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영의 그 한마디에 고은영은 더 이상 그와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가려 했지만 진호영은 다급하게 외쳤다. “너 정말 이렇게 냉정할 거야?” 그는 절박해 보였다. 요즘 진씨 가문의 상황이 어떤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그녀가 이토록 냉정할 수 있다니 그녀는 정말 마음이 없는 건가 싶었다. 고은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냉정하다고요?” 그 말은 그녀의 가치관과 정의관을 완전히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진호영이 그녀더러 냉정하다고 말하다니! 진호영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한 번도 찾아보지도 않았잖아. 할머니 역시 너의 윗사람인데 네가 아무리 진유경이 너의 자리를 가로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네 혈육이야!” 고은영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들었다. “혈육?” 그녀는 그 단어가 참으로 가소롭게 들렸다. 혈육이라니, 그 말은 정말 듣기 좋게 꾸며진 명분이었다. 그들이 그녀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삼 일 동안조차 그녀를 찾지도 않았고 찾아왔을 때도 목적은 단 하나, 진유경을 진씨 가문에 남기기 위해 그녀더러 진정훈에게 부탁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혈육이라고?’ 고은영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조소를 띠며 말했다. “혈육이라니, 정말 잘도 말하는군요.” 진호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제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 당신은 언제 저를 찾아왔죠?” 진호영의 이런 모습에도 고은영은 전혀 봐 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얘기들을 다 내뱉었다. 고은영의 말은 진호영의 마음을 강하게 찔렀다. 그는 말문이 막힌 채 가슴속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걸 느꼈다. “제가 냉정하다고요? 그럼 진씨 가문과 저 사이에서 대체 누가 더 냉정한 거죠?” 그녀는 진씨 가문에서 마치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와 같았다. 게다가 그것도 양녀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모
‘진유경뿐만 아니라 이젠 나도 형에게서 완전히 버림받은 건가?’ 진호영은 숨이 막히는 듯한 심정으로 진정훈을 바라보았다. 진정훈은 차갑게 말했다. “아직도 안 꺼져?” 그는 이제 진호영에게 한 점의 인내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할 말을 다 했는데도 진호영은 여전히 그쪽에 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렇다면 그를 형제로 여길 수는 없었다. 진호영은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정말로 할머니와 유경이 그 주식들을 내놓아야 유경이를 진씨 가문에 남기겠다는 거야?” 진정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진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주식을 내놓지 않는다면 형은 끝까지 난리를 칠 작정이라는 건가?’ 가족을 상대로도 이렇게 비정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니. 이런 진정훈을 보며 진호영은 그가 마치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실망감에 빠져 자리를 떠났다. 진정훈이 집으로 들어가니 고은영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둘러 다가가며 말했다. “밥 먹으면서 나를 안 기다려?” 고은영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여기선 그렇게 까다로운 규칙은 없어요.” 진정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규칙이 없다고? 웃기고 있네.’ 배씨 가문은 강성의 제일가는 명문가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규칙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지금 고은영이 배준우와 함께 란완리조트에 살고 있어서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것뿐이다. 진짜 배씨 가문에 가면 과연 어찌 될까? 이때 도우미가 진정훈에게 밥을 떠 주었다. 진정훈은 고은영에게 물었다. “배준우는 어디 갔어?” “오늘 밤 접대할 자리가 있어서 나갔어요.” “그래.” 진정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접대 자리는 남자들에게 결코 좋은 장소가 아니야. 조심해.” 고은영은 이 말이 듣기 싫었다. 그녀는 곧바로 진정훈을 째려보며 말했다. “당신과 같다고 생각해요?” “뭐? 내가 뭘 어쨌다고?” 고은영은 더 이상 말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또 잔뜩 먹어치운 진정훈의 모습에 고은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밤에는 좀 적당히 먹어요.”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불만이야? 생활비를 더 낼 수도 있어!” “제가 걱정하는 건 건강이에요.” 과도한 식사는 몸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진정훈은 웃음을 터트렸다. “봐, 이제 나를 걱정해 주네. 내가 너를 아껴온 보람이 있어.” 고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를 아껴왔다고?’ 뭐 사실 생각해 보면 진정훈과 진윤이 정말 자신을 잘 챙겨준 건 맞았다. 최근에만 해도 좋은 물건들을 이것저것 사다 줬는데 아마도 그녀가 배준우와 함께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진정훈과 진윤이 준 선물들에 고은영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다른 진씨 가문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들의 태도는 진심으로 느껴졌다. 한편, 란완리조트에서의 화목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진호영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진씨 가문로 돌아왔다. 지금의 진씨 가문은 완전히 먹구름이 드리운 상태였다. 