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버님까지 귀찮게 할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스타인 엔터가 방금 거금을 들여 경매에서 작품을 낙찰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제가 신영이를 위해 맞춤 제작한 대본이에요. 스타인 엔터가 신영이에게 주는 첫 선물이기도 하고요. 아마 후반으로 접어들게 되면 이곳저곳 돈 들어갈 곳이 더 많아지게 될 건데… 저도 이제 더 이상 돈 나올 곳이 없어서요…”“…”임천강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성홍주의 의심을 샀다.하지만 아무리 임천강이 이쪽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스타인 엔터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임천강이 신영이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다니, 성홍주는 마음이 뿌듯했다.그래서인지 성홍주의 얼굴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는 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상처 처리하고 그만 나가 봐. 돈은 내가 최대한 빨리 부쳐줄 테니까. 나머지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강유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선물 공세와 칭찬 공세가 육시준의 기분을 풀어준 듯, 풀어주지 못한 듯 애매했다.육시준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서재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그는 그녀와 같이 저녁을 먹지도 않았고, 저녁에 안방으로 돌아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강유리는 식탁에 앉아 손에 젓가락을 쥔 채로 아무 표정 없이 그릇 안에 담긴 쌀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형수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아직도 기분이 안 풀린 거예요?” 육경서는 어느새 집에 들어와 있었다.“누가 그래요? 제가 저 사람 기분 풀어줬다고?” 강유리의 목소리는 조금 부자연스러웠다.“당연한 거 아니에요? 형수님이 알랑거리면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 기억 안 나요? 난 형수님이 어디 잘못된 줄 알았어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형수님이 그렇게 애교부리는 모습 정말 처음 봐요! 너무 대단한거 아니에요?”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던 강유리였다. 그런 사람이 애교를 부리다니. 이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전매력이 돋보였다. 어떤 부탁을 하든 다 들어줄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형은 냉정했다. 육시준은 시종일관 차가운 얼굴이었
육시준은 놓쳐버린 타이밍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상처가 동반된 거짓이 아니라면 문제가 없었다. 다시 적당한 타이밍을 찾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강유리는 억지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처음부터 이 모든 사건들은 다 오해였으니까.게다가 이 여자의 두뇌회로는 무척이나 선명했다. 그의 신분을 알고 나면 오히려 엄청 기뻐할지도 모른다. 더 열심히 그의 비위를 맟춰주려고 할 수도 있다.단지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조금 뒤로 미뤄야 할 뿐이다…밤은 점점 더 깊어졌다.강유리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노트북으로 밀린 메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육시준은 그녀에게 파티의 파자도 꺼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화가 난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없는데!다 오해라고, 내가 똑똑히 설명해 줬는데!다 큰 남자가 고작 이런 일로 계속 각방 쓸 만큼 쪼잔할 리는 없겠지?육시준은 그녀가 거금을 들이며 먹여 살리고 있는 남자였다. 잘생기고, 다정하고,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고, 강아지처럼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고, 잠도 잘 오게 해주는 남자였다… 근데 이런 남자를 보기만 해야 한다고?이런!이건 너무 손해인데!이 생각이 들자 강유리는 펄떡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관성의 법칙 때문에 강유리는 바로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육시준은 마침 그때 방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고 있었고, 그렇게 그의 손은 여자의 이마에 정확하게 닿게 되었다. 그는 이마를 미는 것으로 여자의 중심을 잡아주려고 했다.“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청량했고, 그 목소리에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강유리의 마음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수려한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여자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당신 보러 나왔
육시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렇게 침대까지 밀려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육경서, 이 일만 망치는 놈…또 제멋대로 날 팔았네!강유리의 입장 발표는 그렇게 밤새 인터넷에 떠돌았다.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계좌 이체 기록과 수없이 많은 명품 영수증이 함께 인터넷을 떠돌고 있었다.친절한 네티즌들은 알아서 제품들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모두 임천강이 입었던 것들이었다.소문은 이렇게 사실이 되어가는 듯했다. 임천강은 강유리의 스폰을 받은 게 분명했다.#임천강 스폰##임천강, 강유리와 열애 의혹##강유리가 불쌍하다##누가 제삼자인가#관련 검색어들은 계속 차트에 랭킹 되고 있었다.사건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졌다.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티즌들도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제수씨는 왜 아직도 죽은 척이야? 돈을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고맙다고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임천강이 억만장자의 사생아라는 사실이랑 임천강에게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런 반박도 받지 않겠어!”