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원만하게 끝낼 수 있었던 공연이 연지수가 백스테이지에서 일으킨 소동 때문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하지만 이 오점은 ‘연지수’만의 오점이었다.오케스트라의 다른 사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회식 분위기도 매우 좋았다.이번 공연은 연지수가 수석으로서 펼치는 첫 번째 공연이었다.아무리 아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해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빠질 연지수가 아니었다.연지수도 설영준이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룸으로 와서 술을 두 잔 마시더니 다시 매혹적이고 어여쁜 연지수로 돌아갔다.연지수는 설영준의 옆에 앉아 술잔을 들며 교태를 부렸다.“영준 씨 마음은 마치 6월의 날씨처럼 예측 불가에요. 오늘 내가 그 미친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옆에 가만히 서 있었잖아요. 나 정말 너무 서운했어요.”말투가 오버스러웠지만 모두 진심이었다.연지수가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어두운 조명에 설영준의 예쁘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눈빛은 덤덤해 보였지만 그 뒤로 격렬한 파도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쉽게 보아낼 수 없는 설영준의 매력이 연지수를 자꾸만 빠지게 했다. 밤에 잠을 설칠 만큼 연지수는 설영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연지수는 설영준이 끓어넘치는 그 남성 호르몬으로 자기를 정복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연지수와 단둘이 있다 해도 설영준은 아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연지수는 아직 타이밍이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계속 이렇게 썸을 타면 언젠간 불타오를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아무리 도도해봤자 결국 넘어오게 되어 있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연지수는 여자의 촉이 발동했다.설영준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사꾼일 뿐이다. 천천히 그녀를 옭아매면서 어떻게 그녀를 이용해 가치를 창출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전에 했던 행동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릴 수 있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설영준은 송재이에게로 걸어갔다.쫑파티.참석한 사람들 모두 살짝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어두운 불빛 아래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 가식적이면서도 아리송했다.송재이는 이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니면 연지수가 설영준의 가슴에 엎드려 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봐서 그런 것 같았다.두 사람의 눈빛과 스킨십이 송재이를 자극했다.송재이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히 말해서 쿠크다스였다. 이런 상황에는 도망가는 것이 송재이와 제일 잘 어울렸다.송재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밖으로 나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없는 자리라면…그녀와 설영준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설영준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송재이는 질투할 자격도 없었다.너무 울고 싶었다.그때 누군가 송재이의 손목을 낚아챘고 그 힘에 못 이겨 송재이는 뒤로 끌려갔다.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앞에 서 있는 설영준을 바라봤다. 정말 미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는 남자였다.“설영준 씨.”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했다.“이거 놔.”아까 술을 조금 마셔서 그런지 설영준은 약간 어지러웠다.고개를 들고 그렁그렁해서 씩씩대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정말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었다.“오늘은 나랑 가자.”설영준이 이렇게 다독이며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송재이가 실눈을 뜨고는 생각했다.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정말 찔렀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설영준 씨, 자꾸 이렇게 힘으로 제압하려 들면 나 그냥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요.”이 말을 하는 송재이는 정말 고대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여자 같았다.그저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정상적인 남녀라면 다하는 일을 할 뿐인데 죽을 필요까지 있을까?여자가 밀당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설영준도 알아챌 수 있었다.순간 설영준은 송재이 앞에서 얍삽한 변태가 된 듯한
지금 연지수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현아도 연지수보다는 송재이를 더 신경 썼다.며칠 전 송재이가 설영준의 회사에 다녀간 걸 주현아는 알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문이 열렸을 때 두 사람은 꼭 안고 있었다고 했다.이를 마침 지나가던 사원이 목격했고 탕비실로 돌아와 거기에 있는 동료에게 들려줬다.그 동료가 마침 주현아의 옛 동창이었다. 그는 채팅방에서 주현아의 카톡을 추가해 이 일을 말해줬다.본뜻은 주현아에게 약혼자의 여자관계를 유의하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지만 주현아는 카톡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런 돌발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스킨십을 할 수밖에 없다고 셀프 위로를 했다.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해지는 주현아였다.설영준의 아이를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송재이가 유일했다. 송재이가 다른 여자와는 조금 다르다는 의미로 보였다.이런저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손에 들었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영준 씨]드디어 설영준이 먼저 주현아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주현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이튿날 저녁.설영준은 주현아의 어머니 민효연의 별장에 나타났다.곧이어 도착한 송재이가 설영준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도우미가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민효연은 송재이를 웃으며 맞이했다.“선생님, 오셨어요? 일단 앉아요. 연우는 오늘 아빠랑 놀러 나갔다가 금방 돌아와서 샤워 중이에요.”민효연은 연우의 아버지 도정원을 얘기할 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그중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송재이도 알 수 없었다.설영준은 거실 창가에 앉아 민효연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어디에 두어야 할지 봐줄래요?”고개도 들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재이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영준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라 막연한 눈빛으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설영준이
