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의 사무실에서.소파에 앉은 반우희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처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원은 이런 반우희가 너무 웃겨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평소에 그렇게 당당하더니 우리 어머니 만나고 왜 그렇게 겁을 먹었어?”반우희는 영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부승원이 반우희를 불렀다.“그렇게 넋이 빠진 모습으로 있지 말고 여기로 와.”반우희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원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그리고 턱받침을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어머님이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면 어떡해요?”부승원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마음에 안 들면 뭐 어때?”반우희가 입을 삐죽이더니 평소대로 언성을 높여 말했다.“이게 다 변호사님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부승원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정말? 네가 내 생각을 했다고?”반우희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어머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변호사님이 날 만나지 못할 테니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말했다.“변호사님은 나이도 들고 나한테 이렇게 돈도 많이 쏟았는데 결혼까지 가지 못하면 변호사님만 억울하잖아요.”그리고 반우희는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꽤 양심 발언이네? 내가 억울할 가봐 걱정도 하고?”반우희는 다시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난 늘 그랬어요. 다른 사람한테 빚지고는 못 살아요.”“내가 제안 하나 할까?”부승원은 펜을 내리고 옆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 아마도 옆방에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마음 가라앉히고 다시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그 말에 반우희는 바로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이에 부승원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결국 너도 말뿐이네.”반우희는 한숨만 풀풀 내쉬었고 더 고민에 휩싸였다.‘정신 차려 반우희! 너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그리고 머리를 싸매며 말했다.“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승주한테 조언을 받아야겠어요.”‘승주한테 조언을 받는
날이 어두워지고 부승원은 본가로 향했다.부승희는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부승원을 발견한 채애정은 활짝 웃으며 손 씻고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바로 나가봐야 해요.”“약속인 것이냐?”아버지 부형석의 질문에 부승원은 표정 변화 한번 없이 대답했다.“네.”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니 부모님은 부승원을 잡아 둘 수가 없었다. 대신 꿀물로 속을 채우게 했다.“네 어머니가 오늘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고 들었어. 복스럽게 생겼다던데.”“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예쁘던데 나이가 좀 어려요.”채애정의 말에도 부승원은 묵묵히 꿀물을 마시며 대꾸하지 않았다.한참 뒤 부혁석이 물었다.“그 아이랑은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부승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무슨 말씀인지?”부형석은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바라봤고 채애정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 마요. 우리 아들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래요?’부형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질문을 이어가기로 했다.“나와 네 어머니의 생각은 그 아이가 나이가 어리니 네 옆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해외 연수를 다녀와 몇 년 뒤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그러자 채애정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본인 생각이면서 왜 나까지 함께 묶고 그래요?’부형석은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게를 잡았다.부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이런 부승원의 모습에 채애정과 부형석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도우미 아주머니는 내려놓은 잔만 챙겨서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도련님 부승원에게 쉽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부승원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시선에 두 사람은 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졌다.“몇 년간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가 결혼하면 그래도 짝으로 걸맞으니 창피하지 않으실 거고, 내가 그동안 견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실 거잖아요. 그 아이는 돈과 명예를 가졌으니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요.”“그렇죠?
