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철저하게 계획한 거였네.’남설아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나 진짜 얌전히 있을게. 말 잘 들을게.”말은 순하게 했지만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복도만 벗어나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이 건물 자체를 벗어나야 진짜 살아나갈 수 있었다.서도현은 수표와 열쇠를 챙기고 나서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남설아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그러고는 복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남설아는 공포에 질려 몸부림치며 소리치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도현을 쳐다봤다. ‘제정신인 건가?’서도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한번 뺨을 세게 갈겼다.“이 미친년아, 진짜 내가 멍청한 줄 알았냐?”“너 같은 년한테 속을 줄 알아? 오늘은 일단 실컷 즐길 거니까 다 끝나고 나서 공증이든 뭐든 하러 가자!”서도현은 한 손으로 남설아의 두 손목을 움켜잡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띠를 풀며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벌이려는 기세였다.이성적인 접근이 통하지 않자 남설아는 완전히 미친 듯 발악하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뒤이어 그녀는 타이밍을 재더니 무릎을 치켜들어 힘껏 찼다.“으아악!!”“남설아! 이 미친년! 감히 날 걷어차?!”서도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삶은 새우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몸을 웅크렸고 그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끙끙댔다.남설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몸을 굴리며 일어선 뒤 그대로 기어가다시피 문 쪽으로 달렸다.이번이 유일한 기회였다. 다시 잡히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만 내달렸다. 숨이 막혀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출 수 없었다.“거기 서! 남설아, 이 미친년아! 감히 도망쳐?! 잡기만 하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서도현이 뒤에서 악을 썼지만 조금 전 당한 타격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체력 차는 너무 컸다.남설아가 거의 문에 도달해 탈
‘우민 씨’라는 이 한마디에 송우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뭔가 다정하게 들리네. 죽다 살아나는 순간에도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 여자, 정말 보통이 아니네.’송우민은 말없이 남설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도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데려가.”“네!”곁에 있던 전기태가 곧장 앞으로 나서더니 서도현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차에 실어버렸다.그제야 서도현도 자신이 건드린 상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깨달은 듯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다급하게 외쳤다.“안, 안 돼! 나한테 손대지 마! 내 매형이 배서준이야!”“네 매형이 배서준이면 뭐? 그래서 넌 더 죽어야지.”전기태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주먹을 날렸다.송우민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배서준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원수이자 송우민이 모든 걸 잃게 만든 장본인이었다.병원, 병실.다시 눈을 떴을 때 남설아는 온몸이 쑤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목덜미를 더듬어 확인했다. 살아있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혼잣말처럼 웃었다.“휴,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네.”“그래도 멘탈은 괜찮은가 보네?”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송우민은 남설아가 깨어난 뒤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설아는 처음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다.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곧 남설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강연찬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와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들여다봤다.“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어디가 아파?”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남설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강연찬의 다급한 모습에 송우민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오르며 콧소리가 절로 나왔다.“여기 나도 있는데?”그 한마디에 강연찬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남설아 앞에
“동문이야.”강연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남설아를 바라봤다.원래는 이런저런 경고와 당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설아야, 어디 아프진 않아?”그는 애틋하게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다.“배씨 가문은 너한텐 너무 위험해. 제발 이혼해. 네가 원하면 뭐든지 내가 도와줄게.지금 난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알겠지?”“싫어.”남설아는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고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수표 효력을 취소하고 금고 열쇠 분실 신고까지 해버린 것이다.그건 겨우겨우 손에 넣은 중요한 것들이었기에 절대 그런 쓰레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그땐 시간만 벌려고 그랬을 뿐 지금은 몸을 추스르고 정신도 돌아왔으니 더는 잃을 이유가 없었다.남설아의 이런 대처를 보며 강연찬은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고 느꼈다.그리고 확실히 깨달았다.남설아의 마음속에는 이제 배서준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을.그녀가 지금 마음속으로 바라는 건 오직 ‘되찾는 것’뿐이라는 것을.“선배,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직접 되찾을 거야. 다른 사람 손 빌릴 필요 없어.”“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내 힘으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사람이야. 난 나를 지킬 수 있어.”남설아는 전화를 끊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는 배서준의 집에서 5년 동안 ‘새장 속의 새’로 살았다.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했다.다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심지어 누군가의 호의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설아야, 난 그냥 널 돕고 싶었을 뿐이야.”남설아의 말에 강연찬은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자신의 도움이 그녀에겐 오히려 짐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이 씁쓸했다.그의 그런 표정을 보며 남설아는 괜히 미안해졌고 마음 한켠이 아릿해졌다.하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선배, 날
