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주는 침대 옆에 앉아 조수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끊임없이 입에 가져다댔다. 그의 뇌리에는 방금 전 의사가 했던 말들로 가득했다.조수아가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건 알았어도 그녀가 물에 대해 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육문주는 왜 욕실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지려고 했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 유혹해도 그녀가 절대 욕조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에 대한 그녀의 공포 정도가 그 정도였을 줄이야.육문주는 창백한 조수아의 얼굴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조수아, 대체
그녀가 묵고 있는 요양원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입원하게 된 환자들 모두가 비밀유지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환자들은 모두 번호로 불리고 있었으며 이름이 없었다. 조수아는 남자의 번호인 99번만 기억했고, 남자도 그녀의 번호인 11번만 알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조수아의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망망인해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 스쳐지난다 해도 남자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속해서 조수아의 뇌리에 떠올랐다가
육문주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수아가 지난번 일로 아직까지도 속을 끙끙 앓고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육문주는 사건의 진말을 알아내려고 사람을 시켜 증거 확보에 착수했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사람이 중간에서 그 증거를 가로채가는 탓에 결국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육문주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조수아는 차갑게 입술을 휘었다.“대답하지 않아도 돼. 답을 이미 알 것 같으니까. 다들 나가. 누구도 이번 일에 관여하지 마.”그때 문가에서 연성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육 대표님께
“조수아, 이리 줘.”“아직도 나한테 준 상처가 부족해서 그래? 꼭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상처를 헤집어야겠어?”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수록 육문주는 꼭 영상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더 섰다. 조수아의 반항에도 억지로 그녀의 손에서 U디스크를 뺏은 육문주는 그걸 컴퓨터에 연결하고 영상을 재생시켰다.송미진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나자마자 안혜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미진아, 왜 그래! 문주야, 미진이가 쓰러졌어. 얼른 미진이를 의사한테 데려다 줘!”고개를 돌린 육문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진 송미진을 발견했
그녀의 말에 육문주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다. 그윽한 눈매가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어둠속에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그것만 빼고 다른 걸 마음대로 말 해.”“내가 원하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말을 뱉었으면 약속한대로 해야지.”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불쑥 아래로 향했다. 커다란 몸집이 그녀를 아래에 가둔 채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조수아, 그렇게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그렇게 안달났냐고!”조수아는 감정변화 없이 답했다.“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육문주의 음성이 싸늘하
조병윤이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답했다.“예전에 물에 빠졌다가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물을 무서워하기 시작했죠.”그는 조수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 약은? 날 봤으면 빨리 약부터 꺼냈어야지. 아무튼 둘이서 스킨십하느라 바빠서는. 역시 젊은이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니깐.”조병윤은 조수아의 손에서 약을 받아든 뒤 바로 두 알을 까서 입으로 삼켰다.육문주는 그가 이 화제를 입에 올리기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일로 조수아가 그때 당시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이 되는 부
곽명원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우리 와이프가 나한테 경고하더라고. 너한테 한 마디라도 잘못 털어놓았다간 나랑 이혼할 거라면서. 내가 들은 건 딱 이 한 마디야. 넌 진실을 알 자격이 없대. 미안하다, 친구야.”육문주가 뭐라고 더 덧붙이기도 전에 곽명원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꽉 다문 잇새로 단마디 욕설이 비집고 나왔다.차에 시동을 걸고 떠난지 얼마 안 돼, 조수아는 연성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선배, 무슨 일이에요?”“진규민이 도망쳤어. 모레 있을 법정에서 유일하게 내놓을 수 있는 증인이
육문주는 심장이 찢겨 나갈 것처럼 아팠다. 윤곽이 분명한 얼굴에 전에 없던 실망감이 떠올랐다. 얇은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려 한참을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한참을 조용히 조수아를 쳐다보던 그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조수아, 우리 그냥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매일 나랑 이렇게 날 세우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눈물로 글썽이는 얼굴이 입가에 조소를 그렸다.“그럼 사람 시켜서 나 기억상실증 걸리게 만들던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무리 문주 씨를 불러도 당신을 찾을 수 없었던 그때의 고통을 잊게 하고, 3년