부승원은 승주의 초대를 받고 반우희의 집으로 향했다.집 안은 벌써 떠들썩했는데 승주와 반우희가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입맛이 달랐기 때문이었다.“마늘 향이 제일 맛있어!”“에이 마라가 찐이죠!”승주가 반우희를 타이르듯 말했다.“마늘 향 먹으면 양치해도 마늘 향이 남는데 남자 친구랑 뽀뽀할 수 있겠어요?”“...”반우희는 순식간에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틈을 타 승주가 마지막 승부사를 날렸다.“그러니까 내 말이 맞아요. 우리 마라 맛으로 해요!”“마늘 맛 조금만.”반우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마늘 맛도 조금 해줘. 너희 누나 정말 먹는 거에 진심이라니까.”부승원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 목소리에 승주와 반우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반우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왔어요?”승주는 그사이에 삶은 가재를 한입 먹으며 부승원을 불렀다.“삼촌, 여기로 와서 앉아요. 동준아, 우리 매형한테 술 따라드려!”“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승주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삼촌이었다가 매형이었다가 호칭 좀 통일하면 안 돼?”“나한테는 삼촌이지만 누나의 남자 친구일 때는 매형이니까 틀린 거 없잖아요!”승주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어휴. 좀 조용히 해!”그러나 승주는 이런 일로 풀이 죽을 아이가 아니었고 바로 가재를 입안 가득 넣었다.부승원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향했고 소매를 걷어붙였다.“남은 거 뭐 있어? 내가 할게.”그러자 반우희가 말했다.“오이무침할 줄 알아요?”“응.”“그럼 부탁할게요.”주방에는 거실의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온도가 아주 뜨거웠다.부승원은 언젠간 이 집의 가전제품을 다 새것으로 갈아주겠다고 몰래 다짐했다.손놀림이 빠른 부승원은 빠르게 오이무침을 완성했다.반우희는 가재를 입맛별로 나눠 상에 올렸고 작은 상이 부러질 듯한 한 상 차림이 완성되었다.부승원은 그전에도 여러 번 집을 오갔던 터라 이젠 익숙하게 밥상 앞에 앉았다.희주는 부승
“내 얘기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요?”반우희가 다가오자 희주는 빠르게 시선을 피했다.“비밀이에요.”반우희는 몰래 혀를 찼다.다른 한편, 배가 부른 승주는 애어른처럼 요즘 가정 상황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우리가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신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 사람 덕분이죠.”그러자 반우희가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바로 누나... 의 남자 친구 덕분이에요!”“...”“야!”반우희는 승주는 슬쩍 노려봤으나 승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몰래 맥주 맛을 보더니 쓴맛에 혀를 두르며 말했다.“매형, 솔직히 우리 셋이 발목 잡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그 말에 집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꼬맹이들은 모두 부승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털털한 반우희와는 달리 세 아이는 아닌 척해도 걱정이 많아 보였다.그래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게 불편하고 누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가재를 입에 넣더니 승주와 짠을 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 실력으론 너희 셋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승주는 몰래 숨을 돌리며 부승원과 하이 파이브를 했다.식사 막바지에 다다르니 가재는 줄지 않고 오로지 대화만 오갔다.반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찾았다.희주도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웠다.부승원은 승주가 아직도 저에게 할 얘기가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누나한테 들어보니 매형 어머니가 오늘 누나 만났다면서요?”부승원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말했다.“그래. 조금 긴장한 건지 딸꾹질했는데 그것도 너한테 말한 거야?”“별건 아니고, 너무 창피했다면서 누나가 용기를 달라고 했어요.”“어머니가 우희 괴롭힌 거 아니야. 우희가 지레 겁을 먹은 거지.”“누나는 언젠간 삼촌 어머니가 드라마처럼 수표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그 말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누나는 어떻게 할 대책이었는데?”“대책이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주와 아이들은 숙제하러 방으로 돌아갔다.반우희는 부승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고 부승원에게 자리를 찾아준 뒤 열심히 문제지를 풀었다.부승원은 그제야 반우희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자신이 반우희에게 잘해주는 날이면 반우희는 보답을 하기 위해 문제지를 푸는 것이었다.‘정말 바보 같긴.’“2년 안으로 사법고시 넘을 자신 있어?”반우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자신 있습니다!”“사법고시 넘으면 뭘 할 건데?”“음... 사건 받아야죠?”“...”“꿈도 야무져. 그렇게 쉽게 사건 의뢰가 들어올 것 같아?”반우희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그때, 부승원은 부모님이 했던 말이 떠올라 반우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 있어?”“지금 하고 있잖아요?”“그거 말고. 좋은 대학 다니고 싶은 그런 거 말이야.”“에이. 학력도 안 좋은데 누가 절 받아주겠어요?”“그게 뭐가 중요해. 너만 좋다면 내가 다 해줄 수 있어.”“어느 대학인데요?”“세계 어디든.”반우희는 멈칫하더니 펜을 내려두고 부승원을 바라봤다. 왠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날... 