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어머니께서 한꺼번에 많은 질문을 하시니까 어느 것부터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양진아는 농담을 건네고는 계속하여 말했다.“정빈 대군 저택의 서당이 좋긴 하지만 호석이랑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 호석이가 집안 형제들과 더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관복 서원에 보내 성규랑 함께 공부하도록 할까 생각 중입니다.”한수경은 마음속의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그래. 집안 형제들끼리 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맞지.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성규더러 호석이를 잘 챙겨주라고 하마.”“감사합니다, 작은어머니.”“감사하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느냐.”양호석이 정빈 대군 저택의 서당에 다닌다고 안혜선이 여러 번이나 한수경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젠 양호석이 그 서당에 가지 않으니 안혜선이 어떻게 으스댈지 궁금했다.안혜선의 표정만 생각하면 한수경은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실룩거렸고 더는 양진아를 붙잡아두지도 않았다.“얼른 네 어미한테 가보거라. 그래도 모녀 사이가 아니냐. 너도 호석이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네 어미도 이해할 거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수경을 배웅했다.“아씨, 둘째 마님께서 우리 큰집이 망신당하는 걸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둘째 마님께 도련님의 준비물을 부탁하신 겁니까? 첫째 마님께서 준비하지 않으신다면 아씨가 준비하시면 되지 않습니까?”경혜는 양진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예전에는 분명 둘째 마님을 가장 싫어했었는데. 왜 이번에 돌아온 다음에는 둘째 마님과 엄청 친한 것 같지?’양진아가 웃으며 말했다.“작은어머니는 나쁜 분이 아니다. 내가 부탁했으니 성규한테 호석이를 잘 챙겨주라고 할 거다. 그럼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차피 모두 한 가족인데 망신당할 게 뭐가 있다고. 우리가 망신당하는 걸 작은어머니가 봤다면 그건 우리가 그럴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지난 생에 그녀도 경혜처럼 생각했었다. 작은어머니가 늘 무섭게 얘기한다고 생각했고 매번 어머니와 다
양진아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도자기 조각들을 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 제가 뭘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지금 뻔뻔스럽게 뭘 잘못했는지 묻는 것이냐?”안혜선이 탁자를 탁 치며 화를 냈다.“제멋대로 혼사를 바꿔치기한 것도 모자라 혼수도 압수하지 않았느냐? 양진아, 감히 이 어미의 뜻을 거역한 것이냐?”“그럼 관아에 가서 절 고발하세요.”양진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분노와 지난 생의 원한이 안혜선의 뉘우침이라곤 전혀 없는 태도를 본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어머니, 어머니의 여식은 대체 접니까, 안정미입니까? 양씨 가문의 물건을 남한테 준 건 물론이고 정미한테는 혼수를 120가지나 준비해줬으면서 저한테는 하나도 준비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말끝마다 절 위해서 그런 거라고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해보세요. 이게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안혜선은 양진아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그건 내 것이다. 내 물건을 누구한테 주든 내 마음이야. 넌 할아버지께서 주신 혼수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정미는 남이 아니다. 만약 네 할아버지가 그동안 네 외삼촌을 보살펴줬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게 노력할 필요 있었겠어? 양씨 가문 전체가 네 아버지의 덕을 보았고 모든 이익을 누렸다. 그런데 우리한테 쥐꼬리만한 재산을 나눠주고 퉁 치려고? 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양진아는 안혜선이 전혀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원망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화를 냈다.“만약 할아버지께서 외삼촌을 내버려 뒀다면 안씨 가문은 아직도 광북 사막에서 모래나 먹고 있었을 겁니다.”“입 다물거라. 안씨 가문은 네 외가이고 네 몸속에 안씨 가문의 피가 반이나 흐르고 있다.”“허허. 어머니, 그동안 정미가 저한테서 빨아먹은 피만 해도 얼마인데. 제 몸속에 흐르는 안씨 가문의 피 절반은 진작 돌려주고도 남았어요.”순간 변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양진아는 더는 어머니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런 얘
안정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뜻밖의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모, 언니가 뭐라는지 좀 보세요. 분명히 언니가 제 서방님을 빼앗아 간 건데. 임 나리는 원래 제 것이었습니다.”“그래. 네 것이다, 네 것.”안혜선도 울음을 멈추고 양진아를 노려보았다.“양진아, 혼수는 일단 그렇다 치자. 하지만 임우진은 네가 먼저 혼약을 파기하겠다고 해놓고 혼례 날에 수를 써서 임우진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냐? 이건 네가 너무한 게 맞다. 그러니 어미 말을 듣거라. 아직 이 일이 알려지기 전에 다시 서로 바꾸거라.”양진아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어머니의 진짜 의도를 알아챘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안혜선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미련마저 완전히 사라졌다.그녀가 싸늘하게 물었다.“정미가 아직 어머니께 말하지 않았나 보군요. 저와 서방님은 이미 합방까지 했는데 어떻게 바꾸란 말입니까?”안혜선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고정수한테 물어봤는데 너한테 깊은 정을 품고 있더구나. 네가 순결을 잃어도 괜찮다고 했다. 고정수한테 시집가기만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허허. 