건 이성용의 냉대와 엄애리의 비아냥이었다.나와 이진욱을 위해 5년을 더 버티던 엄마는 나의 17살 생일에 엄애리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 이성용이 엄정아의 병을 치료해야 한다며 내 골수를 빼가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엄마가 재산을 모두 내 명의로 돌려놓고는 이성용에게 내가 죽으면 일전 한 푼도 얻지 못할 거라고 말했고 이에 잔뜩 화가 난 이성용은 다음날 나와 이진욱을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학교로 보내버렸다. 내가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와 증거를
이를 들은 고태오가 멈칫하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은지를 괴롭힌 건 짐승만도 못한 우리 둘이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고태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저승길에 당신들 꼭 데리고 갈 거예요.”이진욱이 버렸던 상자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가 엄애리와 이성용이 억울하다고 아우성치는 걸 보고 우습다는 듯 메모리 카드를 꺼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나 다 기억났어요. 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호해 준 사람이었어요.”메모리 카드에 적힌 학교 이름을 보고 엄정아네 가족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반년 후,나는 남극의 빙하에 서서 카메라 감독과 함께 펭귄이 이동하는 모습을 녹음했다. 일상 업무를 마치고 기지에 돌아왔는데 방송국에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은지 씨, 남극 프로젝트도 곧 마감인데 언제 돌아와요?”나는 눈보라를 막아주는 고글을 벗으며 가볍게 웃었다.“내일요.”다음 달에 엄마 기일이 있어서 돌아가 봐야 했다.“그래요. 전에 보도국에 제보한 한옥 마을 무허가 개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뜨거워요. 용의자가 잡혔고 재판에서 3년 형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약간 익숙한데 고... 태오라고 했나? 은지 씨 전 약혼자와 같은 성인데 역사학 박사라고 하더라고요. 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나는 고개를 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처음 듣는 사람인데요.”그렇게 잠깐 수다를 떨다 전화를 끊었다....짐 정리를 마치고 동료들과 인사한 나는 귀국행 크루즈에 올랐고 한 달간의 항해를 거쳐서 해성시로 돌아왔다.나는 남극에 반년 동안 있으면서 모든 걸 내려놓았고 앞으로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살리라 다짐하고는 방송국 근처에 방을 하나 얻었다.이튿날 방송국으로 돌아온 나는 동료와 인수인계를 마치고 꽃 한 다발을 사서 공원묘지로 향했다. 엄마의 묘비 앞에 선 나는 깨끗하게 청소된 묘비와 묘비 앞을 가득 메운 생화, 그리고 엄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 한가득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나는 묘비에
정아라는 두 글자를 듣고 나서야 고태오는 정신을 조금 차리며 억지로 웃어 보이더니 시선을 상자에서 떼고는 이진욱과 함께 엄정아의 호텔 방으로 향했다.호텔로 가기 전 이진욱은 특별히 고태오에게 꽃 한 다발 사라고 귀띔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엄정아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려 했다.하지만 두 사람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게 잠기지 않은 문틈 사이로 고태오가 아는 폐암에 걸려 연약하기 그지없는 엄정아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엄정아의 부모님은 표정은 과할 정도로 의기양양했다.특히 엄정아의 어머니 엄애리는 고태오가 보낸 함에 담긴 돈을 세고 있었다.“역시 우리 정아가 총명하다니까. 폐암에 걸린 척하니까 고태오가 마음 아파서 쩔쩔매잖아. 교수가 돼서 진단서의 진위도 구별하지 못하는 게 웃기지 않아?”엄애리가 얍삽한 말투로 엄정아의 아버지 이성용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고태오도 참 모자라. 15년이나 따라다닌 이은지를 두고 하필 우리 딸에게 반했으니. 쯧쯧. 역시 우리 딸 매력은 무시 못 한다니까.”이성용이 와인을 홀짝이더니 오만하게 지적했다.“이은지는 팔자가 딱 그 정도인 거예요. 자기 엄마 닮아서 복이 없는 거지 뭐. 애초에 유산만 내놓으라는 대로 고분고분 내놓았으면 투신자살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연기하면서 이진욱 그 병신 같은 놈을 속일 필요도 없었고.”엄정아가 짜증스럽게 눈을 흘기더니 역겨움을 그대로 토해냈다.“아, 이은지 그년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도망치기만 해봐. 내가 가만두나. 내가 애만 낳을 수 있어도 그년이 고태오랑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결혼만 하면 다시 기회 잡아서 그년 그 학교에 다시 집어넣어요. 이번에는 여덕학교로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어요. 그때 가서 내가 눈물 좀 흘려주면서 이은지가 나 괴롭혔다고 하면 고태오가 바로 믿어줄 거예요. 그러면 이은지가 낳은 그 잡것 명의로 이은지 엄마의 유산을 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거죠.”작당을 꾸민
