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사업 이야기를 하러 부승원을 찾았고 대화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함께 저녁을 먹었다.반우희는 대화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않았다.“승희 씨, 전주에 가서 돼지를 키우게 되는 거예요?”부승희는 반우희의 말을 정정했다.“축산업 회사를 설립하는 거예요.”“어떤 가축을 기르려고요?”“돼지.”“그럼 결국 승희 씨가 돼지를 기르는 거네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반우희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다른 것도 키워요.”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네...”반우희는 생각에 잠겼다.부승희는 장난기 가득한 성격이지만 돈 버는 일에는 진지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부승원은 부승희가 가져온 사업 계획서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 말했다.“지금 네 자본 규모가 너무 작아.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좀 투자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투자를 받는 건 어려울 것 같아.”“얼마나 투자할 수 있어?”“600억에서 천억 정도. 시험 삼아 해보자.”“그럼 충분하네. 이전에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6천억 정도 되겠어.”반우희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실례지만 '억'이라는 단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부승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만'은 아니겠죠.”반우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세상에 그러니까 억이라는 거야?’반우희는 자신이 꽤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재벌가의 창업은 억 단위로 시작하는 건가?’부승희는 부승원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사이 반우희는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부승희와 부승원은 반우희를 바라보았고 반우희는 히히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기 혹시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요?”부승원은 놀랐다.부승희는 재미있어하며 반우희를 놀렸다.“우희 씨는 얼마나 투자할 거예요?”반우희는 손가락 하나를 펴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200억 정도 어때요?”부승희는 반우희를 보며 웃었다.“우희 씨 현금
“대략 몇 명 정도 와요?”“많지 않아.”“...”“오십에서 육십 명 정도?”반우희는 놀랐다.‘...?’‘오십에서 육십 명이면 거의 결혼식 아니야?’반우희는 애써 이건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반우희는 큰 장면을 못 본 것도 아니고 경기도 내 저명한 가문들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심지어 연정훈도 오빠라고 부를 정도다.‘괜찮아 사소한 일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녀는 결국 불면증에 시달렸다.‘아.’반우희는 양시연을 찾아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부모님을 뵐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그 당시 그녀가 처음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뒤 그녀가 다시 돌아와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이런 경험은 공유하기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결혼식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만났었고 심지어 연정훈의 외가 쪽과도 몇 번밖에 마주하지 않았다.하지만 독특한 민씨 가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녀에게 꽤 친절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걱정 마요. 아무도 우희 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다들 우희 씨한테 잘해줄걸요?”“왜요?”“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좋아하니까요.”양시연은 핵심을 짚었다.시부모 문제도 두 집안 간의 문제도 결국 부부 문제로 귀결되며 대부분의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된다.반우희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 말이 꽤 일리 있다고 느꼈고 그리고는 히히 웃으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맞아. 부승원 씨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자자.’반우희가 부씨 가문에서 식사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표세연은 미리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건조하게 성사된 의형제 관계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우희는 점점 표세연의 마음에 들었다.아침이 되자 승주는 일찍 일어나 희주와 동준을 끌고 와 반우희가 옷을 고르는 걸 지켜봤다.부승원이 도착했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을 자신이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사기 친 거 아니에요. 부승원 씨가 나한테 뽀뽀하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이게 바로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거죠. 이해되죠?”부승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럼 내가 너에게 뽀뽀하면 네가 긴장한다면서 왜 딸꾹질은 안 해?”“몰라요. 아마 이게 전설 속의 신체 본능인가 봐요. 내 딸꾹질마저도 오빠를 좋아하나 봐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그는 입꼬리를 억지로 눌러 내리며 그녀를 평가했다.“거짓말을 참 잘 꾸며내는군.”“에휴. 결국 안 해 주겠다는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 심장은 계속 날뛰게 놔두셔야죠. 당신 집에 도착하면 언제 딸꾹질이 터질지 몰라요. 창피당하는 건 감수해야죠. 어차피 부승원 씨가 내 곁에 있으면 어떤 고생이든 할 수 있어요.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시를 읊조리듯 감상에 젖었다.그러더니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던 찰나 눈앞의 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응?’반우희는 1초 만에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얼른 다가가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여기.”부승원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반우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손으로 그녀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반우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난 기회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는 말만 배웠어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어휴. 참 똑똑하긴 하지.’마침 그때 근처에 한 대의 차가 멈춰 섰다.반우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있는데 부승원이 그녀의 귀를 한 번 더 꼬집으며 말했다.“나의 할아버지예요.”‘네?’반우희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마치 사열을 받는 군인처럼 반듯이 섰다.부승원은 그런 그녀
