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병실 문을 세게 밀치며 들어갔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려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고은영의 등장에 의기양양했던 량천옥과 량일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량천옥은 고은영임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량천옥은 약병을 본능적으로 숨겼다. ‘이 죽일 년이, 이제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법까지 배웠네! 지금 윤이가 그들 손에 있는데, 이게 대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량천옥과 량일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고은영에게 모든 걸 들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고은영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 숨겨요. 다 들었고 다 봤어요. 대체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거죠?” 량천옥은 잠시 숨을 골랐고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군. 배 씨 집안 며느리라면서 남의 대화를 몰래 엿듣다니.” 그 말에 고은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특히 량천옥의 독기 서린 표정을 보자 그녀의 분노는 더욱 끓어올랐다. “예의? 예의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인가요? 친딸을 해치려는 당신이요?” 자신의 딸까지도 가차 없이 해치려는 사람은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그 본성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병실은 차가운 기류로 가득 찼다. 량천옥은 비웃으며 말했다. “당장 나가. 네 얼굴은 보기 싫어.” “그동안 보여줬던 미안함이 다 연극이었나요? 그때도 저를 해치려 했겠죠?” 고은영은 얼마 전 량천옥이 자신에게 애정 어린 태도를 보이며 어머니처럼 행동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보여준 태도는 마치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보상해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모든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겉으로는 사람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뒤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자신을 갈가리 찢어 먹을 준비가 된 그런 악랄한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
보안 요원이 두 사람을 떼어놨음에도 고은영은 계속 량천옥에게 발길질을 했다. 이 악독한 여자를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다. 고은영도 이제는 엄마가 되었고 아이를 그렇게나 사랑하는데 왜 량천옥은 이렇게 악랄한 걸까? 그녀는 더 이상 배 씨 집안의 배 부인이 아니었고 배항준에게는 이미 새 여자가 있었다. 설령 고은지가 정말 죽는다 해도 량천옥은 배 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곳은 이제 완전히 그녀의 망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도 왜 량천옥은 이렇게나 독한 걸까? “고은영,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 가만 안 둘 거야!” 량천옥도 악독하게 소리쳤다. 나태현이 다가오던 중 멀리서 병실 안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고은영과 량천옥이 싸우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놀란 듯 멈춰 섰다. 그동안 고은영이 계속 나태현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고은지의 수술이 끝난 후에 움직이라고 조언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작 그녀가 먼저 참지 못한 것인가? 예전에는 겁 많던 고은영이 이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나도 당신 가만 안 둬. 앞으로 당신을 볼 때마다 두들겨 패줄 거야. 이 악독한 여자!” 이전에는 업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곤 했지만 지금 고은영은 그런 걸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량천옥의 업보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태현는 고은영의 악독한 외침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뒤로 당겼다. 그러고 나서 차가운 눈빛으로 량천옥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나태현을 본 량천옥은 방금 전까지의 광기가 사라지고 이성도 순간적으로 돌아왔다.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바로 그 순간에야 그녀는 배윤이 아직도 나태현 손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이 순간에 그녀가 지금...! 나태현의 냉혹함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은 더욱 심하게 조여왔다. 서 의사가 급히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다들 이미 마음 정리한 거 아닌가요? 왜 또 싸우고 있나요?” 고은지의 주치의인 그
