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는 그를 따라 화인 그룹으로 들어갔다. 밤은 깊어졌고 화인 그룹에는 별로 사람이 없어서 서준혁과 신유리의 발자국 소리는 서로 뒤섞여 가벼운 메아리를 울렸다.엘리베이터 앞 신유리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먼저 회사 일부터 해결해. 나까지 올라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서준혁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급히 회사로 돌아간 것을 보면 통화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했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어둑어둑한 주위의 광경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먼저 나가려고 했다.“아까도 말했지만 서류는 네가 가져온 거야.”바깥 가로등 없이 어두운 불빛 아래 서준혁은 마치 조금 전까지 그에게 남아 있던 온기는 한꺼번에 사라진 것 같았다.마치 밖에서 느꼈던 다정함은 신유리의 착각처럼 온데간데없었다.서준혁의 뜻은 분명했고 신유리는 그를 따라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서류는 그녀의 손을 거쳤으니 말이다.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준혁을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1층의 적막함과는 달리 사무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이석민과 쥴리, 그리고 신유리와 안면 있는 인턴도 있었다. 그 외에 회사의 고위층도 몇 명 있었다.그들은 서준혁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신유리를 보자 얼굴빛이 묘하게 변했다.신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서준혁이 무엇을 하려는지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의외로 서준혁은 한마디만 내뱉었다. “석민 씨, 최근 일주일 동안 사무실 부근의 모든 감시카메라를 조정하고 겸사겸사 이번 주 안에 누가 내 사무실에 들어왔는지 집계해 보세요.” 그는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사무실을 비웠을 때 누가 왔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봐 주세요.” 어쨌든 서준혁의 사무실에 그가 없을 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신유리는 눈썹을 잠시 치켜올리더니 구석에 앉아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쥴리가 서류 때문에 이리저리 오갈 때 시선이 몇 번이고 그녀에게 꽂혔다.신유리는
서준혁의 얼굴에는 줄곧 아무런 표정이 없엇지만 송지음은 지금의 서준혁이 평소보다 더 무섭다고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고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송지음은 준비했던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는 심지어 뒤로 물러서며 당장이라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서준혁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화인 그룹의 서류를 네가 경희영에게 넘겨줬어?”송지음은 어리둥절했다. 서준혁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원래 서준혁이 왜 경희영과 함께 있었는지 왜 다른 남자랑 함께 잤는지를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준혁은 오직 화인 그룹의 서류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송지음은 준비한 변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되려 서준혁에게 물었다. “오빤 나한테 더 궁금한 게 없어?”서준혁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며 눈동자에는 차가움을 제외하고 약간의 불쾌함이 어려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구부려 테이블을 두드리며 냉랭하게 물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듣겠어? 화인 그룹의 자료를 네가 경희영에게 줬어?”송지음의 얼굴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천천히 서준혁의 앞으로 다가가서 애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 나 다른 남자랑 잤는데 아직도 서류에 신경 쓰고 있어?”“오빠는 도대체 나한테 관심을 갖고 있기나 해?!”송지음의 마지막 질문은 서준혁의 눈에 짜증이 더 철저해지게 했다. 그는 더 이상 숨기기도 귀찮은 듯 이석민에게 분부했다. “누군가 사업기밀을 빼돌렸다고 경찰에 신고하세요.”송지음은 갑자기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준혁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오빠!”그녀는 외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지극히 슬퍼하는 모습이었다. “오빠의 마음속에는 오직 일뿐이야? 그래서 날 신경 쓰지도 않는 거야? 오빠,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송지음은 마치 서준혁이 얼마나 박정
송지음은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오빠가 오늘 저녁에 야근해야 돼서 매우 바빠요.”“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아이고 지음아, 설마 네 남자 친구한테 우리 같은 가난한 친척을 소개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겠지? 이러면 안 되지...”셋째 이모의 말투는 다소 불만스러워서 송지음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몇 마디 대충 대꾸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어머니는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얼굴의 불쾌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너 준혁이랑 싸웠니?”송지음은 흠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게...”어머니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준혁이랑 싸우지 말랬잖아? 무슨 이유든지 얼른 사과해.”“그리고 요 며칠 그를 데리고 오거라. 식사 자리라도 만들게. 네 셋째 이모의 아들을 화인 그룹의 비서로 들여보내는 데 절대 문제없다고 보증했으니까.”어머니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고 송지음은 점점 더 짜증이 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몇 번이나 끊으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노려보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어머니가 나가자 송지음의 굳어진 얼굴이 금세 무너졌다. 그녀가 어떻게 서준혁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 서준혁의 얼굴조차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준혁은 그녀를 화인 그룹에서 쫓아내려고 마음을 굳혔다. 송지음은 마음이 너무 초조한 나머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침대 위에 던져진 핸드폰에 메시지 여러 개가 와있었다. 그녀는 연속 뜨는 전화번호를 보더니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송지음이 화인 그룹의 비밀문서를 용화 그룹에 넘긴 사건은 빠르게 퍼졌고 한동안 떠들썩했다. 신유리 쪽에서도 예전 관계자들로부터 보낸 문자를 적지 않게 받았지만 그녀는 일체 몰랐다는 이유로 막아버렸다. 하지만 이 일은 결국 신유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졌다. 임아중은 소개팅 상대가 준 몇 개의 케이크를 손에 들고 왔다. 임
