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와 설영준은 거실에 앉아 있었고,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리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송재이는 직감적으로 문예슬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추측을 증명할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이때, 설영준의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발신자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다름 아닌 어머니 오서희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휴대폰 너머로 문예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영준 씨가 송재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까 섣부른 행동은 삼가길 바랄게요.”그녀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지금 여사님이 옆에 계시니까 만약 경찰에 신고하거나 날 찾으려고 한다면 여사님의 안전은 책임질 수 없어요.”송재이와 설영준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고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설영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대체 원하는 게 뭐지?”“간단해요. 영준 씨랑 송재이 단둘이서 날 만나러 오는 거.”문예슬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곧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줄 테니까 그전까지 무조건 내 말에 따라야 해요.”송재이는 설영준의 손을 잡고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영준 씨, 절대로 상대방의 목적을 이루게 해서는 안 돼. 사모님을 구하고 문예슬의 음모를 밝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본인의 무능력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알아, 하지만 모험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커.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송재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그럼 일단 문예슬의 요구에 응하기 전에 계획부터 세워.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우선 사모님의 안전부터 확보해야 해.”설영준도 송재이의 말에 동의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송재이는 믿을 만한 사립 탐정한테 연락해서 문예슬의 은신처를 찾고 오서희부터 안전하게 구하기로 했다.한편, 설영준은 변호사에게 전화해 법적인 면에서 도움받기를 바랐다.비록 힘든 싸움이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법이다.몇 시간 후 사립
경찰의 삼엄한 감시 아래 오서희는 보안이 철저한 취조실로 안내받았다.비록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단호하고 결연했다.문예슬이 들어서는 순간 두 여자의 시선이 부딪쳤고, 마치 불꽃이 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먼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오서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문예슬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문예슬, 도대체 왜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 거야? 날 납치한다고 해서 영준과 송 선생님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것 같아?”문예슬은 피식 웃으며 광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쥐락펴락? 아니요. 단지 이 세상이 본인들의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계획이었죠. 사랑으로 뭐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현실은 훨씬 더 가혹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오서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지금 남을 다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격이야. 과연 그런다고 사람들이 동정해 줄 것 같아?”문예슬의 감정이 한층 격해지더니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동정? 난 동정 따위 필요 없어요. 단지 송재이한테서 대가를 받아내고 싶었을 뿐이죠. 영준 씨를 빼앗아 가고, 원래 내가 누려야 하는 모든 것을 망가뜨렸으니까!”오서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송 선생님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전부 다 영준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하지만 네가 저지른 행동은 뭇사람의 비웃음만 사겠지. 왜냐하면 넌 이미 미쳤거든.”“미쳤다니?”문예슬은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당신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범인이 바로 당신들이라고!”악을 쓰는 소리가 취조실에 울려 퍼질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설영준과 송재이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설영준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문예슬을 빤히 쳐다보았다.“당신이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범행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거
취조실 대치를 끝으로 정식으로 체포된 문예슬은 현장을 벗어나 차가운 철창과 법의 심판을 마주했다.구치소에서 분노를 주체할 수 없던 마음은 어느새 절망과 억울함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자신의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고, 앞으로 받게 될 처벌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문성호는 변호사 사무실을 서성거렸고 미간을 찌푸린 채 갈팡질팡했다.변호사로서 법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지만, 문예슬의 오빠로서 핏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이내 걸음을 멈추고 수화기를 들어 구치소 번호로 전화를 걸더니 문예슬의 면회를 다시 신청했다.구치소 면회실에서 두 남매는 마주 앉았고, 문성호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드미컬하게 말했다.“예슬아, 네가 설영준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아. 이제 설영준도 고통을 맛보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어.”고개를 든 문예슬의 눈에 의혹과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오빠, 그게 무슨 말이죠? 저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문성호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고, 문예슬에게 바짝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힌트를 줬다.“설영준이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고소해. 