해외로 보내려는 거예요?”반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연애를 실컷 하고 해외로 보내, 반 헤어짐 상태로 끝나는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설명하려고 했으나 말 대신 볼을 쭉 잡아당겼다.“해외 연수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지금 성적으로는 돈 가득 쏟아부어도 안 돼.”반우희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그쵸? 아무리 나한테 반했다고 해도 그렇게 뭐든지 해주면 안 되는 거죠.”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렸다.“해외 연수 가고 싶어?”부승원은 다시 떠보듯 물었고 반우희는 당황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아니요.”“왜?”반우희는 대답 대신 노래를 불렀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부승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또 반우희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에 부승원은 반우희의 문제지를 채점하고 있었다.동그라미가 이어지고 반우희는 제 자신에게 박수를 쳤다.“와! 다 맞았어요?”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끔 보며 말했다.“오바하지 마. 너 몇 문제 운으로 맞춘 거 다 알아.”“누가 그래요?”부승원은 바로 세 번째 문제를 짚으며 말했다.“이거 설명해 봐.”“...”반우희는 혀를 쯧쯧 찼다.“운도 실력이에요.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다 맞은 게 중요한 거죠!”부승원은 못 들은 척하고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옆에 찰싹 붙어 설명을 들었다.“이젠 곧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래. 문제 잘 풀어서 따로 과외를 할 필요는 없겠어. 오늘은 일찍 돌아갈 것 같네.”“그게 뭐예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내가 열심히 문제 풀어서 다 맞춘 건 시간 짜내서 변호사님이랑 연애하려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이럴 줄 알았으면 두 문제는 틀리는 거였는데.’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반우희를 보며 부승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교과서를 내려놨다.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부승원을 보며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정말 목각처럼 딱딱한 사람이야. 다음부턴 내가 좀 더 머리를 써야겠어.’부승원은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신발 갈아 신고 같이 내려가자.”반우희는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밖으로 걸었다.그러자 부승원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승주한테 말해둬. 조금 늦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왜요?”반우희가 고개를 휙 돌렸다.“기사님이 아래층에 있는 거 아니에요? 금방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은데?”부승원은 반우희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연애하자며?”‘음?’반우희는 바로 눈을 반짝였다.“헤헤.”‘딱딱한 목각이라는 말 취소!’반우희는 활짝 웃으며 승주를 찾았고 빠르게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부승원은 반우희더러 문밖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세 아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반우희는 문밖에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었
두 사람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운전사는 이미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반우희는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반우희는 부승원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없이 매달렸다.부승원은 마음이 약해져 반우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집에 가기 싫으면 한 바퀴 더 돌면서 간식이라도 사줄까?"“싫어요.”반우희는 부승원을 더욱 꼭 안았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반우희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재빠르게 그의 턱에 가벼운 키스로 응답했다.주변은 어두컴컴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부승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으며 평소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너그러움만이 남아 있었다.“마라 새우를 많이 먹으면 원래 이렇게 집착하게 되나?”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새우 탓이 아니라 달이 문제에요.”“달이 뭘 잘못했는데?”“나는 인정해 이건 전부 달 때문인 것을.”반우희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부승원은 그녀의 엉뚱한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조용한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한 구절을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 음성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달빛이 너무 아름다웠고 너는 너무 다정했어. 그 순간 오직 너와 함께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가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부승원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이 정도면 달이 욕을 좀 먹어도 억울하지 않겠네.’“부승원 씨.”반우희가 그의 품 안에서 부르자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흔들리지 마세요. 부모님께 휘둘리지 말고 날 외국으로 유학 보내지 마요. 난 당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반응 없이 달콤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아닌데? 너 승주한테 돈만 많이 주면 나랑 헤어지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고
