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요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가진 정보는 인간세계에 국한되어 있었고 곤륜 구역 일은 접할 자격이 없었다. “계속 보고해. 그 유일하게 남은 왕실 구성원은 지금 어디에 있지?” 윤구주가 물었다. “왕, 남은 이 왕실 구성원은 원래 내정된 계승자였습니다. 그녀는 헨드리의 진주이자 왕실의 총애를 받는 이자벨라 설윤입니다. 현재 황실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황실 섬 영진 장원에 거주 중입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아사 신전에 투항한 왕실 구성원인 설윤의 삼촌 디크스가 이미 그녀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곧 이 공주를 처치할 것입니다.” 정보 요원은 보고하며 영진 장원의 상세 지도를 스크린에 띄웠다. 바로 이때, 한 줄기 차가운 기운이 닥쳐왔다. “극 신급 절정의 기운이야!” 백호, 주작, 현모 세 사람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한 줄기 빙기가 기지로 날아와 윤구주 앞에 멈춰 섰다. “빙신전의 잡놈들이야! 망할!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았지?” 백호는 욕을 내뱉었다. 주작과 현모는 백호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빙신전 부전주가 구주왕에게 귀순했으니 아마 윤구주가 이 사람에게 행적을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아해했다. ‘이 자는 북주에 남아있지 않았던가?’ “너희들도 모르는 걸 문씨 가문의 첩자들이야 오죽하겠어.”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이 말에 두 사람은 모든 걸 깨달았다. 그들의 왕이 일부러 이렇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 정보를 누설하도록 말이다. “왕, 음모를 꾸미시는 솜씨는 문아름도 따를 수 없겠습니다.” 깨달은 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윤구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말을 잘 못하면 하지 마, 입 다물어.” 윤구주가 꾸짖었다. 윤구주는 이 빙기를 받아들였고 하이렌의 전음도 동시에 들려왔다. “왕, 왕의 명령대로 제가 미리 헨드리 제국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빙신전은 이미 혼란에 빠졌고 희랍 신전과 화신전이 동시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비밀리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저택의 침실 안.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가 손에 든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방금 세상을 떠난 헨드리의 여왕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멍하니 사진 속 어머니를 바라보던 소녀는 사진을 품에 껴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공주님.”이때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그 남자는 헨드리 정보부의 엘리트 요원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수차례 외국의 테러 음모를 저지했고 항상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 냈다.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윌리엄 경.”설윤 공주는 눈물을 닦으며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윌리엄도 억지로 미소를 짓고 공주에게 경례를 올렸다.“윌리엄, 어때요? 소식이 있나요? 해외에 주둔 중인 함대와 연락은 닿았나요?”그들은 헨드리를 벗어나야만 살 수 있었다.함대와 연락을 취해 먼바다로 나아간다면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공주님, 실망시키게 되어 죄송합니다. 함대와의 연결은커녕 공주님의 지지자들과의 연락마저 끊겼습니다. 상황이 몹시 나쁩니다. 디크스 경이 이미 우리를 추적한 것 같습니다.”윌리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설윤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현재 그녀의 위치를 안 삼촌이 섬과 외부의 연결을 끊은 것이 틀림없다. 그녀를 도와줬던 정보원들도 이미 처형당했을 것이다.“공주님, 저는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자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섬에 주둔해 있는 로얄 특수부대도 전투 준비를 마쳤습니다.”설윤은 혼이 나간 듯 몸을 비틀거리며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공주님!”“윌리엄,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이젠 뭐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요.”설윤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공주의 모습을 본 윌리엄은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최악의 소식을 전했다.“함대 한 척이 섬 근해에 접근 중인데 흑해골 특수부대
상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했다.설윤 공주가 필사적으로 싸우려 할 때 함대에 있던 흑해골 부대는 이미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흑해골 부대는 헨드리 최정예 특수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외부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흑해골은 왕실 멤버 디크스의 친위대였다.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이 부대가 아사 신전에 의해 개조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어둠이 내리자 흑해골 대원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섬에 잠입하기 시작했다.흑해골이 작전을 개시하는 동안 함대 지휘실에서는 헨드리 군 지휘관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헨드리 제국의 군인임에도 이제는 외부인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그 외부인은 바로 아사 신전의 신들이었다.이번 작전을 총지휘하는 자는 아사 신전의 야신이라는 신이었다. 