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은 윤구주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성 아래의 시체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예요. 화진도 그렇고 북라국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서 전사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어요.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로와 영예는 모두 그들의 것이 되죠.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들은 복수를 꿈꿔요. 패배로 국가 경제가 무너지면 고통받는 것은 누구 일가요? 복수를 위해 싸울 때도 목숨을 잃는 건 언제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자손들이에요.” 이 말을 하며 엄연은 윤구주를 깊이 바라보았다. 윤구주는 그 속뜻을 이해했다. “엄 장군, 안심하세요. 이번에 종맹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모든 위험 요소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함이에요. 우리 이 세대의 희생으로 화진의 천추만대의 평화를 얻으려 합니다.” 윤구주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 결심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네, 구주왕이 있으니 안심이 되네요.” 엄연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며 윤구주 뒤에 서 있는 현모와 사기가 충만한 십만 명의 신세대 대군을 바라보았다. 장군과 병사들이 하나가 된 모습을 보며 그는 이제 안심하고 은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장군들이 이제는 뒤로 물러나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순간, 윤구주의 날카로운 황금빛이 번뜩이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장군, 북경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아직도 당신이 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은퇴는 서두르지 마세요.” 엄연은 잠시 멍해졌다가 몇몇 동료들과 눈을 마주치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 원래 엄연이 은퇴하면 북경왕이 북역을 지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경왕이 갑자기 실종된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고 왕부의 대장들은 죽거나 실종되었다. 북역 삼주의 군사력도 심각하게 손실을 보았다. 거의 모든 장군이 전사한 상태였다. 엄연은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몰랐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실종된 북경왕도 이미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나
“형님!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형님이 죽을까 봐 정말 무서웠어요.” 공수이는 윤구주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울면 울지, 코물 같은 건 내 옷에 묻히지 마! 저리 비켜!” 다른 사람들이 윤구주의 생사를 걱정하는 것은 윤구주가 나라를 지키는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국면이 흔들리지 않도록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수이는 순수하게 윤구주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윤구주는 비록 그를 꾸짖었지만 공수이는 정신없는 구석이 있어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돌격대에 나섰다. 공수이는 여섯째 공주 이홍연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 공수이는 공씨 가문을 원망했다. 적국이 국문을 넘어 화진의 무술을 짓밟으려 했는데 공씨 가문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던 건 아니야. 공씨 가문도 사람을 보내려고 했잖아?”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사람을 보내려고 했지만 육도진이 금지 무기로 청관을 폭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윤구주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화진의 백개 가문 중 공씨 가문만이 나설 수 있었다. 화진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단순히 살육만으로는 안 된다. 도울 것은 도우고 상을 줄 것은 상을 주어야 한다. 윤구주는 이미 진동왕에게 공씨 가문을 포상하는 문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구주왕, 기자회견 장소가 준비되었습니다. 모두 준비되었고 구주왕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모가 보고했다. “알았어.” 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이를 밀어내고 현모를 따라 기자회견 장소로 향했다. 이번 기자회견은 정부 중심에서 열렸고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윤구주가 회장에 들어서자 현장의 장군들이 일제히 윤구주에게 경의를 표했다. 카메라 렌즈는 윤구주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윤구주가 전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진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TV나 휴대폰으로 이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었다. 윤구주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모두 국주님이 지하 궁전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지?”윤구주의 물음에 현장에 있던 장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윤구주는 그들의 반응을 눈여겨보고 있었다.진동왕이 조카를 걱정하는 것 외에 나머지 장군들은 7일 후의 대전만 생각하며 임정설의 생사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지금은 새로운 국운이 윤구주로 인해 나타났고 그에게 국운이 집중되어 윤구주가 화진에서의 영향력이 이미 임정설을 훨씬 넘어섰다.하지만 이는 윤구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자기가 임정설만 못하다고 생각한 윤구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국주님이 나에게 화진 군무를 책임지라는 조서를 남기셨다. 