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지영도 연예인들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팬심일 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백연신 뿐일 것이다.임유진은 두 사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한지영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이해해주며 사랑까지 듬뿍 주는 백연신이 한지영의 곁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한지영이 남자 배우와 얘기를 다 마친 뒤, 임유진은 그제야 발걸음을 옮겨 옆으로 다가갔다.“지영아, 나 먼저 갈게.”“벌써 가려고? 좀 더 있지. 너도 이번 기회에 배우들이랑 얘기해 보면 좋잖아.”“괜찮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연예인에 크게 관심도 없고... 이제는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뿐이야.”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참, 그 둘은 만났어?”“응, 방금 만나서 왔어. 공수진이 또 양아치들을 보낼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겠지만.”임유진은 한지영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그보다 너 말이야. 남자 배우들이랑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네 남자친구 삐지지 않게 신경 좀 써.”“걱정하지 마. 우리 연신 씨는 마음이 넓어서 이런 일로는 안 삐져.”한지영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마음이 넓다고?임유진은 그 말에 ‘마음이 넓은’ 백연신이 불쌍해지기지 시작했다.“그래. 난 이만 가볼게.”임유진은 한지영에게 인사하고 난 뒤 백연신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나서 자리를 벗어났다.파티장 출구 쪽으로 향하기 전, 강현수에게 인사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배여진과 함께 돌아다니느라 한창 바쁠 것 같아 감사 인사는 내일 다시 전하기로 했다.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누군가가 팔을 잡아 왔다.고개를 뒤로 돌리니 거기에는 강현수가 서 있었다.“벌써 가려고요?”“네, 볼 일을 다 마쳐서요. 오늘은 덕분에 고마웠어요.”임유진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는 세탁소에 맡겨서 깨끗하게 씻은 뒤 회사로 보내줄게요.”“그럴 필요 없어요. 드레스는 내가 유진
그 말에 임유진은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나는...”하지만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강현수의 손이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입술 위로 전해지는 그의 시원한 체온에 임유진은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강현수는 간절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오늘은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이 드레스를 입은 채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그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 보여 임유진은 결국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켜버리고야 말았다.“집에 데려다줄게요. 여기서 택시 기다리는 것보다 빠를 거예요.”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현수와 함께 파티장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출구 가까이에 다가가 보니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가득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그중에는 무전기를 든 사람도 있었고 상황을 보아하니 큰일이 터진 것 같았다.이상함을 감지한 강현수가 그들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죠?”“그게... 누군가의 경호원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밖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다 돌려보내고 이제는 주차장 입구까지 전부 다 막아버렸습니다.”경호실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난감한 얼굴로 보고했다.그 말에 강현수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오늘 이 자선 파티의 메인 주최자는 강현수이지만 그가 대표로 있는 KS 그룹 말고도 이름만 대면 알 정도의 대기업 인사들도 함께 힘을 보탠 파티이다.그러니 여기서 일을 벌인다는 건 그 많은 회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려는 것과도 같다.S 시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지금 당장 확인해보세요.”강현수의 말에 경호실장은 서둘러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흐른 뒤 그는 다시 강현수 앞으로 다가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이곳을 봉쇄한 사람은... GH 그룹의 강지혁 대표라고 합니다.”역시 S 시에서 이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수 있는 사람은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그 말을
뭐라고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심지어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멀리, 아주 멀리,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그때 잔뜩 움켜쥔 주먹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잡아 왔다.“무서워요?”임유진은 강현수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떨고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강현수는 그녀에게 안심이라도 주려는 듯 손을 꽉 잡았다.“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내가 계속 옆에 있어 줄게요.”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그렇게 서서히 손 떨림도 멎어갔다.강지혁은 두 눈을 줄곧 그녀에게 고정한 채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마치 이곳에 온 목적이 그녀인 것처럼 말이다.설마 아니겠지...임유진은 자기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지난번 별채에서 그와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똑똑히 전했으니까.게다가 그가 정말 그녀를 찾아온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큰 움직임을 보일 필요는 없다.강지혁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이윽고 임유진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입꼬리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네가 이런 파티를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런데 왜 벌써 가려고 그래? 더 있다 가지 않고.”강지혁은 그녀와 두 눈을 마주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평범하게 말을 걸어왔다.하지만 임유진은 오히려 털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가까워진 거리로 인해 그녀는 강지혁의 두 눈에 어린 분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강지혁,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그때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사람들까지 끌고 와서 대체 뭐 하자는 건데?”“뭐하긴. 내가 찾는 사람을 네가 데려가 버리지 않게 막으려는 거지.”강지혁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설마 그가 말한 찾는 사람이라는 게 자신인 걸까?그녀의 질문에 답해주듯 강지혁은 다시
