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말로 성신영의 주의를 돌렸다. “그가 당신한테 얼마를 주었길래 당신이 이렇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는 겁니까?”고우신은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낮추고 릴리에게 물었다.“누가 뭘 줬는데?”“꺼져!”릴리는 전혀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이 멍청이! 저 미친 여자가 자기를 엄청 신경 쓴다는 걸 모르나?’그가 자기를 감싸는 모습을 보일수록 성신영을 더 자극하는 셈이다...“목숨을 바친다고?”성신영이 시큰둥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명분도 없이 더러운 돈만 좀 있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목숨까지 팔게 하지?”“그래서. 그가 당신에게 돈을 주었나요? 당신이 다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만큼?”릴리는 흥미를 보였다.성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릴리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시간을 끌면 누군가가 너를 구하러 올 것 같아?”두 발이 풀렸지만 릴리는 급하게 움직이거나 발목의 줄을 던지지 않았다.여전히 묶인 자세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네가 똑똑하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강유리와 텔레파시가 잘 통한다는 것도 알고. 아마 너를 구하러 오고 있겠지.”성신영은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 릴리 앞에 반쯤 웅크리고 앉아 한 마디 한 마디 말했다.“하지만 그들이 너를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는 거라면?”릴리는 머릿속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그리고 릴리의 추측에 부응하듯 은은하게 코를 찌르던 주변의 냄새가 더욱 선명해졌다.나무 썩은 냄새 사이로 휘발유 냄새가 났다...“뭘 하려는 겁니까?”릴리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단지 모두를 저승으로 데리고 가고 싶을 뿐이야. 이승에서 강유리를 이길 수 없다면 아래에 내려가서 계속 싸워야지.”“...”릴리는 입을 떡 벌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납치된 후로부터 지금까지 릴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당황했다.‘미친년. ’이 여자는 정말 릴리보다 더 또라이다.머릿속에 많은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방금 고우신
고우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바닥과 닿은 손에 날카롭고 차가운 무언가가 잡히는 것 같았다. 고우신은 아무도 모르게 그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성신영은 고우신의 모습에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원래는 그냥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동생을 이렇게도 끔찍하게 아끼니 그냥 같이 죽어요!”그녀는 티테이블 위의 도자기를 바닥에 냅다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밖에 불이 반짝였다.불길이 점점 거세지더니 순식간에 빌라 밖을 집어삼켰다.성신영은 미친 듯이 웃으며 릴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네 언니도 곧 올 거야. 네가 죽든 살든 무조건 안으로 들어올걸?”릴리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목을 조여 죽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며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난 당신들이랑 함께할 생각 없어. 이 일이 끝나면 명성과 목숨 다 가질 거거든. 그리고 당신들이 죽어야만 내가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어. 안 그러면 타향에서 편히 못 지내. 하하...”그런데 성신영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제압당해 바닥에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던 릴리가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릴리는 빠른 몸놀림으로 경호원들을 가볍게 피한 뒤 성신영의 옆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팔을, 다른 한 손으로는 목을 꽉 잡았다. 그러고는 검지에 낀 반지에 감춘 날카로운 칼로 그녀의 대동맥을 겨누었다.“나랑 같이 죽을 용기는 없나 봐요? 차라리 잘됐네요. 난 죽는 게 두렵지 않거든요.”경호원이 몇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릴리가 칼을 들고 있어 결국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릴리는 그녀를 인질로 잡은 채 일어나는 고우신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다 비켜! 우신 오빠, 가서 대문 열어요.”원래는 궁지에 몰린 이상 그냥 마지막 발악이나 하려 했는데 전부 다 연기였을 줄은 몰랐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불길이 점점 더 거세지자 방 안의 온도도 급격하게 상승했고 연기도 자욱해졌다.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고우신은 손목을 묶고 있던 끈을 자른 후 자리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럼 다행이고.”차가 빠르게 달려 빌라에 도착했을 때 불길은 놀랄 정도로 매우 거셌다.강유리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재빨리 차에서 내려 본능적으로 앞으로 달려가려는데 육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조금만 더 기다려.”강유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더 기다렸다간 누구 하나 죽어 나가겠어. 이게 지금 괜찮은 거로 보여?”육시준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경적이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낯익은 차 한 대가 눈앞에 나타났다.육시준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경호원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문 열어.”경호원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다가갔다.강유리는 그가 확신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칠 수도 없었고 릴리도 걱정되어 다급한 마음에 경호원과 함께 문을 부쉈다....방 안의 릴리는 처음에 경호원과 대치하면서 어떻게 탈출할까 계속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밖에 인기척이 들려오자 성신영이 고소해하며 말했다.“왔네! 네 언니가 널 구하러 왔나 봐. 그런데 아쉬워서 어쩌나? 마당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라서. 이곳은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어...”릴리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두 눈에 살기도 스쳤다.“그럼 당신 소원대로 다 같이 죽죠, 뭐.”미친 듯이 웃던 성신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무릎이 찌릿했다.“으악!”성신영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순간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더니 의자를 들고 그녀의 다른 한쪽 멀쩡한 다리를 힘껏 내리쳤다.“으악!”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성신영은 바닥에 움츠러들었다.고우신은 릴리의 민첩하고 잔인한 움직임을 보고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말릴 틈도 없이 릴리는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녹이 슨 과일칼을 들고 경호원을 향해 달려갔다.맨 앞에 서 있던 두 경호원은 릴리의 모습을 보고도 한 치