곽서연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아픔이 서려 있었고 얼굴의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심은하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호칭이 나오자 곽서연은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이 끊어진 듯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몸 전체의 신경 하나하나가 무언가에 찔리는 듯 아파져 왔다.곽서연의 모습을 본 박서준은 가슴이 아파 한층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박서준은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었고 심지어 곽서연의 앞에 뛰어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있는 상처 때문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박서준의 부름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갖고 싶고 혼자만 차지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였다. 마치 그가 곽서연과 윤상후가 함께 있는 것을 봤을 때 느꼈던 그 감정처럼.박서준은 심은하의 마음이 넓은 이해심인지 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인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박서준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병실 문이 열렸고 누군가 들어왔다. 병실에 들어선 사람을 본 박서준은 심은하를 보며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엄마한테 알려준 거야?”심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의사가 너 다리 부상이 심해서 장애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그러길래 너무 무서워서
박서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심은하는 순간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미안해. 사실 서연이가 네 조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 계속 모른 척했던 건 내가 널 따로 조사했다는 걸 너는 몰랐으면 했거든. 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서준아, 솔직히 말하면 처음 소개팅을 했던 그 날부터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여기까지 이직해서 온 것도 너랑 가까이 있고 싶어서였고 자주 만나다 보면 너도 나한테 감정이 생길 거로 생각해. 내가 우리 관계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는척하
병실로 돌아온 심은하는 곽서연을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서연아, 삼촌은 내가 돌보고 있을게. 의사가 너한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윤상후랑같이 먼저 들어가서 쉬어.”말을 마친 심은하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곽서연을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현재 심정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곽서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삼촌이 깨어나는 걸 보고 가면 안 될까요?”심은하는 가볍게 곽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서연아, 숙모 말 들어. 오늘에는 일단 돌아가서 푹 쉬어. 삼촌이 너를 구하려고
박서준은 아픈 허벅지를 이끌며 힘겹게 달려가 곽서연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그는 곽서연이 다치는 게 싫었고 다시 병이 발작할까 봐 두려웠다.순간 박서준의 머릿속에는 그날 곽서연이 해변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삼촌, 저는 삼촌이 저를 구해준 그 날부터 삼촌을 좋아하게 됐어요.”“삼촌 옆에 가까이 있기 위해 유학을 선택한 거예요.”“삼촌, 저는 앞으로 계속 삼촌을 좋아할 거예요.”한마디 한마디 떠오를 때마다 박서준은 마음이 점점 더 아파 났다.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서준은 곽서연을 좋아하고 있었다.
박서준은 허리를 굽혀 칼을 손에 쥔 채 곽서연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서연아, 울지 마. 삼촌 안 죽어.”곽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삼촌이 불구가 되는 게 싫어요. 그러니까 하지 말아요. 두 번 다시 누가 나 때문에 희생하는 걸 보고 싶지가 않다고요. 한평생을 갚아도 못 갚잖아요.”곽서연은 자신의 삼촌을 통하여 알게 된 박서준이 그녀를 위해 다리를 잃는 게 싫었고 자신은 박서준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곽서연의 말뜻을 알아차린 박서준은 가슴이 지끈거렸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며 지체할
박서준의 머릿속에는 곽서연이 납치되는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곽서연은 어렸을 때 벌어졌던 일 때문에 이미 심한 스트레스성 장애를 겪었었는데 만약 다시 재발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혼자 차를 몰고 곧장 거래 장소로 달려간 박서준이 대문을 걷어차자, 큰 나무에 묶여 있는 곽서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공포에 가득 찬 눈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곽서연을 보자 박서준은 수없이 많은 칼이 한 번에 심장에 박히듯 아파져 왔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두 다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려왔다.침착하고 냉정하게
입술을 닦아준 윤상후는 곽서연에게 물었다.“서연아, 둘째 삼촌이 우리가 사귀는 걸 정말로 믿게 하고 싶어?”박서준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신경 쓰는 것이 싫었던 곽서연은 확실히 마음을 단념했음을 보여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윤상후는 즉시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 위에 댄 뒤 머리를 숙여 손가락을 사이에 두고 입을 맞추었다.결국, 그들의 계획대로 박서준은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고 오해했다.박서준이 아까 했던 말을 떠올리던 곽서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곽서연은 예나 지금이나 박서준이 잘해줬던 건 그냥 곽명원 때문이
윤상후는 몸을 앞으로 숙여 곽서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비록 박서준을 등지고 있었지만, 윤상후의 입술이 곽서연의 입술에 맞닿은 것을 본 박서준은 마치 마른벼락이 온몸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줄곧 침착하게 앉아있던 박서준은 즉시 일어나 어두운 얼굴로 그들을 향해 걸어가더니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박서준의 목소리에 윤상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셔지지 않은 뜨거운 눈빛을 머금은 채 박서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둘째 삼촌, 죄송해요. 방금 참지 못하고 서연이한테 입을 맞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