경호원들 중 누구 한 명 이 상황에 개입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앞에 있는 두 남자 모두 S 시의 꼭대기에 있는 남자들이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낀다는 것은 목숨이 여럿 있어도 부족할 게 분명했으니까.“그래, 그런데 그게 뭐?”강지혁은 차갑게 대꾸했다.임유진은 그런 그를 힘껏 노려본 뒤 서둘러 강현수의 손을 감싸 쥐고 말했다.“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파티장 안에 의사 있죠?”돌발 상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기에 이런 파티가 열릴 때면 의료진들은 항상 파티장 안에 대기하고 있다.“괜찮아요. 조금 부러진 것뿐이에요.”강현수는 그녀의 걱정에 괜찮다는 말부터 했다.생각해보면 어릴 때 산속에서 다리를 다친 뒤로 이런 식의 골절은 오랜만이었다.그래서였을까, 지금은 이런 생각할 상황이 아닌데도 당시 감옥 안에서 임유진이 손가락 골절로 얼마나 아팠을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남자와 여자는 태생부터 피지컬 적인 차이가 있기에 남자인 자신도 이렇게 아프니 여자인 임유진은 최소 이것보다 10배는 더 아팠을 것이 분명했다.임유진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현수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이었으니까.“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대체. 지금 당장 치료 안 하면 나중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은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이에 임유진의 몸은 잠깐 굳어버렸다가 곧바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혁, 이거 안 놔?”강지혁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뒤돌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수가 임유진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강지혁의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막아섰다.파티장 경호원들이 많다고는 하나 작정하고 이곳으로 온 강지혁이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파티장 경호원들은 강지혁이 데려온 사람들 손에 묶여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강현수는 다친 손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산속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어릴 때부터 줄곧 각종 운동을 해왔었고 그 목적은 다시
까만 눈동자가 멀어져가는 차량의 뒷모습을 찢어 죽일 듯이 보고 있다.강현수의 얼굴은 초조함과 분노가 뒤섞여 엉망이 되었다.강지혁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려는 건가?한편, 차량 뒷좌석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임유진은 몸을 절반 정도 일으키며 물었다.“강지혁,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왜.”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는 차갑게 웃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마치 뜨거운 불과 차가운 얼음이 그대로 공존하는 것 같은 눈동자에 임유진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몸을 움찔 떨었다.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몸을 기대오더니 두 팔을 시트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감싸다시피 했다.그와 동시에 앞 좌석과 뒷좌석을 연결하는 부분에 가림막이 내려오더니 공간을 철저히 분리해버렸다.지금 두 사람이 있는 뒷좌석은 온전히 독립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이에 임유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강지혁은 얼굴을 점점 더 그녀 가까이 가져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현수가 그렇게도 좋아? 그래서 걔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었던 거야?”그의 얼굴에는 질투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렇다. 강지혁은 지금 질투하고 있다. 그것도 미칠 듯이!아까 임유진에게 붙여준 경호원들에게서 그녀의 사진을 전해 받았을 때 그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서 강현수와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의 그녀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결국 강현수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이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는 순간 질투라는 감정이 온몸을 집어 삼켜버렸다.강지혁은 강현수가 보라색 드레스와 원피스를 수집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대외적으로는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친한 지인들끼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언제 한번 이한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은 적이 있다.“현수야, 너 그 옷들은
얼마나 지났을까,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키스가 드디어 끝이 나고 임유진은 온 힘을 다 뺏긴 듯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청순하게 올렸던 머리는 그의 손에 의해 어깨 위로 떨어졌고 두 볼은 핑크색으로 예쁘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은 지금 강지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줄곧 잔잔한 호수 같던 그 두 눈에 드디어 파도가 일었다. 그 모습이 꼭 드디어 그녀의 세계에 다시 강지혁이라는 존재가 들어온 듯했다.강지혁은 분노를 가득 담은 그녀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그는 손을 들어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그리고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가더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현수 사랑할 생각하지 마.”임유진이 강현수를 사랑하는 걸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그녀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오직 강지혁뿐이어야만 하니까.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내가 누굴 사랑하든 그건 내 자유... 읍...”