릴리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는데 정말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을 납치했을 때도 이 사람은 이곳에 있었다.대체 어떻게 된 걸까?어리둥절한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목을 움켜쥔 경호원도 멍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경호원은 계속 공격하려 했다.2대 1로 싸우는 건 누가 봐도 불공평했다. 옆에서 무뚝뚝하게 지켜만 보던 다른 경호원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방에 총 여섯 명의 경호원이 있었는데 지금 2대 2로 싸우고 있었고 나머지 두 명은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했다.릴리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당신들 대체 누구 편이야?”“우린 릴리 씨의 안전만 책임지면 됩니다. 보스께서 릴리 씨가 우릴 때리지 않는 이상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거든요.”‘어쩐지... 이러니까 아까 가만히 있었지.’릴리는 손잡이가 끊어진 과일칼을 던지고 저릿한 손목을 어루만졌다.“그럼 날 공격한 저 둘은 뭐야?”그러자 상대가 대답했다.“성신영 씨가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보스께서 이 연기가 실감 나려면 저 사람들을 남겨야 한댔어요.”“당신네 보스가 혹시 육시준이야?”릴리는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네.”‘그런 거였구나. 언니가 형부한테 계획이 있다더니 정말로 있었어.’하지만 이 계획이 너무도 진짜 같아서 조금 전 하마터면 상대와 같이 죽으려 할 뻔했다. 자기편이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아까 그렇게 진지하게 싸우지도 않았을 텐데.릴리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교전 중이던 한 경호원이 자기 보스의 호감도를 사기 위해 한마디 했다.“릴리 씨, 저의 보스는 육 회장님이 아니라 신하균이에요. 릴리 씨의 안전이 걱정돼서 저더러 따라가라고 했거든요.”릴리는 할 말을 잃었다.‘굳이 그렇게까지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는 없는데.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나만 진지했다 이거야? 아,
상대는 릴리를 죽이려고 여러 번이나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릴리는 전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마지막에 그 칼이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상대는 아마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고우신은 지금까지 안일하게 살아왔다. 유일한 자극이라면 아마 레이싱카를 타고 질주할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비하면 레이싱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릴리의 잔인하고 과감한 움직임을 보면 이런 상황을 대체 얼마나 겪었는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싸워야 이 정도가 된단 말인가...고우신의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고 그를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던 릴리는 곧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연기도 마구 들어와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니까지 데리러 왔다니 신속하게 나가야 했다.그런데 옆에 서 있던 두 경호원이 릴리를 막으면서 귀띔했다.“아가씨, 잠시만요.”릴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두 경호원은 긴장한 얼굴로 다급하게 설명했다.“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육 회장님 아직 안 오셨어요.”혹시라도 릴리가 따귀라도 때릴까 두려워 아주 빨리 말했다. 설령 릴리가 때린다고 해도 그들은 감히 반격할 수 없었다.다행히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문을 들이박는 소리였다. 경호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셨네요.”두 경호원은 조금 전 릴리와 싸웠던 두 사람을 아주 쉽게 제압해버렸다. 수단이 어찌나 잔인한지 릴리 못지않았다. 게다가 릴리보다 더 강했는데 딱 봐도 프로였다.두 사람을 제압한 후 팔을 부러뜨렸고 발로 다리 관절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비명과 함께 임무를 마친 네 사람은 창문을 통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그 모습에 릴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장에 성신영과 고우신, 릴리, 그리고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두 경호원만 남게 되었다. 참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릴리는 잠깐 멈칫하다가 매캐한 연기를 참으며 고우신을 협박의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고우신은 어찌해야 할지
고우신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때 제복 차림의 경찰들이 인질을 구출하러 달려왔다.그런데 사람들이 다 멀쩡하게 서 있어 누가 인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신하균이 뒤에서 다가와 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안 나가고 뭐 해요?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이 빌라는 아주 오래된 빌라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마당의 작은 공지였고 정자를 지나서야 빌라 밖의 큰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 적지 않은 사람과 경찰차가 서 있었고 소방차도 와있었다.릴리는 고정철 부자가 경찰차에 압송되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릴리를 본 고한빈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달려와 그녀의 목을 조를 기세였다.“너 아주 대단하다 그래! 본인이 죽더라도 우리를 잡겠다 이거야?”그런데 양옆의 경찰이 그를 제압하고 강제로 차에 태웠다.