량천옥은 이 물건을 나태현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기에 절대 고은영에게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고은영의 힘이 너무 강했다! 량천옥이 아무리 저항해도 그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고은영은 강하게 그녀 손에서 약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서 의사에게 건네며 말했다. “서 의사님, 당신이 이 여자에게 기회를 주라고 하셨죠. 전 그럴 가치가 없다고 했는데 믿지 않으셨잖아요! 고맙게도 사람 사이에는 기본적인 신뢰가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에요!” 서 의사가 약병을 받는 순간 량천옥은 본능적으로 나태현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그 순간 나태현 역시 량천옥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단 한 번의 눈빛이었지만 량천옥은 그 눈빛에 완전히 겁먹었다. 고은영이 물었다. “이게 무슨 약이에요? 이걸 먹고 나서 언니 수술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기나요?” 약병에는 전부 외국어가 적혀 있었고 고은영은 영어 이외의 언어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 의사는 읽을 수 있었다. 병원에는 종종 수입 약품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는 이런 언어에 익숙했다. 약품 이름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그 순간 완전히 어두워졌다. 량천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실망감이 넘쳤다. “량 여사님, 정말이지 당신은 너무나 실망스러워요. 당신은 당신 딸을 죽이려고 한 겁니까? 세상에 어떻게 당신 같은 어머니가 있을 수 있죠?” 서 의사는 정말 실망했다. 그는 명문가 사모님의 자신의 지위 때문에 자신의 혈육까지 해칠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서 의사의 말에 량천옥과 나태현의 심장이 동시에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숨을 멈추고 서 의사를 바라봤다. 량천옥은 특히 더 창백해진 얼굴로 서 의사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딸이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고은지가 내 친딸이라고 말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량천옥은 속으로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서 의사는 계속해서 량천옥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자
어제 고은지가 받은 충격은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린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고은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고은영은 고은지의 침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고은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분명했다. 량천옥은 지금껏 고은지의 얼굴을 유심히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왜인지 숨이 막힐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특히 고은지의 얼굴에 감도는 마치 언제든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창백함이 그녀를 더 숨 막히게 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병실 안에서 고은영의 마음 역시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언니, 제발 빨리 깨어나. 응? 꼭 깨어나야 해.” 이 순간 고은영은 고은지를 향한 연민이 극에 달했다. ‘량천옥이라는 여자는 대체 어쩌다 이렇게나 악랄해졌단 말인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고은영은 고은지에게 미안함과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고희주...! 그 아이는 그녀의 손녀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한편, 나태현은 서 의사의 사무실에 있었다. 고은지와 량천옥의 관계를 비교한 데이터 자료를 보고 두 사람이 확실히 모녀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병실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믿기 어려웠지만 이제 확실히 확인하고 나니 그의 가슴속에는 차가운 감정이 퍼져 나갔다. 량천옥의 딸이라니, 하...! 배준우는 혜나로부터 병원에서 고은영과 량천옥이 싸웠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왔다. 고은영의 얼굴에 긁힌 자국을 보자 그의 얼굴은 즉시 차가워졌다. 병실 앞에 있는 보안 요원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당신들은 장식인가?” 이곳에 이들을 배치해둔 건 혹시라도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혜나가 다급히 다가와 설명했다. “사고는 이 층에서 벌어진 게 아니라 한 층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량천옥의 병실은 고은지의 병실과 같은 층이 아니었다. 만약 이런 일이 이곳에서 발생했더라면 아니, 눈
지금 고은영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배준우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량천옥이 고은영에게 마음을 다해 보상하려 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가 만약 연기했다면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을 것이다. 결국 늘 손에 쥐고 있던 천의도 그녀가 직접 내놓았기 때문이다. “확실해요. 서 의사가 량천옥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고요. 모를 리가 없어요.” ‘서 의사가 량천옥에게 이미 말해줬다고? 그런데 왜 고은지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배준우의 입장에서는 량천옥이 그동안 고은영에게 보여준 모든 진심 어린 행동은 진짜였다고 생각했다. 특히 량일의 당시 태도도 아주 명확했으니까. “량일의 태도가 어땠어?” “그 늙은 마녀가 량천옥에게 약을 가져다주고 먹게 했어요. 량천옥에게 약을 먹고 언니에게 수술을 시키라고 했어요. 그 약은 언니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어요.” 량일을 언급하자 고은영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 모녀가 마녀처럼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느껴졌다. 고은지이 량천옥의 딸이라면 당연히 량일의 외손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악랄했다. 량일이 약을 준비했다는 얘기를 듣고 배준우가 말했다. “아마 그들은 몰랐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량일이 전에 우리 아이를 위해 직접 옷을 몇 벌이나 만들어준 걸 잊었어?” “그것도 다 꾸민 거였겠죠?” “하지만 천의도 너에게 줬잖아.” 그래, 천의도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위한 보상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그 후 자신에게 준 모든 것들도 너무 큰 대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 몰랐던 걸까요?” 고은영은 배준우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몰랐을 거야.” 모르는 일이라 해도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 일은 어쩐지 너무 초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언니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게 정말 사실일까요?” 이전에 량천옥과 실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로 인해 지금 고은영의 마음은 어