김영희는 며칠간 온라인에서 떠도는 이야기들로 인해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섣불리 대응할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마치 미친 듯이 스크린 너머로 김영희를 삼키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은 바로 고은영 그 죽일 놈의 여자아이였다! 김영희가 불편함을 느끼면서부터 진유경은 매일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진호영이 집에 들어오는 걸 보자 그녀는 서둘러 다가가며 말했다. “셋째 오빠, 드디어 돌아왔군요.” 진호영은 그녀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밥은 먹었니?” 진유경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며칠째 그녀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진정훈의 강경한 태도는 그녀를 꼭 진씨 가문에서 내쫓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사무친 그녀는 매일 불안에 떨며 지내고 있었고 입맛도 없었다. 진호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씨 가문? 결국 지금 그녀에게 닥친 상황은 진씨 가문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식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라는 압박이었다. 주식과 진씨 가문 중 진정훈은 하나만 선택하도록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진유경의 가슴은 더 답답하고 아팠다. 자신과 진씨 가문이 이런 관계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진호영은 침묵하는 진유경을 보며 계속 말했다. “유경아, 진씨 가문에 남아 있어야 너도 강성에서 위치를 지킬 수 있단 걸 알지 않니?” 진유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그녀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주식을 그렇게 순순히 내어주라고? 그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진정훈이 자신에게 가하는 가혹한 태도를 떠올리면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꼭 주식을 넘겨야 하나요?” 진호영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도 봤잖아. 형은 지금 너 때문에 할머니를 공격하고 있어. 이렇게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계속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걸 네가 정말 보고만 있을 수 있겠니?” 진유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호영이 이 문제를 꺼내들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만약 할머니 때문이라면 그녀는 어차피 주식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진씨 가문에서 나가야 했고 아니면 주식을 넘기고 계속 남아야 했다. ‘둘째 오빠는 정말 나에게 이 정도로까지 무자비해질 수 있는 사람인 걸까?’ 진호영은 부드럽게 타일렀다. “유경아, 할머니께서는 늘 너를 예뻐해 주셨잖아. 그렇지 않니?” 진유경은 침묵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예뻐했다는 것은 그녀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식을 내어주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여전히 망설여졌다. 진호영은 그녀의 침묵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머니를 위해서도 못 하겠니?”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이 배어 있었다. 그는 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진정훈은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나서서 고은영의 아이를 돌봤다. 그는 특히 이 조카를 아끼는 듯했고 아기도 그가 안아주면 유난히 좋아하며 웃었다. “크크, 이게 바로 혈연이라는 거지. 내 품에 안겨서 이렇게 웃는 걸 봐.” 고은영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완전히 자랑하는 말투였다. 고은영과 배준우는 원래 저녁에만 겨우 아이를 볼 수 있었기에 집에 오면 서로 안아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제 이곳에 하나 더 추가된 경쟁자가 생겼으니, 바로 진정훈이였다. 그는 정말 성가신 존재였다. 진정훈이 아이와 놀아주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황급히 아이를 고은영에게 넘기고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태도는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이어 진정훈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지금 바로 돌아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더니 고은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외출 좀 해야겠어. 한 시간 안에 돌아올게.” 고은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한테 스케줄을 굳이 보고할 필요가 있나?’ 결국 그는 떠났다. 배준우는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둘째 오빠, 정말 짜증 나.” 그는 한마디로 ‘고출력 전구’같았다. 이런 사람은 정말 피곤했다. “그럼 진정훈을 어쩔 건데요?”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너 진정훈을 아예 쫓아낼 수 있어?” 집 안에 한 명이 더 있으니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지금도 사람이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들 필요할 때만 나타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조용히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진정훈은 달랐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은영 앞에 나타났다. 언제 어디서나 그녀와 형제애를 쌓겠다는 의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고은영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준우 씨라도 한 번 해봐요.” 배준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고은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
