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약을 삼키려던 설윤 공주는 윌리엄의 비참한 비명 소리를 듣고 권총을 움켜쥔 채 방에서 급히 뛰쳐나왔다. 그녀는 남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총알이 바닥 날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지만 모든 총알은 마법처럼 공중에 멈춰 버렸다.“오호? 헨드리의 빛나는 보석이로군. 역시 미인이야.”신이라 자칭하는 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총알을 피해 설윤에게 다가갔다.“공주님!”윌리엄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신이 팔을 휘둘러 그를 날려버렸다.“여기 온 목적은 공주님 때문이었지. 우리 야신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너희들은 힘을 아껴뒀다가 흑해골 특수부대와 신나는 싸움을 하라고. 하하!”신이 공주에게 손을 뻗는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천장이 찢어지며 한 거대한 그림자가 빛처럼 빠르게 공주가 있던 방안으로 추락해 들어왔다.공주가 방 안에 없음을 확인한 그 남자는 강철로 만들어진 문을 주먹으로 한 방에 박살 내 버렸다.“뭐야?”갑작스럽게 등장한 압도적인 존재에 신도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아군인가? 하지만 이 불길한 기운은 뭐지?”신은 희미한 조명 아래서 그를 살펴보았다.그 남자는 동양인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고 그의 그림자는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용이 저택을 압도하는 듯 커다랗게 드리워졌다.“부성국 사람인가? 이런 젠장. 누가 널 보낸 거야?”신이 소리쳤다.“뭐라고?”부성국 사람이라는 말에 윤구주는 어이없어했다.“내가 부성국 사람으로 보이냐? 눈이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 공주는 내가 접수한다. 너희들은 이제 죽어도 좋아.”윤구주가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개자식. 너 화진 사람이지. 화진 놈들은 언제나 이렇게 죽음을 재촉하더라.”분노에 찬 신은 한 손에 번개를 다른 손에는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윤구주를 향해 공격했다.쿵!엄청난 폭발이 윤구주의 가슴에 닿자 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하!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건 화진 놈들이지. 하찮은 인간이 감히 신에게 맞서다니.”“신?
“이게 무슨 예의 없는 행동인가? 내가 너희를 구해줬어. 안 그랬으면 너희들은 평생 정신병원에서 살았을 거야.”윤구주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러다 갑자기 이들이 자신의 화진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당신은 대체 누구죠? 공주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그분은 우리 헨드리의 공주님이에요. 화진도 아까 그 나쁜놈들처럼 기회를 노리는 겁니까?”윤구주가 외국어에 능통한 주작을 불러오려던 찰나 윌리엄이 화진어로 물었다.“그쪽은 화진어를 유창하게 잘하는군.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윤구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유심히 관찰했다.“아. 생각났다. TV에서 봤어. 내 기억이 맞았다면 그쪽은 헨드리의 유명한 스파이 영화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지?”윤구주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영화 재밌게 봤어. 꽤 잘 만든 것 같더라.”이 말에 윌리엄의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이 미스터리한 남자의 정체를 묻고 싶었다.도대체 누구길래 그 신마저 벌벌 떨게 했는지.‘설마 화진에도 진짜 신이 존재하는 건가?’윌리엄도 윤구주의 얼굴이 낯익다는 걸 느꼈다.“저도 그쪽을 TV에서 본 적 있어요. 설마 당신이 바로 화진의 구주왕인가요?”로얄 특수부대원들은 화진어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구주왕이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다. 윌리엄의 말을 들은 특수부대원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 전설적인 동양인을 바라보았다.“윌리엄 경, 확실해요. 저분이 세계를 뒤흔든 화진의 군신 윤구주입니다.”“맞아요. 얼마 전 북라국에 전쟁을 선포할 때 세계 방송에 나왔던 그분이에요.”“그래. 바로 내가 그 구주왕이야. 근데 내가 외국에서도 유명해? 날 영웅처럼 쳐다보는 것 같은데.”윤구주는 백옥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근데 구주왕이 어떻게 이곳에...”윤구주의 신원이 확인되었지만 그의 의도를 몰랐기에 윌리엄은 쉬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화진이 왜 갑자기 개입한 거지?’“흑해골 특수부대가 돌격해 옵니다.”“전투 준비.”로얄 특수부대원들이