지금 그녀의 마음속은 이성과 감정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은지가 정말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울렸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그녀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만약 고은지가 진짜 자신의 딸이라면 그때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전 고은영에게 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와 혐오감이 다시금 그녀를 덮쳤다. 나태현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나태현을 보자 량천옥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나태현은 아무 말 없이 몇 가지 자료를 그녀에게 건넸다. 친자 확인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료 속 데이터를 통해 고은지가 확실히 그녀의 딸이라는 것이 드러나 있었다. 량천옥은 자료를 손에 들었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 의사는 이 데이터를 대조하여 당신과 고은지의 관계를 확인한 겁니다. 원한다면 친자 확인을 하든지 이 자료를 가지고 다른 병원에 가서 물어보세요. 결과는 서 의사가 말한 것과 동일할 겁니다.” 량천옥은 손에 든 자료를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았다. 아직 친자 검사를 하지도 않았지만 서 의사는 이미 고은지가 그녀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진 듯 서 의사가 이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말 하나하나가 지금 량천옥을 완전히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이건 배준우 등 사람들의 계략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깨달았다. 만약 계략이었다면 이 적합성 검토표가 나오기 전에 서 의사가 고은지가 자신의 딸이라고 직접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서 의사는 그녀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단지 돌려서 말하며 실망과 경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가 한 말은 애매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모두 이해가 됐다! 고은지가 그녀의 딸이 맞다는 사실은 이번엔 틀림없다... 정말 틀림없다...! 량천옥은 보고서를 움켜쥔 채 멍하니 나태현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어 무언가를 말하려
량천옥은 지금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진 씨 가문 쪽에서도 적잖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진호영은 진정훈에게 몇 차례 발길질을 당한 후 소파에 앉아 신음하며 말했다. “형, 그만 좀 해요! 그만 좀 때려요!” 정말 아팠다. 게다가 가슴을 가격 당하다니. ‘이 형은 진짜로 나를 죽이려는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가혹할 수 있단 말인가?’ 진정훈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진유경과 김영희가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거실로 나섰다. “이제 그만두거라!” 진정훈이 여전히 진호영을 때리려고 하자 김영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정훈은 손을 멈추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김영희 쪽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바로 진유경을 바라보았다. 진유경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불렀다. “오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예전에 진정훈은 그녀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소리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라, 응?” “소란이요? 당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우리 어머니를 괴롭혔을 땐 온 힘을 다하더니 이제 와서 우리가 소란 피우는 게 눈에 거슬린단 말인가요?” 김영희를 향해 진정훈은 조금의 자비도 없이 쏘아붙였다. 김영희는 그의 말에 얼굴이 어두워졌고 이 망나니가 하는 말이 점점 도를 넘는다고 느꼈다. 김영희는 옆에 서서 떨고 있는 진유경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유경아, 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진유경에게 돌아가라고 하자 진정훈의 눈빛은 더욱 차갑고 어두워졌다. 진유경은 고은영을 위해 어머니가 준비해둔 작은 집을 불태웠고 그 안의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진유경은 여전히 진 씨 가문에서 게다가 한 채를 차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 얼마나 복받은 일이란 말인가! 진유경은 지금 진정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김영희의 제안을 듣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종적으로 말
