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이 어미도 네 아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서울이 우리 화진의 수도란 사실을 너도 잘 알잖아. 그런 대도시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길가에 즐비했어. 다른 여자들이 구주를 채가지 않게 신경 좀 써야 할 거야.”천희수도 입을 열었다.이들의 재촉에도 소채은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아빠, 엄마, 너무 멀리 갔어요. 저와 인연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너무 연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구주와 저 사이의 문제를 두 분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부모로서 어떻게 자식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그를 바다에서 구해준 사람은 너야. 어찌 이리도 배은망덕할 수 있단 말이냐.”소청하가 말했다.“네 아빠 말이 맞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버리면 안 되지.”부모의 말에 소채은은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회사 갈 거니까 저와 구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소채은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채은아!”“채은아!”소청하와 천희수가 큰 소리로 외쳤지만, 소채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방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머리는 여전히 윙윙거렸다.사실 그녀도 윤구주를 원했지만, 명성이 자자한 윤구주가 강성과 같은 소도시에 자리를 잡을 리 만무하다고 소채은은 생각했다.“내가 그의 배필로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소채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이때, 갑자기 그녀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채은 씨, 오늘에 일찍 퇴근하셨네요.”그녀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우아한 각선미와 옥 같은 얼굴을 한 연규비가 보였다.길고 몸에 착 감긴 듯한 치마는 그녀의 S라인 몸매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연규비의 목소리에 소채은은 재빨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일이 바쁘지 않아 일찍 돌아왔어요.”“아. 정말요?”연규비는 소채은의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발견했다.소채은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채은 씨, 또 구주를 생각한 거예요?”연규비는 소채은에게 다가가
박창용이 용인 빌리지에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가 윤구주의 소식을 가지고 왔을 것으로 생각한 백경재, 주세호, 그리고 소청하 부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모두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에 연규비가 들어왔다.“규비 여신님, 박 사령관이 무슨 소식을 가지고 온대요? 저하에 관한 소식인가요?”백경재가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연규비에게 묻자, 연규비가 답했다.“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박 사령관의 말투로 보아 그런 것 같아요.”“하하!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리 저하의 소식이라니요.”감격에 겨운 듯 백경재의 눈가는 촉촉이 젖었다.물론 다른 사람들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서울로 떠난 반년이란 시간 동안에 윤구주는 문벌과 세가와 싸우느라 강성에 있는 식구들을 신경 쓰지 못했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이들을 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저하가 저희를 버리지 않았다고 제가 말했잖아요.”주세호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모두가 대청마루에서 창용 부대의 총사령관인 박창용을 기다리고 있었다.한 시간이 흐른 뒤, 용인 빌리지의 아래에 3대의 지프 군용차가 나타났다.차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실탄 장착한 총을 지니고 있던 경비병들이었다.그러고 나서 우람한 체구를 갖춘 박창용이 차에서 내렸다.“사령관님, 도착했습니다.”경비병의 말에 박창용이 고개 들어 용인 빌리지를 올려다보았다.“저하가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으니 꽤 오랜만이네. 다들 저하를 그리워하고 있겠지?”말을 마친 후, 박창용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이제 올라가 보자꾸나.”그는 경비병 몇 명과 함께 용인 빌리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박창용과 경비병들이 용인 빌리지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입구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백경재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박 사령관님, 이제야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말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백경재를 바라보던 박창용은 하하거리며 웃었다.“백 대사님, 오랜만입니다.”“제가 얼마나 눈이 빠지게