윌리엄은 이 말을 듣고서야 공주가 청산가리를 가져갔던 사실을 떠올렸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윤구주는 화진에서 의술이 뛰어나다고 유명했다.윌리엄은 윤구주가 공주를 진찰하도록 길을 비켜줬다.중독 여부는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설윤 공주는 다행히 독을 먹지 않았다“문제없어. 그냥 피로와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기절일 뿐이야. 곧 깨어날 거다.”설윤 공주가 문제없음을 확인한 윤구주는 당당하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이 노골적인 행동에 윌리엄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젠장... 신도 순식간에 증발시킨 구주왕을 막을 순 없어.”그는 윤구주가 곤륜의 놈들과 같은 패거리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밖에서 총알이 바닥이 난 흑해골 특수부대는 군도를 들고 현모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그들은 약물 개조를 받은 슈퍼 전사들로 전투술의 달인들이었다. 하지만 화진의 군신 현모 앞에서 이 슈퍼 전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인간을 상대로 할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현모를 마주할 때는 달랐다.현모는 맨손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강철 같은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개조된 육체는 찰흙처럼 찌그러졌다.피범벅이 된 시체들이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슉!주작도 행동에 나섰다.“화진 제일의 킬러가 직접 처리해 주마.”그녀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은 눈으로 좇을 수 없었고 흑해골 병사들은 자신의 팔다리가 토막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로얄 특수부대가 공포에 떨던 흑해골 부대는 그 두 사람을 상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500명의 정예 병력이 10분도 안 되어 전멸했다.“이게 화진의 힘이냐?”로얄 특수부대원들은 입이 떡 벌린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저택 안의 비는 그쳤는데 밖은 폭우가 더 거세졌다는 사실이었다.흑해골 특수부대를 해결한 뒤 주작은 교섭을 위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진 정보 부문의 수장으로 외국어에 능통했기에 윤구주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었다. 현모는 저택을 지키며 외부
“그쪽이 바로 주작이군요。”주작의 이름을 들은 윌리엄의 눈빛이 반짝이었다. 분명히 그도 주작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모양이다.“맞아요.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합시다. 북라국 전쟁은 우리 구주왕의 지휘하에 승리를 거두었고 북라국은 이제 우리 화진의 부속국이 되었습니다. 구변산 전투에서는 신계의 빙황을 처단해서 남북 조정을 모두 떨게 했죠. 이번에 우리가 헨드리로 온 이유는 아사 신족을 소탕하기 위함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이쯤 되면 저희 의도를 이해하셨죠?”주작은 과도한 설명 없이 간결하게 입장을 전했다. 그녀의 말에는 은근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윌리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헨드리와 손을 잡자는 뜻이었다.“협력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들이 원하는 게 단순한 협력만은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윌리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작은 반박하지 않고 없이 받아쳤다.“정말 그렇다 해도 지금 헨드리에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의 화진은 100년 전과 다릅니다. 헨드리는 화진 국문을 깨고 독약으로 수많은 백성을 해쳤으며 화진을 약탈했죠. 지금 저희가 복수를 해도 당연한 일입니다. 협력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는 그쪽의 자유지만 대답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세요. 저와는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지만 저하께서 직접 나선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주작이 뒤를 돌아보자 윤구주는 또다시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윌리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 자들은 분명히 악마다.“내가 옛날 일을 들먹이는 성격은 아니오. 우리 화진은 늘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법이지. 협력해 주면 좋고 하지 않으면 나도 방법이 없지.”윤구주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이번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니 헨드리가 방해한다면 먼저 헨드리를 정리한 뒤 아사 신족을 섬멸하겠소.”바로 이때 로얄 특수부대원이 급히 보고했다.“함대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화진 함대와 합류했고 이미 헨드리 해역에 진입해 있습니다.”이 소식을
