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는데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연정훈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점점 서운함에 입을 삐죽이는 양시연을 보며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막 신혼이고 양시연이 아이도 가졌으니 연정훈의 삼십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시기였다. 양모 펠트 인형을 만들다가 손가락에 구멍이 나도 상관이 없었고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서운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보아하니 양시연은 정말 섭섭한 게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다가 ‘다른 사람’이라는 키워드에 누군가가 떠올랐다.‘설마... 소현주?’“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라면 아마도 강의실이겠지?”연정훈이 떠보듯 물어보자 양시연이 눈을 흘겼다.“글쎄요. 나도 기억이 잘 안 나서.”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넌 그때 주지혁 만나지 않았어?”“자꾸 쓸데없는 얘기로 대화 돌리지 마요.”양시연이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찌르자 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내가 언제 대화를 돌렸다고 그래? 이미 지난 일에 질투도 하면 안 돼?”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찼다.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우울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도둑 맞힌 물건을 몰래 가져왔는데 지금 와서 본인이 원래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기도 난감해졌다.그때 연정훈이 또 떠보듯 물었다.“내가 멍청하다고 한 건 요즘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거야? 아니면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가리키는 거야?”양시연은 대답이 없었고 연정훈을 바라보는 대신 양모 펠트 인형을 꾹꾹 눌렀다.그러자 연정훈은 바로 눈치를 챘다.“과거구나.”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과거에 있은 일 때문에 나온 말이긴 해도 요즘 정훈 씨가 잘했다고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못생긴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좀 봐요. 정말 못생겨서.”“못생긴 건 그렇다 해도 내 성의를 봐서 받아줘. 우리 양 대표님이 부디 선심을 베풀어 나를 용서해 주길 바라.”“무슨 선심.”양시연이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하찮은 것 같아요.”양시연이 투덜댔다.“그냥 내가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잖아요.”“그러면 네가 못생겼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내면을 좋아한다고 해야죠.”“너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고 마음속엔 온통 나만 있는데 이게 내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양시연이 반문했다.“그러면 소현주 씨는요? 처음에 소현주 씨를 좋아했던 이유가 뭐였어요?”연정훈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와 펜을 꺼냈다.“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연정훈이 답했다.“프로젝트에 큰 문제가 생기면 몇 가지 방안을 세워서 최적의 선택을 투입하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이 교활한 인간 말로만 날 달래려는 거잖아.’양시연은 일부러 표정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소현주 씨의 첫인상을 한 마디로 묘사해 보세요.”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물을 마셨고 심지어 연달아 몇 모금씩 꿀꺽꿀꺽 삼켰다.양시연이 재촉했다.“처음 소현주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말해보세요.”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놓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내 아픈 곳을 찌르는 거잖아.”양시연은 긴장하며 물었다.“왜요?”“소현주와 편지 주고받을 때 내가 눈이 멀어서 소현주가 순수하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결국...”연정훈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정말 큰 웃음거리였어.”‘순수...’이번엔 양시연이 물을 마시고 입술을 꽉 깨물며 일부러 말했다.“소현주 씨는 순수하고 나는 단순해서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현주 씨와 비슷하다고 느껴서였나요?” ‘뭐라는 거야.’연정훈은 과거의 일을 단번에 떨쳐내며 반박했다.“내가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말뜻을 바꾸지 마.”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일부러 화난 척하며 코웃음 쳤다.“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긴장해요?”“너 때문에 긴장하는 거지.”“...”“너 지금 배도 많이 커졌는데 내 곁에
“제가 예전에 배운 보잘것없는 천문 지식으로 연 대표님께 지혜롭다고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요?”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상대적으로는 그렇지.”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천문학 전공은 아니지만 네가 그런 지식을 알고 있어서 꽤 놀랐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겠죠. 원래는 그냥 단순한 교류라고 생각했는데 정훈 씨가 저랑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순간 레벨이 올라간 것 같죠.”“...”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쳐다보며 미소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정훈 씨와 소현주 씨는 진짜 화면 너머로 순수하게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질투를 느끼며 잠시 멈칫한 뒤 말했다.“왜 자꾸 말끝마다 소현주를 언급하는 거야?”“정훈 씨의 옛일을 들춰내고 있잖아요.”“그렇다고 계속 소현주랑 나를 비교하지는 마.”“나는...”“나는 네가 항상 소현주랑 비교하는 게 싫어.”양시연은 잠시 놀랐고 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넌 내 아내고 내가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자꾸 너 자신을 한심한 사람과 비교하는 게 난 싫어.”양시연은 그가 소현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소현주에 대한 감정이 혐오에 가까운 것을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내려간 입꼬리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이번에야말로 연정훈이 소현주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그림자조차 양시연에게 닿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양시연은 한때 그렇게 깊었던 사랑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내가 항상 자신을 주지혁 씨와 비교한다면 넌 분명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맞네.’주지혁도 한때 양시연과 함께 결혼을 꿈꾸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에게는 그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연정훈이 계속해서 주지혁을 언급했다면 양