나는 진동왕을 북역 삼주의 시장으로, 현모를 구주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엄후작을 북주의 시장으로 승격시켜 여전히 청관을 지키게 한다. 나머지 장군들도 모두 임무가 맡겨질 것이니 북라국의 난리를 평정한 후에 공을 논하여 상을 주겠다.”이 결정은 윤구주가 미리 그들과 상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 아무런 반응 없이 받아들였다. 다만 엄후작이라는 말이 엄연을 혼란스럽게 했다.“구주왕님, 저를 왜 엄후작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엄연이 의혹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무슨 뜻 이긴 장군은 항상 후작에 봉해지지 못해 고민하지 않았었나?”말을 마친 윤구주는 화진 군기처에서 발급한 조서를 꺼내 장군 엄연을 엄후작에 봉하고 동시에 후작의 인장을 꺼내 엄연에게 건네주었다.그의 말에 엄연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작에 봉해지는 것은 모든 장수의 꿈이었지만 후작에 봉해지기란 쉽지 않았다.공이 높아도 평생 후작에 봉해지지 못한 장수들이 많았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엄연도 그들과 비슷한 처지였다. 모두 나라를 지키는 데 공이 컸고 만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세운 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임정설이 그를 후작에 봉하지 않았던 것이다.소원이 이루어진 엄연은 그 기쁜 소식이 믿어지지 않았고 꿈만 같았다.“
윤구주는 임홍연이 무엇 때문에 풀이 죽어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우리 공주님 무슨 일이야? 누가 또 널 화나게 했어? 설마 공수이 그 자식이 또 헛소리를 한거야?”“아니야. 그냥 일주일 후의 전쟁이 걱정돼서 그래.”임홍연은 입을 삐죽이며 땅에 쪼그려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전쟁이 걱정된다고? 내가 정의의 군대를 이끌고 화진을 침범한 적들을 처단할 건데 뭐가 걱정돼? 병사들의 마음도 하나로 뭉쳤잖아. 게다가 나는 이보다 더 어려운 전쟁도 다 겪어봤어. 북라국 따위야 별거 아니야.”윤구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열 개 나라의 강적들도 다 물리쳤었는데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북라국은 말할 것도 없었다.“너무 방심하지 마. 북라국 뒤에는 아사 신전이 있잖아. 그리고 곤륜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어. 세계는 구주와 오방으로 나뉘는데 구주는 우리 화진을 뜻하고 오방은 곤륜을 말해. 북라국은 곤륜 북방에 속하는데 그곳은 빙신전과 아사 신전의 세력권이야. 그 둘은 원래 사이가 안 좋지만 네가 군대를 이끌고 북라국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손을 잡고 맞서 싸울 거야. 북라국은 작지만 두 뿌리가 깊은 신전이 있어서 조심해야 해. 게다가 문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방해할 것이 틀림없어. 네 말처럼 그렇게 쉽게 넘어갈 상대가 아니야.”임홍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이 말을 들은 윤구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감탄을 표시했다.“음, 그렇다면 공주님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을까?”윤구주가 다시 물었다.“반드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어디 있어? 지리적 우세나 민심은 우리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하늘의 뜻은 예측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네가 새로운 국운을 얻었고 국운이 네 편에 있으니 네가 직접 군대를 이끌면 이 전쟁은 질 수가 없어. 하지만 병법에도 말했듯이 최고의 전략은 모략으로 이기는 거야. 북라국을 상대하는 건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거로 끝나는 게
“임성진 할아버지께서도 말씀하셨잖아. 너는 화진의 새로운 왕일 뿐만 아니라 500년 만에 한 번 나오는 황자라고. 네가 황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나도 네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었다면 옛 왕실의 결말은 참혹했을 거야. 임씨 가문의 임무는 이미 끝났어. 이제는 네가 우리 임씨가 이루지 못한 것릏 이어가야 할 때야.”임홍연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군주가 듣고 싶어 할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윤구주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 말들은 누가 가르쳐 준 거야? 설마 진동왕이야? 그래, 진동왕은 이미 군대에서 위엄을 세웠고 지금은 사람을 쓸 때라 그가 없어서는 안 되지. 진동왕은 임씨 황실의 왕이기도 하고 새로운 왕조의 왕이기도 해. 어느 쪽이 이기든 손해 보는 일은 없지.”윤구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임홍연은 어안이 벙벙해져 윤구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윤구주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너무 화가 났지만 윤구주가 황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윤구주를 화나게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옛 왕실의 신하들을 위해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다시 말해, 진동왕이 새로운 왕조에서 왕이 되는 것은 옛 왕실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했다.“아니, 진동왕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없어. 그분은 자신의 능력으로 군대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이런 말을 너한테 하는 건 우리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야...”임홍연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슴이 베이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계속 말해 봐. 우리가 무슨 관계야?”윤구주는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그녀에게 얼버무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임홍연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화진의 천하와 백성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나는 지금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묻는 거야.”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단호하게 말했다.“우리는 친구야! 누구든