김영희는 이 망나니가 미쳐 날뛸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의 여론 파동을 떠올렸다. 비록 일이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이 망나니가 발작을 일으킬 때는 집안의 명예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 아이는 우리와 정이 없지 않니?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과연 가치가 있니?” “정? 고은영은 이 집에서 자라지도 않았어요. 우리에게 무슨 애착이 있겠어요?” “그래, 유경은 이 집에서 자랐으니 그 정이야 어찌 이루 말할 수 없지 않니? 너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가 있니? 버릴 수 있다면 버린다는 말인가?” 진정훈을 보며 김영희는 속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지팡이를 휘둘러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미친놈이었다. 정말로 폭주하면 사실 김영희도 그가 조금 두려웠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서는 진정훈이 진유경을 내쫓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그들이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감정에 호소하고 이성으로 설득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편처럼 보였다. 심사숙고한 후 김영희는 진정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정훈아, 네가 은영을 아낀다는 거 안다. 은영이가 돌아오면 본집에서 살게 해 주면 안 되겠니?” 본집은 진 씨 가문에서 다섯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오로지 어른들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자손들은 모두 작은 별채에서 살고 있었다. 본집에 거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진 씨 가문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유경은 김영희가 고은영이 돌아오면 본집에 머물도록 하자는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영희는 늘 자신을 가장 아껴 주지 않았던가? 그런 김영희가 어찌 고은영을 본집에 머물게 하자고 제안할 수 있단 말인가?’ 진유경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는 이 작은 별채에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렀다. 하지만 방금 김영희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흔들렸다. 만약 자신이 본집에 살 수 있
진이훈은 왕 비서가 장선명에게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보며 나태웅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이제 안지영의 회사는 분명 장선명을 사위로 인정한 모양이다. 나태웅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에 진이훈은 나태웅이 얼마나 억울할지 마음이 아팠다. 이 기간 동안 나태웅은 무엇을 했던 걸까? 장선명은 비밀스럽게 모두의 인정과 신뢰를 얻었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안지영과 하주원이 이미 사람들에 의해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그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주원은 나태웅이 오자 억울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왔네, 사촌 오빠! 이 여자가 나를 죽여버릴 뻔했어!” 안지영은 그 말을 듣고 비웃고 싶었다. ‘이 여자가 먼저 고자질이라니!’ 나태웅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지영을 노려보았다. ‘저 눈빛은 뭐지? 내가 하주원에게 손을 댔다고 저러나? 나태웅은 진짜로 하주원의 말을 믿는 건가?’ 하주원은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안지영은 장선명을 보자 화가 올라와 자신도 다가가 말했다. “드디어 왔네요. 저 짐승이 갑자기 쳐들어 오더니 날 때리고 할퀴었다니까요.” ‘고자질? 누군 못하는 줄 알고?’ 그녀들은 마치 학교에서 싸운 초등학생 같았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니 부모님을 불러오는 초등학생 말이다. 나태웅은 안지영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선명에게 고자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하주원은 계속해서 울며 얘기했다. “정말 너무 잔인했어! 내 머리카락까지 다 뽑아갔어!” 안지영도 대꾸했다. “제 얼굴도 할퀴어서 흉터 생긴 것 같아요!” 진이훈은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선명의 비서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두 명의 아가씨들이 이렇게 서로 고발하는 걸 보니 혹시 두 대표가 직접 손을 쓰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태웅의 기운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위험해
안열은 안지영과 함께한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매우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다. 이전에 안지영의 아버지 안진섭이 의식을 잃었을 때 회사는 안팎으로 위기였다.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안진섭의 결혼식 때는 하늘 그룹을 삼키려 했다. 그때도 그녀는 참을성을 가지고 침착하게 상황을 관리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는데 왜 갑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왕 비서가 말했다. “하주원이라는 여자와 싸웠습니다.” “하주원, 그게 누구예요?” 안열은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안지영과 함께한 시간 동안 한 번도 하주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왕 비서는 조금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 대표님의 사촌 여동생이에요!” 듣고 보니 그 여자가 바로 나태웅의 사촌 여동생이라니, 안열은 순간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안 대표님 다치지 않게 해요. 제가 바로 돌아갈게요.” “알겠습니다.” 안열은 전화를 끊었다. 