윌리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윤구주는 화진을 대표할 수 있었지만 윌리엄은 헨드리를 대표할 수 없었다.“괜찮다. 일단 왕실과 협력하는 것으로 하고 헨드리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다.”윤구주가 담담하게 말했다.그의 대답을 들은 윌리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오늘 밤 화진의 구주왕이 없었다면 설윤 공주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윌리엄은 그제야 해역에 디크스의 함대가 여전히 정박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구주왕님, 여긴 아직 위험합니다. 디크스의 함대가 포격을 시작하면 저희 모두 탈출할 수 없게 됩니다.”윌리엄이 초조한 목소리로 외치자 주작은 비웃는 눈빛으로 이를 받아쳤다.‘대포 따위가 저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놈들이 금기를 쓴다 해도 저하께서 전부 막아내실 것이다.’“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걱정하지 마라. 백호가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모양이군. 주작, 함대 쪽을 확인해 봐라. 그리고 우리가 탈출할 때 필요하니 함대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게 주의해.”명령을 받은 주작은 즉시 함대 방향으로 사라졌다.한편, 기절했던 설윤 공주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공주님!”윌리엄과 로얄 특수부대원들이 감격에 차 공주를 둘러쌌다.“윌리엄 경, 모두 무사하신가요? 방금 무슨 일이었죠? 그 화진 사람은 정말 무서웠어요.”조금 전의 기억을 되짚는 공주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네? 제가 그렇게 무섭게 보였나요? 저 윤구주는 부드러운 사람이에요.”소파에 앉아 홍차를 마시던 윤구주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윤구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왕실의 고급 디저트를 먹으며 흥미진진하게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외국어로 된 책은 못 읽으니 결국 그림이 많은 동화책을 꺼내 들었다.그 목소리를 들은 설윤이 조심스레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정교한 턱시도를 입은 청년이 조용히 앉아 동화책을 읽으며 디저트를 즐기는 평온한 모습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 이는 전쟁으로 엉망이 된 저택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이상하게도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윤구주는 단지 조용히 책을
설윤은 윤구주의 손을 잡고 강제로 악수를 했다.“저는 이자벨라 설윤입니다. 전 윤구주 씨를 정말 존경해요. 사해에서 10개국이 윤구주 씨를 포위했을 때 어떻게 살아남으셨나요?”그녀의 물음을 들은 윤구주는 미소를 지었다. 헨드리 공주가 그 사건까지 알고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동시에 사해 사건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약간 어색했다.윌리엄도 윤구주의 어색함을 눈치챘다.‘화진의 구주왕도 긴장할 때가 있구나.’“공주님, 사해의 10개국 무술 고수들은 구주왕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윤구주님이 곤경에 처한 것은 믿었던 여인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었죠.”윌리엄이 설명했다.헨드리 정보부의 에이스였던 윌리엄은 사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창피한 일이니 그만합시다. 저 윤구주가 그렇게까지 비참했던 적이 없었어요.”윤구주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아니 그게 왜 창피한가요? 그것은 윤구주 씨 탓이 아니에요. 오히려 윤구주 씨가 사랑에 얼마나 충실한 사람인지 증명해 주는 거죠.”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윤구주를 변호했다.윤구주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모습은 마치 윤구주의 광팬같아 보였다. 윤구주가 무슨 잘못을 하든 그의 편이 되어줄 것 같았다.윤구주는 일어서서 정식으로 설윤과 악수하며 말했다.“공주님이 헨드리의 보배로 불리는 이유가 있군요. 사해 사건에 대해 다른 이들은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공주님의 눈에는 그것이 오히려 제가 사랑에 얼마나 충실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증거로 보이는군요. 아마 공주님도 순수하고 순진한 성품을 지니신 모양입니다.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군요. 전하를 만나게 된 것은 제 영광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들은 설윤의 얼굴이 붉어졌다.윌리엄은 그의 말에 놀랐는지 입을 딱 벌렸다. 구주왕은 화진의 군신이자 신계의 사신이라 분명 피도 눈물도 없는 무시무시한 인물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이렇게나 평온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니.“왜 그러시오?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자네
영진 장원이 위치한 섬의 해역.이곳에는 세 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바다에는 거친 파도가 일렁였지만 세 척의 함선은 흔들림 없이 바다 위에 떠 있었다.이 이상한 현상은 배속의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마치 유령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불길한 분위기였다.삼척의 함선을 뒤덮은 흉악한 살기에 선원들은 공포에 질려 하느님께 안전을 빌며 기도했다.주력함에서는 어떤 선원이 무서운 기세에 눌려 바닥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간간이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긴장시켰다.쿵!아사 신전의 반신 한 명의 반 토막이 난 시체가 함교를 뚫고 피 웅덩이를 남기며 갑판에 떨어졌다.