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이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찍어냈고 곧 서유라는 해당 영상을 전달받았다. 영상은 매우 선명했고 편집이 가해진 티가 분명했다.서유라는 그 영상을 바로 배서준에게 가져갔다.“서준아, 봐. 설아 씨가 배건 그룹 지분을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어!”영상은 교묘하게 앞뒤 내용이 잘려 있었다.서유라는 알고 있었다. 앞부분 내용 따윈 배서준이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걸.하지만 ‘배건 그룹’이라는 단어만큼은 그의 심장을 건드릴 것이 분명했다.배서준은 영상을 본 순간 눈빛이 확 바뀌었고 두 손을 꼭 쥔 채 핏대가 설 정도로 분노를 억누르다 못해 결국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렸다. 깨진 조각이 바닥으로 튀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며 그 자리를 떠났다.서유라는 그런 배서준의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산산조각 난 핸드폰을 흘끗 보고는 냉소를 흘렸다.애정 같은 건 그저 흐릿한 감정에 불과하다. 이 남자에게 진짜 치명적인 건 ‘이익’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이번엔 남설아가 제대로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었다.남설아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아침에 자기 방을 청소했던 객실 청소 아주머니를 신고했고 바로 증거 영상까지 함께 제출했다. 그녀가 호텔에서 해고되자마자 남설아는 그 여자가 훔쳐 갔던 USB를 되찾았다.우는 아주머니를 마주하고서도 남설아의 눈빛엔 단 1도 흔들림이 없었다.그녀는 감정에 휘둘리는 성인군자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든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USB를 손에 든 채 방으로 들어서자 문을 열자마자 무거운 기류가 밀려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배서준을 보자 남설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남설아, 이 나쁜년!”배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다가와 남설아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현관문에 내리찍듯 밀쳤다.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말 그대로 이를 갈고 있었다.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설아야’라는 말 한마디에 남설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닭살이 다 돋을 정도였다. 믿기 힘든 눈빛으로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어떻게 저토록 혐오스러운 말이 저 입에서 나올 수가 있지?’남설아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싸늘하게 말했다.“내 딸은 죽었어요. 그런데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냥 치기 어린 짓이라고 생각해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 배서준 씨, 그렇게 돈이 많으면 거울부터 좀 사서 보세요.”“알아. 그 아이 일은 네가 마음속에 못 놓는 매듭이란 것도. 근데 아이를 좋아한다면 우리 다시 낳으면 되잖아.”배서준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지만 지금은 이미 남설아의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에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당연하다는 듯 굴고 있는 배서준을 보며 남설아는 그저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사실 그녀는 배서준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는 건 오히려 과거의 자신이었다.예전에는 배서준이 마치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결국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의 ‘사랑’이 그에게 후광을 씌운 것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사랑이 사라졌고 후광도 함께 꺼졌다. 남은 건 그저 허세만 가득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서준 씨, 지금 당장 나랑 이혼해요. 줘야 할 거 주고 우리 깔끔하게 끝내요.”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배서준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부어오른 눈 때문에 그녀의 얼굴조차 흐릿하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배서준은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뿌리 깊은 혐오감만큼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이혼 못 해.”배서준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이 여자를 어떻게든 떼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요즘의 남설아는 정말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니까.배씨 가문의 아내로 이런 여자가 있다는 건 어디 내놔
바닥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남설아는 다리에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저릿저릿해진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일어서려던 그 순간 문이 갑자기 바깥에서 세게 걷어차이더니 쾅 소리와 함께 열려버렸다.그 충격에 남설아는 한참이나 밀려 나가며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고통에 찬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자 건장한 남자 넷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당신들 누구예요? 뭐 하자는 거예요?!”남설아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 했지만 조금 전의 충격에 스프레이는 이미 멀리 튕겨 나가 있었다. 결국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나무 조각 하나를 움켜쥐며 그녀는 저항하려 했다.