복도는 적당히 어둡고 분위기도 완벽했다.부승원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반우희에게 입을 맞췄다.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반우희가 발끝을 들자 부승원은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깊게 키스했다.반우희의 몸에서 오래 스며든 듯한 강한 딸기 향이 났고 부승원은 그 향이 가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반우희는 식사 후 화장실에서 거의 반병을 썼고 혹시 음료처럼 한 통을 다 마신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숨결이 얽혔고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반우희는 자기 입술을 핥으며 부승원의 입술도 스치듯 지나갔다.두 사람의 코끝이 부딪히자 반우희는 살짝 부끄러워졌는지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부승원의 가슴에 묻었다.“이제 가야 해. 승주가 널 찾을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반우희는 가볍게 대답하고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불빛은 어두웠지만 부승원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정말 좋다.’반우희는 부승원을 마주 보며 뒷걸음치자 부승원이 말했다.“넘어지지 말고 조심히 걸어.”“네.”반우희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두 걸음 더 뒤로 걸어가며 기분 좋게 계단을 올랐다.부승원은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고 입안의 딸기 향이 한층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발소리가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갑자기 멈추자 부승원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부승원 씨.”그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고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몸을 숨겼다.부승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뭐 하는 거야?”반우희는 두 손을 입가에 모아 확성기처럼 만들고 아래를 향해 외쳤다.“오늘 밤에 문제집 다 풀 거예요.”부승원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적당히 해. 문제집이 너한테 질려서 도망가겠어.”반우희는 키득키득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고 부승원은 그녀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차로 향했다.차에 다가가자 그는 잠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양혁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변여름이 마침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나타나 줬다는 것이었다.화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에서 변여름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양혁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이렇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기분은 스물다섯이 넘은 뒤로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스물다섯 전의 양혁수는 출생의 비밀도 몰랐고, 양시연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총으로 제 친어머니를 쏴 죽이는 일도 겪지 않았다.변여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고 아무 이유 없이 옆을 지켜주는 걸 보며, 어쩌면 변여름이라면 최악의 모습을 들켜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양혁수도 변여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었다.‘내가 정말 여름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닌데...’결국 양혁수는 본인이 변여름의 아낌없는 사랑에 점점 응석받이가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시간이 차츰 흐르고 변여름의 뜨개질도 점점 스웨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정말 밤을 새우기라도 할까 봐 밤 열한 시가 되자 서둘러 변여름을 제지하며 잠을 잘 시간이라 다독였다.변여름은 아까 호박죽을 끓였고 양혁수를 시켜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그릇 떠오라고 부탁했다.양혁수가 고분고분 두 그릇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는데 변여름이 제 방에서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옆방의 변여름 침대에 베개 하나가 사라졌고 그건 양혁수의 침대 위에서 다시 포착되었다.‘쯧. 또 시작이군.’양혁수의 발걸음 소리에 변여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호박죽을 받아쥐었다.그리고 테이블로 걸어가 겉으론 침착한 얼굴을 하고 한 입 떠먹었다.양혁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또 제 침대를 가리켰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변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빠랑 같이 자려고요.”“꿈도 꾸지 마. 얼른 베개 들고 네 방으로 돌아가.”“새벽에 몰래 오빠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웃음이 터졌다.