그럼 심혈을 기울여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해야겠네요?”양진아가 대놓고 비웃었다.“난 네 어머니인데 널 해칠 리가 있겠느냐?”안혜선이 진지하게 말했다.“제후 저택이 화려해 보여도 임우진은 사람을 아낄 줄 모르고 또 네 시어머니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딱 봐도 고씨 가문이 훨씬 좋지 않느냐. 시어머니도 다정하고 고정수도 너한테 잘해주는데. 어떠냐? 괜찮다면 내가 임우진한테 말해 보겠다.”“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의 서방님은 임우진뿐입니다. 서방님이 절 내쫓기 전까지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양진아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정중하게 인사했다.“어머니, 전 피곤해서 이만 방에 가서 쉬겠습니다. 이따가 함께 본채로 식사하러 가시지요.”그러고는 경혜와 함께 가버렸다.안정미는 양진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심방원은 양진아의 옛 안방이었다.사실 예전에 썼던 안방은 안혜선이 머무르는 본채 근처의 화야원이었으나 안정미가 탐을 낸 바람에 안혜선은 그녀를 옆문에 가까운 심방원으로 옮기게 했다.그때 안혜선이 이렇게 말했었다.“네가 언니이자 주인이니 당연히 동생한테 양보해야지.”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7년 동안 안정미는 쭉 서쪽 별채에서 지냈다. 양진아는 줄곧 그녀에게 양보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혼사마저 양보했다. 결국 목숨을 잃고서야 모든 걸 깨닫게 되었다.“콜록콜록. 아씨, 먼저 잠시 마당에 계십시오. 이 방에 먼지가 너무 많습니다.”경양은 북방에 위치하여 공기가 매우 건조했다. 방을 하루만 청소하지 않아도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양진아가 출가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탁자 위에 벌써 먼지가 수북했다. 그녀가 출가한 후로 어머니가 이곳에 발도 들인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됐다. 너무 깨끗하게 청소할 필요 없다. 어차피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따가 본채로 갈 건데.”양진아는 먼지가 가득한 의자에 앉아 안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그날 정신을 차리자마자 허둥지둥 꽃가마에 올랐기에 이곳을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오늘 친정에 인사하러 온 것이지만 얼마나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아씨, 왜 우십니까?”양진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걸 본 경혜는 황급히 손수건을 건넸다.“아씨, 앞으로 큰 마님이 계시면 첫째 마님께서도 예전처럼 터무니없는 일을 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어쨌든 아씨의 어머니신데 나중에 깨달으시겠지요.”양진아는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에 경혜를 내보냈다.“물 좀 가져오거라.”경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는 나가버렸다.방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양진아는 손을 탁자에 놓고 턱을 괸 채 앞으로 걸어갈 길을 곰곰이 생각했다.양호석을 서원에 보내 안씨 가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했다. 그래야 훗날 안
말을 마친 고정수는 양진아를 쏘아보면서 아주 작은 흔들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양진아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대체 뭔 소리야, 그게?”고정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양진아,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돼. 너도 돌아왔다는 거 알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다신 그러지 않을게. 그러니 나와 혼인하자. 나한테로 돌아온다면 순결을 잃었다고 해도 괜찮아. 이번에는 그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게.”양진아가 얼굴을 찌푸렸다.“고 귀공, 제발 좀 자중해. 난 지금 제후 저택의 작은 마님이야. 이런 터무니없는 말로 내가 안정미와 다시 바꿀 거라는 생각 따위 하지 마.”양진아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과 역겨워하는 표정을 본 고정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만약 진아가 나랑 같이 환생한 게 아니라면 아무 이유 없이 혼처를 바꿔치기했을 리가 없잖아. 전생에 분명 나랑 혼인했었는데. 그리고 안정미의 120가지 혼수도 들키지 않고 고씨 가문으로 옮겨졌어야지.’고정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양진아, 난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 숨기지 않아도 돼.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런데 네가 제후 저택으로 시집가면 좋은 결과가 없을 거야. 날 따르면 양씨 가문도 지켜주고 널 행복하게 해줄게.”“그 입 다물어, 고정수. 좋은 결과가 없는 사람은 너야.”양진아는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모욕당한 느낌마저 들었다.“함부로 안방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터무니없는 말로 우리 시댁까지 저주해? 우리가 만만해 보여? 분명히 말하는데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무척이나 경계하는 양진아의 모습에 고정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정말로 환생한 게 아니라고?’“양진아, 난 안 믿어. 네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니라면 왜 나와 혼인하지 않는 건데?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양진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안정미가
