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바로 초상비였다.그런데 초상비와 만났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방금 떠본 것이었다.한참을 관찰한 결과 그를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니었다.어쩌면 머리라도 다쳐서 정말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때 멀리서 어떤 손님과 초상비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손님, 계산하고 가셔야죠!”초상비가 일행의 앞을 막았다.“꺼져! 용하의 새끼. 죽고 싶어?”바이크 조끼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뚱뚱한 남자가 으르렁거렸다.뒤에 같은 차림새의 일행이 있는 것을 보니 오스크국의 세력인 폭주족 같았다.“상준, 그만둬.”그때 주방에서 외국 여성이 나와 초상비의 옷자락을 가볍게 당겼다.“카리나, 놈들이 매일 와서 공짜로 먹어.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늘 반드시 돈을 받고야 말겠어.”초상비는 일행을 노려보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용하의 새끼야, 마누라 예쁘다. 우리가 데려가도 되지?”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초상비를 옆으로 밀치고 카리나의 손을 잡으려 했다.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공짜로 얻어먹고 다니는 놈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어디 가나 존재하는 것 같았다.“내 아내를 건드리지 마!”열받은 초상비가 주먹을 세게 날리자 남자는 면상을 맞고 문밖으로 날아갔다.‘기운을 사용했어.’익숙한 기운에 염구준은 사장이 초상비가 맞다고 더 확신했다.그런데 그가 사용한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보스가 죽었어. 저놈에게 복수하자!”일행은 보스의 상태를 살피더니 금속 막대기를 들고 전부 초상비에게 달려들었다.그런데 초상비는 무공마저 잊어버렸는지 카리나를 부둥켜안고 얻어맞고 있었다.전신지상의 고수는 기운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구타를 견딜 수 있다.“멈춰요. 제발 그만 때려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카리나는 울면서 도움을 청했다.하지만 손님들은 싸움에 말려들까 봐 문 밖에 나가서 지쳐보고 있었다.“씨발 년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한 남자가 금속 막대기를 들더니 카리나의 뒷통수를 내리쳤다.슈우웅!그때 바
초상비는 그가 파견한 것이니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카리나는 초상비의 몸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상준, 괜찮아?”두 사람은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초상비는 아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돌렸다.“당연하지. 나 튼튼해서 맺집이 좋아.”“정말 본인이 누군지 모릅니까?”옆에서 지켜보던 염구준이 다가가더니 다시 초상비에게 물었다.그 말에 카리나는 잔뜩 긴장하면서 초상비의 앞을 막았다.“이 사람 기억을 잃어서 예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제발 놓아주세요. 부탁할게요.”기억을 잃었다는 해석에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고 이상한 메시지까지 보낸 것이었다.“내가 따라갈 테니까 아내는 해치지 마세요.”초상비가 앞으로 나서며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다.“진정하세요. 우리 한 패예요. 그쪽을 찾으려고 이곳에 왔거든요.”예상치 못하게 오해가 커지자 염구준이 바로 해명했다.그러자 초상비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염구준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그동안 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그쪽한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나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부부가 염구준이 보여준 메시지를 보더니 서로 눈을 마주쳤다.카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말할게요. 그런데 그 전의 일은 저도 잘 몰라요. 한 달 전에 해변가에서 조깅을 할 때 온몸이 상처투성인 상준을 발견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데리고 집으로 왔는데 상준이 깨어난 순간, 예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 곁에 남기고 가게에서 일하게 했어요.”카리나는 염구준이 사랑하는 남편을 데리고 갈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그 속내를 알아차린 염구준은 강제로 두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선택권을 주었다.“그쪽 진짜 이름은 초상비예요. 전에 나를 도와 많은 일들을 해결했어요. 만약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고, 여기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면 평생 쓸 수 있는 돈을 줄게요.”초상비에게 있어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혹시나 본인의 과거에 가정이