화로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오고 거실에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양혁수는 도라미 인형을 베개 삼아 누워 맞은편에서 열심히 뜨개질하고 있는 변여름을 바라봤다.“너 정말 뜨개질할 줄 알아?”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뜨개질하는 방법 다 익혔고 생각보다 쉬워요.”그리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쏘아붙였다.“오빠, 도라미 베개로 쓰지 마요!”양혁수는 상체를 살짝 들며 말했다.“좀 쓴다고 안 망가져.”그러자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를 보였고 양혁수를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인형을 머릿밑에서 빼냈다.변여름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편하게 기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오늘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정말?”양혁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건 굵은 실이라 빠르거든요.”꽤 전문가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양혁수는 긴가민가해졌다.그래서 그 옆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며 변여름의 완성품을 기다렸다.변여름은 스웨터 말고 먼저 목도리를 뜨려고 했는데 양혁수는 변여름이 스웨터를 만드는 줄만 알고 이렇게 비아냥거렸다.“이게 스웨터라고? 왜 이렇게 네모난 거야?”“스웨터는 너무 어려워서 담요로 바꾼 건가?”그리고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름아, 오빠가 하나 조언해 줄까? 차라리 담요 두 장 만들어. 그다음에 가위로 옷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만 꿰매면, 그러면 그게 스웨터잖아.”“...”변여름은 처음으로 양혁수가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담요를 그렇게 자르면 실이 다 풀린다고요!”“본드로 붙이면 되지.”“...”‘정말 못 말려.’양혁수가 말이 많아진 건 꽤 진지해 보이는 변여름의 모습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변여름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연구 실험을 하듯 한껏 굳은 표정이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 표정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그리고 양혁수도 변여름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회색 실을 보아하니 본인의 몫으로 뜨고 있는 것
고작 인형 하나 받았다고 변여름의 입이 귀에 걸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던 변여름은 어느새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며 평범한 소녀처럼 사진 찍기에 바빴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찍은 사진을 아마 노지혜에게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을 찍고 변여름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도라미를 눕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줬다.“오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변여름의 관심사가 다시 양혁수로 돌아오고 있었다.양혁수는 베란다에 앉아 국내 회사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양혁수가 변여름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자 변여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옷을 든든히 입고 출입문 앞에 선 변여름을 보고 양혁수가 불러세웠다.“어딜 가려고?”“마트요.”“이렇게 추운 날에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오빠가 소갈비찜 먹고 싶다면서요. 그건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집에 없어요.”양혁수는 아까 일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잊었고 소갈비찜에 양파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돼.”“안 번거로워요. 마트가 멀지도 않고요.”고집 피우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나 양파 별로 안 좋아해.”“그러면 빵가루 사와 내일 빵 구워줄게요.”‘쯧.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양혁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변여름의 목도리를 풀어 헤쳤고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이르듯 말했다.“집 밖에선 어른 말 들어야 한다고 네 오빠가 안 가르쳤어?”변여름은 순수 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고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심심하면 책 보거나 드라마 봐. 교수님이랑 프로젝트 의논을 하든지. 왜 종일 나 뭐 먹일 건지만 고민하고 있어?”“책이나 드라마, 그리고 프로젝트 의논을 해서는 오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잖아요.”양혁수는 목도리를 아예 훌렁 잡아당겨 소파에 곱게 눕혀진 도라미 위로 던졌다
어디 도라에몽뿐이겠는가? 양혁수는 변여름이 신기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고개를 돌리자 뿌듯한 표정의 변여름이 칭찬을 갈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옆자리 변여름의 테이블 위로 여러 장의 카드에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게 보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이고 다시 그린 것 같았다.양혁수는 저도 모르게 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캐릭터 사진을 보며 카드에 옮겨 그리는 장면이 떠올랐다.‘음. 드디어 마음에 드는군. 이걸 오빠한테 보여줘야겠어!’양혁수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고 대답 대신 펜을 찾아 도라에몽에게 귀를 두 개 그린 뒤 그걸 다시 변여름에게 돌려줬다.카드를 돌려받은 변여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이건 무슨 의미지?’