얼마 후, 아사 신전의 야신이 강력한 힘에 이끌려 갑판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야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얼굴은 백지처럼 창백해졌고 오른팔은 잔인하게 뜯겨나간 상태로 피부와 근육이 덜렁거리는 참혹한 모습이었다.야신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의 그림자가 먼저 갑판을 덮으며 함선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제길... 화진의 군신 백호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빙신전이 널 잡아갔다는 소문이 가짜였나?”야신은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그의 몸은 멈출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특히 그 흉악한 살기가 감싸올 때마다 더욱 심하게 떨렸다.“아사 신전 놈들은 머리가 나쁜가 보지? 아, 맞아. 우리 왕이 종말산에서 너희를 속였지. 이제 너희는 빙신전을 믿지 않겠지. 빙신전 멍청이들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을 거야. 솔직히 말해주지. 빙신전 황자의 제자 목신은 이미 죽었어.”백호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입가의 피를 핥았다.“뭐? 목신이 죽었다고? 그럼 그의 스승 빙황도 너희가 죽인 거야?”이 소식을 들은 야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럴 리 없어. 빙황은 신계의 황자다. 빙신의 제자 목신은 곤륜 500년 만에 나타난 천
함교 위에 있던 주작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아래쪽은 검은 안개에 뒤덮여 있었고 그녀의 신념술도 통하지 않았다.“이 멍청한 백호. 아까 빨리 처리하지 않아서 지금 이 꼴이 됐잖아. 금단의 술법까지 쓰게 만들다니. 내가 안 왔으면 얼마나 더 끌었을까.”주작이 투덜거리며 백호를 도우려는 순간 백호의 전음이 들려왔다.“손대지 마. 너 지금 날 무시하냐? 네 도움 필요 없거든. 그리고 너 말조심해. 내가 네 오빠라고. 4대 군신 중 2위인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주작은 할 말을 잃었다.“이 멍청한 놈!”주작은 눈을 흘기며 혼자 책임지라고 말한 뒤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함교 지휘실로 들어가 영진 장원과 연락을 취했다.주작이 통신하는 동안 백호 쪽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공격하는 쪽은 백호가 아니라 어둠과 하나가 된 야신이었다. 칼날과 핏빛이 번뜩이며 백호의 몸에 순식간에 열여덟 군데의 상처가 생겼다. 하나하나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깊은 상처였다.쉭!야신은 빠르게 움직이며 백호에게서 당한 수모를 열 배로 갚았다.“백호라고? 화진의 전신이라고? 이 하찮은 인간이 감히 신을 모욕하다니. 망할 놈. 내가 영혼까지 태워 술법을 써야 했어. 이 금단의 술법 때문에 나는 평생 다시는 수련할 수 없게 됐다고. 어디 한번 말해봐. 널 어떻게 고문해 줄까? 널 처리한 다음에 저 주작과 천천히 놀아줄 거야.”야신이 주작에 대한 상상에 잠긴 순간 백호가 움직였다.백호는 번개처럼 손을 뻗어 야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살기가 야신의 몸속에 흘러 들어가자 야신의 경맥이 막히면서 금단의 술법도 저절로 풀렸다.어둠이 사라지자 야신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백호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이런 상처를 입고도 속도가 더 빨라졌다고? 도대체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놀랐나? 나 백호는 4대 군신 중 코가 가장 밝다. 주작 같은 건 암살자라고도 할 수 없지. 내가 표적을 정하면 천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이 빠르게 반응하여 박물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바로 생방송을 열어 방금 목격한 끔찍한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설명했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뒤흔들었으며 수많은 네티즌이 생방송으로 몰려들었다. 헨드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었다.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박물관 안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비명 소리는 군중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두려움의 분위기는 박물관을 넘어 거리 전체로 퍼져나갔다.순찰 경찰들이 도착했지만 상부의 지시하에 박물관을 봉쇄하기만 했다.잠시 후 특수 부대가 현장에 도착해 군중들을 안전 지역으로 밀어냈다.그들의 행동에 군중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왜 즉시 박물관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지 않는 것인가?현대인의 교육과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박물관에서 발생한 이상 현상은 어떤 유독 가스 누출로 인한 것이라고 여겼다.이성이 그들에게 즉시 대피해야 한다고 알려줬지만 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박물관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려 했다. 쓩!어느 병원의 기사단이 군마를 타고 먼저 도착했다. 이어서 검은 갑옷을 입은 암부 요원 10여 명과 구주군 갑옷을 입은 장군들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다.기사는 중세기의 고전적인 직업으로 근대에 들어서는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그런데 그들이 이제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도착한 기사들은 말에서 뛰어내려 맨손으로 교통사고가 난 차량의 문을 뜯어내어 갇힌 사람들을 구출한 후 차량을 들어 올려 군중 밖으로 던져버렸다.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괴력인가? 아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이 장면을 본 생방송 시청자들이 열광했다.“유라비아 기사들이 이렇게 세다고?”전 세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라비아인들조차 어리둥절해 했다.이 장면은 현장에 도착한 기자들에게도 포착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이때 군중들이 갑자기