초상비는 카리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얘기했다.“그럴게. 당신이 어디 가면 나도 따라갈게. 근데 용하에서 국적 취득하는 거 엄청 어렵다고 들었어.”카리나는 웃으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웠다.“그런 거라면 나한테 맡기세요. 그보다 두 사람 축하주를 마시지 못했는데 용하에 돌아가면 다시 결혼식을 올려야 해요.”염구준은 두 사람의 일에 기뻐하며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이번 임무에서 초상비는 진화위복으로 아내까지 얻었다.“염구준, 고맙다. 축하주는 당연히 마셔야지!”초상비는 입이 귀에 걸려 다물지 못했다.“휴.”그제야 염구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초상비가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이젠 왜 기억을 잃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초상비는 전신지상 무술인이지만 경공이 뛰어나고 몸놀림이 괴상했다.이런 그에게 중상을 입힐 정도라면 상대방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춘 고수일 것이다.그제야 초상비는 오스크국에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내가 도착했을 때 모든 일이 순조로웠어. 첫날에 바로 단서를 찾았거든. 손중석은 노엘테크놀로지에서 납치해갔어. 그리고 에빈은 다른 세력들이 납치했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몰라. 내가 더 깊게 조사하려고 할 때, 행적이 발견되는 바람에 반보천인 고수 두 명에게 쫓기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어. 참, 모든 일은 만능 전당포와 관련 있는 거 같아.”“노엘테크놀로지!”염구준의 추측대로 모든 일은 이 회사와 연관이 있었다.그런데 에빈을 납치한 다른 세력은 또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들이 일을 크게 벌여가면서 여자를 납치할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생각나지 않았다.“초상비 삼촌, 그럼 우리 아빠와 엄마는 아직 살아 계세요?”제이든이 자기 부모와 관련된 말이 나오자 다급하게 물었다.“난 살아 계신다고 생각해. 그놈들이 엄청 중시했거든. 아니면 납치하지 않고 바로 죽였을 거야.”초상비가 추측한 것도 염구준의 생각과 비슷했다.그러니 지금 대략 확신할 수 있었다.제이든의 부모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심지어 어떤 세력
중립국인 오스크국에 군대가 없기 때문에 황실 호위대가 가장 강력했다.호위대에서 한 팀이라고 해봤자 고작 20명밖에 안 되었다.“방금 누가 내 사촌형을 살해했어?”호위대 소대장이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그제야 염구준은 깨달았다.친척이 죽어서 이렇게 빨리 달려온 것이었다.“네 사촌형이 공짜로 먹은 것도 모자라 약한 사람들도 괴롭혔어. 그런 건 왜 따지지 않아?”누군가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누가 더 염치없는지 하나씩 따져볼 것이다.“흥, 사촌형은 정직한 사람이야. 함부로 모함하지 마. 넌 반드시 정의의 제재를 받을 것이다.”소대장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자기 사람의 허물을 감쌌다.겉보기에 의로운 사람 같지만 솔직히 말하면 위선적인 소인배였다.염구준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소대장을 쳐다보았다.“소대장님, 저놈이 주먹으로 우리 보스를 죽였습니다.”그때 도망친 폭주족의 부하가 나타나 초상비를 가리키며 고발했다.“전부 체포해! 반항하면 바로 죽여! 용하의 개들은 봐줄 필요 없어!”소대장은 손을 흔들며 거만하게 명을 내렸다.그가 여기 라틴 마을을 장악하고 있으니 폭주족처럼 횡포하는 놈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염구준은 궁금했다.용하 조상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오스크국에서 이토록 용하인들을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 장면을 본 초상비가 싸울 기세로 앞으로 나섰다.본인이 일으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생각이었다.염구준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네 아내를 데리고 용하로 돌아가. 나머지 일은 내가 처리할게. 가는 길에 어려운 일에 닥치면 바로 연락해.”초상비가 아내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알았어.”초상비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아내를 번쩍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워낙 속도가 빨라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무술인이야!”정체를 알아차린 호위대 소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이미 늦었다.병사들은 말리기 전에 벌써 돌진하여 염구준을 공
“아빠야? 나 너무 배고파. 우리한테 밥도 안 주고... 무서운 개랑 같은 데 가둬두고... 개한테 여러 군데 물리기까지 했어. 나 너무 아프고 무서워. 흑...”극북빙양, 거대한 전장에서 수많은 함선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그중 붉은색 드래곤이 코팅된 함선의 지휘실 수화기에서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하지만 아이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염구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잘못 거셨습니다.”“아니야! 우리 엄마가 날 속였을 리가 없어. 내 이름은 염희주야. 염구준의 딸 염희주라고! 엄마가 그렇게 말해 줬단 말이야.”쿠궁!행여라도 전화를 끊을가 싶어 다급하게 내뱉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염구준의 눈동자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한다.