“나리, 이 일은 언니 잘못인데 왜 이 사람을 때리십니까?”안정미는 속으로 임우진을 몹시 원망했다. 임우진이 양진아와 고정수가 단둘이 한 방에 있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양진아를 감쌀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나리는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정상적인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보고 분노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맞아야 할 사람은 양진아지.’안정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불명예를 양진아에게 뒤집어씌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모두 임우진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나리, 전 그런 적 없습니다.”양진아는 다급히 임우진의 옷깃을 붙잡고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고정수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길래 나가라고 했더니 전혀 듣지 않더라고요.”“양진아, 네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일 줄은 몰랐어. 난 너한테 마음을 주었건만 내 출신이 싫다고 날 버리고 다른 사내한테 붙어먹어?”고정수는 안정미의 손을 잡고 일어서더니 입가의 피를 닦고는 양진아를 무섭게 노려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나리, 양진아가 저한테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런 탐욕스럽고 속물인 여인한테 절대 속아선 아니 됩니다.”임우진은 양진아의 손을 잡고 고정수를 비웃었다.“네 그 더러운 입에서 그래도 진실이 나오긴 하는군. 탐욕스럽고 속물이면 어때서? 너도 예전에 안씨 가문의 여식이 눈에 차지 않아 진아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느냐? 진아가 너의 본모습을 알아보고 나한테 시집왔는데 어디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냐?”쿵.‘알고 있었어?’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임우진에게 향했다.“나리, 말조심하십시오. 저와 진아의 혼인은 양가 어른들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고정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임우진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양진아조차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임우진이 알고 있었다면 전생에 고정수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그녀뿐이었단 말인가?“허.”임우진이
고정수는 더욱 심하게 분노를 터트리며 임우진을 보았다.“나리, 방금 진아가 절 부른 게 맞다고 나리께서 인정하지 않았습니까?”임우진은 경멸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것이냐? 넌 글공부를 어디로 배운 것이냐?”고정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전부 임우진이 해버렸다. 고정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원래는 임우진과 양진아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었다. 설령 양진아를 되찾을 수 없더라도 자기 부인이 전 약혼자와 한 방에 있는 걸 보면 임우진이 분노해서 둘 사이에 금이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임우진이 상식 밖의 행동을 보이더니 양진아를 감싸고 돌았다.임우진은 훤칠한 키로 양진아의 곁을 지키면서 경멸 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어머님, 오늘은 진아가 친정에 인사드리러 온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조부모님과 작은어머님께 대체 집안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꼭 여쭤봐야겠습니다. 설마 진짜로 진아한테 뒷배가 없다고 생각해서 함부로 괴롭히는 것입니까?”안혜선은 임우진이 일을 크게 벌이려고 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말했다.“오해다, 오해. 여긴 우리 서쪽 별채의 일이니 아버님 어머님께 폐를 끼칠 필요 없다.”임우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어머님은 제가 그냥 넘어가길 바라시는 겁니까?”“다 한 가족 아니냐? 마음이 넓은 네가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다.”안혜선의 시선이 양진아에게 향했다.“진아야, 너도 한마디 하렴. 좋은 날에 이런 일이 터져서 다들 기분이 상했을 텐데 풀어야지.”양진아는 어머니가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 어쨌거나 어머니의 눈에 친딸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그녀는 임우진의 시선을 받으며 씁쓸하게 웃고는 그의 뒤에 숨어버렸다.“어머니, 전 이젠 출가했으니 서방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고정수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어머니께서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전 어머니의 딸입니다. 제 편을 들어주시지 않
임우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그는 이 말을 남긴 후 안혜선의 설명 따위 듣지 않고 양진아와 함께 심방원을 나섰다. 그렇게 서쪽 별채를 완전히 벗어나고 나서야 양진아를 놓아주었다.양진아는 옆에 선 그를 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오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양진아, 앞으로는 좀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여. 내가 매번 제때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임우진은 딱히 생각하지 않고 계속하여 질책했다.“만약 오늘 진짜 고정수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다면 앞으로 우리 제후 저택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양진아의 마음속에 차올랐던 감동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네, 서방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오늘 일은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어머니를 쉽게 믿지 말았어야 했어요. 어쨌든 다른 사람의 비방을 듣지 않고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임우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가 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네가 제후 저택에 시집와서 편하게 살려고 갖은 수까지 썼는데 고정수에게 돌아갈 리가 없지 않느냐? 