“내부 소식에 따르면 억만장자는 올해 서른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큰아들이 어디서 나!”“계략이 엄청난 거지새끼. 감히 강유리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모함을 해? 정말 웃기다니까!”“남자한테 돈 쓰면 평생 재수가 없어!”“얼굴도 예쁜데… 둘이 대체 뭘 잘못 먹었길래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근데 나만 성신영이 첩 같아?”“맞아! 너만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팬인 우리도 딱히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이건 다 임씨 잘못이야. 신영이도 피해자라고!”“…”그리고 그때, 계속 침묵을 지키던 임천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감정을 한껏 때려 넣은 작문 하나를 업로드했다. 강유리와 일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내용이었다.‘강유리씨는 사업 초창기 때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저는 그 도움에 엄청 감동했고, 나중에 이 은혜를 꼭 갚아
남들도 아는 도리를 강유리가 모를 리는 없었다.돈을 돌려받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임천강이 굳이 그렇게 해주겠다는데, 거절하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이렇게 하죠. 잠깐만 기다리시면 신주리 씨 매니저가 연락할 겁니다.”“???”여한영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신주리는 스타인 엔터에 소속된 인기 배우였다. 육경서와 비슷한 인기와 위치를 가지고 있었고, 연기와 인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배우였다…하지만 이 사건이 신주리와 무슨 상관이지?강유리는 전화를 끊더니, 저장되어 있진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자…”‘기’라는 글자는 목구멍에 막혀버렸다. 뭔가 갑자기 떠오른 듯, 그녀는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여자는 침을 두어 번 삼키더니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계약할래? 조건은 예전이랑 똑같아. 위약금은 내가 낼게!”강유리가 유강엔터를 책임지게 됐을 때 제일 먼저 데리고 오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신주리였다.단지 육경서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계획이 바뀌게 된 것뿐이었다.“허. 필요할 때만 자기고, 필요 없을 땐 문자에 답장도 안 하지?” 전화기 너머로 조금은 괴상한 말투가 울려 퍼졌다.신주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강유리에게 육경서랑 무슨 사이냐고 물어봤고 강유리는 신주리의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박쥐였다.“그리고, 당신 회사 엄청 작잖아. 육경서 하나 키우는데도 벅차지 않아? 날 서포트 해줄 돈이 있기나 해?”“…”신주리가 뒤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문자에 답장 안 하는 게 내 주특기 아닌가?왜 아직도 옛날 일을 꺼내는 거지?강유리는 허허 웃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친구잖아! 정 안되면 네가 날 먹여살리면 되지!”신주리는 혀를 차며 탄식했다. “평소에도 당신이 이렇게 귀여웠으면 좋겠네!”“…”귀엽다고?부자에게는 이런 딱지가 필요 없었다!“나 지금, 임천강이랑 대놓고 싸우고 있어. 네 계약 해지 관련된 여론은
게다가 이 행위는 한겨울에 연탄을 선물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강유리의 영광이긴 하죠.”신주리는 느릿하게 입을 열더니 몸을 일으켰다. “위약금은 그냥 대외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매니저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아까랑 말이 다르잖아!여한영도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신주리 씨,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스타인 엔터는 그 돈 달라고 못 해요.”신주리는 무척 의혹스러웠다.“임천강에게는 아직 남은 빚이 있잖아요. 어림잡아 계산해도 적은 액수는 아니에요! 강 대표가 빚으로 위약금을 청산한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예요.”“…”신주리는 눈썹을 들썩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임천강은 그 이상한 발표문으로 어렵게 잡음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그는 이 사건을 천으로 덮어버렸다.강유리가 청산하자고 제의한 것도 다른 방식으로 그를 놓아주고 있는 것이었다.만약 임천강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면, 더 세세한 장부를 세상에 퍼뜨릴 생각이었다. 여론이 조금만 부채질을 가한다면 천으로 덮인 그의 비밀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스폰은 그의 얼굴만 팔아버리는 게 아니라, 스타인 엔터와 성씨 집안의 얼굴도 다 팔아버리는 사실이었다.“그러니까, 그걸 다 계산하고 있었단 말인 거죠?” 신주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게…”설마 모르고 계셨어요?LK그룹.육시준은 오늘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바로 본부로 향했다.회의 시간 내내 그는 딴 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임강준이 몇 번이나 옆에서 그에게 주의를 줬고 그는 겨우 회의가 끝날 때까지 버텼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는 눈빛은 이미 이상해져 있었다.점심시간, 개인 단톡방.문자들은 점점 많이 지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대표님이 회의 시간에 정신을 팔다니요!”“우리 육 대표님 소문난 일로봇이잖아요. 냉정하고 꼼꼼하고 효율이 엄청나시죠. 이렇게까지 집중 못 한적은 정말 처음인