윤구주는 임홍연의 허리를 끌어안아 올려 자리에 앉혔다.“윤구주... 잠깐 내 말을 들어봐.”윤구주는 두 손가락으로 임홍연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지만 나라를 다스릴 재능은 없어. 공주님은 국주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고 조정의 신하들과도 많이 접촉잖아. 근데 그 서생들은 나를 엄청 무서워해. 나는 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마음 놓고 쓸 수 없어. 다른 건 일단 제쳐두고 이번 북라국 침략을 막아낸 일만 봐도 장병들이 네게 복종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나는 나라를 다스릴 재능이 없으니 이 국주의 자리는 역시...”이때 임홍연이 벌떡 일어서서 그의 말을 끊었다.“윤구주!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가 올 줄은 몰랐다고. 내가 탱크들을 청관으로 소집했을 때는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공주님, 서두르지 말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윤구주는 임홍연을 강제로 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어갔다.“일주일 뒤에 전쟁이 시작될 거야. 이 일주일 동안 공주님은 나를 대신해 북역을 지켜줘. 나는 서울로 돌아갈 거야.”“서울로?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거야?”임홍연은 그가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깨달았다.“맞아. 나는 화진의 구주왕이야. 국주님이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구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나 윤구주는 체면을 아끼는 사람이야. 만약 가지 않는다면 서생들이 날 욕할 거야.”윤구주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감히 널 욕해! 네가 아버지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어!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나라와 백성이 군주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어. 전쟁이 임박했는데 사령관이 없으면 안 된다고. 군주는 죽을 수 있어도 국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임홍연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자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공주님 말이 맞아. 하지만 내가 방금 말했듯이 나 윤구주는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국주님은 나의 첫 번째 스승이셨
“게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네가 공주라도, 미래에 왕이 된다 해도 넌 나 윤구주의 여자야. 우린 영원히 함께할 거야.”“윤구주, 난 네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콜록.두 사람이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밖에서 민규현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민규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쟤는 밖에서 뭐 하는 거야? 감히 엿듣고 있었다니.”윤구주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던 임홍연의 표정이 갑자기 엄숙해지더니 왕의 기세를 뽐냈다. 이 장면을 본 윤구주는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왕실의 유전자는 정말 다르네. 한 번의 경험만으로 예전의 기운을 모두 벗어버렸어. 우리 불쌍한 채은이...’윤구주는 소채은이 안쓰러워졌다. 그녀는 임홍연과 달랐고, 윤구주는 그녀의 순수함과 선량함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술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평가를 하고 싶지 않았다.우상 육도진의 말을 빌리자면, 소채은은 무술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누구라도 윤구주와 그렇게 오래 함께했으면 주변 사람의 지도를 받아 이미 강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나는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해. 너에게 문제가 생겨서는 안 돼. 그러니 북역에 남아 있어. 일주일 뒤 북역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지만 화진에서 북역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어.”윤구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신신당부했다.“응. 난 너를 믿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임홍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 인사로 키스를 했다.임홍연에게 일을 맡기고 난 윤구주는 급히 민규현을 따라 저택을 떠났다.“저하, 비행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누구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왕이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몰라요. 역시 우리 왕이십니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에요. 왕께서 전 세계에 결전을 선포하니 북라국 놈들이 더는 별짓을 못 하고 급히 전쟁 준비를 시작했죠.”민규현이 혀를 차며 말했다.“오? 너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어? 이건 너답지 않은데. 천현수가 너
