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마마, 안심하십시오. 반드시 사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소현준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소우연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괜히 제 선의를 늑대에게 바치고 싶진 않았거든요.”그녀는 정연에게 손짓하여 약병을 건네주게 한 뒤, 더 이상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소현준은 그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린 약병을 내려다보았다.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만약, 진정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소우희가 아니라 소우연이라면?’그렇다면, 그동안 소우희는 가문의 모든 이들을 기만해 온 것이었다.그 생각에 소현준의 손이 떨렸다.그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소우연이 처소로 돌아오자, 간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왕비마마, 소현우 대인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이번엔 또 무슨 말을 적어 보냈을까?”소우연은 냉소를 터뜨렸다.그때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소현우가 지금쯤 대장군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아니다. 그랬다면 그는 이미 오래전에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그를 위해 밤낮으로 간호했다.칠 일동안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그에게 직접 약을 달여 먹였다.그러나 그가 처음 내뱉은 첫마디는…“우희야, 날 살려줘서 고맙다…”그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그녀는 그 순간에도, 소우희가 자신의 공을 가로채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때의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그저 침묵했다.그리고, 그 침묵이 결국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간석이 조용히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줄 지나지도 않아 입을 다물었다.“왕비마마, 이 편지는… 그냥 넘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그러나, 소우연은 담담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다.그 순간, 그녀의
소우연이 이육진과 혼인한 후, 이토록 감정이 흔들린 것은 오랜만이었다.“왕야, 왕비마마께서 지금 혼자 계십니다.”간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왕야께서 직접 위로하러 가시겠습니까?”이육진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지금 부인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이육진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오늘 저녁, 부인이 좋아할 만한 단것을 준비해 두어라.”“알겠습니다.”간석은 공손히 답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이육진은 책상 위의 병서를 집어 들었지만, 한 줄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머릿속에는, 눈물을 삼키며 홀로 감정을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렇게 혼자 참을 필요가 없는데…’이육진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녀를 혼자 두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은 불과 몇 분 전이었다.그런데, 지금 그는 벌써 책을 던져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이렇게 신경이 쓰이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그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진규가 그를 보고 다가왔다.“왕야?”이육진은 흐린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서쪽 하늘에 퍼진 노을이 회색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부인을 보러 가야겠다.”진규는 순간 놀랐지만, 이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이전의 왕야라면, 누구에게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왕야는 달랐다.그녀에게만큼은… 그렇게라도 곁에 있고 싶어 했다.우연은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그리고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왕야… 돌아오셨군요.”이육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가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그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이제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오늘은 바둑 둘 기분이 아니군.”이육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소우연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저녁을 드시겠습니까? 제가 정연에게 말해…”“연아.”
이육진의 따뜻한 위로 덕분인지, 소우연의 마음속 응어리가 한결 가벼워졌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먹고 싶습니다.”그의 정성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그녀를 바라보던 이육진은 그제야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다음 날.소우연은 직접 만안당으로 향했다.오늘은 그녀가 직접 의원을 지키며 환자들을 진료하는 첫날이었다.그러나 그녀가 의원에 앉아 있자, 많은 사람들이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렸다.“의원이라지만… 왕비마마께서 직접 진료를 보신다고?”“여인이 의원을 본다니… 믿을 수 있는 걸까?”“그보다, 왕야께서 허락하신 건가?”소우연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그래서 미리 대책을 준비해 두었다.그녀는 일부러 임곽수 대부를 두 시간 늦게 오도록 했다.그리고, 곁에 있던 정연이 기침을 가다듬고 크게 외쳤다.“자, 모두 잘 들으세요! 우리 왕비마마께서는 어려서부터 의술을 익혀 오셨습니다. 왕야께서도 왕비마마의 손길로 건강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마마의 의술을 의심하지 마십시오!”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소씨 가문의 소우희가 의술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왕비마마도 의술을 다룰 줄 안단 말인가?”“소우희가 할 줄 아는데, 소우연이라고 못할 게 있나?”“그야 그렇지만… 왕야께서 정말 허락하셨을까?”