거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반우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마침 부승원이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감싸며 뒤로 숨으려 했지만 한 아줌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됐네요. 이렇게 되면 호칭 바꾸는 용돈 안 줘도 되고 돈 아끼는 셈이네요.”반우희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부형석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 채애정이 다가왔다.부승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우희를 살짝 끌어냈다.“우리 엄마는 본 적 있잖아. 와서 인사해.”반우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입이 떨어지지 않다가도 결국 힘겹게 말을 꺼냈다.“...어머니, 안녕하세요.”부승희는 혀를 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왜 차별 대우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 차례에서 용돈을 받을 생각이라도 했어요?”웃음이 터졌다.반우희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부승원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부승원이 그녀를 붙잡고는 부승희를 노려보았다.부승희는 사람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끝났네요. 우리 오빠가 나한테 눈빛으로 압박을 주고 있어요.”다시 한번 웃음이 퍼졌다.부승원은 동생들의 농담을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승희야, 앞으로 조심해. 오빠는 이제 아내가 생겼으니까 아마 너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부승희는 한숨을 쉬며 익숙한 듯 말했다.“괜찮아요. 오빠는 여자친구가 없어도 저한테 신경 안 썼어요.”채애정은 부승희를 힐끔 보며 나직이 말했다.“너 오빠가 신경 안 쓴다고? 그런 말 하지 마.”부승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빠가 우희 씨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예전에 나한테 잘해줬다고 생각하긴 어려울걸요.”모두 자연스럽게 다시 부승원과 반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반우희는 부승원의 곁에 꼭 붙어 있었고 부승원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없이도 모든 걸 전하는 듯했다.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움찔했지만 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반우희는 아직 어리니까 다들 너무 괴롭히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반우희는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채애정에게 건넸다.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반우희는 겉으로 덜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분별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씨 가문을 배경으로 삼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가 준비한 선물만 건넸고 식사 후 모두가 흩어진 뒤에야 차분하게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어머님, 이 선물은 저희 엄마께서 드리는 거예요.’채애정은 원래 기분이 좋았지만 선물을 받고 부승원이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반우희의 손을 잡고 문밖까지 배웅했다.그녀는 돌아와 선물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담긴 것에 놀랐다.그것은 비취 구슬로 엮인 목걸이였으며 색상과 품질 모두 뛰어났다.그녀는 표세연과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표세연이 이렇게 진심으로 반우희에게 대해줄 줄은 몰랐다. 첫 번째 만남인데도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주다니 진짜 딸이 있는 집안은 다르구나 싶었다.‘쯧.’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원은 반우희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고 전화를 받고 몇 번 응답했다.“주는 거면 그냥 받으세요. 그냥 며느리의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세요. 그 외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반우희는 말의 끝에 귀를 기울였다.부승원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가 살짝 웃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은근히 올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부승원은 술을 많이 마셔서 입에서 술 냄새가 섞인 숨이 나왔다. 반우희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얼굴을 비비며 다가갔다.부승원은 반우희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오늘 저녁 맛있었어?”“맛있었어요. 당신 집에 요리사 정말 요리를 잘하시네요.”부승원은 그녀의 코끝에 입술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앞으로 여기서 살면 매일 너에게 요리해 줄 거야.”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왜 내가 그 집에