하지만 그 네 명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다가왔고 남설아가 쥔 나무 조각을 발로 차서 날려버리더니 곧바로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머리카락이 뽑힐 듯 당겨지며 남설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떻게든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분명 이곳은 5성급 호텔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하늘도 땅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놔요! 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불법인 거 몰라요?!”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그러자 남자 중 한 명이 성가시다는 듯 남설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기 직전 남설아는 그들 중 한 명이 내뱉은 거친 욕설을 희미하게 들었다.다시 눈을 떴을 땐, 손과 발이 모두 꽁꽁 묶인 상태였다.한참이나 지나서야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고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저 온몸이 아팠고 뼛속까지 피로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남설아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어떻게든 좀 편한 자세를 찾아내고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이렇게 대놓고 들이닥친 걸 보니 분명히 배경이 있는 놈들일 테고 당장 죽이지 않았다는 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시간이
남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목숨이 걸린 일에 비하면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처음 보는 사이에 굳이 형식 따질 것도 없잖아요.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역시 똑똑하네. 내 이름은 송우민이야. 누가 내게 이 억대 돈을 주면서 네 목숨을 원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널 죽이기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이 말을 하며 송우민은 주머니에서 수표 한 다발을 꺼내더니 남설아 얼굴 쪽으로 그대로 던졌다.하얀 수표들이 눈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고 몇 장은 남설아 눈앞에 닿았다.남설아는 고개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봤다. 수표 하단에 적힌 이름을 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인연이라는 게 끊으려 해도 지저분하게 엮여 있네요. 감방에 들어가면서도 날 끌어들이는 거 보니 진짜 내 좋은 외삼촌 맞다니까.”남설아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눈빛 속에 담긴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여자의 이런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낀 송우민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강제로 얼굴을 들게 했다.“대체 누가 네 목숨을 노리는지 궁금하지도 않아?”“혹시 알고 있어요?”남설아는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진짜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 꽤 멍청한 인간이겠네요.”송우민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잠깐 멈칫했다. 이 여자가 이런 수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는 손을 거둬들이며 무표정하게 옆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를 바라봤다.그러자 ‘기태’라 불리는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남설아의 몸에 묶여 있던 줄을 풀어주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순순히 협조해. 안 그러면 진짜로 죽는다?”“믿어요. 한 방이면 제 머리통을 돌아가게 할 힘은 있으시잖아요.”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그의 힘을 인정해줬다.전기태는 그간 수많은 인질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유쾌한 인질은 처음이었다.그는 피식 웃으며 송우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 나가 있어. 이 여자랑 단둘이 얘기 좀 할게
“뭐? 그 자식이 널 안 좋아한다고?”송우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보며 이 사람을 상대로 한 게 실수였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그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아요.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여자가 있어요. 난 그냥 가문에서 정해준 결혼 상대였을 뿐이에요. 원래는 그냥저냥 살려고 했죠. 하지만 내 딸을 죽게 만든 그 일 때문에 더는 용서할 수 없고 절대 가만두지도 않을 거예요!”남설아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단호히 말했다.“송씨 가문을 다시 되찾고 싶다면서요? 그럼 우리 손 잡는 게 어때요?”“손을 잡자고?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송우민은 코웃음을 치며 얼굴에 대놓고 경멸을 드러냈다.바보도 아니고 이 여자가 지금 일부러 말을 끌고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나 배건 그룹 지분 51% 가지고 있어요. 원하면 다 줄게요.”남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녀 입장에서 이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았다.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내줄 각오가 돼 있었다.그 말을 들은 송우민은 예상치 못한 정보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정까지 딱 15분 남았어요.”“곧 누군가 이곳을 포위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나랑 손잡자는 말은 없던 일로 할 거예요.”남설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목에 찬 시계를 송우민에게 흔들어 보였다.“다음에 납치할 때는 신원조사 꼭 하고 해요. 나 기술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든요. 온몸에 장비 장착하고 다녀요.”“이 시계 안에는 내가 만든 GPS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요. 특수 기능도 하나 있죠. 자동 신고.”이제 놀 만큼 놀았다고 생각한 남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싱긋 웃었다.자신의 마지막 패를 스스럼없이 공개한 것이었다.그 당당한 표정에 송우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15분이라... 과연 내가 먼저 포위당할까, 아니면 네가 먼저 내 손에 죽을까?”그 말에도 남설아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내 생각엔 그쪽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죽고 싶진 않을 거예요. 나같이 이