그는 암살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어둠의 신이었으며 주변의 십여 명 부하들 역시 반신급의 전사들이었다.“야신님, 첩보에 따르면 빙신전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한 반신이 보고했다.와인을 마시던 야신이 동작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빙신전? 종말산 사건도 그놈들이 꾸민 게 분명해. 이미 구주왕과 손을 잡은 모양이군.”“그런데 왜 빙신전은 여전히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까? 그리고 빙황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화진 태백산에서 당했다더군요.”“맞습니다. 제자를 살리러 나섰다가 자신도 휘말렸다고 합니다.”다른 반신들이 수군거렸다.“너희들은 그게 모두 윤구주의 소행이라고 보는 건가? 걱정하지 마라. 제아무리 구주왕이라 해도 빙황을 상대해선 쉽게 이기지 못할 거다. 윤구주가 빙황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면 문씨 가문의 함정에 걸릴 리가 없지 않겠나? 기억해라. 문씨 가문의 계략이 성공한 건 윤구주가 약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의 목표인 설윤 공주 역시 힘이 없기에 오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야신의 눈에서 음란
“모두들 방심하지 마세요. 흑해골 특수부대가 그렇게 약했다면 수많은 왕실 구성원들과 장군들이 암살당하지 않았을 겁니다.”윌리엄이 경고를 마치자마자 폭발로 사지가 조각난 흑해골 대원들이 불바다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이 모니터에 비쳤다.그 장면을 목격한 윌리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설마 정말 개조당한 슈퍼 전사인 건가요?”생물학 박사인 설윤 공주는 불길에 휩싸인 채 절반 남은 몸으로 일어서는 그들을 인간응으로 여기지 않았다.더욱 소름 돋는 것은 흑해골들의 비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면 속 흑해골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조용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망할. 이건 좀비가 분명해.”“저격수, 사격 준비!”펑!저격수가 흑해골 부대원들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나 머리가 없는 시체도 열 걸음 더 전진한 후에야 천천히 쓰러졌다.윌리엄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들은 더는 인간이 아니었다.이때 다른 흑해골 분대가 접근하더니 조준도 없이 무기를 들어 수백 미터 밖의 저격수를 사격했다.“전원 사격. 저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숲에 숨어있던 로얄 특수부대원들이 명령을 받고 총격을 퍼부었다.흑해골 대원들은 순식간에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침착하게 기관총을 들어 반격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숨어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차례로 쓰러졌다.섬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매복해 있던 로얄 특수부대는 지리적 우세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피해를 보았다. 10분 만에 100명의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탄약을 다 쓴 특수부대원이 흑해골을 기습해 단검을 그의 머리에 꽂았지만 흑해골은 아무 일도 없듯 주먹으로 그를 10미터 밖으로 날려버렸다. 그의 공격에 전사의 가슴이 관통당하는 모습이 모니터에 비추어졌다.“윌리엄, 삼촌이 신의 도움을 빌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저는 그저 교황과 같은 종교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그럼 이 세상에 진짜 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요?”설윤의 세계
남아 있는 로얄 특수부대 대원들은 영진 장원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윌리엄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왕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설윤 공주는 미리 그에게서 청산가리를 받아 두었다. 저택이 함락되면 그녀는 즉시 독약을 삼킬 작정이었다.쾅!이 긴박한 순간, 귀청을 찌르는 천둥소리가 섬 상공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바다에서 폭풍이 일더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폭풍우로 인해 저택 내부에서는 외부의 상황을 전혀 관측할 수 없었다. 무전기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의 비명만이 들려왔다.“공주님,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흑해골 특수부대의 수가 너무 많아요. 우리 병사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윌리엄은 가슴에 십자표를 긋고 나서 공주를 마지막으로 깊게 바라보고 결연히 방을 나서서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다.영진 장원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찢겨 나간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흑해골들이 이미 저택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살아남은 10여 명의 특수부대원이 저택 내부로 후퇴해 윌리엄과 합류했다.윌리엄과 만난 병사들은 이미 멘탈이 무너져 더는 전투에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떤 병사들은 바닥에 웅크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으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었다.윌리엄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정예 병사들은 그를 따라 공주를 호위하며 헨드리를 탈출할 때부터 미리 유서를 써둔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었다.이번 임무도 자원으로 참여한 병사들이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만났기에 이 모양이 된 것일까?“윌리엄 경, 그들은 신이었습니다. 진짜 신이 나타났어요.”한 병사가 비틀거리며 외쳤다.공포에 질려 있는 그들의 말속에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가 그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특수부대의 무기는 그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고 상대는 맨손으로 야수처럼 그들을 찢어버렸다고 한다.윌리엄은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흑해골 특수부대가 이미 저택을 포위한 상태였고 정원 중앙에 누가 서 있었다.핏빛 같은 붉은 눈동자가 윌리엄을 향했고 단 한 번의