진호영이 황급히 뒤쫓아 나갔다. “둘째 형!” “무슨 일이야?” “내일이면 더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을 안 봐도 되는 거지?” 진호영은 숨을 죽이며 물었다. 이틀 동안 외부의 악의적인 보도들은 그들의 숨통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지금 진유경이 이미 주식 양도서에 서명을 했으니 이제 모든 일이 끝난 거 아니냐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진정훈은 고개를 돌려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건 모두 할머니의 태도에 달렸지.” 이 말에 진호영은 순간적으로 누가 머리를 한대 친 것 같았다. 할머니의 태도라니. “형,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제 할머니의 주식까지 노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진호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미친 거 아니야?” 진정훈은 대꾸하지 않고 가볍게 돌아서 떠났다. 진호영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형이 지금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단지 고은영이 그동안 겪은 고생을 보상하기 위해서 온 가족을 이렇게 희생시키는 건가? 고은영이 겪은 어려움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데 왜 모두가 함께 보상해야 하는 거지? 보상하고 싶으면 고은영을 집에 데려오는 걸로 끝내면 될 일 아닌가? 왜 사태를 이렇게까지 키우는 건데?’ 진호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정훈은 진씨 가문을 떠나 곧장 란완리조트로 돌아갔다. 고은영과 배준우는 아직 안 자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묘한지 진정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들 쳐다보는 건데?” 배준우가 말을 꺼냈다. “저랑 은영이는 둘째를 가질 계획이에요.” “뭐라고?” ‘둘째라니!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둘째라니? 아니, 둘째를 가질 거면 그냥 가지면 되는 거 아니야? 굳이 나를 그렇게 쳐다볼 필요가 있냐고!’ 고은영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배준우의 무책임한 발언에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이 사람, 뭔
“고마워요, 둘째 오빠.” 진정훈은 충분히 둘째 오빠라는 단어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그저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그의 강압적인 태도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은영이 드디어 그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순간 진정훈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릴 듯했다. “에이, 며칠 뒤에 또 있어!” 배준우는 무심결에 진정훈을 쳐다봤다. ‘이 사람, 정말 단순히 오빠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이토록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건가?’ 그는 지난 며칠 동안 태풍처럼 진씨 가문을 휩쓸고 다녔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진호영의 지분을 빼앗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진유경의 지분마저도 강제로 가져왔다. 그는 고은영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했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녀를 위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었다. 특히 진유경. 그가 고은영에게 했던 짓은 진정훈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녀를 겨냥했던 것이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는데...” “오빠가 준 거잖아. 받아.” 고은영은 무심결에 거절하려 했으나 배준우가 말을 가로막았다. 고은영은 배준우를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는데 왜 더 받아야 하냐는 표정이었다. 배준우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심시키려 했다. 진정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 겁낼 거 없어.” 겁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훈은 진씨 가문에서 자라며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고은영은 그가 자신 때문에 가족들과 너무 심하게 대립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 진정훈은 분명 그들에게 완전히 실망한 듯했다. 고은영의 설득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 고은영은 배준우에게 물었다. “왜 자꾸 받으라고 해요?” “원래 네 거였으니까.” “뭐라고요?” 배준우는 단호히 말했다.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남겨둔 지분이었어. 그