그때, 나태웅이 하주원이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열이 돌아보았을 때 나태웅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원래는 나태웅이 안열에게 해명을 요구하려던 차였는데 상황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다. 안열이 날카롭게 물었다. “나 대표님, 이제 당신은 제게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셔야겠죠? 왜 당신의 사촌 여동생이 안 대표님에게 손을 댔죠?” 그런데 나태웅은 병상에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병원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 안열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사람, 정말 나를 무시하는 건가? 설명을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이제는 해명을 해줘야 할 차례 아닐까? 그런데 딱 이 시점에 가서 얼굴을 찌푸리며 떠나버리다니. 대체 이 사람 지금 이게 무슨 태도지?’ 그때 진이훈이 뒤따라 나섰다. 안열이
두 여자가 마치 맹수처럼 서로 얽혀 싸우고 있었다. 안지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네 얼굴을 찢어버려야지! 도대체 누가 너더러 감히 나한테 와서 이러라고 했어!” 그녀가 나태웅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그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귀찮게 다가온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주원은 기가 막힌 듯 대답했다. “너 같은 년, 너는 양심도 없잖아! 나는 경고하는 거야, 내 사촌한테 가까이 가지 마! 그 사람는 네가 손댈 사람이 아니야!” “그럼 네가 사람을 멀리 데려가던지! 그 병을 나한테 옮기지 말고!” “너 같은 년은 정말로!” “너야말로, 너희 가족 전부가 다 미쳤어!” 안지영은 거침없이 맞받아쳤다. 하주원은 하늘 그룹의 계승자가 이렇게 무례하고 난폭한 여자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 안지영에게 경고만 하려 했고 안지영이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고 자신에게 이제부터는 나태웅과 연락하지 않겠다며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지영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에서 이렇게 자신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너 그만 놔!” 하주원은 머리가 당겨져서 아팠다. 안지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 방금 나 때리겠다고 하지 않았어? 때려 봐! 나 때려봐!” 하주원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고 비서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는 급히 사람들을 데려와서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한편, 그녀는 급히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안열은 여전히 병원에 있었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이상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진이훈은 나태웅을 한번 보고 다시 안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열이 이곳에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며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보스에게 손을 대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나태웅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안열을 마치 찢어버릴 듯이 차갑고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손을 댄 안열은 점차 차
한편, 하늘 그룹에서는 안지영이 진이훈을 차단한 후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안지영의 세계는 조금 조용해졌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나오자 비서부의 작은 비서가 다가왔다. “안 대표님, 접대실에 하주원 씨라는 분이 오셨습니다.” “하주원?” “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게 누구지?” 머릿속에서 그녀와 관련된 사람을 검색했지만 그 이름은 낯설었다. 그녀는 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비서가 말했다. “나 회장님의 여동생의 딸입니다.” “나태웅의 사촌?” “네, 맞습니다.” ‘이런!’ 그제야 그녀는 고은영이 왜 배준우와 함께 있을 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문제는 언제나 따라왔다. 안지영은 머리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금발의 긴 파마머리로 화려하게 꾸민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지나치게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본래의 단아함을 가리고 풍만한 매력을 풍기며 섹시한 기운을 뽐냈다. 특히 짧은 청바지와 상의가 안지영의 머릿속에 두 글자를 떠오르게 했다. ‘불량소녀!’ 안지영은 쉽게 다른 사람의 외모나 스타일을 평가하지 않지만 그 순간 하주원의 화려한 화장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특히 그린 아이섀도와 은색이 박힌 네일이 그녀에게서 여유보다는 떠도는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하주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안지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당신이 안지영 씨?” 하주원은 적대적인 어조로 물었다. 안지영은 그녀가 왜 왔는지 감을 잡았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저를 찾으러 오셨으면서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나요?” 하주원은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대화는 금세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공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주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안지영에게 다가갔다.