현대 문명에서 가장 으뜸으로 뽑히는 무기들이 이 남자에겐 장난감 같아 보였다. 총알들은 마법처럼 멈춰 버렸고 완전히 무력화되었다.“아악!”윌리엄은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한편, 굉음과 함께 천둥이 연속으로 울려 퍼졌고 사나운 폭풍우는 점점 더 거세졌다.이 비바람 속에서 한 대의 수상비행기가 영진 장원이 있는 섬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냉철한 얼굴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주작, 침착하게 지도를 살피는 현모, 느긋하게 뒤에 앉아 있는 윤구주 그리고 미친 듯이 문을 열어젖히며 거칠게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광전사 백호가 비행기에 있었다.“시끄러워, 좀 닥쳐.”윤구주는 짜증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비행기에 있는 내내 백호는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냥 사람 하나 구하러 가는 건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지.“저하! 이 분위기 어때요? 하늘도 이 무시무시한 백호의 위엄에 벌벌 떨고 있잖아요.”백호는 큰소리로 웃으며 윤구주에게 튀어나온 가슴근육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윤구주는 할 말을 잃었다.백호의 말이 끝나자 비행기 안은 찬물을 뒤엎은 듯 조용했다.백호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죄 짓은 아이처럼 조용해졌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윤구주가 일어나더니 백호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꺼져! 이 미친놈아. 네 힘으로 헤엄쳐 가서 아사 신전의 가짜 신들을 박살 내 버려.”퍽!윤구주의 강력한 발길질에 백호는 비행기에서 차여 나가 거친 바닷속으로 떨어졌다.“저하, 이제 백호를 해방해 주셨군요.”현모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됐어. 시끄럽게 입만 살아서 진절머리 나게 하더라. 알아서 일하게 놔둬.”윤구주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 백호로 실험을 했을 때 성수의 피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뒤로 그가 더 미쳐버렸다.하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백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윤구주가 백호의 미친 기질을 고칠 방법을 고민하던 그때...한편,
독약을 삼키려던 설윤 공주는 윌리엄의 비참한 비명 소리를 듣고 권총을 움켜쥔 채 방에서 급히 뛰쳐나왔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총알이 바닥 날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지만 모든 총알은 마법처럼 공중에 멈춰 버렸다.“오호? 헨드리의 빛나는 보석이로군. 역시 미인이야.”신이라 자칭하는 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총알을 피해 설윤에게 다가갔다.“공주님!”윌리엄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신이 팔을 휘둘러 그를 날려버렸다.“여기 온 목적은 공주님 때문이었지. 우리 야신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너희들은 힘을 아껴뒀다가 흑해골 특수부대와 신나는 싸움을 하라고. 하하!”신이 공주에게 손을 뻗는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천장이 찢어지며 한 거대한 그림자가 빛처럼 빠르게 공주가 있던 방안으로 추락해 들어왔다.공주가 방 안에 없음을 확인한 그 남자는 강철로 만들어진 문을 주먹으로 한 방에 박살 내 버렸다.“뭐야?”갑작스럽게 등장한 압도적인 존재에 신도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아군인가? 하지만 이 불길한 기운은 뭐지?”신은 희미한 조명 아래서 그를 살펴보았다.그 남자는 동양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고 그의 그림자는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저택을 압도하는 듯 커다랗게 드리워졌다.“부성국 사람인가? 이런 젠장. 누가 널 보낸 거야?”신이 소리쳤다.“뭐라고?”부성국 사람이라는 말에 윤구주는 어이없어했다.“내가 부성국 사람으로 보이냐? 눈이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 공주는 내가 접수한다. 너희들은 이제 죽어도 좋아.”윤구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개자식. 너 화진 사람이지. 화진 놈들은 언제나 이렇게 죽음을 재촉하더라.”분노에 찬 신은 한 손에 번개를 다른 손에는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윤구주를 향해 공격했다.쿵!엄청난 폭발이 윤구주의 가슴에 닿자 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하!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건 화진 놈들이지. 하찮은 인간이 감히 신에게 맞서다니.”“신?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인가? 내가 너희를 구해줬어. 안 그랬으면 너희들은 평생 정신병원에서 살았을 거야.”윤구주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러다 갑자기 이들이 자신의 화진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당신은 대체 누구죠? 공주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그분은 우리 헨드리의 공주님이에요. 화진도 아까 그 나쁜놈들처럼 기회를 노리는 겁니까?”윤구주가 외국어에 능통한 주작을 불러오려던 찰나 윌리엄이 화진어로 물었다.“그쪽은 화진어를 유창하게 잘하는군.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윤구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유심히 관찰했다.“아. 생각났다. TV에서 봤어. 