역시 자기 동생이다 보니 어딜 봐도 귀엽기만 했다! 키는 꽤 컸지만 이건 아마도 진씨 가문의 유전일 것이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여자애는 잠을 많이 자야 빨리 늙지 않아.” 그는 정말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고은영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훈 전에 외국에서 대체 뭘 한 거야? 어쩜 이렇게 많은 걸 알고 있는 거지?’눈을 비비며 말했다. “오늘 병원에 가야 해요. 언니가 수술을 받아요.” “고은지 말하는 거야?” “응.” 고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훈은 사실 고은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고은영의 어린 시절을 조사하면서 고은지가 그녀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그 할머니가 고은영을 데리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나이가 많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고은지는 자주 몰래 그녀들을 도와줬다. 이렇게 착한 여자아이가 하필이면 량천옥의 딸이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량천옥은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저런 딸을 두게 된 거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같이 갈까?” 어쨌든 동생의 은인이니 곧 그의 은인이기도 했다. 진정훈은 늘 은혜와 원한을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때려야 할 사람은 때리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고은지는 분명 그가 감사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혼자 가면 돼요!” 고은영은 진정훈이 같이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진정훈은 잠깐 더 고집을 부리려 했지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꺼내 확인하니 진씨 가문의 집 전화였다. 고은영을 한 번 보고는 그녀 앞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옆으로 걸어가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당장 집으로 돌아와라!” 전화기 너머로 할머니가 이를 악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진정훈이 진유경과 진호영의 지분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진정훈은 태
나태웅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여기 왜 온 거야?” 비록 감정을 억누른 듯한 목소리였지만 옆에 있던 진이훈조차 그의 불만이 섞인 말투를 알아챌 수 있었다. 나태웅의 물음에 하주원은 금세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차올랐다. 이내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해외에 있는 동안 안지영이 오빠의 감정을 짓밟았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팠고 오빠를 대신해 정의를 되찾으러 온 거야.” 말투와 표정 모두 그럴듯했다. 하지만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진이훈은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마음이 아프다니, 정의를 되찾겠다니? 그게 아니라 안지영을 적대시하고 일부러 괴롭히려고 온 거겠지. 정의를 운운하며 나태웅을 돕는다니 말도 안 돼.' 나태웅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응, 오빠 말 들을게.” 하주원은 나태웅 앞에서 완전히 순종적인 태도를 취하며 착한 아이로 변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에 나태웅도 마음 한구석에 쌓였던 울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는 다시 진이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여자한테 전해. 사흘 안에 사과하지 않으면 하늘 그룹은 강성에서 사라질 거라고.” ‘뭐라고? 안 대표님이 사과를 해야 한다고?’ 방금 전 구이준에게 두들겨 맞은 것을 떠올리며 진이훈은 온몸이 다시 풀리는 것 같았다. ‘이 타이밍에 가서 안지영 씨를 찾으라고? 그럼 이번엔 구이준뿐 아니라 장선명 씨한테도 맞는 거 아냐?’ 진이훈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 “근데 왜 꼭 안 대표님이 사과를 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저질렀던 일들은 다 안지영 씨와 화해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이건 화해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그의 의문에 나태웅은 바보를 보듯 그를 흘겨보더니 하주원을 향해 말했다. “가자. 병원에 데려다줄게.” “좋아.” 병원에 데려다준다는 말을 들은 하주원의 얼굴은 금세 환해졌다. 그녀의 손목은 진짜 너무 아팠다. ‘그 못된 안지영, 그리고 안열 때문에 지금 내
원래는 기고만장했던 하주원이었지만 지금 안열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겁에 질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안열의 손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너 당장 놔!” 고통에 찬 하주원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방금까지 안열을 비서라고 무시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두려운 눈빛을 본 안열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가서 네 아버지에게 말해. 오늘 네 딸은 안열이라는 여자에게 맞아서 이렇게 됐다고.” “너!” “그리고 네가 안지영에 대해 한 마디라도 입에 올린다면 네 이 손목은 완전히 잘려 나갈 줄 알아.” 하주원은 경악하며 더듬거렸다. “너, 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안열은 차분히 대답했다. “협박이 아니라 경고야. 이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말해주는 것뿐이지.” 하주원은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온몸이 떨려왔다. 안열은 그런 하주원의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알겠어? 확실히 기억했으면 대답해.” 그 순간, 나태웅이 나섰다. 그는 안열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이제 충분하지 않아?” 안열은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손목을 빼냈다. 지금 이 순간, 안지영의 눈빛은 엄청 차가워졌다. 하주원은 안열을 노려보고 억울하다는 듯이 나태웅에게 매달렸다. “사촌 오빠, 저 너무 아파요!” 나태웅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며 안열을 향한 적대감이 뚜렷해졌다. “안열, 네가 정말 내가 널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해?” 안열은 비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건드릴 수야 있겠죠. 하지만 저를 어떻게 할 건데요?” 그녀의 태도는 전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당당해 보였다. ‘이 여자가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을 얻은 거야? 감히 사촌 오빠한테 이런 말을 하다니!’ 두 사람이 할 말을 잃자 안열은 비웃으며 말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하는 건 두 가지 일입니다. 나 대표님, 제 말이 틀리나요?” “