이 상황에 무슨 명령을 내릴수 있겠나.윌리엄은 신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직접 목격한적이 있었기에 오직 화진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빨리 후퇴하라!”그 말을 들은 특수 부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이때 익숙한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무덤 속으로 우르르 밀려들어왔다.“황혼 기사들이다. 성전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야.”윌리엄이 그들을 알아보자 선두에 선 성전 기사단장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당신들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세히 기록해 세상에 알려야 하오.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고 성전 기사단이 수백 년 동안 헨드리를 지켜오며 악마와 싸워왔음을 말이오.”기사단장이 검을 뽑아들자 검에서 황금빛이 터져 나오며 신성한 기운을 발산했다.다른 기사들도 단장을 따라 검을 꺼내며 이 검들은 신성한 힘으로 강화된 성검이고 무수한 악마를 베어 왔다고 설명했다.신성한 기운이 묘실을 뒤덮으며 으스스한 기운을 억눌렀다.윌리엄 일행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장비를 꺼내 녹화를 시작했다.이때 주작은 지표면에 위치한 지휘본부에서 신념술로 지하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다.그녀는 성스러운 힘으로 강화된 무기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뭐가 신성한 강화야? 그냥 옛날에 쓰다 남은 낡은 법구잖아. 유라비아 놈들은 이제 최하급 법구도 못만들어내는 거야?”만약 곤륜의 주의가 화진에만 집중되지 않았다면 유라비아을 비롯한 다른 대륙의 수련자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이때 주작의 이어폰에서 천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대장님, 우리 암부도 헨드리 왕도에서 여러 제단을 발견했어요. 이거 일종의 전법 같은데요? 우리는 전법에 대해 잘 몰라서 빙신전 놈들을 불러야할것 같아요.”이전에 암부의 세 지휘사도 비밀리에 왕도에 잠입했다. 인력이 부족했지만 조사를 위해 구주군에서 장군 십여 명을 지원받은 상태였다.주작은 즉시 청해에게 전음을 보냈다.“제단 전법이라고? 이건 틀림없이 아사 신전 놈들의 짓이야. 기다려. 내가 당장 가서
그 말은 청해의 마음에 딱 들어맞아 아주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도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은 그냥 듣고 넘길 뿐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그놈들에게 분명히 다른 음모가 있을 거야. 하지만 주인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명령이 설윤을 보호하는 것이니 그 여자를 잘 보호하자. 너희들 모두 잘 들어. 주인님은 나중에 너희들의 죄를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잘만 한다면 사형을 면하고 공을 세워 죄를 갚을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주인님께 좋은 말도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주인님께서 기뻐하시면 큰 이익을 너희에게 하사하실 거다. 그렇게 되면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어.”청해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그의 뜻을 금세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나중에 윤구주가 그들의 죗값을 물을 때 죽음을 면하고 공으로 죄를 갚을 수 있을지는 청해의 말 한마디에 달린 거 아닌가?그래서 이 빙신전의 신들은 윤구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사 신전과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다행히도 윤구주가 앞에서 대부분 압력을 막아 주고 있어 그들은 목숨을 걸고 나머지 적들과 싸울 수 있었다.빙신전이 회의실을 주요 전장으로 삼아 방어를 구축하고 있을 때 주작도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었다.이전에 주작은 윌리엄과 함께 헨드리의 정보 요원들을 모아 비밀리에 왕도로 들어갔다. 그들의 노력으로 수많은 특수 부대원들이 다시 소집되어 팀으로 돌아왔다.왕도의 한구석.윌리엄이 이끄는 특수 부대 한 팀이 어떤 은신처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30명이 넘는 부대원들이 악취가 나는 하수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낯선 지하 동굴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찬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앞쪽에는 불길한 푸른 불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탐조등을 켜자 지하 동굴이 비추어졌고 부대원들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동굴 벽면에 크고 작은 무덤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