제후 저택이 경양에서 제일가는 가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씨 가문보다는 훨씬 낫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다.”그 말에 양진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임우진을 물어버리고 싶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임우진을 따라 본채로 향했다.두 사람이 막 대문턱을 넘으려던 그때 뒤에서 경혜가 다급하게 달려왔다.“아씨, 아씨 괜찮으세요? 쇤네가 너무 늦었습니다.”양진아는 경혜의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물 뜨러 간 게 아니었느냐? 꼴이 왜 이러냐?”“쇤네 물을 뜨러 갔었는데 순자 할멈을 만났지 뭡니까. 할멈한테 붙잡혀서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려고 했습니다.”경혜가 울먹이며 말했다.“그런데 할멈이 쇤네를 보내주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붙잡아놨습니다. 겨우 빠져나와 마당으로 나와보니 첫째 마님께서 외사촌 아씨와 고 귀공을 데리고 심방원에서 나오시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모두 여느 때보다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양진아는 애초에 호락호락하던 아씨가 아니었다.시집을 가서 진국후 저택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한편 안정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우릴 협박해? 우린 다 한 가족이야. 고모도 우리한테 엄청 잘해주시고.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거야?”양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양씨 일가에 있어야겠네?”“너...”“됐다!”박정숙은 안정미를 째려보고 다시 양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진아 말이 맞아. 하지만 이제 성균이가 잡혔으니 우리 모두 단합해서 어떻게든 구해내야지. 진아 너도 이번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양진아는 시선을 올리고 할머니께 답했다.“저는 단지 새색시일 뿐이니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못 돼요. 추월이가 돌아오거든 상세한 정황을 묻는 게 더 나을 겁니다.”다들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추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안혜선은 자꾸 양진아만 흘겨봤다. 하루빨리 임우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제후 저택을 손에 넣으라고 쉴 새 없이 딸을 설득하려는 어머니였다.양진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심지어 딸에게 손까지 댈 기세였다. 다만 이때 청연, 청하가 바로 가로막았다.안혜선이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양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 이 두 아이 모두 제후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저택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으신다면 얼른 그 입 좀 다물어요.”안혜선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끝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딸아이가 친정에 보탬이 되길 바랄 뿐 제후 저택에서 쫓겨나는 건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왜 양씨 일가의 상황이 특별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약 양씨 일가에서 안혜선이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양 태부와 최영옥 모두 애초에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아이가 어머니를 여의게
박정숙은 슬픈 척하면서 눈가에 음모와 계략이 잔뜩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양진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전에 대체 얼마나 멍청했으면 외할머니가 날 엄청 아껴주신다고 여긴 걸까?’다만 그녀는 전혀 티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서 박정숙을 부축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외숙모는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진아야, 얼른 나 좀 구해줘.”이때 하진경이 불쑥 양진아에게 덮쳐들었다.“네 서방한테 말해서 외삼촌 좀 구해달란 말이다.”“...”양진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그 입 다물지 못할까! 관아가 무슨 진국후 저택에서 여는 줄 알아? 구하고 싶다면 구하게?”박정숙이 냉큼 쏘아붙였다.물론 그녀도 하진경과 똑같은 생각이지만 곧이곧대로 입밖에 내뱉을 순 없었다.“진아야, 방금 한 무리 위병들이 와서 네 삼촌을 잡아갔어. 우진이가 능력이 좋잖아. 어서 우진이더러 네 삼촌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해줄래? 그래야 우리도 대안을 세우지!”양진아는 곧장 대답했다.“예, 할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추월아, 혁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예, 마님!”추월이 나간 후 양진아는 박정숙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남혁수는 서방님을 모시는 가장 든든한 사람이에요. 분명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낼 거니까 숙모도 그만 울어요. 이번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알아봐 줄게요.”양진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박정숙은 문득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양진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안 변했지만 예전처럼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실눈을 뜨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안정미가 왔다고 전해드렸다.안정미는 아직 아버지가 잡혀간 줄 모른 채 침울한 집안 분위기에 흐느끼는 어머니까지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양진아를 질책했다.“언니는 꼭 어머니 생신날까지 이렇게 괴롭혀야겠어? 사람들이 언니를 불효녀라고 삿대질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아니면 진국후