염희주?“정... 정말 내 딸이라고?”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 찢어질 듯한 따귀 소리와 여자아이의 처참한 비명소리였다.“이 계집애가, 발칙하게 몰래 전화를 걸어?”“아,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여자아이의 애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겨버리고 다시 걸어봐도 묵묵부답.딸이 위기에 처했음을 인지한 염구준은 다급한 마음에 붉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주군!”깔끔한 군복차림의 여자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하지만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친 염구준이 포효했다.“어서 전세기 준비해. 지금 당장 청해로 돌아간다!”“알겠습니다!”잠시 후, 거대한 전세기가 하늘을 뚫고 사라지고... 수많은 병사들이 수십 척의 함선갑판을 가득 메운 채 무릎을 꿇었다.“안녕히 가십시오, 주군!”다음 날, 청해 교외, 손씨 가문 저택.저택 밖에 선 염구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5년 전, 가문에서 쫓겨나고 킬러들에게 쫓기다 교통사고까지 당했던 순간, 우연히 길을 지나던 소녀 한 명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헤치고 중상을 입은 그를 구해냈었다.그녀의 정체는 바로 손씨 가문의 딸,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염구준은 기꺼이 데릴사위가 되는 조건
이에 다시 딸을 꼭 끌어안은 염구준이 아이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아니야. 엄마가 착각한 거야. 아빠 살아있어. 지금 바로 네 앞에 있잖아.”눈물의 부녀상봉을 마친 염구준이 물었다.“그런데 여기 말이야... 혹시 엄마가 보낸 거야?”염구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던 염희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아니야! 엄마가 날 이딴 곳에 보낼 리가 없잖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이모, 나쁜 이모가 날 여기 보낸 거야. 이모가 엄마랑 날 집에서 내쫓은 거라고...”‘이모?!’생각지 못한 단어에 염구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손혜린 그 여자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그럼...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누구지? 나랑... 손혜린이 낳은 딸... 아니었나?’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염구준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이모 이름이 뭐야?”“이모 이름은 손혜린. 우리 엄마 사촌언니랬어. 그런데... 나쁜 이모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래. 이모가 내 엄마래!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아저씨도 우리 아빠 아니지?”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던 염희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엄마가 그랬어. 아빠를 구하려다 성대를 다친 거라고. 그래서 말을 못 하는 거라고. 그래도 이건 가르쳐줬다?”염희주은 작은 손가락으로 염구준의 큰 손바닥에 삐뚤삐뚤하게 “염구준” 세 글 자를 적어보였다.“엄마가 가르쳐 준 거야. 아빠 이름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나 제대로 쓴 거 맞지?”한편, 염희주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염구준은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날 구하려다 성대를 다쳤다고? 그날 날 구한 게 손혜린 그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손혜린 그 여자는 분명 말을 할 줄 알았었지... 그럼 그날 밤, 나랑 첫날밤을 보냈던 그 여잔 도대체 누구야?’“희주야.”전장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며 살아남은 염구준이었지만 이 순간,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차마 숨길 수 없었다.“엄마 이름이 뭐야?”그러
혼인신고를 하고 맹세의 키스를 하고 서로의 부모님께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5년 동안 전장을 구르면서도 매일 밤 그리워했던 여자가 이 여자였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리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손혜린은 그녀의 사촌언니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다!결혼식마저 모두를 속이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했다!그는 이제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전신전 군주 염구준이다!그런 그가 이 하찮은 여자에게 5년을 속았다니!“지금… 뭐 하자는 거야?”잠시 당황한 손혜린은 옆에 있는 서재원의 팔을 꽉 잡고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네 신분을 망각하지 마. 넌 우리 가문 데릴사위야! 어디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내?”염구준은 낮게 으르렁거렸다.“말해! 왜 나를 속였어?”“5년 전 나와 결혼한 사람이 너 맞아? 손가을은 누구야? 빨리 해명해!”손혜린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설마… 다 알고 왔어?”