수술을 마치고 해성시로 돌아왔지만 고태오는 여전히 전화 한 통 없었다. 아마 내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인스타 스토리를 연속 몇 개나 올렸다.엄정아를 데리고 드레스를 입어보는 사진, 웨딩 촬영을 하는 사진, 예물로 쓸 액세서리를 고르는 사진 등등이었다.나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방송국으로 돌아와 남극에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떠나는 지질 탐사팀에 자진 합류하는 김에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이장님이 몰래 내 가방에 넣어둔 자료까지 보도국에 전달했다.지진의 원인을 알아낸 나는 고태오에게 남은 마지막 미련까지 털어버렸고 그 자리에 역겨움이 가득 찼다.이 모든 걸 완성한 나는 졸업 후 살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15년간 고태오가 내게 선물한 저렴한 선물과 지금까지 조사한 인터넷 중독을 치료하는 학교에 관한 자료가 담긴 메모리 카드를 이혼 서류와 함께 결혼식장에 보냈다.이진욱은 그 학교로 보내졌을 때 나이가 어렸고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극심한 후유증을 앓으면서 기억을 잃었고 지금까지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비행기에 오르기 전 나는 고태오와 이진욱의 모든 연락처를 지우고 유심칩을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나는 이제 과거의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결혼식 현장.고태오는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아마도 엄정아가 폐암 말기를 앓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천사처럼 순박한 엄정아가 언젠간 시들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고태오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그때마다 왜 병에 걸린 사람이 이은지가 아닌지 원망했다. 분명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은 이은지인데 말이다.이진욱도 그렇게 생각했고 여러 번 입 밖으로 내뱉었다.“정아 누나처럼 착한 사람이 왜... 은지 누나가 대신 죽어야 하는 건데.”고태오는 이를 떠올릴 때마다 이은지에 대한 원망이 깊어만 갔다. 곧 결혼식을 시작하는데도 이은지가 나타나지 않자 고태오는 임신이 뭐 대수냐고 생각해 오랫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깍지를 낀 고태오와 엄정아의 손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이제 필요 없어.”예상 밖의 반응에 세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뒤따라온 이진욱이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만해. 태오 오빠 졸라서 임신까지 하더니 이젠 밀당하려고? 꼴이 너무 우습다. 근데 임신하면 뭐 해? 정아 누나 시중들기도 변변치 않은데.”이진욱은 여전히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지나치게 덤덤한 내 표정에 고태오도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은지야. 나 미행하면서 내 업무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심술까지 부리는 거야?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정아도 조용히 몸조리해야 하는데 네가 나타나면 오히려 기분이 영향 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태오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현장에서 끌어내려 하는데 여진이 시작되었고 고태오와 이진욱은 동시에 공터에 서 있는 엄정아에게로 달려갔다. 고태오는 많이 급했는지 나를 바닥에 넘어트리기까지 했다. 내 뒤로 콘크리트 전봇대가 무너지는 걸 분명 봤을 텐데 말이다.전봇대는 내 다리로 떨어졌고 극심한 고통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고 왼쪽 다리에 깁스한 상태였지만 옆엔 아무도 없었다.간호사는 내가 잠에서 깨자 얼른 링거 바늘을 뽑아주며 걱정스레 말했다.“다리를 다쳤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아이까지 위험할 뻔했어요.”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애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중절 수술 예약하게 도와주실래요?”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병실을 나서서야 나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온 게 이 마을 이장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작 나를 다치게 한 장본인은 고태오는 문자 하나만 딸랑 보내왔다.[정아가 너 다친 거 보고 놀라서 쓰러지는 바람에 구조용 헬기를 신청해서 진욱이랑 같이 정아를 해성시로 데려왔어.]내가 다친 것에 대해서는 걱정 한마디 없었다. 이제 더 실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