헨드리 의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의회장에는 300명의 의원이 모였다. 평소 같으면 이익 집단별로 나뉜 의원들이 설전을 벌였겠지만 올해는 의회장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모든 의원의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어떤 이는 멍들어 있기도 했다. 의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최전열에 앉은 백색 정장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뒤에는 가면을 쓴 흑해골 전사들이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설윤의 삼촌, 디크스였다. 나이로 따지면 디크스는 70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시간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처럼 생기발랄했다. 이것이 아사 신전의 작품이었다. 곤륜 구역의 수단으로 일반인을 젊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 설윤 공주가 왕도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차량 행렬이 거리를 순회 중이며 많은 군중들이 설윤 공주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뒤에 있던 흑해골 전사가 지금의 상황을 보고했다. 디크스가 레드 와인 잔을 흔들자 선글라스 사이로 비친 눈동자가 섬뜩한 붉은빛을 드러냈다. “상관없어. 오히려 안 올까 봐서 걱정이었지. 해외에 숨어있으면 찾기 어렵거든. 죽여 버리면 내가 정당한 권리를 얻을 거야. 그리고 이단자들은 주인님이 신적 기적을 보여주실 때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의회장 밖 거리에는 이미 엄청난 군중이 모여 설윤을 지지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차 안에서 군중의 지지에 감동한 설윤은 확신이 생겼다. 승리의 확신이 아니라 헨드리를 위해 희생할 각오다. 윤구주는 아무 생각 없이 저택에서 가져온 동화책을 뒤적이며 잔을 들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구주왕, 이따 저랑 같이 들어가실 거죠?” 설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당연하죠. 당신 혼자 들어가게 둘 생각 없어요.” 윤구주는 웃으며 답했다. 설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구주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괜찮을 거라 믿었다. “구주왕, 당신이 곁에 있으면 지옥에 빠져도 두렵지 않아요!” 설윤은 갑자기 윤구주의 팔을 움켜쥐
“충성을 맹세해. 우리 화진의 투명장과 마찬가지다. 비록 너희 맹세가 별 의미는 없지만 형식적인 절차는 거쳐야 해.” 윤구주는 손을 저었다. 윤구주의 말에 성기사는 번역기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는 이자벨라 설윤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주왕 폐하도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사 신족을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 최전선에서 싸워주세요.” 윤구주는 이미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자신이 없으면 이들은 감히 아사 신족과 맞서지도 못할 것이다. 화진을 대표하는 자신이 등장했기에 그들에게 저항할 용기를 준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너희가 없어도 나는 아사 신족을 섬멸할 거야! 한 마디로 만약 너희가 앞으로 화진을 적대한다면 나는 하나씩 처단할 거야!” 이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구주왕은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오직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일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적이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설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하,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윤은 여전히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행복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와 결심을 보여줘요. 이틀 후, 헨드리 의회에서 디크스를 몰아내고 당신의 권력을 되찾아야 해요!” 윤구주의 목소리는 설윤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니요! 저는 헨드리 국민의 존엄을 지킬 거예요! 신이라도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순 없어요!” 설윤의 눈빛은 확고해졌다. 윤구주가 이 모든 준비를 한 이유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의회가 열리는 날, 빙신전과 황혼 기사회의 수련자들은 헨드리 왕도에 잠입해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케일 공작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설윤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고 디크스의 즉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헨드리 국내외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도