알고 왔다니?염구준은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역시 그런 거였어!희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 결혼식은 가짜였다.손가을, 손씨 가문…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혜린아.”여태 말이 없던 서재원이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두려워할 것 없어. 저 자식이 진실을 알게 된들 뭘 할 수 있는데? 너 이제 곧 나랑 결혼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 저놈은 그냥 벌레야. 남한테 놀아난 줄도 모르는 가련한 버러지일 뿐이라고!”손혜린은 깔깔 웃더니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녀는 서재원의 품에 안기더니 염구준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너랑은 이혼할 생각이었으니까 거짓말할 필요도 없지! 넌 내가 널 살려준 은인인 줄 알았어? 내가 왜? 난 손가을처럼 멍청하지 않아!”과거, 손씨 가문은 데릴사위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4대째 내려온 가문은 이번 대에서 대가 끊길 위기에 직면했다. 손가을은 이 가문의 유일한 손녀였다. 결국 어르신은 친척인 손혜린을 호적에 입적시켰다. 손혜
“예전에 잘나갈 때 나도 잘해준다고 선물도 종종 가져다 주고 그랬는데 저 여자 나한테 시선 한번 안 주더라?”서석호는 두툼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도도하게 굴어도 어쩔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말을 마친 그는 손가을에게 손짓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거기, 여기 와서 앉아! 오늘은 오빠가 예뻐해 줄게!”피아노 박자가 다소 빨라지더니 손가을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휴게실에 있는 손님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서석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짓고는 손가락으로 의사를 표현했다.5년 전 사고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다가 뜨거운 일산화탄소에 성대가 손상되면서 다시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그 뒤로 그녀는 수화를 몸에 익혔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퇴근해야 해서요. 재밌게 놀다 가세요.]수화로 의사를 전달한 그녀는 다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그녀가 서석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애 보러 가는 거야?”그는 야비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아, 넌 아직 모르겠구나? 네 딸 희주 있잖아? 손혜린이 걔를 우리 조카한테 보내주기로 했어!”“우리 조카 알지? 우리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왕자님이잖아. 애가 좀 멍청하기는 해도 예쁜 여자애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더라고! 지난번에 걔랑 같이 놀라고 데려온 여자애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즉사했다지?”손가을은 움찔하며 충격 어린 표정으로 서석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소리 없이 흐느꼈다.서석호가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손혜린은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애였다.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딸 희주는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왜? 마음 아파?”서석호가 입술을 감빨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딸 살리고 싶어? 간단해! 내가 평소에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 거야! 여기 사람
중립국인 오스크국에 군대가 없기 때문에 황실 호위대가 가장 강력했다.호위대에서 한 팀이라고 해봤자 고작 20명밖에 안 되었다.“방금 누가 내 사촌형을 살해했어?”호위대 소대장이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그제야 염구준은 깨달았다.친척이 죽어서 이렇게 빨리 달려온 것이었다.“네 사촌형이 공짜로 먹은 것도 모자라 약한 사람들도 괴롭혔어. 그런 건 왜 따지지 않아?”누군가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누가 더 염치없는지 하나씩 따져볼 것이다.“흥, 사촌형은 정직한 사람이야. 함부로 모함하지 마. 넌 반드시 정의의 제재를 받을 것이다.”소대장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자기 사람의 허물을 감쌌다.겉보기에 의로운 사람 같지만 솔직히 말하면 위선적인 소인배였다.염구준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저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소대장을 쳐다보았다.“소대장님, 저놈이 주먹으로 우리 보스를 죽였습니다.”그때 도망친 폭주족의 부하가 나타나 초상비를 가리키며 고발했다.“전부 체포해! 반항하면 바로 죽여! 용하의 개들은 봐줄 필요 없어!”소대장은 손을 흔들며 거만하게 명을 내렸다.그가 여기 라틴 마을을 장악하고 있으니 폭주족처럼 횡포하는 놈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염구준은 궁금했다.