내 기억이 맞았다면 그쪽은 헨드리의 유명한 스파이 영화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지?”윤구주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영화 재밌게 봤어. 꽤 잘 만든 것 같더라.”이 말에 윌리엄의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이 미스터리한 남자의 정체를 묻고 싶었다.도대체 누구길래 그 신마저 벌벌 떨게 했는지.‘설마 화진에도 진짜 신이 존재하는 건가?’윌리엄도 윤구주의 얼굴이 낯익다는 걸 느꼈다.“저도 그쪽을 TV에서 본 적 있어요. 설마 당신이 바로 화진의 구주왕인가요?”로얄 특수부대원들은 화진어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구주왕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다. 윌리엄의 말을 들은 특수부대원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 전설적인 동양인을 바라보았다.“윌리엄 경, 확실해요. 저분이 세계를 뒤흔든 화진의 군신 윤구주입니다.”“맞아요. 얼마 전 북라국에 전쟁을 선포할 때 세계 방송에 나왔던 그분이에요.”“그래. 바로 내가 그 구주왕이야. 근데 내가 외국에서도 유명해? 날 영웅처럼 쳐다보는 것 같은데.”윤구주는 백옥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근데 구주왕이 어떻게 이곳에...”윤구주의 신원이 확인되었지만 그의 의도를 몰랐기에 윌리엄은 쉬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화진이 왜 갑자기 개입한 거지?’“흑해골 특수부대가 돌격해 옵니다.”“전투 준비.”로얄 특수부대원들이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이 빠르게 반응하여 박물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바로 생방송을 열어 방금 목격한 끔찍한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했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뒤흔들었으며 수많은 네티즌이 생방송으로 몰려들었다. 헨드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박물관 안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비명 소리는 군중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두려움의 분위기는 박물관을 넘어 거리 전체로 퍼져나갔다.순찰 경찰들이 도착했지만 상부의 지시하에 박물관을 봉쇄하기만 했다.잠시 후 특수 부대가 현장에 도착해 군중들을 안전 지역으로 밀어냈다.그들의 행동에 군중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왜 즉시 박물관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는 것인가?현대인의 교육과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박물관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은 어떤 유독 가스 누출로 인한 것이라고 여겼다.이성이 그들에게 즉시 대피해야 한다고 알려줬지만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박물관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 했다. 쓩!어느 병원의 기사단이 군마를 타고 먼저 도착했다. 이어서 검은 갑옷을 입은 암부 요원 10여 명과 구주군 갑옷을 입은 장군들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다.기사는 중세기의 고전적인 직업으로 근대에 들어서는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그런데 그들이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도착한 기사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맨손으로 교통사고가 난 차량의 문을 뜯어내어 갇힌 사람들을 구출한 후 차량을 들어 올려 군중 밖으로 던져버렸다.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괴력인가? 아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이 장면을 본 생방송 시청자들이 열광했다.“유라비아 기사들이 이렇게 세다고?”전 세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라비아인들조차 어리둥절해 했다.이 장면은 현장에 도착한 기자들에게도 포착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이때 군중들이 갑자기
이 상황에 무슨 명령을 내릴수 있겠나.윌리엄은 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직접 목격한적이 있었기에 오직 화진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빨리 후퇴하라!”그 말을 들은 특수 부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이때 익숙한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무덤 속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왔다.“황혼 기사들이다. 성전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야.”윌리엄이 그들을 알아보자 선두에 선 성전 기사단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당신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세히 기록해 세상에 알려야 하오.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고 성전 기사단이 수백 년 동안 헨드리를 지켜오며 악마와 싸워왔음을 말이오.”기사단장이 검을 뽑아들자 검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신성한 기운을 발산했다.다른 기사들도 단장을 따라 검을 꺼내며 이 검들은 신성한 힘으로 강화된 성검이고 무수한 악마를 베어 왔다고 설명했다.신성한 기운이 묘실을 뒤덮으며 으스스한 기운을 억눌렀다.윌리엄 일행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장비를 꺼내 녹화를 시작했다.이때 주작은 지표면에 위치한 지휘본부에서 신념술로 지하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다.그녀는 성스러운 힘으로 강화된 무기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뭐가 신성한 강화야? 그냥 옛날에 쓰다 남은 낡은 법구잖아. 유라비아 놈들은 이제 최하급 법구도 못만들어내는 거야?”만약 곤륜의 주의가 화진에만 집중되지 않았다면 유라비아을 비롯한 다른 대륙의 수련자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이때 주작의 이어폰에서 천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대장님, 우리 암부도 헨드리 왕도에서 여러 제단을 발견했어요. 이거 일종의 전법 같은데요? 우리는 전법에 대해 잘 몰라서 빙신전 놈들을 불러야할것 같아요.”이전에 암부의 세 지휘사도 비밀리에 왕도에 잠입했다. 인력이 부족했지만 조사를 위해 구주군에서 장군 십여 명을 지원받은 상태였다.주작은 즉시 청해에게 전음을 보냈다.“제단 전법이라고? 이건 틀림없이 아사 신전 놈들의 짓이야. 기다려. 내가 당장 가서