“노트북 하나 줘요.”남설아는 울다가 웃은 얼굴로 말했다.사실 처음에 이 프로그램 만들 때는 중간에 해제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설정해 둔 거라 지금 와서 해제하려니 꽤나 번거로웠다.송우민은 별말 없이 부하에게 눈짓해 노트북을 가져오게 했다.남설아는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프로그램을 조작했고 결국 5분 안에 경보 시스템을 해제해냈다.그런 다음 송우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실 이 경보 시스템, 꽤 비싸요.”“죽고 싶어?”송우민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남설아는 입만 열면 꼭 사람 속을 긁는 말만 골라서 했다. 거슬리고 짜증 나고 아주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송우민이 진심으로 화난 걸 느낀 남설아는 한숨을 쉬며 작게 말했다.“그럼 우리 이제 자리 좀 옮겨서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긴 좀... 애매해서요. 편하지도 않고.”“그래, 따라와.”송우민 역시 이 공간이 다음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카페에 앉는 순간까지도 남설아는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자기를 납치한 범인과 이렇게 한자리에서 커피 마시며 대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정말 웃긴 상황이었다.커피잔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쉰 남설아는 송우민을 바라보며 물었다.“결국 돈이 목적이에요? 아니면 목숨이에요?”“둘 다.”송우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송가는 배씨 가문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그러니 배씨 가문 역시 똑같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자본의 세계가 피 냄새 나는 법이라는 걸 남설아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 답변이 전혀 의외는 아니었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그럼 확실히 말해두죠. 그 사람 죽이고 나서는 나 건드리면 안 돼요. 지금 우리는 부부라고는 하지만 껍데기뿐인 관계예요. 곧 남남이 될 거고 나까지 엮이면 안 돼요.”“진심이야?”송우민은 더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남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말한 게 진심이라는 증거들을 하나둘
송우민은 남설아의 슬픔을 느끼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그의 뜻밖의 너그러운 태도에 남설아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지금 이 세상 모두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에겐 상관없었다.단 하나, 자신의 계획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목숨이든, 자존심이든, 사실 남설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놨다.이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따라가 배나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송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빛이 살짝 달라지더니 탁자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가볍게 웃었다.“참, 묘한 여자네.”“형님, 이렇게 그냥 보내버리면... 의뢰인한텐 뭐라 말하죠?”전기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우민을 바라봤다.그러자 송우민은 그를 보며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꾸했다.“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 사람한테 무슨 설명을 해? 그리고 말이야, 저 여자가 벌인 일은 지금 가리고 숨기기에도 벅찰 판인데 뭐? 되레 우리가 책임지라고?”“형님, 그래도 이건 좀... 규칙을 어기는 거 아닌가요?”전기태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처음 보는 여자 하나 때문에 평소의 원칙을 어기는 송우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돌아온 건 송우민의 싸늘한 시선과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커피잔뿐이었다.남설아는 카페에서 나온 순간까지도 이 모든 상황이 마치 꿈속 같았다.호텔에 돌아왔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그녀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속에 자신을 잠기게 했다.숨이 막힐 듯한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땐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몸을 닦지도 않은 채 그녀는 그대로 욕실 거울 앞에 섰다.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피멍이 든 자국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다.“기억해. 오늘 이 모든 건... 다 서유라, 네가 만든 결과야.”남설아의 눈빛엔 차디찬 증오가 담겨 있었고 두