‘사과? 하주원에게 사과를 하라고?’ 이제야 그녀는 진이훈이 왜 맞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장선명의 주먹은 나태웅을 겨냥한 것이었다. 진이훈을 때린 것은 분명 그들에게 경고하는 의미였다. 이 일을 더 물고 늘어진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말이다. 하지만 나태웅은 이런 경고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해하고도 무시한 것인지 여전히 끈질기게 얽매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하주원은 나태웅이 자신을 위해 정의를 주장하며 나서는 모습을 보고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녀는 안열을 향해 도발적으로 말했다. “못 들었어? 빨리 너희 안 대표님을 불러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해!” ‘무릎 꿇고 사과하라니?’ 진이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주원에게 무릎을 꿇고 말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여자가 도대체 안지영이 어떤 사람인지나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오늘 일을 계기로 안지영과 나태웅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끝났다는 것이다. 진이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태웅이 안지영에게 사과를 요구하다니, 이 사람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들었지?’ 그는 속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나태웅은 안지영 때문에 심리 상담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이건 그야말로 안지영을 완전히 떠밀어내는 꼴 아닌가. 진이훈은 숨이 턱 막혔다. 안열은 하주원의 말을 듣고 마치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듯이 되물었다. “당신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물론이지! 당장 불러와서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면 이 일은 여기서 끝낼게.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으려고요?” 하주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열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하주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안열은 냉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경멸과 혐오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하주원의 얼굴을 내리쳤다. ‘찰싹!’ 날카로운
모두가 안지영이 흉터라는 한마디를 듣고 자리를 떠나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 얼마나 심각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걸까? 그녀가 이렇게 떠나는 게 정말 적절한가? 하지만 적절하든 말든 안지영은 결국 떠났다. 그녀는 나태웅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안고 떠난 것이었다. 몇 년을 알고 지냈던 사람인데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태웅이 이렇게까지 판단력이 흐린 사람일 줄이야. 방금 그는 상황을 묻지도 않고 그녀더러 하주원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다행히도 지금 결혼을 논의 중인 사람이 나태웅이 아니었다. 만약 나태웅이였다면 그녀는 그야말로 울분이 터졌을 것이다. 이번 일을 겪고 안지영은 나태웅이란 사람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오늘 같은 상황에서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이훈은 구이준에게 한 대 얻어맞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태웅은 진지한 눈빛으로 장선명을 보며 말했다. “이게 장씨 넷째 도련님이 일 처리하는 방식입니까?” 장선명은 차가운 미소를 날리며 답했다. “제 방식은 이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당신 방식대로 해 봐요. 근데 별로 좋지도 않은 것 같던데. 안지영 씨가 이 정체불명의 여자한테 사과해야 한다고요? 저 여자가 그럴 자격이라도 있나요?” 방금 나태웅이 벌인 일 때문에 안지영이 참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장선명조차도 참을 수 없었다. 남자라면 자기 여자가 억울한 일을 겪게 놔두면 안 된다. 그제야 장선명은 안지영이 왜 그때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이해했다. 그녀 주변에는 자기를 물어뜯는 개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나태웅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럼 장씨 넷째 도련님은 아직 내 방식이 뭔지 모르는 것 같군요.” 이때 안열이 장선명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나태웅을 한 번 보더니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이 상황에서 한마디라도 더 하면 오늘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크