진동왕의 말이 엄연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북경왕이 문씨 가문과 타협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북경왕은 일찍이 구오에 도달했지만 무술로 도를 깨우쳤기 때문에 곤륜에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 구오에 도달한 자들보다 실력이 훨씬 뒤떨어졌다.문씨 가문은 곤륜을 등지고 있어 북경왕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그렇다면 진동왕의 뜻은...”“엄 장군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해야 할 말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마세요.”진동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엄연을 바라보자 엄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동왕은 다른 장군들에게도 눈치를 주며 의도적으로 엄연을 통해 위엄을 세우려 했다.현장에 있던 장군 중에는 구주군 휘하의 장수들도 있었는데 진동왕의 이런 행동에 매우 불쾌해했다.바로 그때 윤구주가 도착했다.그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진동왕, 정말 위엄이 대단하시군요. 얼마 안 돼 구주군 총사령관 자리도 진동왕에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그의 말을 들은 진동왕은 매우 당황하여 윤구주가 들어오기도 전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자리에 있던 모든 장군도 윤구주에게 경례를 했다.윤구주는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상석에 앉지 않고 진동왕이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진동왕 임성진은 불안했는지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윤구주는 진동왕을 유심히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 우리한테 사적인 관계가 있는 건 맞지만 오늘 장군들 앞에서 분명히 말해야겠어요. 진동왕은 국주님이 아저씨에게 봉한 자리에요. 밖에서 제가 아저씨를 진동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의 관계 때문이죠. 그 관계가 없다면 저는 아저씨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아저씨가 제 휘하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저는 아저씨를 관계하지 않을 것이에요. 하지만 진동왕은 지금 구주군의 장수며 삼주 총사령관에까지 봉해졌잖아요. 한마디로 제가 진동왕을 쓰겠다면 누구도 아저씨를 밀어낼 수 없고 제가 쓰지 않겠다면 누
“충성을 맹세해. 우리 화진의 투명장과 마찬가지다. 비록 너희 맹세가 별 의미는 없지만 형식적인 절차는 거쳐야 해.” 윤구주는 손을 저었다. 윤구주의 말에 성기사는 번역기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는 이자벨라 설윤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지만 구주왕 폐하도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아사 신족을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 최전선에서 싸워주세요.” 윤구주는 이미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자신이 없으면 이들은 감히 아사 신족과 맞서지도 못할 것이다. 화진을 대표하는 자신이 등장했기에 그들에게 저항할 용기를 준 것이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너희가 없어도 나는 아사 신족을 섬멸할 거야! 한 마디로 만약 너희가 앞으로 화진을 적대한다면 나는 하나씩 처단할 거야!” 이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구주왕은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다. 오직 자신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일한 목표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적이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설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하,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설윤은 여전히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행복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용기와 결심을 보여줘요. 이틀 후, 헨드리 의회에서 디크스를 몰아내고 당신의 권력을 되찾아야 해요!” 윤구주의 목소리는 설윤에게 확신을 주었다. “아니요! 저는 헨드리 국민의 존엄을 지킬 거예요! 신이라도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순 없어요!” 설윤의 눈빛은 확고해졌다. 윤구주가 이 모든 준비를 한 이유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의회가 열리는 날, 빙신전과 황혼 기사회의 수련자들은 헨드리 왕도에 잠입해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케일 공작은 전날 기자회견을 열어 설윤에게 충성할 것을 선언하고 디크스의 즉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영향으로 헨드리 국내외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도
“황혼 기사회는 어떤 국가나 세력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요. 그들의 존재 목적은 단 하나, 종말의 전쟁을 대비하는 거예요. 평소에는 수련자처럼 생활하죠. 황혼 기사회는 유럽 대륙에서 유일한 정통 수련자 집단이에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럽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만 그들이 나타난다니!’ 이건 진정한 기사 정신이었다. 설윤은 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설윤 공주, 오해예요. 그들은 하나의 구원 단체예요. 그들의 고행은 모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죠. 이자벨라 설윤 당신이 바로 유럽의 구세주예요. 헨드리는 유럽의 강국으로 아직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마지막 국가죠. 헨드리마저 함락되면 유럽 전체가 제신전의 노예가 될 거예요.” 설윤은 깜짝 놀랐다. ‘내가 구세주라고? 그럴 리가!’ “전하, 황혼 기사회 초대 성기사는 예언을 남겼습니다. 종말의 악마 불길이 유럽 대륙을 태울 때 헨드리의 진주가 구세주가 되어 국민을 구할 것이라고요.” 성기사는 말하며 초대 성기사가 남긴 예언서를 꺼냈다. 설윤은 대충 훑어보았다. 예언 속에는 구세주의 출현만 언급했고 헨드리 출신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방의 신비로운 별이 떠오를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구주는 동방에서 왔다. 구세주는 화진의 구주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구주왕이 진짜 구세주일 텐데요!” 설윤이 윤구주를 바라보자 기사들은 어색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 제가 맞다고 하면 맞는 거예요. 이건 서양의 문명이잖아요. 동방에서 온 제가 구세주가 되면 당신들 문명은 끝나는 거 아니에요? 구세주는 당신이어야만 해요.” 윤구주는 거리낌 없이 웃으며 말했다. 설윤은 깨달았다. 예언은 사실이었다. 윤구주가 진짜 구세주다. 하지만 문명의 입장을 고려해 구세주를 서양인으로 바꾼 것이다. “구주왕, 당신은 정말 명예를 전혀 개의치 않나요? 이런 영광을 저에게 양보하다니...” 설윤은 동방에서 온 이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