사무실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임강준의 눈치가 드디어 출근을 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대표님은 임천강이랑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니까요! 대표님은 바람을 피지도 않았고, 사모님을 모함에 빠뜨리지도 않았잖아요. 사모님의 어떤 도움도…”말을 이어가던 임강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육시준의 약지에 머물렀다.이거 설마… 결혼반지야?육시준이 그에게 이 일을 시켰었다. 하지만 급하지 않다면서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고 했는데…게다가 임강준은 아직 디자이너와 연락이 닿지도 않은 상태였다…“이거, 사모님이 선물하신 거예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육시준은 아무 말 없이 임강준을 차갑게 쳐다볼 뿐이었다.임강준은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정의감이 마음속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제일 완곡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반지를 선물하게 하다뇨!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사모님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하죠!”“네가 일을 잘했다면, 그 사람이 나한테 반지를 선물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육시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가웠다.“…”대표님이 안 급하다고 천천히 하라고 했잖아요?임강준은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감히 그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한참을 끙끙대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결혼반지잖아요! 괜찮아요! 디자인이 낯설어 보이는데, 엄청 유명한 브랜드 제품은 아닌가 봐요!”그는 요즘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많은 쥬얼리 브랜드 마켓터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그래서인지 육시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어떤 하이 브랜드의 제품도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너무 비싼 거만 아니면, 그렇게 창피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세계적인 쥬얼리 디자이너 Seema가 직접 디자인한 반지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어.”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임강준의 환상을 깨뜨렸다.“!!”임강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일석이조였다.이번 싸움은 강유리의 승이었다.강유리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막 핸드폰을 끄려는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대리석과 부딪치는 하이힐 소리에서는 또렷한 분노가 느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분노가 가득한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 해명해 보시지? 내가 왜 덤 취급을 당하고 있지?”강유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덤은 무슨 덤이야! 다 널 칭찬하고 있잖아!”신주리는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뺏어 들더니 댓글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미리 말해줬어야지. 난 내 비상금까지 털어서 너 도와주려고 했는데!”“날 도와준다고?” 그 말에 강유리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얼마나?”신주리는 콧방귀를 뀌며 맞은 켠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이제는 한 푼도 없어!”그 말에 강유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유리는 커피 두 잔을 타더니 다시 여유롭게 소파에 앉았다.“나는 왜 찾아왔어? 화내러 온 건 아니지?” 신주리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강유리는 그녀가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신주리는 커피잔을 들더니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쳐다보았다. “꼭 무슨 일 있어야만 찾아올 수 있는 거야? 계약 문제가 아니었으면 너 나랑 연락할 생각도 없었지?”강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마침 다른 일도 좀 있었어.”“…”신주리는 대충 예상을 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이 여자는 또 전처럼 능글능글하게 빠져나갈 것이라는 걸.친한 친구면 연락 안 해도 되는 거야?너한테 친구는 그런 존재야?신주리는 이미 다 준비를 해놨다. 강유리가 또 감히 그런 말들을 꺼내 상황을 무마한다면
이어지는 며칠 동안, 육시준은 강유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아침이면 다정하게 그의 넥타이를 묶어주었고, 저녁이면 서재에 커피를 가져다주며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이보다 더 이상한 일은 따로 있었다. 토요일에 낮잠을 자지 않았다. 그가 일어났을 때 강유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육시준은 세수를 다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방에서는 팅팅-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오씨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사모님, 이건 제가 할게요!”“사모님,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사모님, 칼은 건드리지 마세요!”“…”그는 주방으로 가까이 다가갔고 가녀린 몸 하나가 그곳에서 분주하게 돌아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여자는 옅은 색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그 위로 분홍색의 앞치마를 메고 있었다. 대충 묶은 똥머리와 멋대로 헝클어진 잔머리는 나른한 분위를 풍기고 있었다.유리 사이로 비쳐 들어온 햇빛이 음식에 열중하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에 내려앉았다. 집안에는 따뜻한 분위기가 한층 더 첨가되었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건지 강유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육시준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여보, 좋은 아침!”육시준은 그녀의 웃음에 혼을 뺏기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응. 뭐가 그렇게 바빠?”“모처럼 휴일이잖아. 당신 먹을 아침 만들고 있어!” 강유리는 기쁜 마음으로 접시를 들고나왔다. “갓 만든 만두랑 참치 죽이야! 얼른 먹어봐!”“…”육시준은 머릿속에 갑자기 강유리가 저번에 한 음식이 떠올랐다. 그 순간 눈 앞에 씌워진 필터가 사라졌다.그는 여자의 손에 놓인 접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머뭇거렸다.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강유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그릇에 올려놓았어!”그 말에 육시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럼 됐다.식탁 위에는 동서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 먹던 음식보다 3배나 많은 양이었다.육시준은 의혹감이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