“아아악!!”서유라가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거칠게 날뛰던 그녀는 급기야 자기 팔을 긋기 시작했고 여러 군데서 피가 철철 흘렀다.곧장 호텔 직원들이 옆방 투숙객의 항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나같이 혼비백산했다.직원들은 급히 배서준에게 연락을 시도했다.한편 배서준은 어렵게 시간을 내 천주에 와 있었고 여러 사람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잔이 오가며 거의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마시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서유라 이름이 뜬 화면을 본 배서준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드디어 받으셨네요. 유라 씨가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빨리 와서 처리 좀 해주세요!”그 말에 배서준의 얼굴이 확 변했고 그는 결국 잔을 내려놓고 급히 자리를 떴다.조성우는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남설아가 너무 안됐다 싶었다.배서준이 떠나자 조성우는 바로 강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연찬은 남설아를 데리고 그 자리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본 조성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남설아를 바라봤다.“설아 씨는 여기 웬일이에요?”그 말에 남설아는 이 자리가 자신에게 예정된 자리가 아니었단 걸 눈치챘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색한 침묵 끝에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면... 믿을래요?”“친구들끼리 모여서 얘기 좀 하는 게 뭐 어때서요.”강연찬은 남설아의 손을 끌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그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며 진지하게 말했다.“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배서준과 어떤 사이든 간에 지금 난 법적으로 그 사람의 아내야. 밖에선 모두가 날 사모님이라 부른다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오빠랑 얽히는 건 나도 싫고 오빠에게도 민폐야.”그 말을 끝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알고 있었다. 강연찬은 그녀의 앞날을 위
“서유라 씨가 저보고 개래요. 대표님은 말리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때리려고 했어요.”천기준은 말할수록 억울함이 북받쳤다.명문대 출신에 수년간 배서준을 따라 일해 왔건만 돌아오는 건 모욕뿐이라니, 그것도 제대로 된 사과나 공정한 대우조차 받을 수 없다니.‘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하는 사람도 사람인데, 감정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뭐요?”남설아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설마 이런 이유였단 말이야? 진짜로 이 일 때문이었어?’배서준은 지금 서유라한테 완전히 미쳐버린 상태였다.이젠 이성이 마비됐는지 자기 옆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을 모욕하는 걸 그냥 두고 보질 않나?진짜 머리에 뭐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아니,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난 게 틀림없었다.“걱정 마요. 이번 일은 내가 기억해둘게요. 언젠가 꼭 되갚아줄 겁니다.”“지금 당장 회사 최근 5년간의 핵심 자료가 필요해요. 구할 수 있어요?”이미 서로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남설아는 더는 멋쩍게 굴 필요가 없었다.이젠 파트너이니 필요한 건 당연히 요구할 수 있었다.천기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구할 수 있어요.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한데 내일 밤까지 드릴게요.”이렇게 말하고 일어선 천기준은 망설이다가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저 이제부터 설아 씨 편이에요. 그 말은 곧 배 대표님을 배신하겠단 뜻이죠. 모두가 배신자를 어떻게 보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설아 씨도 목적 달성하면 절 옆에 두지 않을 거란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 돈이 필요해요. 멀리 떠나서 새 인생 시작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요.”사실 남설아는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좋았다.뒤에서 어정쩡하게 기회만 노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결국 남설아가 웃으며 말했다.“200억. 일 끝나면 200억 줄게요. 멀리 떠나서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예요.”“감사합니다, 남 대표님!”천기준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솔직히 처음엔 남설아 성격상 많아야 몇억을
바보도 아닌데 서유라가 천기준의 말에 담긴 냉소와 비아냥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천 비서님은 그냥 서준이 옆에 붙어 다니는 개일 뿐이잖아요! 근데 감히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요? 일하기 싫어진 모양이죠?”그러자 천기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대꾸했다.“죄송합니다, 서유라 씨. 저는 배 대표님의 개가 아니라 비서거든요. 개가 좋으시면 대표님께 새로 한 마리 사달라고 하시죠.”서유라는 천기준이 이렇게까지 대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라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뺨을 올려쳤다.하지만 천기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고 차갑게 말했다.“서유라 씨, 선은 지키시죠.”그 순간 병실에 들어선 배서준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성큼 다가와 천기준을 가로막았다.그러고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대표님, 서유라 씨가 제 뺨을 때리려 했습니다.”천기준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곧 그녀의 손목을 놓으며 덧붙였다.“전 단지 제 몸을 방어했을 뿐입니다. 공격할 생각은 없었습니다.”서유라는 억울함과 분노에 눈이 뒤집힌 채로 배서준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서준아, 난 진짜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저 사람이 계속 날 모욕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모두가 나한테 이래?”천기준은 이런 ‘울고 떼쓰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서유라의 방식에 익숙했기에 담담하게 받아치듯 말했다.“병원 CCTV는 음성까지 녹음됩니다. 정말 억울하시다면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됩니다.”