송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효연이 설영준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설명’을 끝내자 맞은편에 앉은 민효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현아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너랑 관련된 일이면 현아도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거...”“녹음은 아까 이미 들려드렸어요. 저도 일 크게 만들 생각 없어요. 그냥 이 결혼을 무르고 싶을 뿐이에요.”설영준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마치 수다를 떠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사실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최대한 두 집안의 화기를 깨지 않는 상황에서 잘 얘기해 볼게. 좋게 끝내야지 않겠어?”민효연이 이렇게 덧붙였다.“현명하십니다.”“아쉽게도 현아와 우리 그이도 현명할지는 모르겠네.”민효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영준이도 너도 나랑 약속해. 현아가 무슨 짓을 했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해 줘.”“대표님 벌써 미래를 대비하시는 거예요?”설영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민효연의 웃음이 점점 난감해졌다. 그러더니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엄마니까 딸 앞길은 생각해야지.”설영준이 차갑게 웃으며 장기판에 마지막 장기를 두었다.“노력할게요.”설영준이 이렇게 대답했다....약혼 취소.좋게 끝낸다.용서해달라.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너무 놀라워 송재이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입을 뻐끔거렸지만 딱히 끼어들 입장은 아니었다.이때 이층에 있던 도우미가 연우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인기척을 들은 송재이가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설영준은 손에 장기 말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서야 설영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송재이와 연우가 피아노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요새 연지수라는 아가씨와 스캔들이 많던데 이 시점에 우리 현아와 약혼을 취소하면 경주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거야. 이런
설영준은 아무 미련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별장에서 나온 설영준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느긋하게 피우기 시작했다.아까 별장에 있을 때부터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민효연과 장기를 두느라 꺼내보지 않았다.지금은 시간이 나니 꺼내서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현아가 걸어온 부재중 전화였다.설영준이 약혼을 취소하자고 말한 후부터 주현아는 설영준을 귀찮게 했다.그날.설영준은 주현아와 밖에서 만나기 싫어 곧장 대학시절 주정명이 주현아에게 사준 별장으로 향했다.비워놓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줌마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주었기에 먼지는 별로 없었다.설영준은 바로 목적을 얘기했다. 주현아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가 송재이의 아이를 해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주현아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이 실로 가여워 보였다.한참 후 주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준의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눈물범벅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영준 씨, 나 영준 씨 사랑해. 헤어지고 싶지 않아.”“주현아, 넌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설영준은 다리를 꼰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거기다 슈트까지 입고 있어 어딘가 차가우면서도 냉정해 보였다.점잖은 외모였지만 남성적인 매력이 다분했고 여자로 하여금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었다.주현아는 그런 설영준을 놓치는 게 너무 아쉬웠다.그녀는 울먹이며 허둥지둥 설영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빌었다.“영준 씨, 나 9살 때부터 영준 씨 좋아했어.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나한테도 기회를 줘.”송재이의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건드린다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 했는데 결국 그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지금 경주 사람들은 내가 연지수랑 바람 나서 약혼 취소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여론도 자연스럽게 네 편일 거고. 너랑 주씨 집안에 손해될 건 없어.”“내가 죽어도 동