어르신께서 너무 직설적이라 신유리는 다소 의외였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와 서준혁은 이미 과거에요.”어르신은 한숨을 쉬더니 눈에는 서운함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다만 밥을 먹을 때도 기분이 좋지 않아 몇 입 드시지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신유리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고 그녀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환절기에는 날씨가 불안정해서 밥을 다 먹기도 전에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유리는 한창 택시를 타고 먼저 할아버지를 모셔다드린 후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류 사부님더러 연락하라고 했다. 류 사부님이 돌아왔을 때 그는 신유리를 보더니 어르신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도련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어르신께서 밖에 계시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비가 오니 어르신을 모시러 오겠다고 합니다.”어르신은 짧게 대답했다.“오라고 해. 어차피 조만간 나한테 볼 일이 있을 테니”그는 말을 마치더니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침 밖에 비가 오니 유리도 데려다주라고 하렴.”신유리는 듣자마자 거절했다.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할아버지는 애원의 눈빛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리야, 조금만 더 나랑 함께 있어 줄 수 없겠니? 만약 준혁이때문이라면 나랑 뒷줄에 앉자. 팔순 노인이 아직도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니, 난 네가 제일 편하다.”어르신의 많은 말들이 신유리는 듣기에 불편했다. 마치 어르신이 불쌍한 척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르신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면 그녀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서준혁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는 요즘 화인 그룹의 난장판을 처리하느라 바빴는지 피곤함이 역력했다. 살도 좀 빠진 것 같았고 워낙 훤칠한 이목구비는 더욱 뚜렷해졌다. 평소의 냉랭함보다는 날카로움이 더해졌다. 그의 눈빛은 신유리의 몸에 잠시 머물렀고 새까만 눈동자는 조금의
서창범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는 위엄이 어려 있었고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준혁의 덤덤하던 얼굴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새까만 눈동자는 서창범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만 그가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서 더욱 심각한 호통이 들려왔다. “너도 내가 한 말을 들은 적도 없으면서 지금 준혁이보고 말을 들으라고 하다니,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어르신은 류 사부님의 부추김을 받으며 천천히 들어섰다. 그는 비록 팔순이 다 되어가지만 몸의 기세는 오히려 그 당시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그는 서창범을 노려보며 말했다. “준혁이가 너한테 한 약속말고 네가 당시에 나한테 했던 약속부터 떠올려보거라, 그런 말 하기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서창범은 서준혁이 어르신을 모시고 올 줄은 몰랐다. 굳었던 표정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더니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내가 오지 않았다면 너한테 아직 나 같은 애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겠느냐?”어르신은 콧방귀를 뀌며 태도가 좋지 않았다. “우리 서씨 가문은 아직 준혁이를 혼인시켜야 할 정도로 망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서창범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 아직 주현을 만나본 적도 없어서 그래요. 저랑 정숙이도 그녀가 결혼하기에 적합한 아가씨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그 애를 봤더라면 분명 좋아했을 것입니다."어르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너랑 정숙이 생각에 결혼할 가치가 있다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혼은 너랑 하면 되겠네.”어르신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그만 가자.”서창범의 얼굴색도 말이 아니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 서재로 오거라. 할 말이 있다.”어르신께서 또 입을 열려고 하자 그는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사 일이다.”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서재로 향했다. 어르신은 서준혁을 보며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서준혁이 서재에 들어가자 서