양혁수는 변여름이 애니메이션에 큰 관심이 없고 도라에몽을 그린 것도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의아한 변여름을 내버려두고 양혁수는 문을 닫고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맞은편의 변여름이 잠잠한 걸 보니 도라에몽에게 정말 귀가 있는지 없는지 검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양혁수가 수프를 다 먹고 나니 변여름이 카드 한 장을 틈새로 보냈다.[도라에몽에게 도라미라고 여동생이 있었네요!]‘어릴 때 애니메이션도 안 봤냐 정말...’양혁수는 카드를 테이블 위로 내려두고 여유롭게 칵테일을 즐겼다.편하게 먹고 즐기고 착륙 전에 두 사람은 샤워까지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에든베타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어 두 사람은 일단 뉴델리에서 하룻밤 묵고 이튿날에 다시 떠나기로 했다.마중 온 사람을 찾아 차에 타려는데 마침 백인 가족이 두 사람을 지나쳤고 가족 성원 중 가장 어린아이가 인형을 안고 있는 게 보였다.변여름은 바로 양혁수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그곳을 바라보게 했다.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확인했고 표정을 찡긋거렸다.‘도라미네?’유럽 쪽엔 아시아권 애니메이션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테마파크도 아닌 공항에서 캐릭터를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그런데 비행기에서 막
“뭐가 더 좋냐고?”양혁수가 변여름의 손을 떼어내며 낮게 말했다.“내가 너 보고 반가워하길 바랐냐?”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혹시... 안 반가웠어요?”“그럼 어떤 기분이었는데요?”양혁수는 자세를 편하게 고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싶었어.”변여름은 말없이 양혁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거짓말.”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방금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 오빠 눈이 반짝거렸어요.”“사람 눈이 무슨 조명이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변여름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안 반가워하면 뭐 어때. 내가 이렇게 반가운데.’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다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감고 찰싹 들러붙었다.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변여름에는 자꾸 마음이 약해졌고 어느새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그때 지나가던 스튜어트가 변여름을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빨리 일어나.”변여름은 꼼짝도 하지 않고 품에 가만히 안겨있었다.“...”스튜어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바로 낮은 소리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물었다.양혁수는 고개를 숙여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했다.‘네 생각엔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변여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문을 열고 문밖의 스튜어트를 바라봤다.당황한 스튜어트를 보며 양혁수는 어이가 없어 눈을 감았다.변여름이 스튜어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뿐더러 한참 뒤 다시 돌아온 변여름의 품에는 담요가 들려 있었다.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양혁수의 품에 안겼고 직접 양혁수의 손을 움직여 자기 허리에 감았다.양혁수는 벌써 어깨가 시큰거렸고 아직 착륙까지 열 몇 시간이나 더 있었는데 계속 이러다가는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양혁수가 자세를 고쳤다.“여름아.”“네?”다정하게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변여름이 번쩍 고개를
변백호는 양혁수의 말을 듣더니 눈썹을 살짝 올렸다.“변여름이 너한테 잘 가라고 했다고?”양혁수는 옆에 서서 트렁크에 짐이 실리는 걸 지켜보다가 뒷좌석으로 향했고 변백호가 바로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두 팔짱을 척 끼더니 단정 지어 말했다.“그 꼬맹이, 지금 너 낚는 중이야. 내 생각엔 벌써 비행기 안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사실 양혁수도 방금까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변여름은 그 연락을 끝으로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들러붙던 변여름의 연락이 갑자기 딱 끊기니 양혁수도 괜히 기분이 뒤숭숭해졌다.변백호의 말에 양혁수는 마음이 조금 동요했으나 그래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잘 좀 챙겨줘. 우리 여름이 또 여기저기 도망 다니게 하지 말고.”변백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 마음 꽁꽁 숨기는 것도 참 양혁수답다니까.’그래도 변혁수는 이 말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양혁수의 체면을 모르는 척 지켜주기로 했다.그리고 오후 네 시가 조금 넘는 시간에 두 사람은 공항에서 헤어졌고 양혁수는 비행기에 올랐다.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앞뒤로 천천히 지나가며 확인했지만, 변여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승무원이 몇 번이나 다가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지만, 양혁수는 건성으로 넘겨버렸다.눈을 감아도 마음은 불편했고 딱히 뭘 하기도 귀찮아 그냥 대충 시간이나 보내려 했다.그때, 바로 옆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유창한 스페인어로 식사를 주문하고, 이어 샤워 예약까지 잡는 목소리에 양혁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가림막을 내리고 상대와 시선을 마주했다.이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예상이 갔다. 변여름이었다.변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었다.양혁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변여름을 몇 번 힐끔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