안지영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하주원을 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나태웅에게 달려가서 바로 그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장선명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지영 씨!” 안지영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저 자식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지 봐요!” “일단 지영 씨 먼저 사무실로 가요.” 장선명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분명 위협이 묻어 있었다. 이 순간, 장선명은 나태웅의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태웅이 여기서 안지영 씨에게 사과하라고 한다고?’ 오늘 이 일은 절대로 안지영의 잘못이 아니었다. 설령 안지영에게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가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저 자식을 찢어버릴 거예요!” 지금 그녀는 이성을 잃었고 진짜로 나태웅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온 걸 보면 이 순간의 안지영은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장선명은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닿자 안지영은 느껴지는 통증에 소리쳤다. “아, 아파요!” “약 안 바르면 진짜 흉터 남을 거예요.” 장선명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안지영은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나씨 가문 사람들은 진짜 미쳤어! 확실히 다들 미쳤어!’ 그녀는 아직도 나태웅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얼굴이 흉지게 될 걸 생각하니 결국 약을 바르러 가기로 했다. “그럼 여기 처리 좀 해줘요.” 안지영은 장선명에게 말했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요. 지영 씨가 만족하게끔 처리할게요!” 그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진이훈은 몸을 움츠렸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안지영은 장선명이 어떤 방법을 쓸지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화가 난 그녀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갑자기 진이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안지영 씨!” “구이준.” 진이훈이 말을 꺼
하지만 나태웅은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주원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하주원은 바로 눈물을 훔쳤다. 방금 안지영과 싸울 때의 사나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태웅은 그녀를 한번 쓱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안지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과해.” 차갑게 뱉은 세 글자가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가가 떨렸다. ‘사과? 누가 누구한테 사과하라고?’ 안지영은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진이훈은 나태웅의 의도가 무엇인지 금세 눈치챘다. “나 대표님, 설마...” 진이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태웅을 바라봤다. 그러자 나태웅은 더욱 냉랭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과하라고.” 안지영이 움직이지 않자 그의 말투는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의 말의 뜻을 알아챘다. 그는 안지영더러 하주원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하주원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안지영을 바라보며 승자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지영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야, 정말 병 걸렸다고 이러기야? 어?” 그녀는 나태웅이 병을 앓고 있는 걸 알기에 이곳에서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라니 나를 더 화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걸까?’ 안지영은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태웅을 조각조각 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진이훈이 한 걸음 나섰다. “안지영 씨, 대표님께서는 그냥 이번 일은 사과하고 지나가길 바라고 계십니다.” “그럼 내가 사과 안 하면? 나를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안지영은 화가 나서 크게 소리쳤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나태웅의 마음을 깨달은 후에도 자신의 결정을 고수할 수 있는 자신이 대견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와 그의
진이훈은 왕 비서가 장선명에게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보며 나태웅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안지영의 회사는 분명 장선명을 사위로 인정한 모양이다. 나태웅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에 진이훈은 나태웅이 얼마나 억울할지 마음이 아팠다. 이 기간 동안 나태웅은 무엇을 했던 걸까? 장선명은 비밀스럽게 모두의 인정과 신뢰를 얻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안지영과 하주원이 이미 사람들에 의해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그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주원은 나태웅이 오자 억울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왔네, 사촌 오빠! 이 여자가 나를 죽여버릴 뻔했어!” 안지영은 그 말을 듣고 비웃고 싶었다. ‘이 여자가 먼저 고자질이라니!’ 나태웅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지영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은 뭐지? 내가 하주원에게 손을 댔다고 저러나? 나태웅은 진짜로 하주원의 말을 믿는 건가?’ 하주원은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안지영은 장선명을 보자 화가 올라와 자신도 다가가 말했다. “드디어 왔네요. 