이에 대해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박창용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설국의 선대 국주가 갑자기 붕어한 탓에 다른 새 국주를 임명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새 국주가 여성이라던데.”주세호가 말했다.“주 회장의 말이 맞아. 그렇다면 설국의 젊은 국주가 왜 갑자기 붕어했는지는 알고 있나?”박창용이 또 묻자, 주세호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주세호는 사업가인지라 국정에 대해 알 리 없었다.“참수당했어!”박창용은 큰 소리로 말했다.“네? 설국의 선대 국주가 참수당했다고요?”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네. 10국의 성원이었던 설국의 야심은 하늘을 찔렀어요. 특히 요 몇 년 동안에 우리 화진의 국경을 밥 먹듯이 침범한 탓에 그 대가를 치른 셈이죠. 이뿐만이 아니에요. 설국은 군신, 광명 신전 등 거물급 인사들까지 잃었어요. 당연히 이 모든 것은 한 화진 사람의 소행이고요.”이 말을 내뱉는 박창용의 목소리는 격앙된 상태였다.“그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소행이에요?”소청하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화진 사람 한 명이 설국을 상대로 싸워 설국의 국주를 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소청하의 질문에 박창용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 사람들에게 되물었다.“하하! 누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췄는지 여러분은 짐작이 가시나요?”“박 사령관님, 혹시 구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총명한 연규비가 물었다.“네? 저하라고요?”백경재가 외치자, 소채은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주세호와 다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박창용을 바라보았다.“저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역시 규비 여신님밖에 없네요. 맞아요. 설국의 국주를 참수하고 설국을 백 년 동안 우리 화진에게 굴복시키게 한 인물이 바로 저하에요.”박창용이 진실을 말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홀로 한 나라와 맞선 데다 설국 국주의 목까지 베었다니!”“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설국을 백 년 동안 우리 화진의
박창용이 말했다.“저도 잘 몰라요. 북방군과 황성 금위군이 흑여산맥에서 철수했다는 사실 외에 저하에 대해서 저도 아는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 감가 무소식이에요.”대청마루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모두 윤구주를 만나고 싶었지만, 박창용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조차도 윤구주의 행방을 모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어휴. 언제면 저하를 만날 수 있을는지.”백경재가 탄식했다.다른 사람들도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허탈한 표정만큼은 감추지 못했다.…이때, 강성의 숨겨진 공항에 군용 헬기가 천천히 착륙하더니 군인들이 공항 외곽을 철저히 봉쇄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공항 활주로에는 수십 명의 중무장한 군인들로 채워졌다.헬기의 문이 열리자, 3명의 영웅인 박천후, 염수천, 그리고 윤구주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박 총사령관님! 염 통령님!”소령으로 보이는 한 장교가 박천후와 염수천이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더니 즉시 차려 자세를 취했다.하지만, 이 장교는 윤구주를 알아보지 못했다.박천후가 이 장교를 힐끗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너희들은 이만 가봐.”“네!”그러자 두 줄의 군인들이 물러났다.“저하, 강성에 도착했어요.”윤구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박천후가 공손하게 말했다.윤구주는 자리에 멈춰선 후, 강성의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 번 했다.“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는가? 용인 빌리지로 갈 테니 차 준비해.”“네!”차를 준비하라고 박천후가 서둘러 부하들에게 명령했다.박천후와 염수천을 데리고 용인 빌리지로 향하는 도중에 윤구주는 소채은과의 기이한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와 강성에서 보냈던 날들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그러자 박천후가 감격에 찬 어조로 말했다.“저하의 얘기를 들어보니 채은 씨는 엄청 착하신 분이네. 그녀를 만난다면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려야겠어.”“그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염수천도 찬성했다.윤구주는 창밖의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소채은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함과 함께 살기 가득한 눈빛을 한 백경재는 즉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백 선생, 날 죽이려고?”익숙한 목소리가 백경재의 귓가에 들려옴과 동시에 윤구주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이 늙은이가 꿈꾸고 있는 건가? 저하?”갑자기 나타난 예구주를 보더니 백경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윤구주가 미소를 지으며 백경재에게 다가갔다.“뭐야? 고작 반년 못 봤는데 날 잊은 거야?”“제가 어찌 저하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백경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저하가 정말로 강성으로 돌아왔다고요?”백경재는 여전히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당연하지. 나 윤구주 맞아.”윤구주가 싱긋 웃자, 백경재는 자기 얼굴을 꼬집었다.통증이 느껴지고서야 그는 비로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맙소사! 저하가 돌아오다니! 저하가 정말로 돌아왔네요!”용인 빌리지의 내부를 향해 백경재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주 회장님, 채은 씨, 규비 여신님, 어서 나와들 보세요. 저하가 돌아왔어요!”백경재의 말에 서둘러 뛰쳐나온 주세호, 연규비, 소청하 부부, 그리고 박창용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저하!”“내 사위가 정말로 돌아왔다고?”“저하가 돌아왔어!”익숙한 사람들을 바라보던 윤구주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그래. 나야. 이 윤구주가 왔어.”윤구주가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우리 사위가 드디어 돌아왔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윤구주를 보자마자 소청하는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천희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물론 다른 사람들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잠깐, 천후 맞지? 수천도 있네. 너희들이 왜 저하 옆에 있어?”윤구주 뒤에 박천후와 염수천이 있는 것을 박창용은 발견했다.“하하하! 당연히 저하와 함께 창용 씨를 뵈러 왔죠. 그나저나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저하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았으면서도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어요?”박