단지 이러한 혐의 자체만으로 명예 훼손은 물론 설씨 가문의 사업까지 영향을 미칠 거야.”문예슬은 깜짝 놀랐다. 예상치도 못한 오빠의 제안에 목소리마저 떨렸다.“하지만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우린...”“가짜라니?”문성호가 그녀의 말을 끊더니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예슬아, 지금은 단지 현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했을 뿐이야. 외부인은 설영준과 네 과거에 대해 잘 모를 텐데 끝까지 시치미를 뗀다면 과연 의심할 사람이 있을까?”갈등에 빠진 문예슬은 침묵으로 일관했다.비록 극도로 위험한 도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설영준을 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여동생의 표정을 보자 문성호는 자신의 제안이 먹혔다는 것을 눈치채고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잘 생각해 봐, 예슬아. 이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이사회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공중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설영준의 앞에 서류와 노트북이 놓여 있었고, 표정은 차분하면서 단호했다.심보가 고약한 이사 몇 명이 맞은편에서 마치 승리를 거머쥔 듯 비열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았다.그중 전유지 이사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도발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현재 여론의 위기를 감안해서 회사가 외부의 압력에 더욱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떠세요?”설영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흘긋 쳐다보더니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전 이사께서 오해한 것 같은데 난 쉴 생각이 없어요. 게다가 회사를 향한 믿음도 여전하죠.”이어서 또 다른 이사 이민철이 잽싸게 말을 보탰다.“대표님, 저희도 회사를 위해서 제안하는 거예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미 그룹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는데 한 사람 때문에 회사 전체 운영에 영향을 미치게 할 수는 없잖아요.”이때, 송재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이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적인 사정’은 조작이에요. 대표님은 항상 회사의 발전에 이바지해 왔고, 본인의 명예와 회사의 이익을 일치하기 위해 노력했죠.”설영준의 휴대폰이 문득 울렸고, 증거를 확보했으니 행동을 개시해도 된다는 임상훈의 문자를 받았다.설영준의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현장에 있는 이사들을 둘러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오늘 여러분과 더욱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려고 회의를 소집했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회의실의 대형 스크린을 켜고 임상훈이 제공한 증거 자료를 하나하나 보여주었다.“바로 장 이사와 이 이사가 외부인 문성호와 결탁해 이번 사건을 발판 삼아 회사 경영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증거입니다.”시한폭탄 같은 말에 회의실은 발칵 뒤집혔다.전유지와 이민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더듬거리며 반박하기 시작했다.“이건... 모함입니다! 저희는 그런 적이 없...”설영준이 두 사람의 말
기자회견장은 취재진으로 가득 찼고, 카메라와 마이크는 일제히 단상에 서 있는 설영준을 향했다.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 다들 기대하는 얼굴로 설영준의 발언을 기다렸다.다크 네이비 정장 차림의 설영준은 유난히 차분하고 침착하게 보였다.이내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존경하는 기자님들, 오늘 멀리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에 저와 우리 회사에 대해 떠도는 허위 보도를 정정하기 위해서 이번 기자회견을 개최했어요.”한 기자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설영준 씨, 혹시 오보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대응했다.“물론이죠. 최근 일각에서 제가 사업하면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거나 문예슬 씨와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고 암시하는 루머가 떠돌아다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떠한 사실적 근거도 없는 날조된 혐의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또 다른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그럼 본인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는 있나요?”설영준이 싱긋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제 결백은 물론 이러한 허위 고발은 전부 문성호 씨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죠. 명예를 훼손하고 우리 회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저랑 여동생인 문예슬 씨의 과거를 이용해 꾸민 음모였어요.”한 여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붙였다.“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 자리에서 공개 가능한가요?”설영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법무팀 직원에게 증거를 보여 달라고 눈짓을 보냈다.이내 대형 스크린에서 문서와 이메일 내용, 녹음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고 문성호의 음모가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설영준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이러한 증거들은 이미 경찰에 제출했으며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받을 거로 믿어요. 또한 기자님들한테도 허위 정보에 현혹되지 말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사실을 보도해 줄 것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기자들이 방금 보여준 증거에 대해 의논하며 귓속말로 숙덕거렸다. 설영준의 답변과 제시된
