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신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이미 늦었다.릴리는 핸들을 왼쪽으로 틀고 곧장 도로 옆을 향해 부딪혔다.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 부딪혀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리고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릴리는 아니다...릴리는 손을 쓰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을 끝냈기 때문에 행동할 때 한 치의 주저도 없었다.고우신이 순발력으로 핸들을 옆으로 약간 튼 덕분에 차는 도로를 스쳐 지났다.“너 미쳤어!”고우신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다.“맞아요. 저는 기분이 나쁘면 미쳐버리는 경향이 있어요.”힘을 꽉 주고 있는 손과 달리 릴리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고우신이 동공 지진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차는 이미 그린벨트와 충돌했다.릴리는 이번 내기에서 이겼다. 실랑이를 벌이는 틈을 타 고우신이 브레이크를 밟았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충돌에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릴리는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손으로 시트를 잡고 안전벨트의 힘을 빌려 빠르게 다시 균형을 잡았다.하지만 고우신은 허둥지둥하다가 핸들에 머리를 부딪혔다.상대방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서 릴리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재빨리 휴대폰 잠금을 풀고 신하균에게 위치를 다시 보냈다. 이번엔 강유리에게도 위치를 보냈다.현 위치는 고성그룹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의 예리함이라면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이 모든걸 마친 후 전화를 걸려는데 릴리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두 줄기의 눈부신 불빛이 릴리가 눈을 뜰 수 없게 했다.릴리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막았다. 뒤에 있던 두 대의 승용차가 재빨리 따라오더니 릴리를 앞뒤로 막았다.고우신은 머리를 비비며 운전석에서 비틀비틀 내렸다.‘뭐야 따라온 사람이 더 있었어? ’‘하긴, 이 멍청한 놈이 혼자서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지.’승용차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이 내리더니 릴리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낚아채 땅에 세게 내던졌다. 휴대폰이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다
차가 시동을 걸 때까지 고우신은 자신 납치범에서 납치 피해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릴리의 손목에 지어진 매듭은 전통적인 매듭으로 발버둥 칠수록 더욱 조여든다. 그래서 릴리는 아예 힘을 아끼려고 움직이지 않았다.하지만 트렁크는 좁고 둘 다 움츠려 있어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차가 두 대나 있는데 굳이 같은 트렁크에 넣을 게 뭐야. 저 여자 바보 아니야! 자원 분배도 모르나?”“지금 욕할 기분이 들어?”고우신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그가 분노할수록 릴리는 더욱 차분해졌다.방금 그가 바보같이 자기편을 들어주다가 함께 묶인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둘은 남매 아니었나요? 한 편 아니었어요? 이렇게 간단히 배신당한다고요?”고우신이 분노하며 말했다. “지금 똑같이 묶인 상황에 꼭 날 비웃어야겠어?”“저희 둘은 다르죠. 저는 원래도 납치당할 상황이었고 당신은 배신당한 거잖아요.”릴리는 여유롭게 손목을 휘적였다.“...”그가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지금 상황이 유리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처음에 성신영은 그와 릴리의 관계를 이간질하려고 했다. 릴리가 고성그룹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그를 선동했다.그리고 이 망할 계집애가 권력을 넘기도록 계획을 마련해 주었다...고우신은 성신영의 계획이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성신영은 끊임없이 그를 세뇌시키며 오늘 밤이 가장 적합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는 이런 기회를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 밤이 지나면 모든 일이 결정되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우신은 비록 성신영의 계획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관점에는 찬성했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성신영이 감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지루한데 둘이 어떻게 엮이게 됐는지나 얘기해 보시겠어요? 성신영 같은 여자를 이렇게나 오래 믿다니. 당신도 정말 대단해요. 요 몇 년 동안 밥은 거저먹었나 봐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키만 크고 지능은 하나도 안 높
릴리의 추측이 맞았다. 10분도 안 되어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멈추었다.트렁크를 열자 눈부신 빛이 비춰들어 릴리는 한순간 적응하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밝기에 적응한 후에야 릴리는 바깥 환경을 훑어보았다...“둘을 들여보내. 우리 오빠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예.”이 지시대로 릴리와 고우신은 경호원들에 의해 어깨에 메어져서 들어왔다.거꾸로 된 느낌은 좋지 않았지만 트렁크 안보다는 시야가 넓었다.릴리는 재빨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대충 상황 파악이 되었다.이곳은 확실히 고한빈이 사들인 정원이 맞다. 서울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교외 공장 지역에 가깝다.하지만 공장 구역도 그가 사버렸으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때 이곳을 찾아냈을 때 릴리는 몰래 와서 이쪽 상황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보았을 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허름한 곳에 발 디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그 당시 릴리는 순진하게 이곳이 단지 돈세탁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퍽! “윽!”릴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릴리는 뼈가 아파왔다.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추스른 릴리는 일어나 앉아 주위를 살폈다.이 정원의 내부환경은 외관과 일치한다. 모두 낡고 허름하다. 의자와 일부 가구는 눈으로 봐도 몇 년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나무는 모두 썩어 있었다.옆에는 유럽식 가죽 소파가 있었는데 가죽이 벗겨지고 내용물이 보였지만 이 중에서는 그나마 깨끗해 보였다.성신영은 이 유일하게 깨끗한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손가락을 놀고 있었다.“보아하니 캐번디시 집안의 공주님이 고성그룹의 폐인 도련님보다는 확실히 더 총명하군요. 보세요. 납치당한 긴장감이 전혀 없잖아요.”성신영이 웃으며 말했다.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우신이 입을 열었다. “성신영!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고!”성신영은 입을 가