용하 조상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오스크국에서 이토록 용하인들을 미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 장면을 본 초상비가 싸울 기세로 앞으로 나섰다.본인이 일으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생각이었다.염구준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네 아내를 데리고 용하로 돌아가. 나머지 일은 내가 처리할게. 가는 길에 어려운 일에 닥치면 바로 연락해.”초상비가 아내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알았어.”초상비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아내를 번쩍 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워낙 속도가 빨라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무술인이야!”정체를 알아차린 호위대 소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이미 늦었다.병사들은 말리기 전에 벌써 돌진하여 염구준을 공
초상비는 카리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얘기했다.“그럴게. 당신이 어디 가면 나도 따라갈게. 근데 용하에서 국적 취득하는 거 엄청 어렵다고 들었어.”카리나는 웃으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웠다.“그런 거라면 나한테 맡기세요. 그보다 두 사람 축하주를 마시지 못했는데 용하에 돌아가면 다시 결혼식을 올려야 해요.”염구준은 두 사람의 일에 기뻐하며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이번 임무에서 초상비는 진화위복으로 아내까지 얻었다.“염구준, 고맙다. 축하주는 당연히 마셔야지!”초상비는 입이 귀에 걸려 다물지 못했다.“휴.”그제야 염구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초상비가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이젠 왜 기억을 잃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초상비는 전신지상 무술인이지만 경공이 뛰어나고 몸놀림이 괴상했다.이런 그에게 중상을 입힐 정도라면 상대방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춘 고수일 것이다.그제야 초상비는 오스크국에 임무를 수행하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내가 도착했을 때 모든 일이 순조로웠어. 첫날에 바로 단서를 찾았거든. 손중석은 노엘테크놀로지에서 납치해갔어. 그리고 에빈은 다른 세력들이 납치했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몰라. 내가 더 깊게 조사하려고 할 때, 행적이 발견되는 바람에 반보천인 고수 두 명에게 쫓기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어. 참, 모든 일은 만능 전당포와 관련 있는 거 같아.”“노엘테크놀로지!”염구준의 추측대로 모든 일은 이 회사와 연관이 있었다.그런데 에빈을 납치한 다른 세력은 또 누군지 알 수 없었다.그들이 일을 크게 벌여가면서 여자를 납치할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생각나지 않았다.“초상비 삼촌, 그럼 우리 아빠와 엄마는 아직 살아 계세요?”제이든이 자기 부모와 관련된 말이 나오자 다급하게 물었다.“난 살아 계신다고 생각해. 그놈들이 엄청 중시했거든. 아니면 납치하지 않고 바로 죽였을 거야.”초상비가 추측한 것도 염구준의 생각과 비슷했다.그러니 지금 대략 확신할 수 있었다.제이든의 부모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심지어 어떤 세력
초상비는 그가 파견한 것이니 끝까지 책임져야 했다.카리나는 초상비의 몸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상준, 괜찮아?”두 사람은 서로 끔찍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초상비는 아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돌렸다.“당연하지. 나 튼튼해서 맺집이 좋아.”“정말 본인이 누군지 모릅니까?”옆에서 지켜보던 염구준이 다가가더니 다시 초상비에게 물었다.그 말에 카리나는 잔뜩 긴장하면서 초상비의 앞을 막았다.“이 사람 기억을 잃어서 예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해요. 제발 놓아주세요. 부탁할게요.”기억을 잃었다는 해석에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그래서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고 이상한 메시지까지 보낸 것이었다.“내가 따라갈 테니까 아내는 해치지 마세요.”초상비가 앞으로 나서며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다.“진정하세요. 우리 한 패예요. 그쪽을 찾으려고 이곳에 왔거든요.”예상치 못하게 오해가 커지자 염구준이 바로 해명했다.그러자 초상비가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염구준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그동안 받은 메시지를 보여줬다.“그쪽한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나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부부가 염구준이 보여준 메시지를 보더니 서로 눈을 마주쳤다.카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말할게요. 그런데 그 전의 일은 저도 잘 몰라요. 한 달 전에 해변가에서 조깅을 할 때 온몸이 상처투성인 상준을 발견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데리고 집으로 왔는데 상준이 깨어난 순간, 예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 곁에 남기고 가게에서 일하게 했어요.”카리나는 염구준이 사랑하는 남편을 데리고 갈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그 속내를 알아차린 염구준은 강제로 두 사람을 갈라놓지 않고 선택권을 주었다.“그쪽 진짜 이름은 초상비예요. 전에 나를 도와 많은 일들을 해결했어요. 만약 기억을 되찾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고, 여기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면 평생 쓸 수 있는 돈을 줄게요.”초상비에게 있어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혹시나 본인의 과거에 가정이
