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고 송재이는 얼른 백스테이지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바깥에서 소동이 들렸다.문을 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지수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에 보디가드도 보였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시끄러워졌다.송재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가서 보려는데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연지수의 팔목을 낚아챘다.연지수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중년 여자가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빌어먹을 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순간 그저 옆에서 싸움을 말리던 보디가드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서 중년 여자를 제압했다.연지수는 얼얼한 볼을 감싸고는 신고하겠다고 이리저리 고아댔다.송재이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직원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했다.직원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신비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말도 마요. 다 연지수 씨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에 설영준 씨와 춤을 추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잖아요. 그러면서 계속 스캔들이 났었거든요. 근데 설 대표님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알면서 세컨드 노릇을 한 거라는 소린데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가정주부들이 듣고 화가 난 거죠…”주부들은 원래도 이런 일에 잘 반응하는 타입이었기에 순간 도덕의 화신이 되어 뜻이 맞는 다른 주부들과 함께 ‘세컨드를 타도하자’는 명목하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선 설영준이 보였다.설영준은 연지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표정 없이 자기와 관계없다는 듯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보디가드와 경찰들이 그 주부들을 연행해 갔다.연지수는 지금 꼴이 매우 처참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머리가 다 뜯겼고 옷도 다 찢겼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오늘은 원래 연지수에게 최고의 날이어야 했다.연지수는 얼떨결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설영준을 발견했다. 순간 연지수는 쥐구멍에라
원래는 원만하게 끝낼 수 있었던 공연이 연지수가 백스테이지에서 일으킨 소동 때문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하지만 이 오점은 ‘연지수’만의 오점이었다.오케스트라의 다른 사람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그래서 그런지 회식 분위기도 매우 좋았다.이번 공연은 연지수가 수석으로서 펼치는 첫 번째 공연이었다.아무리 아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해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빠질 연지수가 아니었다.연지수도 설영준이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룸으로 와서 술을 두 잔 마시더니 다시 매혹적이고 어여쁜 연지수로 돌아갔다.연지수는 설영준의 옆에 앉아 술잔을 들며 교태를 부렸다.“영준 씨 마음은 마치 6월의 날씨처럼 예측 불가에요. 오늘 내가 그 미친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옆에 가만히 서 있었잖아요. 나 정말 너무 서운했어요.”말투가 오버스러웠지만 모두 진심이었다.연지수가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어두운 조명에 설영준의 예쁘고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눈빛은 덤덤해 보였지만 그 뒤로 격렬한 파도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쉽게 보아낼 수 없는 설영준의 매력이 연지수를 자꾸만 빠지게 했다. 밤에 잠을 설칠 만큼 연지수는 설영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연지수는 설영준이 끓어넘치는 그 남성 호르몬으로 자기를 정복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연지수와 단둘이 있다 해도 설영준은 아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연지수는 아직 타이밍이 무르익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계속 이렇게 썸을 타면 언젠간 불타오를 날이 올 거라고 말이다.아무리 도도해봤자 결국 넘어오게 되어 있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연지수는 여자의 촉이 발동했다.설영준은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사꾼일 뿐이다. 천천히 그녀를 옭아매면서 어떻게 그녀를 이용해 가치를 창출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전에 했던 행동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릴 수 있는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설영준은 송재이에게로 걸어갔다.쫑파티.참석한 사람들 모두 살짝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어두운 불빛 아래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 가식적이면서도 아리송했다.송재이는 이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니면 연지수가 설영준의 가슴에 엎드려 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봐서 그런 것 같았다.두 사람의 눈빛과 스킨십이 송재이를 자극했다.송재이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히 말해서 쿠크다스였다. 이런 상황에는 도망가는 것이 송재이와 제일 잘 어울렸다.송재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밖으로 나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없는 자리라면…그녀와 설영준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설영준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송재이는 질투할 자격도 없었다.너무 울고 싶었다.그때 누군가 송재이의 손목을 낚아챘고 그 힘에 못 이겨 송재이는 뒤로 끌려갔다.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앞에 서 있는 설영준을 바라봤다. 정말 미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는 남자였다.“설영준 씨.”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했다.“이거 놔.”