“황혼 기사회는 어떤 국가나 세력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요. 그들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종말의 전쟁을 대비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수련자처럼 생활하죠. 황혼 기사회는 유럽 대륙에서 유일한 정통 수련자 집단이에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럽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만 그들이 나타난다니!’ 이건 진정한 기사 정신이었다. 설윤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설윤 공주, 오해예요. 그들은 하나의 구원 단체예요. 그들의 고행은 모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죠. 이자벨라 설윤 당신이 바로 유럽의 구세주예요. 헨드리는 유럽의 강국으로 아직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마지막 국가죠. 헨드리마저 함락되면 유럽 전체가 제신전의 노예가 될 거예요.” 설윤은 깜짝 놀랐다. ‘내가 구세주라고? 그럴 리가!’ “전하, 황혼 기사회 초대 성기사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종말의 악마 불길이 유럽 대륙을 태울 때 헨드리의 진주가 구세주가 되어 국민을 구할 것이라고요.” 성기사는 말하며 초대 성기사가 남긴 예언서를 꺼냈다. 설윤은 대충 훑어보았다. 예언 속에는 구세주의 출현만 언급했고 헨드리 출신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방의 신비로운 별이 떠오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구주는 동방에서 왔다. 구세주는 화진의 구주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구주왕이 진짜 구세주일 텐데요!” 설윤이 윤구주를 바라보자 기사들은 어색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 제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예요. 이건 서양의 문명이잖아요. 동방에서 온 제가 구세주가 되면 당신들 문명은 끝나는 거 아니에요? 구세주는 당신이어야만 해요.” 윤구주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설윤은 깨달았다. 예언은 사실이었다. 윤구주가 진짜 구세주다. 하지만 문명의 입장을 고려해 구세주를 서양인으로 바꾼 것이다. “구주왕, 당신은 정말 명예를 전혀 개의치 않나요? 이런 영광을 저에게 양보하다니...” 설윤은 동방에서 온 이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
“대협이요?” 윤구주는 웃었다. 그렇게 불린 건 처음이었다. “대협은 별로예요. 화진에서 대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요. 차라리 곤륜 구역이 지어준 ‘살신'이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들어요.” 윤구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방금 기사 얘기했죠?” 윤구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설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구주가 장난을 걸자 그녀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 제가 꿈꾸던 기사가 저를 구하러 올까요?” 설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리 고전풍의 가야금 소리가 흘렀고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헨드리의 오래된 군기를 들고 있었다. 설윤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성전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도 있어요!”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단이었다. 설윤은 그 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같은 덜 유명한 기사단도 보았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기사단별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만 천 명 가까운 기사가 들어왔다. 밖에는 더 많은 기사와 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설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 앞의 열세 명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 안팎의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어눌한 화진어로 윤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윤구주를 ‘존경하는 화진의 왕’이라 부르며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서양에서 군주는 ‘전하'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구주의 ‘구주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화진의 왕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였다. 물론 윤구주는 이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윤구주에게 인사한 후, 열세 명의 기사는 설윤 앞으로 다가갔다. 신들의 위압감을 이미 경험해 본 설윤은 이 기사들에게서도 동등한 강도의 기세를 느꼈다. 다만 분위기가 달
