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끌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승희는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분노는 잦아들었고 조금 전 그를 휘감았던 충동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이승우가 무슨 말을 하든 부승희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너무 늦었어. 이제 집에 갈게.”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승우가 다급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팔을 단단히 조였다.“나 정말 너 몰래 다른 짓 한 거 아니야.”부승희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다.“알아. 그러니까 일단 나를 놔. 나 그냥 집에 가려고.”“집엔 왜 가? 방금 그 난리 치고 그냥 모른 척할 거야?”부승희는 어이없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대체 뭘 책임져야 하는데? 내가 뭘 했다고? 손 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이승우는 이를 악물었다.‘이런 젠장.’이승우는 그 여자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지만 지금은 최대한 냉정을 되찾고 분위기를 되돌릴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너 질투했지?”“질투는 무슨!”이승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맞네. 질투했네.”“헛소리 그만하고 손 안 놔? 안 그러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옆얼굴에 입술이 스쳤다.부승희는 눈을 크게 뜨고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는 다시 반대쪽에서 그녀의 얼굴을 돌려놓았다.그녀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는 사이 이승우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올리고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부승희는 하늘이 갑자기 희미하게 밝아지는 걸 발견했고 아까의 어두컴컴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제 서로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난감하고 긴장됐다. 이 상황이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 차라리 그의 신경을 긁어놓기로 결심했다.“이승우, 나한테 이러지 마. 아까는 그냥 술기운에 그랬던 거야. 아무 의미 없어. 그리고 그 여자 때문에 질투할 일도 없어. 너랑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나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그래. 그런 한심한 애가 너한테 질투받을 자격은 없지.”이승우는 그녀의 말을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침 햇살이 살며시 방 안을 물들이자 한때 뜨겁고 격렬했던 감정도 서서히 잦아들었다.이승우는 품에 안긴 부승희에게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그가 더 부드러워질수록 부승희는 점점 더 그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조금씩 정신을 차리려고 하며 도망치려 할 때마다 이승우는 부드러운 가면을 벗고 다시 강압적으로 다가왔다.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그녀의 강한 태도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언제부터인지 부승희는 이승우의 목을 감싸고 그의 리듬에 맞춰 몸을 맡기며 점점 더 빠져들었다....아침에 양시연은 아직 자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끊었다. 전화가 온 번호를 확인하고는 반쯤 깨어 있는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품에서 떼어 놓고 나가서 전화를 받으려 했다.“누구예요?”양시연이 흐릿한 눈으로 물었다.“너 자고 있어. 내가 나가서 받을게. 끝나면 돌아와서 말해줄게.”“네...”양시연은 너무 피곤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잠을 청했고 얼마 후 발소리를 들은 그녀는 눈을 떠보니 연정훈이 돌아왔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품에 안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양민아를 찾았어.”“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잠이 싹 달아나며 고개를 들었다.“양민아?”“응.”양시연은 변백호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한 것에 놀랐다. 한번 말했을 뿐인데 바로 사람을 찾아냈다.연정훈은 말을 이었다.“양민아를 찾았을 때 이미 성형으로 얼굴을 완전히 바꾸고 지국주의 작은 나라에서 새 신분으로 살고 있었어. 땅을 사서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지.”양시연은 조금 감탄했다.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후에도 양민아는 온전히 빠져나와 자리를 잡고 나서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양민아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아직 데려오지 않았어. 변백호가 우리의 의도를 물어보더라고.”“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변백호 씨에게 데려오게 했어.”양시연은 그의 계획을 알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잠시 더 이
예전이라면 조재민은 당연히 양민아의 말을 의심했겠지만 몇 달간의 고문 끝에 정신이 흐려져 생각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그때 그의 시선이 양민아의 배로 향했다.“아이는 괜찮아요?”양민아는 조재민을 의자에 앉히고 그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건강해요.”조재민은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비록 그가 죽는다 해도 조재민의 아들은 남을 것이다.양민아는 독사처럼 치명적이지만 그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엄마가 곁에 있는 한 아이는 반드시 살아남을 터였다.“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양민아가 묻자 조재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냥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요. 아니면...그냥 죽으면 되는 거고.”그는 양민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앞으로 다시 오지 마요.