‘소현주가 죽었다고?’갑작스러운 소식에 양시연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고 연정훈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었는데?”“자살입니다.”임성원이 차분히 답했다.“소현주 씨를 24시간 감시하도록 사람을 붙여뒀습니다. 그런데 잠깐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소현주 씨가 플라스틱 숟가락을 부러뜨려 날카로운 끝으로 자신의 경동맥을 찔렀습니다.”양시연은 무심코 그 장면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스피커폰을 끊고 임성원에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한 뒤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양시연은 황급히 휴지로 입을 막으며 화면 쪽으로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우웩.”참으려 했지만 속이 뒤틀리는 것을 이기지 못한 양시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입을 헹궜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핏물의 이미지에 속이 더 울렁거렸다.“시연, 괜찮아?”연정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양시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을 억누르려 애쓰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양시연이 화장실을 나가기도 전에 침실 문이 열리며 양지원이 급히 들어왔다.“시연아?”양시연이 문 쪽을 바라보자 양지원은 양시연의 얼굴이 물에 젖어 흥건하고 창백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괜찮아요. 그냥 입덧이 좀 심해서...”양지원은 양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연정훈이 갑자기 전화해서 네가 아프다며 당장 와 보라고 하길래 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토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영상통화를 끊었는지 모르겠지만 후속 이야기가 궁금해 빨리 알아야 했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양지원을 안심시켰다.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싸운 거야? 연정훈이 너 화나게 했어?”“아니에요.”양시연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다.“그냥 대화하다가...상상력이 너무 지나쳐서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어요."양지원은 믿지
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병실에 카메라가 있으니 절대로 타살일수는 없어요.”“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연정훈이 말했다.“소현주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고 약물의 영향일 수도 있어. 소현주의 하루 세 끼에 손을 댄 가능성도 많아. 결국 임성원이 항상 소현주를 감시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철저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힘이 빠져 의자에 기대어 앉았고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아직 혼란스러워했다.“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양시연이 연정훈에게 물었다.연정훈은 처음 충격을 받은 기운이 가라앉았고 이미 차분해졌다.“그냥 절차대로 해야지. 우리랑은 관계없는 일이야.”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움직임이 어딘지 어색하고 굳어 있었고 연정훈은 그녀가 마음속으로 부담을 느낄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그쪽에서는 아마 부검을 할 거야. 정확한 사망 원인은 확인될 테지만 어쨌든 그건 너랑은 관계없어. 소현주가 저지른 죄는 셀 수 없이 많아. 외국에 있는 동안에 남편의 비서가 계단에서 떨어지도록 꾸민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너의 몇 마디로 생을 마감할 리는 없잖아.”“알아요...”“걱정하지 마.”양시연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멀리 떨어져 있어 연정훈은 양시연 곁에 갈 수 없었고 그저 대화 주제를 바꾸어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도록 하려 했다.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양시연은 그에게 말했다.“아빠 수술 끝나고 나서 돌아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줘요.”그녀는 이번 일이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직감을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일이 생기면 전화할게.”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양지원이 차를 들고 들어오자 양시연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끊었다.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최근 일들을 떠올리며 양지원이 건넨 차를 받아 들면서 하마터면 거의 델 뻔했다.양지원은 급하게 말했다.“천천히 마셔.”양시연은 입술을 핥고 난 후 정신을 차렸다.양지원은 양시연이 더
양홍두가 가볍게 기침하자 양시연과 양지원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양홍두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수술실 밖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양시연과 양지원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양시연은 마음속의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님, 수술은 어떻게 됐어?][곧 끝날 거예요.][이제 밥시간이니까 기다리지 말고 어머님이랑 같이 뭐 좀 먹어.]양시연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아 그에게 포옹 이모티콘을 보냈다.[알았어요.]세 시간이 더 흐르고 수술이 끝났지만 양석진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병실로 옮겨졌다.양시연은 처음 양석진을 봤을 때 그가 신처럼 강력한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병상에 누워 있고 주변에는 여러 의료 장비들이 놓여 있으며 머리카락에 섞인 흰색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반면 양지원은 매우 차분하게 행동했다. 