안순자는 허겁지겁 본채로 달려갔다.그 시각 안씨 일가 어르신 박정숙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짙은 보라색 비단의 옷을 입고 같은 색상의 장식용 머리띠를 두른 채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였다.안순자가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자 박정숙이 물었다.“왜 혼자 오는 것이야? 진아는?”“그게... 큰 아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박정숙이 탁자를 내리쳤다.“누가 돌려보낸 거야?”“다름이 아니라 아씨께서 정문이 닫혀있다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온 계집종이 돌아가서 제후 부인께 알리겠다고 했어요. 안씨 일가에서 큰 아씨를 능멸한다고요...”“뭐?”이때 안성균의 부인 하진경이 버럭 화를 냈다.“그냥 돌려보내면 어떡하란 말이냐? 걔가 가면 내 생일은 어쩌라는 거야?”박정숙이 옆에 앉은 안혜선을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너는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니? 이제 하다 하다 내 앞에서까지 으름장을 놓으려고 해?”“정미 혼수를 거둬간 걸 네가 다시 돌려받았다니 뭐라 더 따지지 않았는데 오늘 또 보거라. 외숙모 생신연에 참석하라는 것도 이렇게 연신 거절하고 있잖느냐.”“네 눈엔 이 어미가 있긴 해? 우리 안씨 일가가 있긴 하냔 말이다!”안혜선이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지금 당장 가서 이년을 따끔하게 혼내고 이리로 데려와서 사과하게 하겠습니다!”그제야 박정숙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계집종 두 명을 진아한테 보내거라. 그리고 양씨 일가에서 따라온 그 계집종들은 싹 다 돌려보내.”“오늘 그 계집종들이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예, 어머니.”다만 안혜선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지킴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큰일 났어요! 관아에서 나리를 잡아갔습니다!”“뭐라고?”안혜선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굴 잡아가?”“나리요! 나리께서 금방 잡혀갔습니다.”문 지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위병들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임우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체 이건 무슨 말이야? 누가 진아 앞에서 뭐라고 말한 게야?”요 이틀 관아에 일이 바빠서 거의 매일 심야에 돌아오는 임우진은 양진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서실에서 지냈다.그러나 지난번 호되게 겁을 준 이후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하지 못한다.설마 누가 또 그가 서실에서 쉬는 걸 보고 양진아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꼼수를 부린 걸까?임우진이 오해하자 남혁수는 재빨리 해명했다.“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서...”그는 양진아가 어떻게 안성균을 처리할지에 대해 낱낱이 전해드렸다.“마님의 이 방법은 저로서도 생각해낼 만한데 나중에 안성균이 알게 된다면...”“그야말로 야비한... 아니, 현명한 수단입니다!”임우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남혁수는 얼른 태세를 바꿨다.임우진은 그를 힐긋 째려봤다.“얼른 가서 임 청지기더러 진아한테 무녀를 두 명 붙여두라고 하거라.”남혁수는 실로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나리, 마님께서 언젠가 똑같은 수법을 나리께 쓸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무예를 습득한 노비는 다소 구하기 어려웠다. 제후 저택이라 할지언정 무녀를 구하느라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임태원은 3일도 채 안 돼서 양진아에게 무녀를 보내드렸다.양진아는 마침 안씨 일가로 가려던 참인데 청지기가 보내온 두 명의 무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맙구나.”안 그래도 어멈을 몇 명 데리고 갈까 고민하던 참인데 마침 무녀를 보내왔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양진아의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까지 다들 막무가내인 사람들이고 큰외숙모는 덩치 큰 체구에 인성이 나쁘기로 소문났다.전에 계집종을 데리고 갔을 때 감히 찍소리도 못 냈는데 이번엔 무녀라서 한시름을 놓았다.임태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나리께서 친히 분부하신 일입니다. 마님이 걱정되어 무녀를 보내드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제가 또 가서 물색해볼게요.”‘임우진이었어?’‘요즘 쭉 바쁜 것 같던데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임우진은 다음날 바로 남혁수를 양진아에게 보냈다.양진아는 앞쪽 별채에서 남혁수를 만난 후 바로 그에게 안씨 일가를 조사하라고 분부했다.“우리 외삼촌 안성균은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그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긴 일이 있는지 조사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인증, 좌증 전부 조사해내야 할 것이야.”남혁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양진아가 눈썹을 치켰다.“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닙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그는 놀란 마음을 달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반드시 이른 시일 내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냈다.남혁수는 임우진의 지시를 받은 터라 아주 열심히 나섰다. 양진아가 임우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3일도 채 안 될 사이에 그는 안씨 일가에 관한 모든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양진아에게 보고했다.