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수는 보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그도 그럴 것이 연지수는 이미 서도재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였다. 서도재도 대표님 레벨의 인물이긴 했지만 바람둥이였다.외국에 있을 때 가리지 않고 만났다는 소문이 있으니 무슨 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아까 단장님한테 불려 가기까지 했다.단장님의 말은 이번 구설수로 그녀를 완전히 묻어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렸다.저번에 송재이가 겪었던 상황과 똑같았다.이렇게 벌을 받는 걸까?결국 돌고 돌아 연지수에게도 이런 일이 닥쳤다.어떻게 수석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긴 싫었다.잠깐 고민하던 연지수가 그래도 통화를 수락했다.“대표님...”연지수가 억울한 듯 울먹이며 말했다.“지수 씨, 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나 마음 아파요...”연지수는 지금 믿을만한 백을 찾고 싶었지만 그게 설영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설씨 집안과 주씨 집안이 약혼을 취소했다는 소식은 3일간 경주시의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었다.오서희와 설동훈은 이를 보고 설영준에게 연거푸 전화를 걸었다.설동훈은 그나마 차분한 편이었다.“갑자기 약혼은 왜 취소하는 거야?”“성격 차이 때문에요.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아요.”사무실에 앉은 설영준이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느긋해 보였다.“결정한 거야? 현아 많이 속상해할 텐데. 주 회장 말로는 종일 방에 있으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대.”“좋아질 거예요.”“잘 안 맞는 거야,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설동훈이 떠보듯 물었다.“그 연지수라는 아가씨…”설영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빠, 너무 멀리 갔어요.”전혀 망설임 없는 설영준의 말에 설동훈도 더는 묻지 않았다.하지만 말투는 사뭇 진지해졌다.“주씨 집안에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긴 했지만 알게 모르게 너한테 딴지 거는 건 어쩔 수 없어. 주 회장도 젊은 시절에 소문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어. 보이는 건 어떻게 잘 막아낸다 하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설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설도영도 오서희의 잔소리를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효도를 생각해 눈을 질끈 감고 받았다.설도영이 오서희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설영준은 다시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그는 영어로 메일에 답장했다.설도겸은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었기에 한국어처럼 막힘없이ㅇ 사용할 수 있었다.전송 버튼을 클릭한 설영준은 몸을 뒤로 기대더니 날짜를 힐끔 쳐다봤다.며칠만 더 지나면 1월 19일이다.1월 19일.설영준이 눈을 지그시 감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설도영이 여러 번 불렀는데도 듣지 못했다.“형!”설영준이 정신을 차려보니 설도영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표정 없이 핸드폰을 건네받더니 한쪽에 던져두었다.설도영이 전화로 오서희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오히려 설도영이 그를 여러번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형, 현아 누나랑 약혼도 취소했으니 엄마가 다른 선자리 알아봐 주겠대요. 언제 시간 되는지 묻던데…”“언제든 시간 안 된다고 해.”설영준은 덤덤한 말투였지만 듣는 사람은 소름이 돋았다.설도영은 그저 오서희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설영준의 반응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비록 15살밖에 안 되는 나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똘똘했다. 설도영은 진작에 인터넷에서 그 여자와 춤을 추는 설영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여자의 생김새는 예뻤지만 그 대신 우아하지 못했다.송재이와 헤어지고 나서 기분이 아무리 꿀꿀하다 해도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떨어질 일은 없는데 말이다.설영준의 기분이 꿀꿀하다는 것도 설도영의 일방적인 추측일 뿐이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여도 설도영은 설영준의 핸드폰에서 송재이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남자가 시도 때도 없이 한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바로 사춘기라는 것이다.…지금 경주시에서 제일 ‘핫’한 사람은 연지수였다.송재이는 위에서 적
진주로 가서 하는 공연은 보름 전에 이미 결정한 사안이었다.이번에 가면 아마 진주에 3일에서 5일은 있어야 한다.곧 송재이의 생일도 다가온다.송재이는 혹시나 그때 돌아오지 못하면 엄마와 함께 따듯한 국수 한 사발도 먹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하여 생일을 미리 축하하기로 했다.올해는 엄마가 돌아가신 첫해였다.매년 엄마와 같이 생일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공원묘지로 향하는 날은 하늘이 씻은 듯이 파랬고 햇빛과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송재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오늘 집에서 나올 때 평소에 신던 하이힐을 신고 나온 게 실책이었다. 절반까지 갔는데 발이 아픈 것이었다.그때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얼떨결에 고개를 들어보니 뒤에 선 남자가 보였다.송재이가 멈칫하더니 이렇게 불렀다.“도정원 씨?”도정원은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지만 표정이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송재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도정원 씨,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매달 도정원은 공원묘지에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보러 왔다.하지만 방금 받은 전화에서 아버지가 차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수술하고 있다고 했다.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도정원은 얼른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중간에 송재이와 마주친 것이다.“혹시 송 선생님도 가족 보러 왔어요?”도정원이 물었다.송재이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손에 국화와 백합 꽃다발을 들고 다른 손에는 보온이 되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엄마 보러 왔어요.”도정원에게 급한 일이 있어 보이니 송재이도 그를 잡고 더 얘기를 나눌 엄두를 내지 못했다.간단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는 각자 갈 길로 떠났다. 도정원은 밖으로, 송재이는 묘지를 향해 걸어갔다.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도정원의 걸음이 서서히 멈췄다.도정원이 고개를 돌려 송재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마음속에 담아뒀던 의문이 송재이를 마주칠 때마다 점점 커지기만 했다.이게 과연 우연일까?