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또다시 강지혁의 입술에 의해 막혀버리고 말았다....파티장 안에 있던 사람들도 슬슬 소동을 눈치채기 시작했다.한지영은 강지혁이 밖을 봉쇄하고 강현수와 마찰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강지혁은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파티장에 들어오면 될 일을 굳이 봉쇄까지 한 이유가 뭘까? 설마...그녀는 순간 아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임유진이 떠올랐다.설마 나가려다가 마침 강지혁과 딱 마주친 건가?그리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못 가게 하려고 파티장을 봉쇄한 것이고?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스치자 한지영은 서둘러 머리를 흔들며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휴대폰을 집어 들어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걸어봐도 임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진 한지영은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유진이한테 뭔 일 난 건가?!’옆에 있던 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배여진은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계속 지으며 말을 걸었다.“현수 씨, 많이 아픈 거 아니에요?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병원으로 가요. 나 너무 걱정된단 말이에요.”“너는 유진 씨 걱정은 한 적 있어?”강현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배여진은 고개를 갸웃했다.“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유진 씨 손이 지금의 내 손보다 더 심하게 다쳤을 때 넌 한 번도 걱정한 적 있냐고. 두 사람 사이좋다며? 그럼 유진 씨가 감방에 있었을 때 면회 가본 적 있어?”강현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그는 임유진의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기에 이미 누가 면회를 갔었는지 다 알고 있다. 당시 면회를 간 사람은 오직 한지영뿐이었고 임유진의 외할머니는 몸이 불편한 탓에 직접 걸음은 하지 못하고 몇 번 전화통화만 했다.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감옥에 있는 임유진을 걱정해주지 않았다.가족들과 친척들에게서 철저하게 외면받은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강현수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배여진은 그의 추궁에 시선을 내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한지영은 백연신의 도움으로 드디어 강현수의 앞에까지 다가왔다.“유진이는요? 유진이 지금 어디 있는지 혹시 알아요?!”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답했다.“강지혁이 데리고 갔습니다.”그 말에 한지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예상한 대로 강지혁이 데려간 게 맞았다.“그럼 그 강지혁은 어디로 갔는데요? 대체 유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냐고요.”한지영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그가 알 리가 없는 데도 계속해서 질문해댔다.강현수는 고개를 저었다.“하... 유진이 어떡해...”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옆에 있던 백연신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강지혁이 유진 씨한테 험한 짓을 할 리는 없을 거야.”강지혁은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고 있으니까.“그러면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길 강지혁이 강현수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그
“현수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유진이를 데려간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 씨잖아요. 그 두 사람 원래 사귀는 사이기도 했었고 지금은 헤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서로...”배여진의 목소리는 서서히 멎어갔다. 강현수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치 자신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듯했다.강현수의 머릿속에는 온통 임유진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배여진은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대체 임유진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다들 이러는 걸까!강지혁은 물론이고 강현수까지!임유진이 뭐라고!이대로 임유진이 행복한 꼴은 절대 볼 수 없다....차량이 멈춰서고 임유진은 강지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제야 이곳이 처음 오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울창한 숲 사이에 지어진 해당 저택은 한옥 느낌이 물씬 풍겼고 지어진 지 꽤 오래돼 마치 과거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여기는 어디야?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임유진은 낯선 곳을 보고 많이 긴장한 듯 몸이 얼어붙었다.“왜냐니. 당연히 널 이곳에 가둬두려고 데려왔지.”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저택 안은 리모델링의 흔적이 보였지만 우디한 향은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창문 밖으로는 작은 연못과 물레방아도 보였다.평소라면 이렇게 좋은 풍경을 조금 더 감상하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틈 따위 없었다. 그의 보폭에 맞춰 억지로 끌려간 탓에 그 아름다운 풍경마저 지금은 무섭게만 느껴졌다.가둬버린다니!강지혁은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걸까.“이거 놔!”임유진은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힘껏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의 손은 강철로 된 족쇄라도 되는 듯 꿈쩍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점점 더 세게 손목을 옥죄어왔다.강지혁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전에는 내가 너무 물렀던 것 같아. 진작에 이랬어야 하는 건데. 앞으로는 내 식대로 할 거야. 네가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정다연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집안이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재벌가의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강지혁을 노리고 있었고 지금은 정다연이 나서서 임유진의 기를 꺾으려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정다연은 임유진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점점 더 기세등등해졌다.“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짜 죽음으로 강 회장님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도 얘기해주시겠어요? 