양진아가 문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남혁수가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마님, 안성균의 만행은 전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대부분 나쁜 성분의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거래했고 본인이 직접 도맡은 처사를 두 번씩이나 사고를 냈습니다. 상관은 그자가 양씨 일가에서 추천한 사람이라고 최대한 체면을 봐준 것 같습니다.”“그자의 동료들도 찾아가 보았는데 다들 그자와 함께 일하길 꺼렸지만 안씨 일가의 체면을 보고 참아온 것 같더라고요.”그는 말하다가 불현듯 양진아가 안씨 일가를 언급할 때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이것들은 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속만 잘한다면 큰 사고는 면할 테지요.”이에 양진아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안성균의 성격에 큰 사고를 빚을 일이 없다는 말이냐?”남혁수는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내뱉지 못했다.“사람 한 명 보내서 안성균의 만행을 적발하고 체포한 뒤 내 소식을 기다리거라. 잘 들어! 이번 일은 제후 저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임우진이 처가에 손을 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
“들라 하라!”임우진은 곧장 한마디 더 보탰다.“앞으론 마님의 부탁이라면 제때 나에게 알려야 한다.”“예, 나리!”하선은 밖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다. 임우진이 양진아 때문에 화나서 일부러 그녀를 밖에 세워둔 줄 알았는데 모사 두 분이 서실에서 걸어 나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서실 안에서 임우진은 하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더냐?”하선은 분명 마님께 남혁수를 빌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나리께서 직접 마님을 찾아가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리.”“무슨 일로?”임우진이 눈썹을 치켰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알겠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하거라.”하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물러났다.한편 임우진은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설마 내가 화난 걸 알고 달래주려는 거야?’‘이번엔 절대 쉽게 용서치 않아!’그는 양진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정성껏 일정을 짜놓았지만 결국 고정수의 소식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한없이 식어갈 따름이었다.임우진은 격하게 갈등하다가 마침내 뒤쪽 별채로 갔다.그 시각 양진아는 하선의 말을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임우진이 설마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 이러는 걸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임우진은 이렇게까지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고정수를 조사해보라고 해도 거절, 남혁수를 빌려서 안씨 일가를 조사해보려고 해도 거절하는 게 과연 무슨 경우란 말인가?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 앞에 있던 계집종이 청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진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상에 앉았다.“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양진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인지 몰라서 마지못해 질문을 건넸다.“서방님, 남 호위를 잠시 제게 빌려줄 수 있나요?”임우진의 안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른 채 안씨 일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혜가 옆에서 살갑게 말했다.“이건 청지기가 보내온 거라 큰 마님은 몰라요.”“모르시길 다행이지.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양진아는 화나서 청첩장을 내팽개쳤다.“제 주제를 알아야지, 어딜 감히 나더러 같잖은 관원 부인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이야? 뻔뻔스러운 것!”청찹장에는 양진아더러 외숙모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청지기가 중도에 가로채길 다행이지 본채까지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시어머니께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이제 슬슬 주제 넘치게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여길 수도 있다.“노여움 푸세요, 마님. 그럼 이 초대에는 응하시겠습니까?”“가야지! 아주 푸짐한 선물도 해드릴 거야!”양진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녀가 안씨 일가를 한방에 기선제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아마 안혜선을 쥐락펴락하듯 그녀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로 여길지 모른다.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방에 급소를 찔러야 한다. 안씨 일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자가 바로 3대 독자 안현조이지만 실세는 양진아의 큰외삼촌 안성균이다.안성균은 현재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어서 벌어들인 은냥으론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처지였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그래서 안씨 일가는 양씨 일가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다.하지만 욕망이란 골짜기는 메우기가 어려운 법이고 안성균 그 인간은 술과 여자, 도박 어느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게 없다. 