고태오는 그제야 이 일을 떠올린 듯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이진욱이 핸드폰을 앗아갔다.“누나, 이제 그만 좀 해. 난 누나처럼 의부증이 심한 사람은 처음 봤어. 억지 부리지 마. 그러다 태오 형 업무 진척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건데. 누나가 질 거야? 미련한 짓은 누나가 다 하고 뒤처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거 미안하지도 않아?”이진욱이 이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엄정아는 고태오의 품에 기댄 채 부드럽게 웃으며 이진욱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렇게 달랬다.“됐어. 언니 성격 한두 날이야? 오늘은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야. 그러니까 너도 화내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해.”말 한마디에 이진욱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하객들은 시끌벅적하게 신혼 방이 마련된 방향으로 향했다.깜깜한 밤, 결혼식이 끝난 곳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자 마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더 서 있던 나는 핸드폰을 꺼내 중절 수술을 예약하고는 자리를 떠났다.15년을 노력해도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이제 버릴 때도 된 것 같았다.시내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시간이라 대충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어렴풋이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요란하게 울려대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방송국에서 걸려 온 전화였는데 목소리가 초조하면서도 흥분에 차 있었다.“은지 씨, 은지 씨가 있는 한옥 마을에 5.3급 지진이 일어났대요. 얼른 인터뷰 따러 가요.”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생각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엄정아가 올린 인스타가 보였다. 하얗고 작은 엄정아의 손에 고태오의 뼈마디가 선명한 큰 손이 올려졌고 커플링을 나눠 끼고 있었다.나는 고태오 손등에 난 칼자국을 보며 싸늘하게 식었던 마음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18살 되던 해 고태오는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는 나를 구해주기 위해 날아온 맥
나는 비를 맞으며 한옥 마을에서 50미터 떨어진 계단에 서서 내 약혼자인 고태오와 의붓동생의 전통 혼례를 지켜봤다. 고태오가 입에 옥으로 만든 패물을 물고 전통 혼례복을 입은 어여쁜 엄정아에게 전해주자 엄정아가 얼굴을 붉히며 입으로 받았다. 고태오는 엄정아가 입에 문 패물을 꺼내기도 전에 냉큼 엄정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두 사람은 하객의 호응과 축복 속에 서로를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눴다. 그렇게 20분간 지속된 키스는 엄정아의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가을바람에 장식으로 걸어둔 비단들이 휘날려서야 나는 어두운 불빛 아래 환호하는 사람 중에 내 가족과 친구들도 있음을 알아챘다.내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동생 이진욱은 한복을 입고 결혼식 사회를 보며 주인공인 엄정아만 신경 썼다. 전에 엄정아와 엄정아의 어머니에 의해 게임 중독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학교에 보내져 죽을 뻔한 기억은 이미 지워버린 것 같았다.“누나, 형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알콩달콩 잘살길 바라요.”이진욱이 큰소리로 축복하자 옆에 있던 하객이 미리 준비한 불꽃을 터트렸다. 터지는 불빛과 함께 고태오가 엄정아를 번쩍 안아 들었고 흥분한 이진욱이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리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하객 여러분, 결혼식은 여기서 마칩니다. 신랑, 신부 이제 합방해도 좋습니다.”현장은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이진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원히 내 편에 서겠다고 약속했던 내 친동생에게 말이다.이진욱은 핸드폰 화면을 한번 쓱 훑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쉬지 않고 고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건 전화임을 확인한 고태오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고 그대로 끊어버리려는데 엄정아가 한 말을 듣고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어디야?”내가 가벼운 목소리로 묻자 고태오는 하객이 보는 앞에서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또 조사질이야? 임신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애정 결핍이야,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