말을 마친 천희수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소채은에게 전화했지만, 소채은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얘가 왜 휴대폰은 끈 거야?”몇 번 전화를 더 해봐도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천희수가 답답해하자, 그녀 옆에 있던 소청하가 상황 수습에 나섰다.“구주야, 걱정하지 마. 채은이 네가 너무 그리워서 산책하러 나갔나 보다. 아마 곧 돌아올 거야.”소채은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본 윤구주는 조금 서운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강성의 스카이가든, 이곳은 소채은이 소씨 가문에서 쫓겨 난 후 소채은과 윤구주가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소채은과 그녀의 곁에 고분고분하게 누워있는 까망이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윤구주가 혼자서 설국을 상대로 싸워 설국 전체를 화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박창용한테서 들은 후부터 그녀는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쓸쓸하기도 했다.기뻤던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이 세상의 위대한 영웅이라는 사실이었고, 쓸쓸했던 것은 자신이 윤구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하얀 다리를 껴안은 채 옆에 있던 까망이에게 물었다.“까망아, 그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겠지? 하긴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천하를 뒤흔든 구주왕의 배필로 전혀 어울리지 않긴 해. 사실, 나도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평생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텐데…”말하다 말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소채은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부귀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녀의 바람은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오손도손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그러나 윤구주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지라 당연히 그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그녀가 혼자서 흐느끼며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소채은은 어리둥절했다.그녀의 옆에 있던 까망이도 극도로 흥분하여 문을 향해 멍멍 짖었다.“누구세요?”소채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 스카이가든은 그녀만의 사적인 공간이어서 부모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런
“채은아, 널 보러 왔어.”현관 입구에 있던 윤구주가 웃음 띤 얼굴로 눈물범벅이 된 소채은을 바라보자, 소채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윤구주를 껴안았다.손을 놓으면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꽉 잡고 있었다.“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윤구주도 자기 앞에 있는 소채은을 껴안으며 말했다.그가 기억하고 있던 소채은은 순수하고 착해서 나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비록 연규비, 이홍연, 그리고 연예인인 은설아와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윤구주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 소채은이란 사실이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그들 옆에 있던 까망이가 이 모습을 보더니 마치 윤구주의 귀환을 환영이라도 하듯 ‘멍멍’하며 짖어댔다.“드디어 돌아왔네! 난 또… 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소채은이 흐느끼며 말했다.그녀도 사랑과 증오,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을 가진 평범한 여자인지라 윤구주의 정체를 알았을 때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윤구주가 너무 훌륭하고 완벽해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었다.“이 등신아. 내가 왜 안 올 거로 생각한 거야? 서울에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제야 오게 된 거야.”윤구주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그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소채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흐르는 눈물을 닦은 소채은이 윤구주를 바라보며 묻자, 윤구주는 미소를 지었다.“여기가 우리 둘이 함께 살았던 곳이잖아.”그 말을 들은 소채은은 방긋 웃었다.‘구주의 마음속에 여전히 내가 있나 보다.’“서울에서 무슨 일을 겪은 거야? 왜 이렇게 몰라보게 변했어?”소채은은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내가 변했다고? 어떻게 변했는데?”윤구주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전보다 더 멋있어진 것 같아.”소채은은 솔직하게 답했다.그녀의 말대로 전성기를 되찾은 윤구주