“대협이요?” 윤구주는 웃었다. 그렇게 불린 건 처음이었다. “대협은 별로예요. 화진에서 대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요. 차라리 곤륜 구역이 지어준 ‘살신'이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들어요.” 윤구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방금 기사 얘기했죠?” 윤구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설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구주가 장난을 걸자 그녀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 제가 꿈꾸던 기사가 저를 구하러 올까요?” 설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리 고전풍의 가야금 소리가 흘렀고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헨드리의 오래된 군기를 들고 있었다. 설윤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성전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도 있어요!”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단이었다. 설윤은 그 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같은 덜 유명한 기사단도 보았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기사단별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만 천 명 가까운 기사가 들어왔다. 밖에는 더 많은 기사와 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설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 앞의 열세 명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 안팎의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어눌한 화진어로 윤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윤구주를 ‘존경하는 화진의 왕’이라 부르며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서양에서 군주는 ‘전하'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구주의 ‘구주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화진의 왕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였다. 물론 윤구주는 이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윤구주에게 인사한 후, 열세 명의 기사는 설윤 앞으로 다가갔다. 신들의 위압감을 이미 경험해 본 설윤은 이 기사들에게서도 동등한 강도의 기세를 느꼈다. 다만 분위기가 달
설윤은 자신의 출생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슬픔에 잠긴 사람은 사실 윤구주였다. 그의 감정에 자신이 휩쓸린 것이었다. “구주왕, 화진의 인황이자 수호신인 이런 신화 같은 인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까?” 설윤은 윤구주가 사해 사건에서 자신을 배신한 애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문아름이었지. 화진에서 아름은 절세미인을 뜻하는 말이야. 윌리엄이 전에 이야기한 적 있어. 그 여자는 화진의 전설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여자 제갈이라 칭했지만 윌리엄은 독한 수단을 쓰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어...” 갑자기 한 차례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며 살벌한 함성이 들려왔다. 설윤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윤구주는 명상 중에 설윤의 중얼거림을 듣고 특히 ‘문아름'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흔들려 살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넘어진 설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너무 무서웠다. 역시 곤륜 구역이 붙인 ‘살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증오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불태워도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흠, 한밤중에 여기서 왜 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죠? 수행 중인 수련자에게 방해는 금물이에요.”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천지를 불태울 듯한 살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감춰져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휴, 됐어요. 제가 마음이 흔들린 탓이죠.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윤구주는 직접 설윤을 일으켜 정원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윤은 계속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냉철한 남자가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니.’ “구주왕, 우리 동서양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서양인은 간단해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