듣기로 다른 남자 때문이라던데 어디 한번 제대로 해명해 보시는 게 어때요? 그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데 이런 일로 가문에 먹칠하시면 안 되잖아요.”정다연의 의도는 뻔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난 게 사실은 다른 남자 때문이었다는 근거 불분명한 얘기로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정다연의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에 너도나도 수군거리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지난 5년간 임유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얼토당토않은 말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정다연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었다.“정다연 씨, 혹시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정다연은 임유진의 입에서 정확히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대꾸했다.“그건 말할 수 없죠.”“그래요? 그러면 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한 사람이 사실은 정다연 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될까요?”임유진의 말에 정다연이 발끈했다.“그게 무슨!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임유진은 평온하고 또 침착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정다연 씨,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들 그걸 직접 내 앞에서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엄연한 명예훼손이에요. 좋은 의도로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제 말이 틀렸나요?”정다연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움찔했다. 남편 덕에 신분 상승한 여자라 몇 번
백연신이었다.백연신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일전 드레스 샵에서 임유진이 제일 먼저 골랐던 그 실버 드레스였다.백연신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임유진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강 회장님 아내분과 아는 사이이지 않았어요? 5년만일 텐데 가서 인사해요, 우리.”그녀는 백연신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그를 이끈 채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죠? 고은채예요.”고은채는 예쁘게 웃으며 먼저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임유진은 조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고은채만 아니었으면 백연신과 한지영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고은채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백연신의 옆자리를 노렸을 것이다. 백연신은 사랑보다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을 원했던 남자였으니까.“사모님과는 연이 좀 깊은 것 같아요. 우리 연신 씨 전 여자친구가 바로 사모님 친구분이셨죠?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모님께서 좋은 남자 소개 해주는 건 어떠세요? 아니면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고은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리낌 없이 한지영의 얘기를 꺼냈다.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불빛 바로 아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아니요. 지영이 친구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지영이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힘이 돼줄 거고 도움을 청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울 예정이에요. 물론 지영이가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그럴 거고요.”임유진은 웃음을 거두어들이며 조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만약 그녀로 인해 한지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은채는 이에 가볍게 웃었다.“한지영 씨는 든든한 친구를 둬서 좋겠어요. 부러워요. 참,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그때는 연신 씨랑 결혼식에 관해 논의
임유진은 청초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하고 긴 머리를 단아하게 위로 올렸다. 물론 머리를 푼 모습도 예뻤지만 올린 것이 훨씬 더 우아해 보였다.그녀는 연예인 뺨치는 미모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강지혁의 옆에 서도 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고 또 분위기 있는 모습 때문에 차가워 보이는 강지혁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이게 바로 하늘이 내린 한 쌍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람 중에는 젊은 남성들도 있었다. 그들은 평소 연예인도 만나보고 몸매가 예쁜 모델들도 만나봤을 텐데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임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그런 남자들의 모습에 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오늘의 임유진은 유독 더 예쁘고 단아했다. 단지 옷이 바뀌고 예쁘게 치장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게다가 그녀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고는 했다.강지혁은 마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임유진을 더 바싹 자기 곁에 붙인 후 나지막이 속삭였다.“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아마 5년 전에 한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도 있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게 목적이라는 걸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기 아내라며 그들에게 임유진을 소개해주었다.임유진과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5년 전에 한 번 정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사람도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소개해준 대로 인사를 나누다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 갑자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나 저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왜, 힘들어?”“그건 아니고 힐