그 말은 청해의 마음에 딱 들어맞아 아주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은 그냥 듣고 넘길 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그놈들에게 분명히 다른 음모가 있을 거야. 하지만 주인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명령이 설윤을 보호하는 것이니 그 여자를 잘 보호하자. 너희들 모두 잘 들어. 주인님은 나중에 너희들의 죄를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잘만 한다면 사형을 면하고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주인님께 좋은 말도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주인님께서 기뻐하시면 큰 이익을 너희에게 하사하실 거다. 그렇게 되면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어.”청해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그의 뜻을 금세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중에 윤구주가 그들의 죗값을 물을 때 죽음을 면하고 공으로 죄를 갚을 수 있을지는 청해의 말 한마디에 달린 거 아닌가?그래서 이 빙신전의 신들은 윤구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사 신전과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다행히도 윤구주가 앞에서 대부분 압력을 막아 주고 있어 그들은 목숨을 걸고 나머지 적들과 싸울 수 있었다.빙신전이 회의실을 주요 전장으로 삼아 방어를 구축하고 있을 때 주작도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었다.이전에 주작은 윌리엄과 함께 헨드리의 정보 요원들을 모아 비밀리에 왕도로 들어갔다. 그들의 노력으로 수많은 특수 부대원들이 다시 소집되어 팀으로 돌아왔다.왕도의 한구석.윌리엄이 이끄는 특수 부대 한 팀이 어떤 은신처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30명이 넘는 부대원들이 악취가 나는 하수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낯선 지하 동굴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찬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앞쪽에는 불길한 푸른 불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탐조등을 켜자 지하 동굴이 비추어졌고 부대원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동굴 벽면에 크고 작은 무덤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
헨드리 의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의회장에는 300명의 의원이 모였다. 평소 같으면 이익 집단별로 나뉜 의원들이 설전을 벌였겠지만 올해는 의회장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모든 의원의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어떤 이는 멍들어 있기도 했다. 의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최전열에 앉은 백색 정장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뒤에는 가면을 쓴 흑해골 전사들이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설윤의 삼촌, 디크스였다. 나이로 따지면 디크스는 70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시간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처럼 생기발랄했다. 이것이 아사 신전의 작품이었다. 곤륜 구역의 수단으로 일반인을 젊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 설윤 공주가 왕도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차량 행렬이 거리를 순회 중이며 많은 군중들이 설윤 공주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뒤에 있던 흑해골 전사가 지금의 상황을 보고했다. 디크스가 레드 와인 잔을 흔들자 선글라스 사이로 비친 눈동자가 섬뜩한 붉은빛을 드러냈다. “상관없어. 오히려 안 올까 봐서 걱정이었지. 해외에 숨어있으면 찾기 어렵거든. 죽여 버리면 내가 정당한 권리를 얻을 거야. 그리고 이단자들은 주인님이 신적 기적을 보여주실 때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의회장 밖 거리에는 이미 엄청난 군중이 모여 설윤을 지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차 안에서 군중의 지지에 감동한 설윤은 확신이 생겼다. 승리의 확신이 아니라 헨드리를 위해 희생할 각오다. 윤구주는 아무 생각 없이 저택에서 가져온 동화책을 뒤적이며 잔을 들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구주왕, 이따 저랑 같이 들어가실 거죠?” 설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당연하죠. 당신 혼자 들어가게 둘 생각 없어요.” 윤구주는 웃으며 답했다. 설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구주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 믿었다. “구주왕, 당신이 곁에 있으면 지옥에 빠져도 두렵지 않아요!” 설윤은 갑자기 윤구주의 팔을 움켜쥐