“가만히 있어!”릴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때 강미영과 바론이 다가왔다. 그들 뒤로 지팡이를 짚은 강씨 어르신도 따라왔다.“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씨 어르신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여기로 왔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감히 우리 외손녀를 괴롭혀?”“딸,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강미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들 중에서 가장 차분한 건 바론이었다. 바론은 릴리가 다친 데 없는지 꼼꼼하게 살핀 후 더는 묻지 않았다.릴리도 그가 잘 살피도록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커다란 두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누가 이 상황을 설명 좀... 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미영과 바론은 오기 전까지 이 일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들 베테랑들이라 결과를 보자마자 바로 내막이 어떤지 눈치챘다.딸의 어리둥절한 눈빛에 설명해 주려던 그때 신하균이 다가왔다. 결국 강미영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돌아가서 얘기해.”그러고는 신하균을 보며 말했다.“하균아, 미안하지만 여길 부탁할게. 네가 알아서 정리해줘.”신하균이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하긴요. 당연히 해야 하는걸요.”신하균
그녀는 당시 제약을 받았던 사람이 성신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막아섰을 리는 없었다.그는 원래 그런 남자였다. 고정남처럼 멍청하고 고집스럽고 위선적이었다.그를 대신해 한 마디 해준 이유는 성신영의 우쭐해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물귀신처럼 다른 사람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이라면 상대의 동의를 거쳐야 할 것 아닌가?그리고 어차피 사실이니 해명하는 건 별거 아니었다.의기양양하던 성신영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성신영은 릴리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의문 가득하던 눈빛이 점차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뒤바뀌었다.고우신은 릴리가 자신을 고발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다. 육시준이 조금만 덜 세심했어도 그들 모두 이곳에서 끝장났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대신 변명을 해주니 꽤 놀라웠다.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타기 전, 고우신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릴리.”“...”릴리는 자기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그의 부름에 릴리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또랑또랑했지만,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원망도 분노도 없는,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고우신은 더욱 괴로워졌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동생아, 미안해.”릴리는 당황스러웠다.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동생이라고 부르니 꽤 당혹스러웠다.“미안하단 말은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난 오빠를 용서할 생각이 없거든요. 남에게 상처를 줬으면서 겨우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없던 일인 척할 수 있다면 가해자들은 더 설치겠죠.”고우신은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는 경찰차에 올라탔다.신하균은 릴리 일행을 차 앞까지 데려다준 뒤 릴리의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아저씨, 아주머니, 제가 릴리를 바래다줄게요. 가는 길에 상황 파악을 좀 해야겠어요.”릴리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마침 가는 길에 상황을 알고 싶었다.육
“...”결정이 나지 않았다. 각자 본인의 생각을 고집하느라 양보하는 이가 없었다.결국 강미영과 강학도가 한차에 탔고, 강유리와 육시준, 바론, 신하균과 릴리 5명이 한 차에 앉았다.불은 서서히 꺼졌고 차도 하나둘 떠났다.강학도는 차에 오르자 혼탁하던 눈빛이 점차 또렷해졌다. 그는 옆에 있던 딸에게 물었다.“그 형사 우리 릴리에게 호감이 있는 거 같지?”신하균은 비록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조금 전 가장 앞에 나서기도 했고 같잖은 핑계를 대면서 릴리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아쉽게도 릴리가 예전처럼 그렇게 열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강미영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게 아니라면 아까처럼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왜 그의 차에 타는 것을 거절했겠는가?불쌍한 척해서 동정심을 얻어 그 기회를 틈타 그를 공략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강학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심했다.그는 외손녀에게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의 직업이 형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에는 외손녀가 힘들어 보여서 마음이 아팠었는데 지금은 그 형사가 안타까웠다.외손녀는 이미 마음이 식은 상태인데, 상대는 이제야 진지해졌으니 말이다.두 사람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을 때, 다른 쪽은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차 안, 육시준은 운전을 하고 있었고 강유리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뒷좌석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릴리가 중간에 앉아서 양쪽에 있는 남자를 힐끔댔다. 그녀는 호기심이 줄어들고 지능이 상승했다.릴리는 그제야 조금 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차를 어떻게 나눠탈지에 대해 의논했는지를 깨달았다.릴리는 당장 엄마가 있는 차로 바꿔타고 싶었다.바론은 운전석 뒤쪽에 앉아서 이따금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리를 힐끔댔다. 그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고 꽤 난감해 보였다.신하균은 조수석 뒤쪽에 앉아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약상자를 열어 필요한 것들을 꺼낸 뒤 곧장 릴리의 오른손을 쥐었다.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던 릴리는 누군가 자신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