설윤은 자신의 출생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슬픔에 잠긴 사람은 사실 윤구주였다. 그의 감정에 자신이 휩쓸린 것이었다. “구주왕, 화진의 인황이자 수호신인 이런 신화 같은 인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까?” 설윤은 윤구주가 사해 사건에서 자신을 배신한 애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문아름이었지. 화진에서 아름은 절세미인을 뜻하는 말이야. 윌리엄이 전에 이야기한 적 있어. 그 여자는 화진의 전설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여자 제갈이라 칭했지만 윌리엄은 독한 수단을 쓰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어...” 갑자기 한 차례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며 살벌한 함성이 들려왔다. 설윤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윤구주는 명상 중에 설윤의 중얼거림을 듣고 특히 ‘문아름'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흔들려 살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넘어진 설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너무 무서웠다. 역시 곤륜 구역이 붙인 ‘살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증오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불태워도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흠, 한밤중에 여기서 왜 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죠? 수행 중인 수련자에게 방해는 금물이에요.”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천지를 불태울 듯한 살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감춰져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휴, 됐어요. 제가 마음이 흔들린 탓이죠.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윤구주는 직접 설윤을 일으켜 정원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윤은 계속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냉철한 남자가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니.’ “구주왕, 우리 동서양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서양인은 간단해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
빙신전의 수련자들은 의아해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아사 신전과 헨드리에 주둔한 다른 신전들을 상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윤을 보호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임무가 쉽다고 생각해? 인간 공주의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마. 설윤 공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해. 왕실이 일찍이 설윤 공주를 후계자로 선전했기 때문에 그 신분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어. 게다가 아사 신전은 헨드리를 통제하려는 거지 헨드리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냐. 그들은 헨드리의 재정 대권을 장악하려는 거야. 국왕의 자리는 오직 설윤이나 디크스만이 차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왕실, 심지어 국체를 바꾸는 건 헨드리를 혼란에 빠뜨릴 거야. 그래서 아사 신족은 이번에 직접 나서 설윤을 제거하려 할 거야.” 윤구주가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자 빙신전의 신들도 깨달았다. “살신 전하, 안심하세요! 제가 직접 헨드리의 공주를 보호하겠습니다. 아사 신전의 신왕 오딘이 직접 온다 해도 제가 그와 싸워 결판을 내보겠습니다!” 빙신전 전주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라는 호칭에 윤구주와 설윤 모두 당황했다. 설윤은 신계의 세력들은 잘 모르지만 화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화진 국주가 조서를 내려 군사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윤구주에게 넘겼다. 얼마 전 화진에서는 새로운 공고를 내렸는데 구주왕이 새로운 화진의 인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윤구주는 화진의 차기 국주가 될 것이며 심지어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윤구주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화진의 백 년 부흥 대계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인황이 등장해 민심을 모아 국운을 끌어 올려야만 화진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의회는 3일 후에 열리니까 3일간 휴식해. 우리의 목표는 헨드리 왕도다!” 모든 인원이 준비하러 떠났다. 설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3일 후면 결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