면회실을 나선 송재이는 갈팡질팡한 나머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비록 문예슬에게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가시처럼 가슴 속에 깊숙이 박혔다.따라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답변이 필요했다.송재이는 설영준을 찾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떠보았다.“영준 씨, 사실대로 얘기해줘. 문예슬이 영준 씨가 차를 사준 적이 있다고 했는데 진짜야?”설영준은 송재이를 바라보았다. 이 질문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는지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이내 심호흡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한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차를 사준 적이 있는 건 사실이야.”송재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갑작스러운 배신감에 고통이 밀려왔다.“왜? 왜 그랬어?”설영준이 다가가 송재이의 손을 잡았고,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났다.“마침 우리 사이가 안 좋을 때라서 그만 실수를 해버렸어. 사실 나한테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질투심 유발 작전이었지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나도 알아. 지금은 너무 후회해.”송재이는 허탈한 기분이 들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영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문예슬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니!”이내 속으로 만감이 교차하면서 질투가 마치 교활한 독사처럼 가슴을 후벼팠다.고작 이런 이유로 질투를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특히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녀의 질투심 때문에 본인은 물론 두 사람의 관계에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송재이는 치열한 사상 투쟁을 벌였다.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했던 날들이 너무 그리워 설영준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하지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해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름 아닌 두 사람의 불화로 인해 미래를 잃은 무고한 어린 생명체 말이다.송재이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설영준과 함께 골랐던 책과 장식품이 가득했다.두
그리고 손으로 어깨를 짚자마자 그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밀어냈다.공포에 질린 눈빛과 패닉에 빠진 표정,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마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야... 영준 씨, 난 글렀어.”송재이는 흐느끼며 말하더니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머릿속은 온통 해원뿐이라서 지워지지 않아. 그동안의 일을 어떻게 그리 쉽게 잊겠어?”설영준은 마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싶었고, 무력감이 느껴져 고통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송재이를 강요할 수 없는지라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주기로 했다.“알았어.”이내 허스키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기다릴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네가 극복할 때까지 기다려 줄게.”송재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갔다.그리고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는데 눈물이 또다시 조용히 흘러내렸다.밤이 깊었지만 침대에 누운 송재이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머릿속은 뒤죽박죽 했고,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비록 힘들게 꿈나라로 떠났으나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어주지는 못했다.꿈속에서 송재이는 해원을 보았다. 귀여운 소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설영준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이내 손을 뻗어 끌어안으려는 순간 아이는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엄마, 왜 날 버렸어요?”낭랑한 목소리가 꿈속에서 메아리쳤다.“엄마, 나 무서워요. 너무 추워...”송재이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비록 목놓아 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뛰어가려고 해도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결국 해원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만 했다.“안 돼!”송재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둠과 적막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결국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의 죄책감과 고통을 직면하기 위해
설영준은 송재이의 반감과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억지로 강요하는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곁을 지키면서 심리 치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지인 추천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입소문이 자자한 심리상담사를 찾았다.상담사는 전문 지식이 뛰어날뿐더러 자상하고 끈기가 있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복잡한 감정 문제를 처리하는 데 능숙했다.설영준과 함께 송재이는 첫 번째 심리 치료를 시작했다.진료실에 앉아 있는 그녀는 한 편으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차올라 만감이 교차했다.심리상담사 이서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송재이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그녀도 서서히 마음을 열려고 노력했다.처음에는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포함한 별 보잘것없는 일들을 털어놓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설영준과 이서군의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점차 꼭꼭 숨겨둔 아픈 기억을 언급하기 시작했다.송재이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무의식 중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뭇잎 틈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카펫 군데군데 그림자를 생성했다.이서군은 송재이의 맞은편에 앉아 펜과 노트를 손에 들고 그녀가 했던 얘기를 빠짐없이 기록할 준비를 했다.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재이 씨,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망설이는 것 같은데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재이는 손에 있던 휴지를 움켜쥐고 흔들리는 시선으로 대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매번 끄집어낼 때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요.”설영준은 송재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재이야, 내가 있잖아. 넌 혼자가 아니야.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송재이는 심호흡하고 설영준을 돌아보더니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영준 씨, 고마워. 영준 씨가 있어서 안심돼.”이서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재이 씨가 느끼는 감정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