릴리는 말로 성신영의 주의를 돌렸다. “그가 당신한테 얼마를 주었길래 당신이 이렇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는 겁니까?”고우신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낮추고 릴리에게 물었다.“누가 뭘 줬는데?”“꺼져!”릴리는 전혀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이 멍청이! 저 미친 여자가 자기를 엄청 신경 쓴다는 걸 모르나?’그가 자기를 감싸는 모습을 보일수록 성신영을 더 자극하는 셈이다...“목숨을 바친다고?”성신영이 시큰둥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명분도 없이 더러운 돈만 좀 있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목숨까지 팔게 하지?”“그래서. 그가 당신에게 돈을 주었나요? 당신이 다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만큼?”릴리는 흥미를 보였다.성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릴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시간을 끌면 누군가가 너를 구하러 올 것 같아?”두 발이 풀렸지만 릴리는 급하게 움직이거나 발목의 줄을 던지지 않았다.여전히 묶인 자세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네가 똑똑하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강유리와 텔레파시가 잘 통한다는 것도 알고. 아마 너를 구하러 오고 있겠지.”성신영은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 릴리 앞에 반쯤 웅크리고 앉아 한 마디 한 마디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너를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는 거라면?”릴리는 머릿속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그리고 릴리의 추측에 부응하듯 은은하게 코를 찌르던 주변의 냄새가 더욱 선명해졌다.나무 썩은 냄새 사이로 휘발유 냄새가 났다...“뭘 하려는 겁니까?”릴리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단지 모두를 저승으로 데리고 가고 싶을 뿐이야. 이승에서 강유리를 이길 수 없다면 아래에 내려가서 계속 싸워야지.”“...”릴리는 입을 떡 벌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납치된 후로부터 지금까지 릴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당황했다.‘미친년. ’이 여자는 정말 릴리보다 더 또라이다.머릿속에 많은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방금 고우신
고우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과 닿은 손에 날카롭고 차가운 무언가가 잡히는 것 같았다. 고우신은 아무도 모르게 그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성신영은 고우신의 모습에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원래는 그냥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동생을 이렇게도 끔찍하게 아끼니 그냥 같이 죽어요!”그녀는 티테이블 위의 도자기를 바닥에 냅다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밖에 불이 반짝였다.불길이 점점 거세지더니 순식간에 빌라 밖을 집어삼켰다.성신영은 미친 듯이 웃으며 릴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네 언니도 곧 올 거야. 네가 죽든 살든 무조건 안으로 들어올걸?”릴리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목을 조여 죽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며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난 당신들이랑 함께할 생각 없어. 이 일이 끝나면 명성과 목숨 다 가질 거거든. 그리고 당신들이 죽어야만 내가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어. 안 그러면 타향에서 편히 못 지내. 하하...”그런데 성신영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제압당해 바닥에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던 릴리가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릴리는 빠른 몸놀림으로 경호원들을 가볍게 피한 뒤 성신영의 옆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팔을,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꽉 잡았다. 그러고는 검지에 낀 반지에 감춘 날카로운 칼로 그녀의 대동맥을 겨누었다.“나랑 같이 죽을 용기는 없나 봐요? 차라리 잘됐네요. 난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요.”경호원이 몇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릴리가 칼을 들고 있어 결국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릴리는 그녀를 인질로 잡은 채 일어나는 고우신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다 비켜! 우신 오빠, 가서 대문 열어요.”원래는 궁지에 몰린 이상 그냥 마지막 발악이나 하려 했는데 전부 다 연기였을 줄은 몰랐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불길이 점점 더 거세지자 방 안의 온도도 급격하게 상승했고 연기도 자욱해졌다.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고우신은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을 자른 후 자리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고.”차가 빠르게 달려 빌라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놀랄 정도로 매우 거셌다.강유리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재빨리 차에서 내려 본능적으로 앞으로 달려가려는데 육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조금만 더 기다려.”강유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더 기다렸다간 누구 하나 죽어 나가겠어. 이게 지금 괜찮은 거로 보여?”육시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경적이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낯익은 차 한 대가 눈앞에 나타났다.