아까 술을 조금 마셔서 그런지 설영준은 약간 어지러웠다.고개를 들고 그렁그렁해서 씩씩대는 송재이의 모습에 설영준은 정말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었다.“오늘은 나랑 가자.”설영준이 이렇게 다독이며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송재이가 실눈을 뜨고는 생각했다.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정말 찔렀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설영준 씨, 자꾸 이렇게 힘으로 제압하려 들면 나 그냥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는 수가 있어요.”이 말을 하는 송재이는 정말 고대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여자 같았다.그저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정상적인 남녀라면 다하는 일을 할 뿐인데 죽을 필요까지 있을까?여자가 밀당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설영준도 알아챌 수 있었다.순간 설영준은 송재이 앞에서 얍삽한 변태가 된 듯한
지금 연지수의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현아도 연지수보다는 송재이를 더 신경 썼다.며칠 전 송재이가 설영준의 회사에 다녀간 걸 주현아는 알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 갇혔다가 문이 열렸을 때 두 사람은 꼭 안고 있었다고 했다.이를 마침 지나가던 사원이 목격했고 탕비실로 돌아와 거기에 있는 동료에게 들려줬다.그 동료가 마침 주현아의 옛 동창이었다. 그는 채팅방에서 주현아의 카톡을 추가해 이 일을 말해줬다.본뜻은 주현아에게 약혼자의 여자관계를 유의하라고 알려주기 위해서였지만 주현아는 카톡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런 돌발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스킨십을 할 수밖에 없다고 셀프 위로를 했다.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해지는 주현아였다.설영준의 아이를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 송재이가 유일했다. 송재이가 다른 여자와는 조금 다르다는 의미로 보였다.이런저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손에 들었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영준 씨]드디어 설영준이 먼저 주현아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주현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이튿날 저녁.설영준은 주현아의 어머니 민효연의 별장에 나타났다.곧이어 도착한 송재이가 설영준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도우미가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민효연은 송재이를 웃으며 맞이했다.“선생님, 오셨어요? 일단 앉아요. 연우는 오늘 아빠랑 놀러 나갔다가 금방 돌아와서 샤워 중이에요.”민효연은 연우의 아버지 도정원을 얘기할 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그중 도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송재이도 알 수 없었다.설영준은 거실 창가에 앉아 민효연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어디에 두어야 할지 봐줄래요?”고개도 들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재이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영준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라 막연한 눈빛으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설영준이
송재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효연이 설영준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설영준이 송재이에게 ‘설명’을 끝내자 맞은편에 앉은 민효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현아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하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너랑 관련된 일이면 현아도 고집이 만만치 않다는 거...”“녹음은 아까 이미 들려드렸어요. 저도 일 크게 만들 생각 없어요. 그냥 이 결혼을 무르고 싶을 뿐이에요.”설영준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마치 수다를 떠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사실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었다.“최대한 두 집안의 화기를 깨지 않는 상황에서 잘 얘기해 볼게. 좋게 끝내야지 않겠어?”민효연이 이렇게 덧붙였다.“현명하십니다.”“아쉽게도 현아와 우리 그이도 현명할지는 모르겠네.”민효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영준이도 너도 나랑 약속해. 현아가 무슨 짓을 했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든 용서해 줘.”“대표님 벌써 미래를 대비하시는 거예요?”설영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민효연의 웃음이 점점 난감해졌다. 그러더니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엄마니까 딸 앞길은 생각해야지.”설영준이 차갑게 웃으며 장기판에 마지막 장기를 두었다.“노력할게요.”설영준이 이렇게 대답했다....약혼 취소.좋게 끝낸다.용서해달라.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너무 놀라워 송재이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입을 뻐끔거렸지만 딱히 끼어들 입장은 아니었다.이때 이층에 있던 도우미가 연우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인기척을 들은 송재이가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설영준은 손에 장기 말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울려서야 설영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송재이와 연우가 피아노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요새 연지수라는 아가씨와 스캔들이 많던데 이 시점에 우리 현아와 약혼을 취소하면 경주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거야. 이런