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까지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죠.”양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섬세한 화장 속에서 비웃음이 스며든 눈빛을 보였다.“위층에서 좀 쉬세요. 뭐 좀 가져다드릴게요. 다 드시고 나면 저는 떠날 거예요. 여기 정말 안전하지 않아요.”조재민은 잠시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잠시 후 양민아는 음식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식은 죽을 저어 건넸다.조재민은 죽을 받지 않고 대신 손을 뻗어 양민아의 배를 만지려 했다.“검사했어요. 아들이에요.”그녀가 말했다.조재민의 흐릿한 눈에 희미한 빛이 스치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피곤한 듯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잠결에 팔에 스치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눈을 뜨자마자 그는 반사적으로 양민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양민아는 주사기를 손에 쥔 채 그의 서늘한 눈빛과 맞섰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이
조재민의 사망 소식은 곧 업계 내에서 크게 퍼졌다.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뿐만 아니라 사망 원인도 처참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그는 과도한 흥분제를 주입받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더 충격적인 것은 조재민이 사망 당시 임신한 여성과 함께 있었다.그 여성은 체포되었고 신원도 빠르게 확인되었으며 무국적이었다.그녀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조재민은 오랫동안 이러한 약물을 주입해 왔고 이번엔 실수였다고 말했다.모두가 그 여성이 단순히 조재민이 데리고 놀던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한때 명성이 자자했던 양씨 가문의 딸이었다.이 소식을 들은 변백호와 양혁수는 자택 펜싱장에서 대결 중이었다.두 사람의 실력은 비슷했고 경기는 한동안 팽팽했다.옆에서는 노지혜와 변여름이 경기를 지켜보며 가끔 응원했다.“변백호 씨, 파이팅.”“오빠, 파이팅.”변여름이 응원을 마친 순간 변백호는 미세한 차이로 양혁수에게 패했다.두 사람이 보호 장비를 벗는 모습을 본 노지혜는 참지 못하고 변여름에게 물었다.“여름아, 오빠라고 말한 거 어떤 오빠 말하는 거야?”변여름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오빠예요.”“분명히 변백호 씨에게 응원한 게 아닐까? 여름이가 응원하자마자 졌잖아.”“저희 오빠랑 같이 살고 나서 언니가 좀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노지혜는 변여름의 평가에 조금 당황했다.???노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 평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변여름이 다시 말했다.“응원은 그냥 응원일 뿐이지. 마법이 아니에요.”노지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쳇. 넌 결국 변백호 씨에게 응원한 거 아니잖아.’두 어른과 아이들이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사이 변백호와 양혁수는 물을 마시며 조재민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연정훈 씨는 참 재미있는 사람 같아.”변백호가 평가했다.양혁수는 혀를 차며 말했다.“그 집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우물쭈물하고 맘에 안 들어.”변백호는 그의 가슴을 쿡 찔렀다.“연정훈 씨는 일
조재민 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째 연정훈은 소현주와 양곡 창고 사건을 다시 꺼내 들었고 그동안 그와 대립하던 이들 조재민의 측근들은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이 화장님은 연정훈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책임을 명확히 하려 했다.한때 양원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빠졌다.이 모든 일의 이면에서 양민아가 감옥에 갇힌 소식은 양시연의 관심을 끌었다. 그날 밤 연정훈은 이를 양지원에게 전하며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양지원은 단 한 마디로 답했다.“양민아 부모님께 받은 은혜는 이미 다 갚았어. 이제 양민아가 죽든 살든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모든 것이 끝났다.양시연은 여 아주머니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여 아주머니는 평생 양씨 가문을 위해 헌신하며 양지원을 키우고 돌보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손자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양민아 뱃속의 아이가 탁승호의 아이라면 내가 키울 생각이에요.”여 아주머니가 말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물어보았고 그 아이가 탁승호의 아이일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말하지 않았고 대신 탁호연과 양민아를 만나게 해주기로 했다.양민아는 조재민을 팔아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했고 가장 큰 카드인 양지원의 연민을 기대했지만 일주일을 기다려도 양지원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점점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이성을 잃었고 여러 번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으나 끝내 모두 삼켰다.그녀는 헛된 말을 하면 죽음이 더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다행히 탁호연이 찾아왔고 그녀는 다시 희망을 느꼈다.탁호연은 양민아를 극도로 혐오했고 특히 그녀의 낯선 얼굴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양민아는 미친 여자였고 잡혀서 다행이지만 만약 그녀가 풀려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손에 죽을 것이다.“저희 어머니께서 당신을 보내신 건가요?”양민아는 급하게 물었다.탁호연은 비웃으며 대답했다.“당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다시 살아나서 양민아 씨를 보러 오겠어요?”‘웃기네. 양지원 씨는 너를