“왕비마마가 이렇게 대중 앞에서 의원을 보는걸?”이들의 반응은 단순히 소우연의 의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그보다 더 깊이 자리 잡은 편견… 여인이 남 앞에서 의술을 다룰 수 있는가. 그것이었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안당의 문이 열린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그들은 마치 구경하듯 입구에 모여서 수군거리기만 했다.만안당 맞은편 일품루. 2층.이육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고요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는, 곁에 서 있던 진규를 보며 조용히 명령했다.“가서 부인을 도와주거라.”진규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손을 움츠렸지만, 소우연이 단호하게 그의 팔을 눌러 고정시켰다.“가만히 있거라.”그녀의 태도가 사뭇 진지해지자, 남자는 감히 움직이지 못한 채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왕비마마께서 직접 손을 대시는데… 정말로 회남왕께서 이를 허락하셨을까?’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우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아침에 무엇을 먹었느냐?”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고구마를 먹었습니다.”“고구마만 먹었느냐?”“네.”“가족들도 함께 먹었느냐?”“아닙니다. 설 전에 쪄둔 것을 부엌 한쪽에 두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가족들에게는 먹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혼자 먹었지요.”이 말을 듣자, 소우연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토하거나 설사를 하진 않았느냐?”남자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이제 확신이 들었다.그는 상한 음식을 먹어 복통과 설사를 일으킨 것이었다.소우연은 곧바로 처방을 적어 만안당의 약제사에게 건네며 약을 준비하게 했다.그러고는, 남자의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곧바로 침을 들었다.“지금부터 통증을 줄여주도록 하마. 조금만 참거라.”그녀는 능숙하게 몇 개의 혈자리에 침을 놓았다.그렇게 겨우 한 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엇?”남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이리저리 몸을 뒤틀 정도로 심한 복통이었는데, 이제는 고통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조금씩 마르고, 몸에 힘도 돌아왔다.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왕비마마의 의술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빠르게 통증이 사라질 줄이야…”그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저는 이 병을 몇 년째 앓고 있었습니다. 매번 약을 며칠씩 먹어야 겨우 나았는데, 왕비마마께서는 단숨에 이 통증을 멈춰 주셨습니다!”그는 말하면서도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이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 당해 본 사람만 알지요. 이렇게 단번에
진원 장군부.우림이 급히 발걸음을 옮겨 소현준에게 다가가 보고했다.“오늘 왕비마마께서 만안당에서 직접 의진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이 왕비마마의 의술을 칭찬하고 있습니다.”“칭찬하고 있다…”소현준은 손끝으로 턱을 문질렀다.“그리고, 회남왕께서도 이를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앞으로 매달 3번 정도 의진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소현준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네 말대로라면, 회남왕비께서 앞으로 매달 정해진 날마다 의진을 한다는 것이냐?”“예, 대인.”우림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대인, 소씨 가문에서 의술을 익힌 사람은 원래부터 둘째 아씨뿐 아니었습니까?”그 순간, 소현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그는 창밖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마도, 아주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우림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사실, 최근 들어 그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소씨 가문에서 오로지 의술을 인정받았던 이는 소우희였다.그런데, 왜 최근 들어 소우희는 태연하게 ‘약재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할머니의 진정향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왜 할머니가 아프셔서 도움이 필요할 때, 소우희는 아니라며 소우연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그 순간…“영감께서 오셨습니다!”밖에서 하인이 소리쳤다.소현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이어 소홍범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그는 묵직한 표정으로 책 한 권을 소현준에게 건네며 말했다.“대장군께서 보낸 서찰이다. 군에서 소우희가 만든 상처 치료약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하지만…”소홍범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졌다.“평서왕부에 가서 직접 소우희를 찾았으나, 그 아이는 궁 안에 없었다.”소현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없었다고요?”소홍범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친정에는 오지도 않고, 이렇게 행방을 감추다니.”소현준은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
노부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힘없이 말했다.“그렇다면… 우희가 진정향을 만든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게냐.”“결국 한 병을 만들어 현준이에게 보낸 것이겠지.”그러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한 병뿐이라니! 이제 그것마저 다 떨어졌으니, 나는 또다시 밤마다 잠을 설치고 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구나. 이게 다 불효막심한 것들 때문이다!”소홍범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한 얼굴이었다.“소우연도 괘씸하지만, 소우희 또한 너무합니다. 제가 직접 평서왕부에 서찰을 보냈고, 그 애 어미까지 나서서 요청했건만, 지금까지 답장 한 통 없다니요!”노부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이게 다 너희 부부가 애초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이다. 