송재이는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엄마의 묘소 앞에 앉아 있었다.해가 뉘엿뉘엿 지자 머리 위로 노을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바람이 불자 주위의 나뭇잎들이 바람을 따라 율동하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세상에 그녀와 엄마, 둘만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진주로 가기 전날, 유은정은 송재이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유중건이 지민건의 회사에 투자한 돈을 아직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송재이 덕분에 유중건은 설영준이라는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유중건은 설영준과 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오늘 이 밥은 아빠가 사주는 거야. 꼭 맛있는 거 사주라고 하셨어.”유은정은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송재이에게 말했다.유중건의 회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설한 그룹과도 거래를 트게 되었기 때문이다.유은정의 약혼자도 요즘 다시 그녀를 살갑게 대했다. 선물도 주고 영화도 보자고 하는 것이 연애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은정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이번 ‘시험’이 없었다면 약혼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유은정은 약혼자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재이야, 난 가끔 네가 쿨한 게 부러워. 시작도 쿨하고 끝도 쿨하잖아.”밥을 먹는데 유은정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송재이가 고개를 들자 유은정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너랑 설 대표님 말이야. 내가 너랑 알고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너는 한 사람을 좋아하면 끝까지 그 사람이잖아. 그렇게 깊은 감정인데도 너는 단칼에 잘라냈으니까.”젓가락을 쥐고 있는 송재이의 손이 멈칫했다.송재이는 유은정의 부러움을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정말 쿨한 게 맞을까?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며칠 전에도 설영준과 차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당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전혀 쾌감을 얻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송재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설영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넋을 잃은 송재이를 바라봤다.너무 급하게 걸다 보니 숨이 차오른 송재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여자의 성숙함과 소녀의 억울함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설영준은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가 제일 역겨워하는 느낌이었다.그는 아무 표정 없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이렇게 물었다.“왜? 못 알아보겠어?”송재이는 설영준이 진주로 내려온 걸 모르고 있었다.진주처럼 작은 도시에 설한 그룹이 확장할 업무가 있을까?“나는...”송재이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마주쳤으니 가자. 나랑 밥 먹어.”발버둥 치던 송재이가 아까 스쳐 지나갔던 사람을 생각하고는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다.설영준 옆에 있으면 그래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송재이도 배고프긴 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차에 태우고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웨이터가 설영준에게 메뉴를 건넸다.“캐비어, 성게, 스테이크, 전복죽, 이렇게 주세요.”메뉴를 정하고 설영준은 메뉴판을 웨이터에게 넘겨주었다.맞은편에 앉은 송재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설영준은 늘 그랬듯 송재이의 의견은 묻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 3년 동안 만나면서 외식한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 가끔 나갈 때도 메뉴는 설영준이 결정했고 송재이는 그 메뉴에 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참 비굴했던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송재이는 몸을 뒤로 살짝 뺐다.송재이는 모르고 있어도 설영준의 눈빛은 지금 송재이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그날 그러고 약은 먹었어?”설영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잠깐 넋을 잃었던 송재이가 이내 반응하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먹었어!”송재이는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설영준이 이 질문을 한 목적을 곱씹어봤다. 설마 다시 애라도 가질까 봐 그러는 건가?설영준은 두 사람의 관계를 그저 살을 섞는 사이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송재이가 앞에서 걸고 설영준이 그 뒤를 따랐다.오늘은 송재이의 생일이었지만 설영준은 모를 것이다. 설영준은 송재이와 관련된 일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설영준은 1월 19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그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뿐이다.그는 송재이가 허황한 꿈을 꾸는 게 싫었고 이걸로 기어오르는 것도 싫었다.설영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그의 생각을 꿰뚫고 이를 약점으로 삼아 그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설영준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저번에 경주에서 쇼핑한 것 외에 처음으로 다른 도시에서 이렇게 길거리를 거닐었다.첫 만남부터 두 사람의 일상은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 그는 침대 빼고는 그녀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은 걸음을 재촉해 송재이와 나란히 걸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보드를 탄 남자애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설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송재이를 옆으로 잡아당겼다.“조심해!”