사장이 바로 초상비였다.그런데 초상비와 만났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방금 떠본 것이었다.한참을 관찰한 결과 그를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니었다.어쩌면 머리라도 다쳐서 정말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때 멀리서 어떤 손님과 초상비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손님, 계산하고 가셔야죠!”초상비가 일행의 앞을 막았다.“꺼져! 용하의 새끼. 죽고 싶어?”바이크 조끼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뚱뚱한 남자가 으르렁거렸다.뒤에 같은 차림새의 일행이 있는 것을 보니 오스크국의 세력인 폭주족 같았다.“상준, 그만둬.”그때 주방에서 외국 여성이 나와 초상비의 옷자락을 가볍게 당겼다.“카리나, 놈들이 매일 와서 공짜로 먹어. 더는 참을 수 없어. 오늘 반드시 돈을 받고야 말겠어.”초상비는 일행을 노려보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용하의 새끼야, 마누라 예쁘다. 우리가 데려가도 되지?”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초상비를 옆으로 밀치고 카리나의 손을 잡으려 했다.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공짜로 얻어먹고 다니는 놈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어디 가나 존재하는 것 같았다.“내 아내를 건드리지 마!”열받은 초상비가 주먹을 세게 날리자 남자는 면상을 맞고 문밖으로 날아갔다.‘기운을 사용했어.’익숙한 기운에 염구준은 사장이 초상비가 맞다고 더 확신했다.그런데 그가 사용한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보스가 죽었어. 저놈에게 복수하자!”일행은 보스의 상태를 살피더니 금속 막대기를 들고 전부 초상비에게 달려들었다.그런데 초상비는 무공마저 잊어버렸는지 카리나를 부둥켜안고 얻어맞고 있었다.전신지상의 고수는 기운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구타를 견딜 수 있다.“멈춰요. 제발 그만 때려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카리나는 울면서 도움을 청했다.하지만 손님들은 싸움에 말려들까 봐 문 밖에 나가서 지쳐보고 있었다.“씨발 년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한 남자가 금속 막대기를 들더니 카리나의 뒷통수를 내리쳤다.슈우웅!그때 바
“귀신이야!”“죄송해요.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잔뜩 겁을 먹어서 벌벌 떨다니 방금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려던 모습과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염구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농장에 불을 질렀어? 누가 지시한 거야?”사람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런데 녀석들은 대답하지 않고 비수를 꺼내 염구준에게 돌진했다.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것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푸합!”염구준은 재빠르게 한 사람을 죽이고 남은 한 사람을 발밑에 밟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누군지 알고 싶어?”살아남은 테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그제야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는 숨기지 않았다.“나도 누군지 몰라. 방금 한 남자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이 농장에 불을 지르면 2억을 준댔어. 통쾌하게 계약금 절반을 먼저 줬어. 아는 걸 다 말했으니까 날 살려줘.”그 말에 염구준의 안색이 굳어졌다.놈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이 방법은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그들의 행방은 누구도 추적할 수 없게 되었다.“다시는 이런 짓거리하지 마.”염구준은 한마디 경고하고는 과감하게 살해했다.두 애송이의 뒤를 캐도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삼촌, 이제 우리 어떡해요?”제이든은 활활 타오르는 농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질문했다.아직도 부모는 행방불명이고 집은 불에 타버려서 완전히 외톨이 신세가 되어버렸다.염구준은 무슨 방법을 찾아냈는지 방정식을 적은 노트를 펼치고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노엘테크놀로지. 오스크국과 노트는 이 회사와 관련되어 있어. 일단 가서 보자.”비록 추측에 불과하지만 목표 없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 백 배 나을 것이다.목표가 생기자 제이든은 마음을 굳히고 염구준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노엘테크놀로지라는 회사에 가서 살펴볼 생각이었다.출발할 무렵에 염구준의 휴대폰이 울렸다.주작이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초상비의 위치가 라틴 마을에서 확보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위