“안지영 씨가 오면 분명히 대표님을 때릴 거예요!” ‘때린다’는 말을 진이훈은 아주 세게 강조했다. 나태웅은 다시 침묵했다. 진이훈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더욱 마음이 아팠다. 보스가 정말 아픈 거였다. 병이 심각해 보였고 이런 상태로 가면 안지영까지 미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아파서 안지영 씨까지 미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진이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나태웅이 정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리 박사님이 이미 왔어요. 큰 도련님께서 의사와 협력해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나태웅은 그 말을 듣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이훈을 노려보았다. 진이훈은 그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맞을 위험을 감수하며 말했다. “몸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진이훈도 답답했다. 나태웅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인데 결국 나태웅과 함께 병원에서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니. 나태웅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꺼져!” 그는 마음속으로 더 괴로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태웅이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걸 보며 진이훈은 다시 물었다. “그럼 안지영 씨가 여전히 안 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유골함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면 돼.” ‘유골함을 열다니! 안지영 씨에게 유골함을 보여준다고?’ 나태웅이 그런 말을 하자 진이훈은 급히 인터넷에서 유골함을 열어본 사진을 찾았다. 그가 캠퍼스를 떠나 처음 일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지만 지금은 이런 유치한 일을 해야 하다니. 안지영을 빨리 오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는 서둘러 그 사진을 안지영에게 보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다고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안지영 씨가 저를 차단했어요. 이제 귀찮아서 오지 않을 거예요.” 진이훈은 힘없이 말했다. 나태웅은 책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췄고 그의 눈빛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
안열은 처음엔 초조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지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지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태웅이 말하길 제가 아침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으면 화장 증명서를 받게 될 거라던데 지금 아침 시간이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잖아요?” ‘한 시간 만에 죽었다고? 화장 증명서까지 나왔다고?’ 안지영은 결국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나태웅, 진짜 못돼 먹었네. 이런 상황에서도 날 도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다니.’ 안지영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열은 뒤늦게 납득하며 말했다. “맞아요! 그럼 결국 장난친 거잖아요?” “화장 증명서가 그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어요.” “설령 진짜 죽었다고 해도 병원에서 절차를 다 마쳐야 화장터로 갈 수 있잖아요.” 안지영은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충격에 휩싸여 허둥대던 그녀는 이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지금 바로 나태웅을 정말 죽여버려도 돼요?” 안열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나태웅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안지영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이미 정신과 의사도 예약했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웅이 진심으로 죽으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지영은 안열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초조해했죠?”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그걸 내가 잘못 볼 리가 있냐고?’ 아까 안열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초조함이었다. 안열은 더 이상 안지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나태웅을 찾아가 따질 생각뿐이었다. 안열은 안지영의 손목을 뿌리치며 말했다. “회의하러 가세요.” “그럼 안열 씨는요?” “저는 마음을 좀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해요!” 안지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러나 지금 나태웅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이미 너무 지쳤다. 회의실로 올라간 안지영은 이제 겨우
‘진짜 너무 악랄해.’ 진이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우리 보스가 안지영 씨에게 얼마나 진심인데 그 마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어.’ 그는 나태웅의 손을 꼭 붙잡으며 혹시라도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이훈의 끝없는 잔소리에 나태웅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러나 진이훈은 더 꽉 붙들며 간절하게 말했다. “우린 안지영 씨 생각하지 말자고요, 네?” 심지어 말 끝에 ‘말 잘 들어요’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나태웅의 눈빛이 점점 더 위험해지더니 낮게 물었다. “우리?” ‘뭐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요! 우리가 아니라 대표님이 안지영 씨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진이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으면 말조차도 안지영 씨와 관련되면 불편한 거야?’ “손 놔.” 