설영준은 아무 미련 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별장에서 나온 설영준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느긋하게 피우기 시작했다.아까 별장에 있을 때부터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민효연과 장기를 두느라 꺼내보지 않았다.지금은 시간이 나니 꺼내서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현아가 걸어온 부재중 전화였다.설영준이 약혼을 취소하자고 말한 후부터 주현아는 설영준을 귀찮게 했다.그날.설영준은 주현아와 밖에서 만나기 싫어 곧장 대학시절 주정명이 주현아에게 사준 별장으로 향했다.비워놓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줌마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주었기에 먼지는 별로 없었다.설영준은 바로 목적을 얘기했다. 주현아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가 송재이의 아이를 해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주현아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이 실로 가여워 보였다.한참 후 주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준의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눈물범벅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영준 씨, 나 영준 씨 사랑해. 헤어지고 싶지 않아.”“주현아, 넌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설영준은 다리를 꼰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었다. 거기다 슈트까지 입고 있어 어딘가 차가우면서도 냉정해 보였다.점잖은 외모였지만 남성적인 매력이 다분했고 여자로 하여금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었다.주현아는 그런 설영준을 놓치는 게 너무 아쉬웠다.그녀는 울먹이며 허둥지둥 설영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빌었다.“영준 씨, 나 9살 때부터 영준 씨 좋아했어.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나한테도 기회를 줘.”송재이의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건드린다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 했는데 결국 그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지금 경주 사람들은 내가 연지수랑 바람 나서 약혼 취소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여론도 자연스럽게 네 편일 거고. 너랑 주씨 집안에 손해될 건 없어.”“내가 죽어도 동
이런 남자와는 절대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주현아는 잘 알고 있었다.차분해진 주현아는 연약함으로 전술을 바꿨다가 안 되면 물고 늘어졌다.매일 설영준에게 전화했고 그가 받으면 울먹이기 일쑤였다.그러다 설영준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지금도 화면에 주현아의 이름이 뜨자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차단해 버렸다.설영준이 민효연을 찾아간 것도 민효연이 주현아를 타일러줬으면 해서였다.주현아는 늘 민효연을 존중했기에 민효연의 말이라면 조금 들을 수도 있다.하지만 설영준은 주현아의 집착을 얕잡아봤다.좋게 헤어지면서 두 집안의 건강한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건 그의 바램에 불과했다.기회는 줬으니 잡을지 말지는 그들의 선택이다....설영준은 핸드폰을 옆에 던져두고는 좌석에 몸을 기댄 채 손에 든 담배를 천천히 태웠다.그렇게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송재이는 레슨을 마치고 연우와 민효연에게 인사하고 별장을 나섰다.얼마 걸어 나오지 않았는데 시야에 어딘가 익숙한 까만색 벤틀리가 들어왔다.그쪽으로 걸어가 보니 설영준이 안에서 자고 있었다.시계를 확인한 송재이는 설영준이 지금까지 가지 않고 기다린 것에 의아했다.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설영준이 눈을 떴다.매서운 눈빛에 송재이는 멈칫하더니 이렇게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가고?”오늘 송재이가 입은 하늘색 원피스는 좀 짧은 편이었다.아까 연우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부터 설영준은 밖으로 드러난 송재이의 하얗고 긴 다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그러다 연우의 악보가 바닥에 떨어졌고 송재이는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를 숙여 주었다.머리를 한쪽으로 젖히자 그녀의 긴 머리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고 이에 송재이는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이 동작이 설영준을 세게 끌어당겼다.송재이는 모를 것이다. 허리를 숙여 물건을 줍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말이다.설영준이 가지 않은 건 그녀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있었다.저번에 송재이는 죽음으로 다시는 그와 잠자리에 들지 않겠다고 협
뜨거운 사랑을 나눈 후 설영준은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셔츠 단추를 잠그며 생각했다.그와 송재이는 정말 몰래 사랑을 나누는 사이 같았다.저번에는 사무실에서, 지금은 차 안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전에 만난 3년도 남들 모르게 몰래 만났었다. 단 한 번도 정상적인 관계인 적은 없었다.설영준은 진심으로 웃으며 이런 관계도 참 짜릿한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남자는 이런 일에 늘 관대한 편이었다. 남들이 모른다고 생각할수록 더 짜릿했다.“방금... 뭐라고?”얼굴이 빨개진 송재이가 손을 이마에 얹더니 눈을 찌푸렸다. 머리와 옷은 이미 헝클어져 있었고 누가 봐도 한바탕 거사를 치른 뒤의 모습이었다.송재이의 이런 모습이 설영준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돌아와. 같이 자자.”무겁기만 했던 송재이의 마음이 한순간 하늘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이었다.송재이가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가렸지만 설영준은 그녀가 웃고 있음을 알아챘다.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고 다시 운전석에 기대앉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송재이는 자신이 설영준의 노리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돌아가면 뭐 해? 3년을 더 허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순간 송재이는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주씨 집안 아가씨와 약혼 취소하면 곧 송씨 집안, 고씨 집안, 조씨 집안 아가씨가 줄지어 올 텐데. 영준 씨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그런 집안 여자예요. 나는 나이가 들어서 이제 놀아줄 힘이 없어요.”이제 겨우 25살이었지만 송재이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노련함이 느껴졌다.설영준은 다시 담배가 생각났다.전에 송재이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던 게 떠올랐다. 아마도 임신해서였겠지.지금은 아이가 없으니 괜찮겠지?설영준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더니 입에 갖다 댔다.차 안은 금세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창문을 열어둬서 그런지 그렇게 매캐하지는 않았다.“아파?”설영준이 갑자기 물었다.사랑을 나누기 전부터 갈라졌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