설영준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을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애가 지나가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진주 거리를 산책했다.설씨 집안과 주씨 집안의 약혼 취소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설영준 옆에 나타나는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가 쉬웠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행인이 그들을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이를 본 송재이가 얼른 설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은 핸드폰을 든 행인을 힐끔 쳐다봤다. 이에 그 행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더니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색하게 웃었다.설영준은 걸음을 옮겨 그 행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행인이 놀라서 뒤걸음질 쳤다.지금까지 쭉 높은 자리에 있었던 설영준은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고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설영준은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
지민건은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몸 사리기 마련인지라 저도 모르게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낸다.마치 지금의 지민건처럼 악의에 찬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이내 등 뒤에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여태껏 너만 따라다녔어.”함께 밥을 먹는 설영준과 송재이, 그리고 식사 후에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걸어가는 모습도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를 서서히 이 지경까지 몰아세운 범인이 다름 아닌 두 사람이었다.지민건은 설령 죽더라도 희생양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을 차마 건드릴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송재이가 타깃이 되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송재이는 비록 속으로 두려웠지만, 그래도 지민건 앞에서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애써 센 척했다.하지만 지민건은 성큼성큼 다가가 송재이를 바닥에서 일으키더니 침대 위로 던지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송재이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이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베개 밑에 마침 휴대폰이 있었는지라 그녀는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급하게 키패드를 터치했다.급한 상황에서 따질 게 뭐 있겠는가? 비록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반면 지민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송재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남자의 손은 마치 뱀처럼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위기일발의 순간, 때마침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서유리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열라고, 얼른!”이때, 설영준이 휴대폰을 손에 들고 복도를 따라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그는 오는 길에 이미 호텔 프런트와 현지 경찰서에 연락을 취했다.프런트 직원들은 설영준 대표님의 전화라는 소리를 듣자 감히 지체할 엄두도 못 내고 긴장한 탓에 자칫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같은 호텔,
송재이는 오늘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수록 왠지 모르게 더 불쌍해 보였다.설영준이 고개를 들었다.“유리 씨는 먼저 가서 쉬어요. 오늘 저녁은 내가 남아 있을 테니까.”“네.”남자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안 하는 송재이를 보자 서유리는 그녀가 설영준을 꽤 많이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그러나 굳이 캐묻지는 않고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방 안에는 송재이와 설영준만 남았다.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얼굴에 눈물 자국 범벅인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깨질듯한 유리처럼 위태위태했다.설영준은 단단한 팔로 송재이의 다리를 들어 자기 허벅지 위로 앉혔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넓은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겼다.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남자에게 대부분 여자는 반하기 마련이다.이처럼 안정적인 느낌을 경험한 게 대체 얼마 만이지?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마저 잃어버렸다.그동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밤을 지새운 적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하고 싶은 말, 억울한 일을 당해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고, 이 세상에 오로지 그녀뿐이었다.마치 외딴섬 같은 무력감은 너무나도 두려운 경험이다.그녀는 설영준이 좋았다. 든든한 가슴도 그렇고, 더욱이 매일 아침 넓은 품에 안겨 눈을 뜨는 그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햇살, 연인, 모닝 키스.하지만 나중에 그가 결혼하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만의 남자가 아니었다.그녀는 홀로 제자리에 남겨져 또다시 버려질 운명에 직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결국 설영준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먼저 떠나가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버튼은 결국 설영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송재이는 마치 밖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온몸이 다치고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남자의 따뜻한 품은 그녀에게 모든 위험과 혼란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쉼터였다.설령 찰나의 순간에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