빙신전의 수련자들은 의아해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아사 신전과 헨드리에 주둔한 다른 신전들을 상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윤을 보호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임무가 쉽다고 생각해? 인간 공주의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마. 설윤 공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해. 왕실이 일찍이 설윤 공주를 후계자로 선전했기 때문에 그 신분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어. 게다가 아사 신전은 헨드리를 통제하려는 거지 헨드리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냐. 그들은 헨드리의 재정 대권을 장악하려는 거야. 국왕의 자리는 오직 설윤이나 디크스만이 차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왕실, 심지어 국체를 바꾸는 건 헨드리를 혼란에 빠뜨릴 거야. 그래서 아사 신족은 이번에 직접 나서 설윤을 제거하려 할 거야.” 윤구주가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자 빙신전의 신들도 깨달았다. “살신 전하, 안심하세요! 제가 직접 헨드리의 공주를 보호하겠습니다. 아사 신전의 신왕 오딘이 직접 온다 해도 제가 그와 싸워 결판을 내보겠습니다!” 빙신전 전주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라는 호칭에 윤구주와 설윤 모두 당황했다. 설윤은 신계의 세력들은 잘 모르지만 화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화진 국주가 조서를 내려 군사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윤구주에게 넘겼다. 얼마 전 화진에서는 새로운 공고를 내렸는데 구주왕이 새로운 화진의 인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윤구주는 화진의 차기 국주가 될 것이며 심지어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윤구주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화진의 백 년 부흥 대계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인황이 등장해 민심을 모아 국운을 끌어 올려야만 화진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의회는 3일 후에 열리니까 3일간 휴식해. 우리의 목표는 헨드리 왕도다!” 모든 인원이 준비하러 떠났다. 설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3일 후면 결전
가톨릭을 언급하자 설윤은 눈이 번쩍 뜨였다. 설윤이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알아챈 현모가 미리 답했다. “당신들이 믿는 가톨릭은 몇백 년 전에 이미 다른 신전 세력에게 멸망했습니다. 아직 일부 신들이 남아 있지만 이미 삼류 수준으로 전락했죠.” 설윤의 신앙이 무너졌다. 교회의 교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였다. ‘신도 죽을 수 있다고?’ “현재 곤륜 구역의 주요 세력은 삼도, 육전, 십이각입니다. 삼도는 고신도, 무도, 검도입니다. 육전은 수신전, 빙신전, 희랍 신전, 아사 신전, 화신전, 그리고 극락 신전입니다. 십이각은 자주 바뀌니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신계의 세력 구분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는 수련자들일 뿐 그렇게 신비로운 존재도 아니고 신화적인 색채는 그저 세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죠.” 현모가 설명했다. 설윤의 세계관이 무너졌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당장 소화진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정신이 나갔을 것이다. 설윤도 한참 후에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지금 우리 헨드리를 침략하려는 건 아사 신전이군요!” 설윤은 침착하게 말했다. “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현모는 설윤에게 헨드리에 자리 잡은 신전이 아사 신전만이 아니라 빙신전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지금은 윤구주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설윤은 헨드리의 배후 세력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 그래서 제국 안에 이렇게 많은 신교 신앙이 존재했던 거였다. “설윤 공주, 공주님 혼자서는 힘이 부족해요. 헨드리 왕실도 거의 남아 있는 게 없고 의회와 각급 장교들도 대부분 잠식당한 상태예요. 그래서 빙신전의 힘을 빌려야만 반격할 수 있어요.” 윤구주가 말했다. 윤구주가 빙신전 전주를 바라보자 윤구주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300석의 의회 의원 중 빙신전이 50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약 2개 여단이 빙신전의 지휘를 받고 있고 케일 휘하의 병력을 합치면 총 5개
“설윤 공주, 이 7일 동안 제가 한 일이 많아요. 케일 영지 내의 아사 신족을 소탕한 건 부수적인 거고 중요한 건 빙신전을 설득했다는 거예요. 이제 그들은 기꺼이 제 밑에서 일할 거예요. 다만 공을 세워 죄를 갚은 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윤구주가 설윤에게 말했다. 설윤은 어리둥절했다. 빙신전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라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있던 현모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왕, 정말 말재주가 좋으시네요. 사실은 왕이 곤륜 구역까지 쳐들어가 숨어 있던 빙신전 전주를 잡아서 피떡으로 만들고 항복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부하들에게 보여줬잖아요. 그제야 그들이 현실을 깨닫고 항복한 거라고요!” 현모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현모가 참지 못했는데 이제는 빙신전 사람들이 참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치욕적인데 현모가 또다시 그 치욕을 들춰냈다. “그만! 난 살신 윤구주에게 항복한 거야.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지? 당시 윤구주도 인정했던 일이야!” 그 남자는 분노와 굴욕에 차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윤구주도 동의한 사실이다. 빙신전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항복하겠다고 했다. 차라리 그의 개가 되더라도 화진에 항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화진에 항복하면 적어도 체면은 유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굴복하길 원했다. 윤구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찌 됐든 윤구주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튼 아까 허세를 부리던 자가 바로 빙신전의 전주였다. 경지는 극 신급 절정 후기로 황자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윤구주에게 항복하는 게 굴욕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사실 빙신전의 최강자는 빙황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빙황은 빙신전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고 빙신전 전주는 원래 빙황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강력한 빙황이 윤구주에게 살해당했고 곤륜 구역의 다른 신전들은 기회를 틈타 빙황의 세력을 전멸시켰다. 빙신전까지 밀어붙이려는 순간, 윤구주가 곤륜 구역에 쳐들어와 숨어 있던