이런 남자와는 절대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주현아는 잘 알고 있었다.차분해진 주현아는 연약함으로 전술을 바꿨다가 안 되면 물고 늘어졌다.매일 설영준에게 전화했고 그가 받으면 울먹이기 일쑤였다.그러다 설영준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지금도 화면에 주현아의 이름이 뜨자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차단해 버렸다.설영준이 민효연을 찾아간 것도 민효연이 주현아를 타일러줬으면 해서였다.주현아는 늘 민효연을 존중했기에 민효연의 말이라면 조금 들을 수도 있다.하지만 설영준은 주현아의 집착을 얕잡아봤다.좋게 헤어지면서 두 집안의 건강한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건 그의 바램에 불과했다.기회는 줬으니 잡을지 말지는 그들의 선택이다....설영준은 핸드폰을 옆에 던져두고는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손에 든 담배를 천천히 태웠다.그렇게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송재이는 레슨을 마치고 연우와 민효연에게 인사하고 별장을 나섰다.얼마 걸어 나오지 않았는데 시야에 어딘가 익숙한 까만색 벤틀리가 들어왔다.그쪽으로 걸어가 보니 설영준이 안에서 자고 있었다.시계를 확인한 송재이는 설영준이 지금까지 가지 않고 기다린 것에 의아했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설영준이 눈을 떴다.매서운 눈빛에 송재이는 멈칫하더니 이렇게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가고?”오늘 송재이가 입은 하늘색 원피스는 좀 짧은 편이었다.아까 연우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부터 설영준은 밖으로 드러난 송재이의 하얗고 긴 다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그러다 연우의 악보가 바닥에 떨어졌고 송재이는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를 숙여 주었다.머리를 한쪽으로 젖히자 그녀의 긴 머리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고 이에 송재이는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이 동작이 설영준을 세게 끌어당겼다.송재이는 모를 것이다. 허리를 숙여 물건을 줍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말이다.설영준이 가지 않은 건 그녀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있었다.저번에 송재이는 죽음으로 다시는 그와 잠자리에 들지 않겠다고 협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 설영준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셔츠 단추를 잠그며 생각했다.그와 송재이는 정말 몰래 사랑을 나누는 사이 같았다.저번에는 사무실에서, 지금은 차 안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전에 만난 3년도 남들 모르게 몰래 만났었다. 단 한 번도 정상적인 관계인 적은 없었다.설영준은 진심으로 웃으며 이런 관계도 참 짜릿한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남자는 이런 일에 늘 관대한 편이었다.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할수록 더 짜릿했다.“방금... 뭐라고?”얼굴이 빨개진 송재이가 손을 이마에 얹더니 눈을 찌푸렸다. 머리와 옷은 이미 헝클어져 있었고 누가 봐도 한바탕 거사를 치른 뒤의 모습이었다.송재이의 이런 모습이 설영준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돌아와. 같이 자자.”무겁기만 했던 송재이의 마음이 한순간 하늘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이었다.송재이가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가렸지만 설영준은 그녀가 웃고 있음을 알아챘다.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고 다시 운전석에 기대앉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송재이는 자신이 설영준의 노리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돌아가면 뭐 해? 3년을 더 허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순간 송재이는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주씨 집안 아가씨와 약혼 취소하면 곧 송씨 집안, 고씨 집안, 조씨 집안 아가씨가 줄지어 올 텐데. 영준 씨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그런 집안 여자예요. 나는 나이가 들어서 이제 놀아줄 힘이 없어요.”이제 겨우 25살이었지만 송재이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노련함이 느껴졌다.설영준은 다시 담배가 생각났다.전에 송재이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던 게 떠올랐다. 아마도 임신해서였겠지.지금은 아이가 없으니 괜찮겠지?설영준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입에 갖다 댔다.차 안은 금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창문을 열어둬서 그런지 그렇게 매캐하지는 않았다.“아파?”설영준이 갑자기 물었다.사랑을 나누기 전부터 갈라졌던 목
“아니요!”서유리의 눈빛에 송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부인했다.하지만 머릿속엔 어젯밤 설영준과 차에서 있었던 일로 가득했다.송재이는 가끔 자기 자신이 정신 분열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설영준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설영준을 죽이고 싶었지만 설영준의 몸 아래서 죽고 싶었다.모순되면서도 자꾸만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에 송재이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간 송재이는 진이 빠져 바로 샤워하고 잠에 들었다.그러다 아침에 출근하러 올 때 약국을 들렀는데 아직 약을 먹지 않은 게 떠올랐다.약국에서 이런 약을 산 건 처음이었다. 아침이라 꽤 쑥스럽기도 했다.약사는 나이가 많지 않은 젊은이였다. 송재이가 약을 가지는데 뭔가 상대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하여 약을 가지자마자 바로 도망쳤다.송재이는 이런 약을 먹으면 몸이 상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약을 먹으면서 설영준을 속으로 몇만 번은 욕했던 것 같다....점심.서유리가 송재이에게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밥 먹자고 했지만 송재이는 아직 연습실에 있었기에 서유리더러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10분 뒤 식당으로 내려가려는데 복도에서 연지수를 마주쳤다.연지수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아우라는 여전히 매우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전처럼 당당하지 않았고 눈시울도 빨간 게 어젯밤 많이 운 것 같았다.송재이는 연지수와 할 말이 없었기에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지만 연지수가 송재이를 막아섰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몸을 한쪽으로 비틀어 다른 쪽으로 지나가려 했다.하지만 연지수는 송재이를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송재이를 보는 눈빛도 차갑기 그지없었다.“뭐 하자는 거야?”송재이는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누가 봐도 연지수는 지금 단지를 걸고 있었다.“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연지수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송재이를 지나쳤다.이렇게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