하지만 잠깐 눈을 판 사이 한지영을 다치게 했고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을 잃어버렸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나와 결혼하고 싶은거라면 그렇게 해줄게. 이곳에서의 일이 다 끝이 나면 혼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정말이에요?”고은채는 예상 밖의 답변에 활짝 웃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백연신은 담담하게 답하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지영이 건드리지 마. 지영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각오해도 좋을 거야.”고은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토록 시린 눈빛은 처음이었다.아무리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남자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백연신, 네가 지금은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지만 머지않아 곧 내 발밑에 납작 엎드리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한지영은 생각도 안 날걸? 두고봐.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니까.’고은채는 만약 백연신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한지영 같은 건 애초에 기회도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한지영은 얼굴로 보나 몸매로 보나 아니면 집안으로 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못난 여자였으니까.“알겠어요. 건드리지 않을게요. 그러니 연신 씨도 꼭 약속을 지켜요.”고은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진은 한정판 블랙 드레스를 입고 그에 어울리는 하이힐을 신었다. 예쁜 드레스에 반짝이는 루비 목걸이까지 하고 나니 한층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는 건 5년 만이라 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남들에게 흠을 잡히는 일은 조금도 없어야 했으니까.사실 그녀가 원래 준비했던 목걸이는 루비 목걸이가 아닌 진주 목걸이였다. 그런데 드레스를 다 입은 후 목걸이를 하려는데 갑자기 강지혁이 다가와 그녀에게 루비 목걸이를 해주었다.“오늘 드레스에는 이게 더 어울려.”강지혁이 말했다.“뭐야?
강지혁의 마음은 어느샌가 그녀의 부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라 그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과거의 자신은 대체 이 여자를 얼마나 많이 사랑했었는지 문득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별장으로 돌아온 백연신은 마치 집주인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고은채를 보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차가운 남자의 말에도 고은채는 상관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왔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나 당신 여자친구잖아. 안 그래요? 그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설마 전 여자친구 보러 간 건 아니죠?”백연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고은채의 말대로 그는 한지영을 보러 갔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것까지 보았다.그 광경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가 가득 찼고 한지영 옆에 있는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한지영은 그의 여자였으니까.“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이 그 여자와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아주 조금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 여자도 이제 34살이나 됐죠? 그러면 머지않아 곧 선도 보고 결혼도 하겠네요. 여자들은 아닌 척해도 나이를 꽤 많이 신경 쓰고 있거든요.”고은채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유혹적인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입 다물어.”백연신은 고은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경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그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였어요?”고은채는 그에게 뿌리쳐진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어들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해주는데 만약 그때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한지영은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전에 벌써 싸늘하게 죽어버렸을 거예요. 그때 연신 씨가 한지영 살리겠다고 나한
임유진은 마치 점심 메뉴 정하듯 태연한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는 내 거라는 것만 확실하게 그 여자한테 각인시켜주면 돼. 만약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헛된 희망을 품고 헛된 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상대할게. 너는 나설 필요 없어.”남편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내가 네 거야?”가까스로 가라앉은 임유진의 볼이 한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임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응, 넌 내 거야. 내 남편이고 나만 가질 수 있어.”강지혁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걸 쉽게 허락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일까, 이 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만족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내가 네 거라고 확신하나 봐?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려고?”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다른 여자한테 아주 잠시 끌린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네 마음을 다시 나한테로 돌려놓으려고 할 거야.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 없이는 안 될 지경에 이른 거라면... 그때는 조용히 네 곁을 떠날 거야. 그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으니까.”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그녀가 알고 있는 혁이가 아닐 테니 서로를 위해서라도 놓아주는 게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임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혁은 얼굴을 무섭게 굳히더니 곧바로 그녀를 제 품에 단단히 끌어안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그녀의 한마디로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들었다.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지?누군가의 한마디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