은설아는 마음속으로 윤구주를 존경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컸다.무예가 출중하다면 윤구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그녀가 그와의 실력 차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수련한 것이었다.붉은 치마를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재이가 열심히 수련하는 은설아의 모습을 보고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설아 씨,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 인제 그만 쉬도록 하세요.”윤설아가 말했다.“괜찮아요. 아직 할만해요.”윤설아의 말에 재이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설아가 열심히도 수련하네.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수련하는 윤설아를 바라보며 용민이 혼자서 중얼거리자, 강철 몸을 가진 철영도 한마디 했다.“사랑 때문에 저 짓거리 하고 있는 거예요.”“뭣이라?”철영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용민은 어리둥절했다.한마디만 내뱉고 철영은 정원 밖을 빠져나왔다.“야! 이 자식아. 말하다 말고 어디 가? 사랑 때문이라니?”용민이 그를 뒤쫓아가며 물었다.은설아가 한창 수련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민규현과 천현수가 얘기를 나누며 방 안에서 나왔다.“이놈아, 수이 소식이 아직 없다고?”말을 꺼낸 사람은 민규현이었다.“없어요. 형님.”천현수가 답했다.“수이 때문에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민규현이 계속 말했다.“흑여산맥 쪽의 저하 소식은 없고?”“그쪽에서 보내온 소식통에 따르면 저하는 이미 그곳에서 떠났대요.”“그렇다면 서울로 돌아온다는 말이냐?”민규현이 서둘러 묻자, 천현수는 고개를 저었다.“그들의 말로는 서울 아니고 강성으로 갔대요.”“강성?”강성이란 말에 민규현은 어리둥절했다.“형님, 잊으셨어요? 형수님이 강성에 있잖아요.”천현수가 그에게 상기시켜 주자, 민규현은 자기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내가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맞아. 저하가 서울에 온 이후로 형수님을 본지가 꽤 되었으니, 강성에 가는 것도 이해는 되지.”“그건 그렇고 형님, 암부가 최근에 이상한 것을 발견했대요.”천현수가 갑자기 화제를 돌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
서울 삼천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 섭혼번이 작동되면 화진의 국운은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우리 문씨 가문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쇠퇴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화진의 주인이다. 감히 누가 복종하지 않겠느냐?”문경우는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웃어댔다.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며 공간이 갈라지더니 한 남자가 시체 한 구를 밟고 서울에 강림했다.“웃기고 있네. 문씨 가문이 화진의 주인이 되겠다고? 문씨 가문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꿈을 꾸는 것이냐? 나 윤구주가 용납하지 않겠다.”우르릉.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자 문경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윤구주의 기운이 섭혼번 아래에 나타나며 음의 기운을 찢어버렸다.거대한 섭혼번이 관통당하자 전법이 무너지고 문경우는 피를 토해냈다.고개를 돌리니 윤구주가 허공에 우뚝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는 아사 신전의 신주 오딘의 시체가 보라색 번개에 휩싸여 있었다.“이게 무슨? 네가 신왕 오딘을 죽였다고?”문경우는 오딘의 시체를 바라보며 벌벌 떨었다.“이 개 같은 자들이 여러 번 화진을 범했으니 죽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오딘뿐만 아니라 아사 신족 전체를 멸했다. 이제 곤륜에 아사 신족은 존재하지 않는다.”윤구주가 공중에 우뚝 서서 음양의 기를 손아귀에 감아쥐었다. 그의 머리 위 갈라진 공간 너머로 아사 신전의 폐허가 보였다. 수만 신령이 죽어 아사 신족이 멸족한다는 종말이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문경우의 눈에 비친 윤구주는 무적의 화신이었다. 그는 윤구주와 싸울 용기도 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너희들이 내가 없을 틈을 타 화진의 기운을 봉인하려 했다고? 문씨 가문은 정말 개수작만 부리는군. 예전에는 나를 죽이려 온갖 더러운 수작을 다 부렸잖아. 내가 없는 틈만 노리는 걸 보니 이젠 내가 무서웠나 보지?”“팔기지, 술자결.”윤구주가 손짓하자 삼천만 생령이 국운 속으로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새 국운에 각자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고 모두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며 위기가 해소되었다.“팔기지, 어
태양으로 변한 그 부적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독한 태양 빛이 대지를 지지며 수많은 건물을 녹여버렸고 그 안에 있던 평민들도 산 채로 타죽고 말았다.“그만해. 화진의 백성들을 건드리지 마라!”임정설이 분노에 차 외쳤다.“너와 나는 모두 화진의 절정 수련자인데 어찌 무고한 자들을 끌어들이느냐?”“하하! 무고하다니? 임정설, 현실을 직시하지. 이 하등한 것들은 개미나 다름없어. 한 무리를 죽여도 금방 다시 번식할 테니. 게다가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삼천만 백성의 목숨으로 화진의 새 국운을 봉인하는 거라네. 우리 문씨 가문이 얻지 못하는 것은 부숴버려도 남에게 주지 않을 거야.”문경우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그는 윤구주가 문씨 가문의 뜻을 거역하는 것에 화가 났다.만약 윤구주가 그들에게 순종했다면 지금쯤 화진의 주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천추만대가 지나도 윤구주는 여전히 화진 최고의 명군으로 남았을 것이다.“저 빌어먹을 윤구주.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걸 모르나? 