진이훈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으며 강하게 말했다. “안지영 씨는 별로예요. 게다가 지금은 장선명 씨와 이미 사귄다는 소문도 있잖아요. 그런 여자를 정말 원하시겠어요?” “내가 손 놓으라고 했지.” 나태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마치 진이훈을 잡아먹을 듯이 날카로웠다. 진이훈은 나태웅의 그 눈빛에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나태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안지영을 헐뜯어봐.” ‘이제 안지영 씨에 대해 나쁜 말도 못 하게 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 여자한테 얼마나 깊이 빠진 거야... 병이 이렇게 심한데도 안지영 씨를 지키려 하다니.’ 한편, 안지영은 진이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곧바로 메시지 창에서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계속 시도했지만 나태웅 쪽에서 받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숨이 가빠지며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
안지영이 여전히 나태웅을 미친놈, 변태라고 욕하는 걸 보며 장선명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돈을 나태웅에게 주면 이 일은 끝나는 거예요?” 안지영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도요?” 만약 이걸로도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나태웅의 머리를 깨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장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제가 처리할게요.” “뭘 하려고요?” 안지영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상태였지만 장선명이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선명 씨가 처리한다고? 항상 유흥가를 드나들던 사람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려는 거지?’ 그녀는 이 순간 깨달았다. 장선명과 나태웅은 원래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이 둘이 얽히게 되었고 나태웅은 정신적으로 예민하고 집요한 수법을 쓰는 반면 장선명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왠지 모르게 건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건달 대 신경질적인 사람? 이 조합은 대체 어떤 장면을 만들어낼까?’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장선명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뭘 어떻게 하겠어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그게 가장 좋은 거죠.” ‘아니, 뭐야 이 사람...’ 다음 날 아침. 나태웅은 병원에서 안지영이 만두와 인절미를 들고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고 대신 그의 은행 계좌에는 무려 600억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돈을 보낸 계좌는 안지영이 아니라 장선명의 것이었다. 이 돈을 확인한 나태웅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그 순간,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던 진이훈이 그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나 대표님, 진정하세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만 하시면 돼요!” 원래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진이훈의 그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안지영은 안 왔나?” “네, 안 왔어요. 왜요? 안지영 씨가 오늘 온다고 했나
‘손자가 한심하다고 할아버지가 나서서 사람까지 뺏으려 한다고? 이게 과연 체면이 서는 행동인가?’ 이 생각에 장선명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안지영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침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장선명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네, 나태범 쪽에서 지영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나서 주셔야 해요!” 평소에 절대 어른들을 끌어들이지 않던 장선명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는 즉각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선명의 할아버지는 안지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으므로 이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나씨 가문 둘째 녀석이 정말로 지영이 때문에 자살 소동을 벌였단 말이냐?” “그럼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지영이와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야, 이놈아. 네가 언제 이렇게 도덕 따지는 놈이었냐?” 심지어 먼저 사귀었다고 설명까지 덧붙이다니. 그의 할아버지조차 손자의 변명이 웃길 따름이었다. “아무튼요. 상황을 미리 알려드렸으니 종대 아저씨에게 나씨 가문 쪽 상황을 살펴보라고 해 주세요.” “알겠다!” 한편, 옆에서 이 전화를 듣고 있던 안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대충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황당함을 느꼈다. 결국 나태범이 나태웅 때문에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 가족 제정신인가? 나태웅이 나를 협박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 할아버지까지 협박에 나선다고? 힘으로 어린 사람을 억누르겠다는 건가? 내가 보호받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만약 안진섭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상황에서도 안지영을 지켜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안열이 말했듯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착하고 온화했으니까. 장선명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안지영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가가 물었다. “언제 왔어요? 다 들은 거예요?” 안지영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