“설윤 공주, 당신도 알다시피 대국 간의 전쟁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어요.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에요. 곤륜 구역과 우리 화진은 적대한 지 천 년이 넘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도 빙신전과 협력하고 있지 않나요?” 설윤이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윤구주가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들은 케일 공작은 즉시 모든 재산, 군대, 영지를 설윤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해 달라고 빌었다. 설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케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충실한 노예로 변신했다. 그는 서둘러 설윤을 상석에 모셔다 앉혔다. “구주왕,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그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군요.” 바로 그때, 옆방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빙신전의 신명들은 일제히 일어나 옆방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람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신명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니 설윤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윤구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 현모는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남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천지를 짓밟을 듯했고 차가운 눈빛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경멸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끝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관을 쓴 그의 위엄 있는 자세와 강렬한 기운은 왕실 출신인 설윤도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윤구주가 없었다면 그녀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홀을 둘러보았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마치 무릎을 꿇지 않으면 신의 위엄을 모독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윤구주의 휘하 군신인 현모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 불쾌했지만 이 자가 정말 강력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그가 천상의 신군처럼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압박감을 주던 그때, 윤구주가 짜증 난 듯 말했다. “적당히 해
설윤의 반응은 윤구주 예상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오는 길 동안 긴장했던 이유였다.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일어나거라. 아무 자리에나 앉아서 우리 화진의 최고급 차나 마시도록 해. 너는 설윤 공주가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으니 계속 무릎 꿇고 있어.” 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홀에 있던 모든 신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하나같이 비웃는 눈빛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었다. 노인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몇 번 조아리자 이마에 상처가 났고 바닥에는 온통 피였다. “윤구주 씨, 이 사람은...” “알고 있어요. 케일 공작이죠. 헨드리 왕실의 적수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헨드리 제국에서는 지금 당신의 삼촌 디크스와 같은 악당이고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 공작은 헨드리의 배신자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영지를 만들고 케일 상단으로 제국의 상업을 독점했다. 심지어 그 영지 안에 군대까지 세웠다. 특히 몇 년 전, 케일 공작은 왕실 후계자인 설윤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다행히 왕실 정보부가 미리 알아채어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왜 이 자가 헨드리 제국에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처벌받지 않았는지 알아요?” 윤구주는 웃으며 물었다. “왕실의 뒤에 더 큰 세력이 있다고 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뒤에도 신명이 있었네요.” 설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그 뒤에는 확실히 신명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헨드리에서의 빙신전 이익 대변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빙신전의 하수인이죠. 헨드리 제국이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연해요.” 윤구주가 말했다. 케일 공작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이미 구주왕에게 항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윤구주는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건 개미 죽이듯이 쉬운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