저 짐승이 갑자기 쳐들어 오더니 날 때리고 할퀴었다니까요.” ‘고자질? 누군 못하는 줄 알고?’ 그녀들은 마치 학교에서 싸운 초등학생 같았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니 부모님을 불러오는 초등학생 말이다. 나태웅은 안지영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선명에게 고자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하주원은 계속해서 울며 얘기했다. “정말 너무 잔인했어! 내 머리카락까지 다 뽑아갔어!” 안지영도 대꾸했다. “제 얼굴도 할퀴어서 흉터 생긴 것 같아요!” 진이훈은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선명의 비서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두 명의 아가씨들이 이렇게 서로 고발하는 걸 보니 혹시 두 대표가 직접 손을 쓰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태웅의 기운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위험해
안열은 안지영과 함께한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매우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다. 이전에 안지영의 아버지 안진섭이 의식을 잃었을 때 회사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안진섭의 결혼식 때는 하늘 그룹을 삼키려 했다. 그때도 그녀는 참을성을 가지고 침착하게 상황을 관리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는데 왜 갑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왕 비서가 말했다. “하주원이라는 여자와 싸웠습니다.” “하주원, 그게 누구예요?” 안열은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안지영과 함께한 시간 동안 한 번도 하주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왕 비서는 조금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 대표님의 사촌 여동생이에요!” 듣고 보니 그 여자가 바로 나태웅의 사촌 여동생이라니, 안열은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안 대표님 다치지 않게 해요. 제가 바로 돌아갈게요.” “알겠습니다.” 안열은 전화를 끊었다. 그때, 나태웅이 하주원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열이 돌아보았을 때 나태웅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원래는 나태웅이 안열에게 해명을 요구하려던 차였는데 상황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안열이 날카롭게 물었다. “나 대표님, 이제 당신은 제게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셔야겠죠? 왜 당신의 사촌 여동생이 안 대표님에게 손을 댔죠?” 그런데 나태웅은 병상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병원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 안열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 정말 나를 무시하는 건가? 설명을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이제는 해명을 해줘야 할 차례 아닐까? 그런데 딱 이 시점에 가서 얼굴을 찌푸리며 떠나버리다니. 대체 이 사람 지금 이게 무슨 태도지?’ 그때 진이훈이 뒤따라 나섰다. 안열이
두 여자가 마치 맹수처럼 서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안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네 얼굴을 찢어버려야지! 도대체 누가 너더러 감히 나한테 와서 이러라고 했어!” 그녀가 나태웅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그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찮게 다가온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주원은 기가 막힌 듯 대답했다. “너 같은 년, 너는 양심도 없잖아! 나는 경고하는 거야, 내 사촌한테 가까이 가지 마! 그 사람는 네가 손댈 사람이 아니야!” “그럼 네가 사람을 멀리 데려가던지! 그 병을 나한테 옮기지 말고!” “너 같은 년은 정말로!” “너야말로, 너희 가족 전부가 다 미쳤어!” 안지영은 거침없이 맞받아쳤다. 하주원은 하늘 그룹의 계승자가 이렇게 무례하고 난폭한 여자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 안지영에게 경고만 하려 했고 안지영이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고 자신에게 이제부터는 나태웅과 연락하지 않겠다며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지영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서 이렇게 자신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너 그만 놔!” 하주원은 머리가 당겨져서 아팠다. 안지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 방금 나 때리겠다고 하지 않았어? 때려 봐! 나 때려봐!” 하주원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고 비서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는 급히 사람들을 데려와서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한편, 그녀는 급히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안열은 여전히 병원에 있었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이훈은 나태웅을 한번 보고 다시 안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열이 이곳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보스에게 손을 대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나태웅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안열을 마치 찢어버릴 듯이 차갑고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손을 댄 안열은 점차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