이 말에 서유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배서준 품에 안긴 채 흐느끼는 것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배서준도 바보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한 명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여자, 한 명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온 비서.두 사람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배서준은 천기준의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비켜!”배서준은 고함을 내질렀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돌아서 있었다.하지만 간병인 안경희는 배서준이 누군지도 몰랐기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이봐요, 전 제 환자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나가 계세요. 이 사람 제 남편이에요.”‘남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남설아의 말투에선 명백한 비웃음이 묻어났다.그 말을 들은 안경희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남설아를 돌보며 봐왔던 남자는 언제나 강연찬이었고 이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남편이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이렇게 험악하게 구는 남편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스러운 얼굴로 남설아에게 물었다.“정말 경찰 안 불러도 괜찮아요?”“괜찮아요, 나가 계세요.”남설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안경희의 손등을 살며시 눌렀다. 진정시키려는 듯한 동작이었다.안경희는 코웃음을 치고 배서준을 노려보았다.“나 문 앞에 서 있을 거니까 손끝 하나라도 대 봐요, 바로 신고할 테니까! 멀쩡하게 생겨선 아내 때리는 놈이라니, 에잇!”그러고는 어깨로 배서준을 밀치며 씩씩하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안경희에게 호되게 당한 배서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그런 모습을 보며 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배서준 같은 사람한테 저런 대접은 평생 처음일 게 분명했다.“서준 씨, 지금 당신 꼴 좀 봐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남설아는 몸을 조금 옆으로 틀어 가능한 한 그와 거리를 뒀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딱 하나만 묻겠어. 송우민이랑 아는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악물고 남설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표정 하나하나를 다 읽어내려는 듯 의심과 긴장이 얽혀 있는 눈빛이었다.결혼 후 이렇게까지 그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선 안에서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남설아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역겨움을 느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설아가 서도현이 한 짓이라고 했지. 너랑은 무슨 상관이야? 네 동생은 원래 하는 일 없이 빈둥대던 애였잖아. 엇나간 짓 좀 했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배서준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유라는 그 말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이젠 자신이 배서준 마음속에서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걸.예전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이성이니 판단이니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언제나 감정대로 움직였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까지 차분하다고? 이제는 날 신경도 안 쓰는구나.’“서준아, 설마... 날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서유라는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나도 내가 요즘 어떤지 알아. 진짜 미안해. 그런데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너무 사랑해서 그래. 너 없이는 안 돼. 진짜 난 너 없으면 안 돼.”말을 하면서 그녀는 조수석에 몸을 웅크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런 서유라의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약해진 배서준은 말투도 한결 누그러졌다.“너한테 화내려는 건 아니었어. 그리고 너 떠날 생각도 없어. 걱정하지 마.”“정말... 정말 믿어도 돼? 정말 날 떠나지 않을 거야?”서유라는 눈가가 촉촉히 젖은 채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배서준은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려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지, 바보야. 내가 어떻게 널 떠나.”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사이였고 수십 년 동안 마음속에 그녀를 품어온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둘은 말없이 차를 타고 해변가 별장까지 도착했다.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서유라는 비명을 지르더니 바로 배서준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배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에 매달린 서도현을 바라봤다. 피범벅이 된 몸을 본 순간,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당장 내려!”그의 명령에 별장 안의 도우미가 덜덜 떨며 서도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사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서유라는 비로소 그게 자기