“뒤로 물러서 있어.”쾅!염구준은 호체기운을 강화하여 방사선 문을 힘껏 발로 찼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안의 물건은 이미 털려서 텅텅 비어 있었다.놈들이 뒤처리를 얼마나 깔끔하게 처리했는지 자그마한 단서마저도 찾아낼 수 없었다.이로서 염구준의 추측이 확신되었다.놈들은 손중석의 과학기술 성과를 노리고 온 것이었다.“맞다. 아빠한테 밀실도 있어요. 제가 위험에 닥치면 거기로 피신하라고 했어요.”제이든은 뭔가 생각났는지 다급하게 말했다.“거기로 가자.”염구준은 어떤 단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별장 밖으로 나오자 제이든은 폐기된 강아지 집을 가리켰다.“저기 아래에 작은 공간이 있어요. 한번 가본 적이 있어요.”쿵!염구준은 바로 주먹을 날려 강아지 집을 부쉈다.그러자 정방형 모양의 입구가 나타나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였다.그는 손바닥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지하 아래로 떨어트렸다.지하 깊이는 대략 5미터 정도였다.염구준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제이든을 안고 번쩍 뛰어내렸다.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휴대폰 전등을 켜자 주변 물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대부분 사진과 잡동사니들이 놓여 있어서 별로 특별한 점은 없었다.그때 제이든이 잡동사니를 담은 큰상자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그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편지 한 통과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마음이 다급해진 제이든은 편지를 뜯어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편지를 읽던 그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염구준도 곁에 다가가 대략적으로 읽어보았다.제이든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였다.편지 첫 줄에 제이든이 이 편지를 볼 때 손중석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거고, 마지막 줄에 자신의 시체를 찾지 말고 잘 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중간 내용은 모두 위로와 설득하는 말들이었다.편지를 읽은 후, 제이든은 노트를 집어들고 펼쳤다.노트에 알아볼 수 없는 방정식들이 적혀 있어서 염구준에게 도움을 청했다.“삼촌, 이게 다 뭐예요?”염구준이 노트를 받고는 펼쳐 보았다.“아마도 에너지 개발에 관한 방정식 같아
지금 상황에서 제이든을 설득해도 소용없으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대략 2시간을 달렸을 때, 제이든이 흥분하면서 손가락으로 전방의 농장을 가리켰다.“삼촌, 저기가 제 집이에요!”염구준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넓은 농장 주변에 포도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고 가운데 4층짜리 복층 별장이 있었다.여기가 용하라면 땅값만 해도 2000억 가치에 달할 것이다.“너희 집은 평범하고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 않았어?”염구준은 의아했다.“맞는데요. 포도를 심고 술도 빚거든요.”제이든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식으로 명쾌하게 대답했다.‘맙소사.’염구준은 할 말을 잃었다.농장 규모만 봐도 제이든의 집은 그렇게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아무리 재산이 있어도 놈들의 표적이 될 정도는 아니고, 심지어 사례금까지 주면서 제이든을 찾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농장에 도착할 무렵, 차가 멈추지 않았는데도 제이든은 벌써 뛰어내려 흥분하며 달려갔다.“아빠, 엄마. 제이든이 왔어요. 집에 계세요?”지금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 한참을 불렀는데도 매미 소리 외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농장은 텅 비었고 포도나무도 한동안 관리하지 않았는지 말라 있었고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있었다.염구준은 주변에 매복이라도 있을까 걱정되어 제이든의 뒤를 바짝 따랐다.그리고 혹시나 단서가 남아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두 사람은 별장에 들어갔을 때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아빠, 엄마. 어디 가셨어요?”마음이 초조한 제이든은 눈물을 뚝뚝 흘렀다.그제서야 부모님이 왜 자신을 용하에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이런 위험을 대비해 피신을 보낸 것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죽어도 부모님과 함께 있었을 텐데 너무 후회되었다.한참 뒤에 염구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울었으면 눈물을 닦아. 남자답게 모든 것에 맞서야지.”그동안 제이든과 한 집에서 살면서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여서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솔직히 이 말은 어릴 적 본인에게