이제 와서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으니, 집안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소홍범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어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노부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다. 어서 가서 진정향을 가져오도록 해라!”“알겠습니다.”그러나 진정향 문제도 심각했지만, 현재 군에서 급히 필요로 하는 상처 치료제 또한 문제였다.소현우와 소한준이 영남에서 도적을 소탕 중인데, 원래 소우희가 만들어야 할 치료제가 공급되지 못하고 있었다.소홍범은 결국, 일반적인 치료제로 급히 대체하여 군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평서왕부.소홍범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직접 평서왕부로 찾아가, 서찰을 전하는 것도 없이 단호하게 선언했다.“평서왕과 왕비마마께서 저를 만나 주지 않으신다면,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결국… 반 시진 후, 이종대가 마지못해 그를 접견했다.그러나 소홍범이 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후원에서 낯선 사내들이 몇 명씩 걸어 나오고 있었다.소홍범은 눈썹을 찌푸렸다.‘평서왕부의 후원에 외간남자들이 드나들다니?’잠시 후, 이종대가 후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소
평서왕부, 본채.“갔느냐?”이종대는 하인이 다가오자마자 서둘러 물었다.“예, 방금 떠나셨습니다.”하인의 대답을 듣고, 이종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긴 회랑을 지나 본채로 향했다.그가 도착한 곳에는 하인들이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나르고 있었다.소우희는 욕조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피부가 빨갛게 변할 정도로 거칠게 닦아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호라, 부인. 그렇게 고운 피부를 너무 심하게 문지르면 상처라도 나겠소.”그 목소리에 소우희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왕, 왕야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그녀는 잔뜩 움츠러든 채,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이종대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네 애비를 돌려보내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나를 반기지도 않는단 말이냐?”이종대와 소홍범의 나잇대는 비슷했다.이종대처럼 탐욕스럽게 탐탁지 않은 남자는 세상에서도 드물 터였다!소우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던 겁니까?”이종대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그야 뭐…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 달라고 하더군.”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오히려 잘 됐지 않느냐. 며칠 동안 쓸모도 없었건만, 이참에 다녀오는 게 좋겠지.”소우희의 손이 욕조 안에서 떨렸다.“저, 저… 저는 안 가겠습니다!”소씨 가문에서 수차례 서찰을 보낸 것은 분명했다.노부인이 다시 두통을 앓기 시작했으니, 그녀에게 다시 진정향을 만들라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이제 소우연은 더 이상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도대체 어디서 진정향을 구한단 말인가?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우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한때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껴주던 가족들.하지만 이제 그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급급할 뿐,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신경 써주지 않았다.‘이 썩어빠진 평
“왕야…”소우희는 뺨을 감싸 쥔 채,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이제…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어.’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혜주…”그러나, 부르자마자 깨달았다.혜주는 이미 소현준에게 끌려가 형벌을 받았고, 더 이상 그녀 곁에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흐느끼다가, 곧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거기 누구 없느냐!”끼익…방문이 살짝 열리더니, 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마마, 소인 여기 있습니다.”소우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옷을 입혀라.”“예.”시녀는 곧 준비를 서둘렀다.그러나, 소우희의 몸을 본 순간, 그녀는 미묘하게 숨을 들이마셨다.몸 곳곳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피부는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소우희는 시녀의 시선을 느끼자, 살기를 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본 것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혀를 뽑고, 눈을 도려낼 것이다.”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예, 왕비마마.”회남왕부.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발라 주고 침을 놓은 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마사지를 해 주었다.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촛불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그러나, 소우연은 연이어 하품을 터뜨렸다.이육진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많이 졸리느냐?”“조금이요.”그녀는 손목을 가볍게 풀었다.이육진이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왕야, 저는 괜찮습니다.”이육진은 그녀의 가녀린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침을 놓고, 마사지를 하느라 손이 많이 고생했겠구나.”그는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간석에게도 가르쳐 주어라. 그러면 앞으로는 간석이가 너 대신 마사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그러나, 소우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일은 제가 직접 하고 싶습니다.”이육진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직접 하고 싶다고?”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왜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