양시연이 경인으로 돌아온 후 한 번 혼자 외할머니의 묘지를 찾아갔었다. 양시연이 떠나 있었던 그 몇 년 동안 연정훈도 몇 번 묘지를 찾아 참배를 올렸다.아이러니하게도 부부가 함께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일이 한결 정리된 뒤 양시연은 맑은 날을 골라 연정훈과 아들 태양과 함께 묘지를 찾았다.묘지 근처는 언제나 싱그러우면서도 쓸쓸한 초록빛에 잠겨 있었다.차에서 내리기 전 태양은 귀찮은 듯 투덜거렸다.차에서 내린 후 아빠 품에 안겨 있던 태양은 넓은 챙의 모자를 쓴 채 까만 포도알 같은 눈을 굴리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햇볕이 눈을 자극할까 봐 양시연은 살짝 모자를 내려주고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오는 길 내내 양시연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고 연정훈은 그 변화를 눈치채고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나 괜찮아요.”그녀는 그저 외할머니가 그리울 뿐이었다.교통사고가 났을 때 가장 위급한 순간 그녀는 아무도 떠올리지 않았지만 의식을 잃기 직전 꿈속에선 외할머니만 나타났다.기억 저편에서 양시연은 여전히 외할머니와 함께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외할머니는 양시연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평생의 사랑을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존재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묘지에 도착하자 연정훈은 태양을 안고 옆에 서 있었고 양시연은 제물을 올리고 묘비를 닦았다.묘비에는 생전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양시연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외할머니, 지난번에 왔을 때 말씀드렸죠? 저 결혼했어요. 이번엔 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기가 생겼어요. 외할머니께서 계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거예요. 우리 아기 정말 착해요.”그녀가 묘비를 닦는 동안 연정훈은 태양을 안은 채 묵묵히 그녀 옆에 앉아 돕고 있었다.그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양시연과 아이를 잘 돌보
그들은 마당에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태양이 시끄럽다며 투정을 부리자 양시연은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하고 연정훈을 배웅했다.양시연은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 태양을 달랜 뒤 작은 침대에 눕혔다. 잠시 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를 두고 갔나 싶어 일어나려다 밖에서 들어오는 양혁수를 보았다.양혁수는 정장을 차려입어 마치 공식 행사를 막 마치고 나온 듯 보였다.양시연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큰 행사라도 있었어? 양씨 도련님께서 정장을 입고 오다니.”“말도 마.”“양혁수는 손을 휘저으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는 그녀 뒤에 앉아 가까운 곳에서 자리에 앉았고 곧 가정부들이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양시연은 말했다.“방금 양씨 그룹에서 회의했지?”“몇몇 임원들을 만나서 말이 많아서 짜증 났어.”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과 자주 만나서 단련해야 해.”“됐어. 난 적응이 안 될 것 같아.”“적응 못 하면 안 돼. 나도 그렇게 능력이 크지 않고 정인 일로도 이미 골치 아파. 엄마도 지금 버거워서 엄마를 도와줘야 해.”양혁수는 대꾸했다.“엄마 연애하기 전엔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았어?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항상 활기 넘쳤지.”양시연은 양혁수의 원망을 듣고 결혼 후의 양지원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어쨌든 지금은 우리 집에서 중요한 사람이니까. 너도 좀 더 힘을 내야 해 우리 다 너한테 의지하고 있어.”양시연이 그를 칭찬하며 아부하자 양혁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솔로여서 일만 해야 한다는 건가?”“그럼 빨리 여자친구를 찾아서 짐을 나눠.”양혁수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아기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말을 마치고 다시 조심스럽게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희고 깨끗한 볼에는 약간의 분홍빛이 돌았고 안색이 매우 좋아 보였다. 출산 후 관리를 잘 받은 덕분인지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해 보였다.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찾고
저녁이 되자 양시연은 태양을 가정부에게 맡기고 혼자 연정훈을 데리러 갔다.차 안에서 연정훈에게 전화가 왔고 그의 말투에는 질투가 묻어 있었다.“오후에 양혁수가 집에 왔었어?”연정훈의 목소리에는 묘한 신맛이 묻어났다.“네.”“무슨 일이 있었어?”“양혁수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보고 싶어서 왔겠죠. 당신 보러 왔는데 안타깝게도 당신은 집에 없었잖아요.”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질투하는 것을 알아채고 자리에 가깝게 다가가서 장난스럽게 말했다.“퇴근했어요? 오늘 일 많았어요? 힘들었어요?”“내 사무실로 와. 저녁 먹고 같이 가자.”양시연은 턱을 살짝 들고 장난스럽게 물었다.“뭐에요? 나랑 데이트하려고?”“응. 양 대표, 시간 있어?”“그건 정훈 씨가 어떤 장소를 예약했는지에 달렸어요. 특별한 곳이면 제가 기꺼이 얼굴을 비춰주죠.”“그럼 와. 아주 특별한 곳이야.”양시연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물었다.“진짜 밖에서 먹는 거예요?”“널 놀려서 뭐 하겠어.”“태양이는 집에 있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집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태양 잘 보고 있을 거야.”‘알았어. 또 질투하는 거네.’양시연은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약간 기대했다.“그럼 내가 올라가서 당신 찾으러 갈게요. 사무실 앞에서 기다려요.”“응. 의자 옮겨 놓고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양시연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마치 조각상처럼 앉아 있는 연정훈의 모습이 떠올랐다.양시연은 양원 건물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게 더욱 공손하게 대했다.역시 임금이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고 연정훈의 사무실이 바뀐 것은 모두에게 분명한 메시지였다.양시연이 도착하자 연정훈은 정말로 사무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그는 사무실 밖 작은 휴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