염구준은 호텔을 찾아 하룻밤을 묶고 이튿날에 제이든의 집에 찾아갈 생각이었다.몰래 그들을 주시하던 일행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용하를 벗어났으니 돈 때문에 그를 살해하려는 놈들이 적지 않지만 말이다.그 사이, 특수 경로를 통해 비행기 사건을 전달받은 손가을은 남편이 걱정되어 안부 전화를 걸었다.그런 아내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염구준은 몇 시간이나 설명했다.하루 종일 바쁘게 보냈더니 제이든은 마음과 몸이 지쳐 눕자마자 잠들었다.그러다 가끔씩 꿈결에 부모를 찾았다.염구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하면서 몸을 회복했다.방금 비행기 착륙 속도를 억제하느라 기운을 많이 소진했다.타닥타닥!한참 회복하고 있을 때 밖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놈들은 왜 죽으러 자기 발로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쿵!밖에서 갑자기 문을 박차더니 주먹만큼 큰 타원형 물건을 방으로 던졌다.수류탄이었다.염구준은 수류탄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부드럽게 기운을 발사하면서 복도로 튕겨버렸다.쾅쾅!몇 초 후, 일련의 폭발소리가 울리면서 복도가 불바다가 되어버렸다.주변에 뿌연 연기가 짙게 피어오르고 소방 경보 울림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사방으로 뿌려졌다.이어서 투숙객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허겁지겁 밖으로 피신하느라 호텔은 난장판이 되었다.해외에서 워낙 무기 단속이 소홀하여 이런 수류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무슨 일이에요?”폭발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제이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아무것도 아니야. 죽음을 자초하는 놈들이 찾아왔었어.”염구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창밖을 주시했다.그를 노리는 놈들이 적지 않았다.밖에서 습격한 놈은 이미 불바다에 타죽고 창 밖에 아직 몇 명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쿵!그 순간 세 그림자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더니 자기들끼리 외국어로 말했다.“저놈을 죽이면 40억을 벌 수 있어!”염구준은 그들의 기운으로 종사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감지했다.정말 화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이런 실
처음으로 충돌할 때 비행기가 조금 변형되었지만 다행히 사고는 발생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착륙했다.“어서 승객들 구조해!”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대기 중이던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한편, 칠흙처럼 어두운 해변가에 두 그림자가 서 있었다.바로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간 염구준과 제이든이었다.“사람 살리는 게 참 힘들다.”염구준은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일반인 100명을 죽이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지만 살리려면 혼신의 힘을 써야 했다.그때 공항과 멀지 않은 어느 빌딩 옥상에서 두 그림자가 와인잔을 들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흑풍, 당신의 계획이 실패했군요.”푸른 눈동자에 금발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니케르 공작, 염구준은 만만한 놈이 아니에요. 이것은 공작께 드리는 첫 대면 선물입니다.”흑풍은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계획이 실패한 것에 핑계를 댔다.그래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지난번 바위성 대결에서 중상을 입고 도망친 그는 계속 염구준을 상대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관두죠. 오스크국에 온 이상 저놈을 상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니케르 공작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뿐, 전혀 개의치 않았다.오스크국에서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니 일개 용하인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공작이 나선다면 오스크국에서도 어느 정도 봐주실 텐데,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흑풍은 염구준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알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치켜세웠다.오스크국은 중립국으로서 황실과 귀족들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지만 공작은 두 명밖에 없었다.“아첨할 필요 없습니다. 그쪽은 연락이 되었습니까?”니케르 공작이 엄숙하게 물었다.“그쪽에서 염구준에게 현상금을 걸고 반보천인 고수들도 보낸다고 약속했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흑풍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내용을 보여주었다.두 사람은 워낙 영리해서 쉽게 상대방을 믿지 않으니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아주 좋습니다. 저들이 나설 때 내가 힘을 보탠다면 염구준을 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