역사를 조작한 왕조가 그렇게나 많은데 유독 그놈만 고집을 부리잖아. 화진의 재난은 모두 윤구주 때문이야. 명군이 되길 거부한다면 영원한 역적으로 만들 거야. 윤구주는 역사의 수치주에 못 박혀 천년만년을 욕먹을 것이다.”“닥치거라! 구주는 우리 화진의 영웅이다. 너 같은 쓰레기가 어찌 감히 구주를 함부로 논하는 것이냐?”그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임정설은 양혼을 불살라 목숨을 걸려 했다. 그러나 문경우가 이미 임정설의 기를 봉쇄하고 제삼의 전법으로 그의 영혼까지 잠가버렸다.“임정설, 내 앞에서 자살조차 못 하는 주제에 어디서 목숨을 걸겠다고 떠드는 건가?”문경우는 기고만장했다. 임정설이 황자가 되면 뭐하나? 어차피 문씨 가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데.“오늘이 바로 화진 황제의 멸망일이라네. 섭섭해하지 말게. 윤구주도 곧 자네 뒤를 따를 거니까. 하하!”그가 양손을 내리자 백 미터 크기의 사악한 검은 기발이 구름을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이, 이것은 섭혼번이군!”그 거대
말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쓸모없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임정설은 황제의 의지를 칼로 삼았다. 황자의 기세가 모여 금빛 칼날을 형성하더니 국운을 상징하는 그 칼로 문경우를 향해 내리쳤다.우르르.음과 양이 맞부딪치며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휩쓸었다. 사령부 빌딩과 인근 건물들의 유리가 모조리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빌딩 꼭대기에서 결투를 시작했다. 칼 빛이 번뜩이며 천지의 영기를 뒤흔들었고 광풍과 폭우가 몰아쳤다. 산해가 울부짖으며 서울은 보라색 번개와 금빛 불길에 휩싸였다.그들은 각각 화진 최강의 무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 아니라 임씨 가문과 문씨 가문의 결전이었다.서울 상공에서는 용의 형상이 구름 사이를 휘저으며 흉수와 피 묻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이게 바로 황자의 힘인가. 정말 굉장하군.”진동왕마저 넋을 잃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이때 다른 도시의 지원병들이 서울에 도착해 진동왕과 연락을 취했고 이 소식을 해외에 있는 현모와 주작에게 즉시 전했다.“국주께서 문경우와 결전을 벌이고 계신다고?”“국주께서 황자급 경지에 오르셨다니.”이는 분명히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지만 윤구주와 임정설의 관계는 남달랐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너무 기뻐하지 마라. 저 문경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곤륜에서 오랫동안 잠적하며 수많은 신전의 공법을 익혔어. 저놈이 서울로 온 목적은 바로 임정설을 죽이기 위함일 것이야.”옆에 있던 황보웅이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주작과 현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화진이 무사하고 임정설이 문경우를 물리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한창 싸우고 있던 두 강자는 공중에서 다시 한번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짓 하나에 산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했으며 그들의 기세는 수백 리 밖까지 영향을 미쳤다.임정설은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임정설은 문경우가 극 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법이 발동되면 서울 수천만 사람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야. 비록 이길 자신은 없지만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화진의 백성을 위해 싸우겠다. 구주군과 금위군의 여러 장수들은 듣거라. 짐이 전사하면 너희들이 나라를 지킬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적들을 섬멸하라.”임정설은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홀로 서울 사령부로 날아갔다.서울 사령부는 진동왕과 수비영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함락된 상태였다. 주둔지는 죽음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붙은 백골들이 널브러진 참혹한 장면뿐이었다.당시 강적의 침입을 받은 주둔지의 병사들은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이 생각에 임정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우리 화진의 자랑이다. 저 요망한 것들이 화진을 어지럽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 빚을 짐이 갚아 내지 못하더라도 화진 자손들이 반드시 값나낼 것이다.”그는 절대 화진의 혼란에 맞선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선인이 걸어온 길을 밟으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이 순간 황운이 임정설의 몸에 서리더니 새로운 국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 그는 특정된 누군가의 왕이 아닌 천하 만민이 우러러보는 황제가 되어 있었다.황도가 더해지자 임정설의 기세는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사령부 빌딩 최상층에서 서울을 어지럽힌 장본인을 마주했다.검은 도포를 걸친 그 자는 사악한 부적으로 몸을 감싼 채 요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바로 그가 전법으로 서울을 뒤덮고 있었다.“참으로 예상치 못했어. 화진에 또 한 명의 황자가 나타나다니. 윤구주는 정말 신기하다니까. 자신의 기운으로 국운을 바꾸고 자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군.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주지. 임정설 자네가 황자가 된 이상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이야. 넌 사흘 안에 목숨을 거둘 것이란 말이지.”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임정설이 죽음을 각오하고 온 것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