“충성을 맹세해. 우리 화진의 투명장과 마찬가지다. 비록 너희 맹세가 별 의미는 없지만 형식적인 절차는 거쳐야 해.” 윤구주는 손을 저었다. 윤구주의 말에 성기사는 번역기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는 이자벨라 설윤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주왕 폐하도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사 신족을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 최전선에서 싸워주세요.” 윤구주는 이미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자신이 없으면 이들은 감히 아사 신족과 맞서지도 못할 것이다. 화진을 대표하는 자신이 등장했기에 그들에게 저항할 용기를 준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너희가 없어도 나는 아사 신족을 섬멸할 거야! 한 마디로 만약 너희가 앞으로 화진을 적대한다면 나는 하나씩 처단할 거야!” 이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구주왕은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오직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일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적이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설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하,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윤은 여전히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행복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와 결심을 보여줘요. 이틀 후, 헨드리 의회에서 디크스를 몰아내고 당신의 권력을 되찾아야 해요!” 윤구주의 목소리는 설윤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니요! 저는 헨드리 국민의 존엄을 지킬 거예요! 신이라도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순 없어요!” 설윤의 눈빛은 확고해졌다. 윤구주가 이 모든 준비를 한 이유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의회가 열리는 날, 빙신전과 황혼 기사회의 수련자들은 헨드리 왕도에 잠입해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케일 공작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설윤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고 디크스의 즉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헨드리 국내외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도
“황혼 기사회는 어떤 국가나 세력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요. 그들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종말의 전쟁을 대비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수련자처럼 생활하죠. 황혼 기사회는 유럽 대륙에서 유일한 정통 수련자 집단이에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럽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만 그들이 나타난다니!’ 이건 진정한 기사 정신이었다. 설윤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설윤 공주, 오해예요. 그들은 하나의 구원 단체예요. 그들의 고행은 모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죠. 이자벨라 설윤 당신이 바로 유럽의 구세주예요. 헨드리는 유럽의 강국으로 아직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마지막 국가죠. 헨드리마저 함락되면 유럽 전체가 제신전의 노예가 될 거예요.” 설윤은 깜짝 놀랐다. ‘내가 구세주라고? 그럴 리가!’ “전하, 황혼 기사회 초대 성기사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종말의 악마 불길이 유럽 대륙을 태울 때 헨드리의 진주가 구세주가 되어 국민을 구할 것이라고요.” 성기사는 말하며 초대 성기사가 남긴 예언서를 꺼냈다. 설윤은 대충 훑어보았다. 예언 속에는 구세주의 출현만 언급했고 헨드리 출신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방의 신비로운 별이 떠오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구주는 동방에서 왔다. 구세주는 화진의 구주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구주왕이 진짜 구세주일 텐데요!” 설윤이 윤구주를 바라보자 기사들은 어색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 제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예요. 이건 서양의 문명이잖아요. 동방에서 온 제가 구세주가 되면 당신들 문명은 끝나는 거 아니에요? 구세주는 당신이어야만 해요.” 윤구주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설윤은 깨달았다. 예언은 사실이었다. 윤구주가 진짜 구세주다. 하지만 문명의 입장을 고려해 구세주를 서양인으로 바꾼 것이다. “구주왕, 당신은 정말 명예를 전혀 개의치 않나요? 이런 영광을 저에게 양보하다니...” 설윤은 동방에서 온 이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
“대협이요?” 윤구주는 웃었다. 그렇게 불린 건 처음이었다. “대협은 별로예요. 화진에서 대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요. 차라리 곤륜 구역이 지어준 ‘살신'이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들어요.” 윤구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방금 기사 얘기했죠?” 윤구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설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구주가 장난을 걸자 그녀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 제가 꿈꾸던 기사가 저를 구하러 올까요?” 설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리 고전풍의 가야금 소리가 흘렀고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헨드리의 오래된 군기를 들고 있었다. 설윤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성전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도 있어요!”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단이었다. 설윤은 그 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같은 덜 유명한 기사단도 보았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기사단별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만 천 명 가까운 기사가 들어왔다. 