반우희는 한참 조잘거렸으나 부승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원은 두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그러자 반우희는 서운한 듯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때, 부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하자.”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결혼이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박!’반우희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며 부승원은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반우희의 귓불을 매만지며 말했다.“나랑 사법 고시 넘기기로 약속한 거 기억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이번 해는 안 될 것 같은데요...”“다음 해는?”“다음 해는 꼭 넘을 게요!”“그래도 못 넘기면 어떻게 할 거야?”“그러면... 변호사님 닮은 아기 안 낳을 거예요.”“...”“어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깜빡였다.“이 정도 벌칙이면 되겠죠?”부승원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래. 뭐 심한 벌칙이긴 하네.”‘히히.’반우희는 바로 입꼬리를 올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퐁퐁 뛰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우희야.”부승원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반우희는 얌전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평소에 늘 성까지 붙여 반우희라고 깐깐하게 부르던 부승원이 다정하게 부른 게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부승원의 이마를 매만지며 아픈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승원의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부승원은 반우희의 손을 잡고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사실 부승원은 늘 반우희 혼자 들떠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과음을 한 탓이라 생각해 앞으로 다가가 빤히 쳐다봤다.“삼촌?”그 호칭에 부승원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리고 반우희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부승원은 침을 꿀꺽 넘겼고 다시 두 눈을 뜨니 눈가가
“그래서 결국 얼마나 있는지 알아냈어요?”그 뒤로 며칠 뒤,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에게 물었다.반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변호사님은 그렇게 해서 제 관심을 끄려는 거예요. 돈으로 유인해서 옆에 묶어두려고!”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반우희는 자신이 아주 넘쳐 보였다.“실은 변호사님 저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 굴리는 거예요.”양시연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그래요. 우희 씨 말이 맞아요. 승원 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그렇죠? 히히.”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벌써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벌써 반우희도 결혼을 한다니.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오늘 아침 기획팀에서 연말 행사 계획안을 반우희에게 제출했었다. 거액의 기획 금액 옆으로 반우희의 사인을 보며 반우희도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신혼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했어?]양시연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애교를 가득 담아 답장했다.[이렇게 바쁜데 언제 여행을 간다고 그래요.][부승원 시켜.]양시연은 빵 하고 터졌다.‘역시 못 말린다니까.’양시연은 사실 몇 가지 여행지를 찾아두긴 했으나 자세한 일정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 연정훈과 상의를 하고 결정할 생각이었다.행사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었고 이건 양시연이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복귀하는 행사였기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연정훈은 미리 시간을 비워두어 양시연의 옆자리를 지켰다.넓고 화려한 강당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양시연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빼곡하게 앉은 사람들을 쭉 훑다가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시작되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샴페인을 연거푸 비우고 양시연은 몰래 내용물을 주스로 바꿨다. 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와인으로 채웠다.양시연이 몰래 연정훈에 말했다.“연 대표님 오늘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그러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왠지 오늘이 우리 결혼식보다 더 결혼식 같은 느낌이 들어.”양시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연정훈은 양시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고 양시연은 결혼식 당일 양혁수의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연정훈이 그걸 지금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시연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식 그날 나도 열심히 했잖아요.”연정훈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왼쪽 방향 가르마, 누구인지 알아?”양시연이 힐끔 보다가 대답했다.“정훈 씨 외숙부요.”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 결혼식에서 인사를 건넨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저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가르마를 한 사람이 외숙부야.”양시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살폈다.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양시연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아, 그쵸. 저는 정훈 씨가 저 사람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거예요. 같은 방향에 가르마 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정훈 씨 질문이 잘못됐네요.”연정훈이 차가운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사실 뻥이야. 첫 번째 그 사람 외숙부 맞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몰래 연정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까 결혼식 당일 넌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내 외숙부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아니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훈 씨가 장난한 거잖아요.”“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꾀에 속았을까?”양시연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