지금 배서준은 비록 서유라 곁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원래는 전날 밤 남설아를 따로 불러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서유라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어쩔 수 없이 밤새 곁을 지켜야만 했다.남설아가 얼마나 기다렸을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이전 같았으면 배서준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괜히 미안하고 뭔가 잘못한 기분까지 들었다.“서준아, 오늘 회사 가지 마. 나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서워...”서유라는 눈물까지 머금고 배서준의 소매를 붙잡았다.그녀는 아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지금 배서준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남설아라는 걸.이런 현실이 그녀의 마음을 더더욱 뒤틀리게 만들었다.오랜 시간 공들여 겨우 붙잡은 배서준인데 고작 며칠 만에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절대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투는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했다.“지금 전환 프로젝트가 중요한 시기야. 빠질 수 없어. 몸 안 좋으면 집에서 좀 쉬어.퇴근하고 바로 올게. 알았지?”“싫어. 서준아, 나도 같이 갈래. 나 혼자 있긴 무서워...”서유라는 다시 한번 그의 소매를 꼭 붙들었다.예전의 배서준이라면 그녀의 이런 의존이 귀엽게 느껴졌겠지만 오늘따라 그녀가 무척 유치하게 느껴졌다.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데리고 회사로 향했다.“남설아 보고 프로젝트 경과 보고하라고 해.”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배서준이 단호하게 지시했다.천기준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며 서 있었고 얼굴에는 난감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안 들려?”배서준은 그가 미동도 하지 않자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착각인진 모르겠으나 요즘 들어 배건 그룹 안에서조차 자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듯한 기분
한원준이 사무실에서 나올 때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기술팀 자리로 돌아온 그는 물 한 모금을 힘없이 마시더니 푸념하듯 말했다.“대표님 오늘 도대체 왜 그러신 거야? 이 기획안, 전에는 엄청 잘됐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아주 쓰레기 취급이야. 한 시간 넘게 혼나고 나왔어. 내가 무슨 천벌 받을 짓 했나?”“오늘 팀장님이 안 와서 다행이죠. 안 그랬으면 그 화살 전부 팀장님한테 꽂혔을걸요?”따뜻이 다가온 오민지가 견과류 한 봉지를 건네며 싱긋 웃었다.그 말을 들은 한원준은 당장 기분이 묘해졌다. 오민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민지 씨, 진짜 사람 맞아? 방금 입에서 나온 말, 스스로 돌이켜는 봤어? 팀장님 목숨은 소중하고 내 목숨은 안 귀해?”“근데 우리 팀장님 요즘 왜 자꾸 결근하시는 걸까요? 오늘도 또 휴가래요. 혹시 대표님한테 맞아서 침대에서 못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오민지의 소리에 한원준은 하마터면 견과류를 뿜을 뻔했다. 그는 당장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민지 씨, 입에 자물쇠 하나 달아 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해? 우리야 그냥 회사원일 뿐인데 대표님이랑 사모님의 애증 관계를 우리가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되는 줄 알아? 죽고 싶어?”“일해, 일!”한원준은 주변의 수군거리는 시선을 손으로 내쫓듯 휘젓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한편 남설아는 다쳤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고통을 꾹 참고 다시 코딩을 이어가고 있었다.송우민이 도착했을 때, 남설아는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그를 묘하게 자극했고 또 부럽게 만들었다.그도 원래는 남설아처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며 빛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걸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여기서 이렇게 여유롭게 일이나 하고 있고 좋겠다?”송우민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비꼬는 말투지만 남설아는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를 보자마자
“서도현?”그 이름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었다. 남설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이를 갈듯 말했다.“그 망할 자식만 생각하면 열이 확 받아. 그놈 때문에 지금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죽을 만큼 아픈 거 아니야. 민아, 네가 꼭 누나 복수해줘야 해, 알겠지?”“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송우민은 이를 악문 그녀의 표정을 보며 왠지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설아는 당장이라도 그 자식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가서 아주 그냥 피떡 될 때까지 두들겨 패. 피범벅 되게. 그리고 해변가 별장 문 앞에 던져놔.”“패기만 하면 돼?”송우민은 의외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의외로 착하네?”남설아는 그 말투가 자기를 놀리는 거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말투 왜 이렇게 여자 같냐? 철딱서니 없이. 먼저 물어본 건 너잖아. 내가 답하니까 또 태도 바꾸냐?”“이 정도로 큰일 도와주는데 뭘로 보답할 건데?”송우민은 더 이상 장난 섞인 태도는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이 인간, 역시 쉽게는 안 넘어가네. 그냥 도와줄 리가 없지.’남설아는 이를 갈며 송우민을 노려봤다.“말해. 뭘 원해?”“배건 그룹 최근 5년간 핵심 사업 자료 전부.”그는 망설임 없이 조건을 내걸었다.대단한 요구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오히려 다행이었다.“지금 당장은 없지만 몸만 회복되면 바로 넘겨줄게. 어때?”남설아는 웃는 얼굴로 단번에 받아들였다.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송우민은 얼굴 표정이 확 바뀌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비웃듯 말했다.“내가 서도현인 줄 알아? 시간 끌기 같은 거, 감히 나한테 써?”‘이 사람 혹시 여우가 사람으로 변한 거 아닐까? 눈썹 진하고 인상 좋아 보였는데... 은근히 뒤끝 있다니까!’남설아는 속으로 분통이 터졌다.“근데 진짜 지금은 가진 게 없단 말이야.”“3년 전 인터넷 경진대회. 그쪽이 우승자였지?”송우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다 알아.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