양진아가 전생에 들었다시피 안성균이 벌어들인 돈은 죄다 더러운 돈이라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하선을 불러왔다.“서방님이 돌아왔는지 가보거라. 만약 돌아왔으면 내가 혁수를 잠시 빌리고 싶다고 전하거라.”하선이 분부대로 나가서 알아보았더니 제후 나리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나리께서 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향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서방님을 난처하게 했군요.”양진아가 먼저 사과했다.그녀가 조바심 때문에, 전생의 일들이 떠올라서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이번 생은 임우진과 혼인했으니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양씨 일가와 안씨 일가를 완전히 떼어놓을 거야!’안정미와 고정수가 아무리 그녀를 해치고 그녀의 집안까지 해치려 해도 전생처럼 쉽게 해낼 수는 없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택까지 돌아갔다. 저택에 도착한 후 임우진은 곧게 서원으로 향했다.양진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남자가 삐졌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뭘 잘못했지? 고정수 한번 조사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나도 다 저택과 친정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대체 내가 무슨 사심을 부렸다고 이러는 거야?’양진아는 어리둥절한 채 하선에게 질문을 건넸다.“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야?”하선과 추월은 양진아의 시중을 드는 요 며칠 동안 애초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서부터 이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마님은 제후 나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서방님보다 시어머니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마님은 제후 나리와 서로 공경하는 부부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제후 나리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가?수많은 부잣집 따님들의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님과의 혼약을 지키고 단 한 번도 파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 제후 나리의 마음도 몰라주고 마님께서 무심한 태도로 임하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게 고 귀공을 언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계집종인 그녀가 말할 자격이 없다.하선은 고개를 푹 떨구고 공손하게 말했다.“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본채로 가시겠습니까, 마님?”양진아는 머리를 끄덕이고 이 일을 뒤로 한 채 본채로 향했다.그 시각 안정미는 백미가 문 앞에서 계집종과 함께 겨우 마차를 한 대 불러왔다.그녀는 고씨 저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양씨 일가로 향했다.서쪽
“왜 그렇게 웃는 것이야?”양진아는 고개를 내젓고 임우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한편 두 여자를 따라 나온 안정미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정나현은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양진아도 딱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정미는 결국 백미가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안달이 났던지 그녀가 대뜸 양진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언니, 잠깐만! 나 좀 실어줘!”다만 양진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안정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언니...”“안 낭자가 기억력이 안 좋다면 내가 대신 안씨 저택에서 했던 말을 되새겨줄 수도 있소.”임우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여자를 안 때린다고 한 적이 없거늘.”순간 안정미는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진국후 저택의 마차가 멀어져가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마차 안에서 임우진은 기분이 언짢은 양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혹 저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냐?”이에 양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저는 단지 나현 군주가 왜 정미랑 가깝게 지내는지가 의문입니다.”정빈 대군은 황제와 이복형제 사이이고 둘은 어려서부터 태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온지라 유독 돈독한 정을 쌓고 있다.정빈 대군은 황제의 왕위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당연히 황제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하지만 안씨 일가와 정빈 대군 저택의 문벌은 천지 차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진아가 몹시 의아한 것이다.전생에도 안정미와 나현 군주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을까?아쉽게도 전생에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 갇혀서 외부 소식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하여 환생했지만 딱히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여태껏 몰랐느냐? 고정수는 정빈 대군의 길을 걷고 있어. 지금 호부 금부사에서 사관 직을 맡고 있지.”임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정수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고 정빈 대군 또한 예의 바르고 고결한 성품을 지녀서 고정수를 중히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나현 군주가 안정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