육시준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문 열어.”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다가갔다.강유리는 그가 확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칠 수도 없었고 릴리도 걱정되어 다급한 마음에 경호원과 함께 문을 부쉈다....방 안의 릴리는 처음에 경호원과 대치하면서 어떻게 탈출할까 계속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밖에 인기척이 들려오자 성신영이 고소해하며 말했다.“왔네! 네 언니가 널 구하러 왔나 봐. 그런데 아쉬워서 어쩌나? 마당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라서. 이곳은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어...”릴리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두 눈에 살기도 스쳤다.“그럼 당신 소원대로 다 같이 죽죠, 뭐.”미친 듯이 웃던 성신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무릎이 찌릿했다.“으악!”성신영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순간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더니 의자를 들고 그녀의 다른 한쪽 멀쩡한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으악!”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성신영은 바닥에 움츠러들었다.고우신은 릴리의 민첩하고 잔인한 움직임을 보고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말릴 틈도 없이 릴리는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녹이 슨 과일칼을 들고 경호원을 향해 달려갔다.맨 앞에 서 있던 두 경호원은 릴리의 모습을 보고도 한 치
릴리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는데 정말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납치했을 때도 이 사람은 이곳에 있었다.대체 어떻게 된 걸까?어리둥절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목을 움켜쥔 경호원도 멍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경호원은 계속 공격하려 했다.2대 1로 싸우는 건 누가 봐도 불공평했다. 옆에서 무뚝뚝하게 지켜만 보던 다른 경호원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방에 총 여섯 명의 경호원이 있었는데 지금 2대 2로 싸우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했다.릴리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당신들 대체 누구 편이야?”“우린 릴리 씨의 안전만 책임지면 됩니다. 보스께서 릴리 씨가 우릴 때리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거든요.”‘어쩐지... 이러니까 아까 가만히 있었지.’릴리는 손잡이가 끊어진 과일칼을 던지고 저릿한 손목을 어루만졌다.“그럼 날 공격한 저 둘은 뭐야?”그러자 상대가 대답했다.“성신영 씨가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보스께서 이 연기가 실감 나려면 저 사람들을 남겨야 한댔어요.”“당신네 보스가 혹시 육시준이야?”릴리는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네.”‘그런 거였구나. 언니가 형부한테 계획이 있다더니 정말로 있었어.’하지만 이 계획이 너무도 진짜 같아서 조금 전 하마터면 상대와 같이 죽으려 할 뻔했다. 자기편이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아까 그렇게 진지하게 싸우지도 않았을 텐데.릴리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교전 중이던 한 경호원이 자기 보스의 호감도를 사기 위해 한마디 했다.“릴리 씨, 저의 보스는 육 회장님이 아니라 신하균이에요. 릴리 씨의 안전이 걱정돼서 저더러 따라가라고 했거든요.”릴리는 할 말을 잃었다.‘굳이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는 없는데.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나만 진지했다 이거야? 아,
상대는 릴리를 죽이려고 여러 번이나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릴리는 전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마지막에 그 칼이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상대는 아마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고우신은 지금까지 안일하게 살아왔다. 유일한 자극이라면 아마 레이싱카를 타고 질주할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비하면 레이싱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릴리의 잔인하고 과감한 움직임을 보면 이런 상황을 대체 얼마나 겪었는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싸워야 이 정도가 된단 말인가...고우신의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고 그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던 릴리는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연기도 마구 들어와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니까지 데리러 왔다니 신속하게 나가야 했다.그런데 옆에 서 있던 두 경호원이 릴리를 막으면서 귀띔했다.“아가씨, 잠시만요.”릴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두 경호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급하게 설명했다.“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육 회장님 아직 안 오셨어요.”혹시라도 릴리가 따귀라도 때릴까 두려워 아주 빨리 말했다. 설령 릴리가 때린다고 해도 그들은 감히 반격할 수 없었다.다행히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문을 들이박는 소리였다. 경호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셨네요.”두 경호원은 조금 전 릴리와 싸웠던 두 사람을 아주 쉽게 제압해버렸다. 수단이 어찌나 잔인한지 릴리 못지않았다. 게다가 릴리보다 더 강했는데 딱 봐도 프로였다.두 사람을 제압한 후 팔을 부러뜨렸고 발로 다리 관절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비명과 함께 임무를 마친 네 사람은 창문을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그 모습에 릴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장에 성신영과 고우신, 릴리, 그리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두 경호원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릴리는 잠깐 멈칫하다가 매캐한 연기를 참으며 고우신을 협박의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고우신은 어찌해야 할지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