송지음의 눈에 비친 억울함이 모두 애원으로 변해버린 지금, 그녀가 가장 듣기 싫은 것은 바로 신유리의 이름이었다. 만약 신유리만 아니었다면 서준혁은 그녀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지음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그날 저녁 자신과 경희영의 일이 발각되어 급히 회사에 도착했을 때 신유리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에 병원에서도 신유리는 그녀와 경희영의 일에 대해 언급했었다. 송지음은 갑자기 무언가를 잡은 듯 눈빛이 싸늘해졌다. 틀림없이 신유리가 서준혁한테 고자질한 것이다!송지음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추측을 거의 긍정했다. 신유리가 그녀와 서준혁 사이의 관계를 질투한 것 외에는 굳이 서준혁한테 고자질할 이유를 더 찾을 수 없었다. 아니면 신유리가 서준혁의 사무실에 나타났을 이유가 없다.“틀림없이 그녀였다. 신유리 그 천한 년!’송지음의 가슴에서 갑자기 강렬한 원한과 증오가 터져 나와 그녀는 괴롭게 했다. 신유리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분명히 서준혁은 그녀의 남자였는데 오히려 신유리가 중간에서 방해하려고 들었다.송지음은 그대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고 몸만 가늘게 떨었다. 갑작스러운 핸드폰 벨 소리에 그녀의 생각이 끊겼다. 송지음은 발신자 표시에 엄마라는 두 글자를 보더니 무뚝뚝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 어머니의 잔소리가 흘러나왔다. “준혁이랑 어떻게 됐어? 잘 사과했어? 준혁이 같은 재벌 사위를 놓치면 너 나중에 후회할 거다.”“네 셋째 이모가 주말에 이모부랑 동생 데리고 함께 오려고 하니까 준혁이 꼭 데리고 와. 알겠지?”송지음은 한숨을 깊데 들이쉬었다. “저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더니 핏기가 별로 없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신유리, 나한테 빚진 건 배로 갚아야 할 거야!’…“레드 스튜디오에서 오늘 밤 만나기로 했어요?”별장 안,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들이 약속했던 시간은 수요일이었는데 왜 갑자
송지음은 신유리의 한쪽 팔을 부축해주며 귀에 대고 아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유리언니,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 예요?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올라가서 좀 쉬세요.”신유리는 송지음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풀려 어쩌지도 못했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내쉬며 들끓는 화를 조절했다.“송지음, 지금이 후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송지음은 말을 하는 신유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악독함을 더는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아직까진 저 협박할 힘도 있나본데... 그럴 바엔 조금 잇다 어떻게 하실 건지나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여정원은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이미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저번에 성서에서 마주친 이후로 여정원을 본 적이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이유로 인해 만흥 그룹사장님으로부터 좌천당했다고 한다.여정원은 멀리서 머쓱하다는 듯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다.“유리씨, 오랜만입니다.”신유리는 송지음에게 부축을 당하며 몸을 겨우 일으켰고 미간을 찌푸린 채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있었다.몸에 이미 퍼진 약의 효능이 너무도 불편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송지음과 여정원 사이에 고정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술잔에 무슨 짓을 한 거죠?”송지음은 일부로 깜짝 놀란 척 연기하며 대답했다.“어머, 사람 함부로 의심 하지 마요. 유리씨 저희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으면서 막 말해도 되는 거예요?”신유리는 송지음의 가식적인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마저 들었다.“경희영씨보고 내 술잔에 약을 타라고 했겠죠?”그녀는 자신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술을 부으러 온 경희영의 모습이 생각나 확신에 차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송지음은 피식 비웃더니 신유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제가 그런 게 맞다면 또 어쩔 건데요? 설마 오늘 밤도 도망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송지음은 말을 마치고 여정원을 쓱 쳐다보고는 그에게 물었다.“준비해야 할 물
신유리는 그의 품에 안겨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이미 말라 터진 입술을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였지만 낼 수 있는 소리는 작디작은 신음소리 뿐이었다.서준혁은 품에 안긴 여자의 체온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고 순간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뒤에 따라 오는 이석민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급히 안내하고 잇던 두 명의 사업파트너에게 사과를 건네고는 둘을 데리고 전에 예약했던 방으로 다시 안내했다.신유리가 그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얼굴은 심할 정도로 빨개져있었으며 몸은 뜨겁다 못해 불구덩이 같았다.오는 길 내내 서준혁에게 안겨 그에게서 나는 익숙하고도 은은한 향수냄새를 맡자 신유리는 금세 진정이 조금 되는 듯 한 눈치였다.그래서 그녀는 오는 길에 계속 서준혁의 가슴팍에 머리를 틀어박고 약간 변태처럼 그의 냄새를 맡아대고 있었다.서준혁은 바로 그런 그녀를 침대위로 던져버렸고 신유리는 반응이 더뎌져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냄새를 맡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그의 옷은 신유리가 비벼대는 바람에 얼룩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서준혁은 이미 눈이 반쯤 풀려 자신의 손끝을 잡고 있는 신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신유리의 눈은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 약 효과 때문인지 눈 끝이 빨개져 반짝반짝 빛이 나던 동공도 더욱 청초해보였다.그녀는 무릎을 반쯤 꿇고 침대에 앉아있었고 서준혁의 손가락을 잡고는 말라 터진 입술이 아파오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쓱 핥았다.신유리는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도달했지만 서준혁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아 그 냄새만을 쫓아다니려고 애를 썼다.뜨거운 그녀의 손이 서준혁의 손가락을 잡아 끌어 자신의 쪽으로 힘없이 끌어당겼고 그가 아무 움직임도 없자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너 일로와!”서준혁은 어떤 표정도 없이 있다가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신유리의 말대로 그녀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그 순간, 신유리가 서준혁의 몸을 덮치더니 그의 허리를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