고통이 클수록 남설아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배서준은 병실을 나서자마자 서유라의 팔을 거칠게 붙잡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고 자신의 차까지 갔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서도현한테 전화해.”“서준아?”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서준을 바라봤다.“너 정말 설아 씨 말 믿는 거야? 진짜 도현이가 그랬다고 생각해?”“전화하라고.”배서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번엔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었다.서유라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들었지만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서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서도현은 손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모진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아아아아악!!”비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울려 퍼진 핸드폰 벨소리는 그에게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형님! 형님! 저 돈 있어요! 전화 좀 받게 해주세요, 제발요!”서도현은 연신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제는 정말 더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전기태는 매질하느라 저린 손을 털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남자라는 놈이 여자나 패고 다니더니 이제 와선 우리한테 사정이나 하고 있어? 퉤! 네 그 몇 푼 더러운 돈 누가 신경이나 쓴대?”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힘껏 채찍을 내리쳤다.이제 진짜로 더 못 견딜 것 같았던 서도현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형님, 진짜 돈 있어요! 제발요! 제 몸에 260억짜리 수표 있어요! 다 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요!”그 말에 전기태는 순간 멍해졌다.‘이런 놈이 260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었다고?’전기태는 곧장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고 정말로 그 수표를 꺼냈다. 한참을 확인한 뒤, 그는 곧바로 자기 부하에게 넘겼다.“야, 내가 널 완전 우습게 봤구나. 너 좀 있네?”“보아하니 그 여자한테서 꽤 많이도 뜯어냈구먼. 진짜 찌질함의 끝판왕이네.
“남설아, 나 정말 너랑 싸우기 싫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냥 솔직히 말해.”배서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지금 회사는 전환의 중요한 시점에 있었고 하필이면 집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 그는 정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그런 배서준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설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서준 씨, 나 당신이랑 이혼하고 싶어요. 공평하게, 내가 받아야 할 건 전부 다 받는 조건으로요.”“뭐라고?”배서준은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심지어 다시 아이를 가지는 것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게 결국 돈 챙겨서 떠나는 거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던 인내심과 온화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배서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이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내 재산 나눠 가져서 결국 강씨 가문 그놈 도와주려는 거였어? 나쁜년... 대체 두 사람 언제부터 붙어먹은 거야!”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남설아는 비웃음을 터뜨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결혼을 우습게 여긴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고요?”“남설아,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배서준의 손이 점점 더 힘을 주기 시작했다.숨이 막히기 시작하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설아는 몸부림치다 상처가 당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그 눈물이 배서준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분명 차가운 물방울인데 배서준은 마치 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손을 홱 빼버렸다.그는 천천히 몸을 세우고 눈물에 엉망이 된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오랜 세월 부부로 지내면서 온갖 모습을 봤다.교활하고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사람을 다루는 모습들을 말이다.그가 제일 싫어하던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왜인지 모르게 남설아의 눈물이 똑 떨어질 때마다 마음 한구
남설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 모습이 어찌나 억울하고 안쓰러운지 배서준의 마음이 한순간 흔들렸다.서유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대놓고 유혹하는 작전까지 쓰네?’배서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걸 보자 서유라의 머릿속엔 경고등이 켜졌다.“서준아, 도현이는 절대 그런 짓 안 했어. 남 팀장이 거짓말하는 거야. 이건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맞아,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유라 씨 말이 다 맞지.”남설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동의했다.그 말투, 그 표정에 또다시 화가 치밀어오른 서유라는 씩씩대며 성큼 다가와 이를 악물고 말했다.“설아 씨가 서준이 때문에 예전부터 나 싫어한 거 알아. 근데 날 싫어하면 날 미워하면 되지, 왜 하필 우리 동생이야? 걔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설아 씨가 그렇게 대할 이유 없어!”“내가 걔한테 뭘 했다고 그래? 내가 때렸어? 욕이라도 했어?”남설아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갈비뼈 쪽을 손으로 짚으며 배서준을 바라봤다.“당신은 당신 와이프한테 다른 여자가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세상에 이런 남편이 또 있을까?”