밖에는 더 많은 기사와 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설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 앞의 열세 명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 안팎의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어눌한 화진어로 윤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윤구주를 ‘존경하는 화진의 왕’이라 부르며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서양에서 군주는 ‘전하'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구주의 ‘구주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화진의 왕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였다. 물론 윤구주는 이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윤구주에게 인사한 후, 열세 명의 기사는 설윤 앞으로 다가갔다. 신들의 위압감을 이미 경험해 본 설윤은 이 기사들에게서도 동등한 강도의 기세를 느꼈다. 다만 분위기가 달
설윤은 자신의 출생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슬픔에 잠긴 사람은 사실 윤구주였다. 그의 감정에 자신이 휩쓸린 것이었다. “구주왕, 화진의 인황이자 수호신인 이런 신화 같은 인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까?” 설윤은 윤구주가 사해 사건에서 자신을 배신한 애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문아름이었지. 화진에서 아름은 절세미인을 뜻하는 말이야. 윌리엄이 전에 이야기한 적 있어. 그 여자는 화진의 전설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여자 제갈이라 칭했지만 윌리엄은 독한 수단을 쓰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어...” 갑자기 한 차례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며 살벌한 함성이 들려왔다. 설윤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윤구주는 명상 중에 설윤의 중얼거림을 듣고 특히 ‘문아름'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흔들려 살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넘어진 설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너무 무서웠다. 역시 곤륜 구역이 붙인 ‘살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증오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불태워도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흠, 한밤중에 여기서 왜 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죠? 수행 중인 수련자에게 방해는 금물이에요.”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천지를 불태울 듯한 살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감춰져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휴, 됐어요. 제가 마음이 흔들린 탓이죠.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윤구주는 직접 설윤을 일으켜 정원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윤은 계속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냉철한 남자가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니.’ “구주왕, 우리 동서양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서양인은 간단해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
빙신전의 수련자들은 의아해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아사 신전과 헨드리에 주둔한 다른 신전들을 상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윤을 보호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임무가 쉽다고 생각해? 인간 공주의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마. 설윤 공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해. 왕실이 일찍이 설윤 공주를 후계자로 선전했기 때문에 그 신분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어. 게다가 아사 신전은 헨드리를 통제하려는 거지 헨드리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냐. 그들은 헨드리의 재정 대권을 장악하려는 거야. 국왕의 자리는 오직 설윤이나 디크스만이 차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왕실, 심지어 국체를 바꾸는 건 헨드리를 혼란에 빠뜨릴 거야. 그래서 아사 신족은 이번에 직접 나서 설윤을 제거하려 할 거야.” 윤구주가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자 빙신전의 신들도 깨달았다. “살신 전하, 안심하세요! 제가 직접 헨드리의 공주를 보호하겠습니다. 아사 신전의 신왕 오딘이 직접 온다 해도 제가 그와 싸워 결판을 내보겠습니다!” 빙신전 전주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라는 호칭에 윤구주와 설윤 모두 당황했다. 설윤은 신계의 세력들은 잘 모르지만 화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화진 국주가 조서를 내려 군사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윤구주에게 넘겼다. 얼마 전 화진에서는 새로운 공고를 내렸는데 구주왕이 새로운 화진의 인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윤구주는 화진의 차기 국주가 될 것이며 심지어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윤구주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화진의 백 년 부흥 대계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인황이 등장해 민심을 모아 국운을 끌어 올려야만 화진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의회는 3일 후에 열리니까 3일간 휴식해. 우리의 목표는 헨드리 왕도다!” 모든 인원이 준비하러 떠났다. 설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3일 후면 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