그가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구속하려는 거라면 자신도 그대로 받아치면 되는 일이었다.‘남편’이라는 자리를 원한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닐까?“유라야, 진정해. 나 혼자 얘기 좀 할게. 잠깐 나가 있어.”배서준은 서유라의 팔을 살짝 잡아끌며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서유라는 여전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이를 갈며 남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고는 병실을 나섰다.서유라가 나가고 나자 병실엔 남설아와 배서준, 단둘만 남았다. 공기는 잠시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치료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배서준이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비록 법적으로는 부부고 아이도 있지만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른다. 대화도, 감정도, 공통의 언어도 거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남설
배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자기 정체부터 내세웠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에서 화낼 자격은 자신 쪽이 더 있다는 태도였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연찬은 더 말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걸 직감했고 입꼬리만 살짝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자기 위치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더 이상 자리만 차지하고 일도 안 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강연찬 씨. 남의 가정 사이에 끼어들어 놓고 그렇게 떳떳합니까? 우리 집안 어른들이 알면 그쪽은 끝이에요.”배서준은 비웃듯 말하며 경고를 날렸다.“배건 그룹 대표란 인간이 고작 하는 짓이 어른한테 일러바치는 거라고요? 진짜 웃기네요. 유치하게.”강연찬은 한마디 남기고 남설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남설아는 조용히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눈을 들자마자 마주친 건 배서준의 날선 눈빛이었다.“내가 몇 번을 말했어? 넌 내 아내야. 배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남자들이랑 밖에서 얽히지 말라고 했잖아! 창피하게 굴지 마!”“너랑 강연찬,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야?”배서준은 이를 꽉 물고 남설아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덮쳐 물어뜯을 기세였다.“맞아, 남 팀장.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사람 기죽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남편인 서준이를 이 정도로 무시할 줄은 몰랐네.”서유라까지 거들고 나섰는데 말끝엔 마치 남설아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통증도 심한 데다 두 사람의 짜증 나는 공세까지 들으니 남설아의 얼굴빛이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갈비뼈 부근을 감싸 쥐고 차분하지만 날이 선 눈빛으로 배서준을 바라봤다.“어젯밤에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다고요. 거기서 진짜 죽을 뻔했고요. 그건 알고 있어요?”“난...”배서준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꺼내려 했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무슨 소리야?”“당신이 준 주소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거기엔 서
송우민은 강연찬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는 늘 신사적인 인상만 남아 있었는데 이런 야성적인 기운은 처음 느껴졌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은 송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강연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걱정 마. 난 남의 아내한테 관심 없어.”배건 그룹 며느리가 아니었으면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사람이다.강연찬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선배 왔구나. 밥은?”병실에서 남설아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온몸이 욱신거리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유일한 위안은 강연찬의 도시락이었다.그녀의 먹을 것만 밝히는 모습에 강연찬은 부드럽게 웃으며 도시락을 테이블에 놓았다.“넌 참, 오직 먹을 생각뿐이지?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해왔어. 옥수수 수프도 끓였고.”“선배는 진짜 너무 좋아! 나 선배 사랑해!”“나중에 돈 많이 벌면 선배 내가 책임질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매일 밥만 해줘. 그럼 돼.”남설아는 신난 얼굴로 젓가락을 집어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런 천진한 모습에 잠시 말을 망설이던 강연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송우민, 그 사람 너 보러 온 거야? 두 사람... 친한 거야?”“친하진 않아. 전에 나 납치했던 사람이야. 나중엔 살기 위해 서로 손잡은 거고.”남설아는 담담하게 말하고 나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근데 왜 다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꺼리더라? 그냥 애 같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주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를 모두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그 말에 강연찬은 조급해졌다.“너 제발 그 사람 얼굴만 보고 착한 척하는 거에 속지 마. 겉보기엔 순둥이처럼 생겼지만 속은 냉혈한이야. 완전 미친놈이라고!”“미친놈이든 바보든 날 도와주면 내 친구야.”남설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강연찬을 바라봤다.“그 사람은 내 목숨 구해준 은인이야. 그 사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