밥도 먹고 물도 마시며 양석진이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저녁이 되어 양석진은 마침내 깨어났고 양지원은 창가에 앉아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오빠, 나 여기 있어요.”양석진은 눈을 뜨고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대신 양지원의 손을 잡고 손에 힘을 주려 애썼다.양지원은 그 미세한 힘을 느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알아요.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말할 수 있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양석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양시연도 옆에 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양석진의 눈길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양시연은 얌전하게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기다렸다.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변이된 부분을 절제하여 진행한 조직검사 결과도 이상이 없자 양시연은 크게 안심했다.그녀는 다시 이틀을 더 한강시에서 보내고 양석진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경인으로 돌아갔다.“저는 이틀 더 있을게요.”양석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지만 양시연이 마음속으로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
이튿날 아침, 비바람이 멈추고 햇살이 비춰왔다.악몽에서 벗어난 양혁수는 그제야 어제 충동으로 벌인 일이 떠올랐고 왠지 이제는 후회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하는 걸 포기한 듯한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이 떠보듯 말을 걸었고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 확인한 뒤에는 다시 악동으로 변했다.변여름은 아침 댓바람부터 서양식 브런치를 먹겠다고 난리였다.변여름에게 오냐오냐 귀여움을 받던 양혁수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부탁하는 변여름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그동안 변여름의 차려준 음식을 실컷 먹었으니 자신도 한 끼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서양식 브런치야 식재료를 구우면 그만이었다.그렇게 첫째 날 아침을 무사히 마치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 변여름은 어제 먹은 브런치가 너무 맛있었다고 또 졸랐다.‘그래, 뭐. 맛있다는 데 해줘야지.’그러나 세 번째 아침엔 변여름이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난도를 높여 버렸다.‘음... 그것도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점심이 되자 변여름은 스테이크와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양혁수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말없이 스테이크를 구웠고 그 옆에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는 변여름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쭈, 지금 복수하는 건가?’‘평생 밥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나한테만 요리해 주겠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야.’‘어쩌면 밥은 물론, 언젠간 뜨개질도 해달라고 할지도 몰라.’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양혁수의 등 뒤를 꼭 껴안았다.양혁수는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하려 했지만, 스테이크 기름이 튀어나오려 하자 먼저 변여름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변여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불이 너무 세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잘하면 네가 하지 그래?”그러자 변여름은 쏙 빠져나와 등 뒤로 숨었고 양혁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싫어요.”“난 오빠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단 말이에요. 맛이 엉망이어도
잠을 잘 때에는 변여름도 얌전한 편이었다. 양혁수에게 찰싹 들러붙긴 해도 기껏해야 팔이나 안고 잘 뿐이었다.가끔 양혁수가 밀어내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며시 팔베개할 때도 있었다.변여름은 양혁수에게서 향기로운 향이 난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변여름에게서 끈적한 허니 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향기에 본인도 취해 버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다.낮에 하염없이 에든베타를 돌아다녔던 건 양시연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양혁수는 이렇게 외로울 때면 혼자 잠드는 게 너무 싫었고, 오늘 밤 변여름이 옆에 있어 너무 다행이라 느껴졌다.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 팔을 베고 자는 변여름이 보였고, 어깨가 너무 시큰거렸지만, 양혁수는 손목을 돌려 살짝 스트레칭만 할 뿐 팔을 빼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불을 당겨 변여름에게 잘 덮어줬다.그때, 창밖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변여름이 깜짝 놀라 깨버렸다.변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양혁수의 품을 파고들었고 양혁수는 자연스레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냥 바람일 뿐이야.”변여름은 용기를 내어 창밖을 바라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눈을 비비며 이미 잠에서 깬 양혁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빠 빨리 자요...”양혁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귓가에는 색색거리는 호흡 소리가 들려오고 창밖에는 거센 바람 소리에 이어 굵은 빗방울이 창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바람에 커튼이 흩날리고 나무 그림자까지 방안에 비춰오자 양혁수는 심기가 거슬렸다.그래서 침대 헤드등을 끄고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갑자기 양혁수는 음침한 무덤 앞에 섰다.짙은 안개에 얼굴을 가린 한 여자가 몇 번이고 양혁수의 이름을 불렀다.“혁수야, 혁수야!”“내가 네 엄마잖아. 혁수야!”피를 쏟으며 쓰러지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양혁수는 온통 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이게 원망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오빠?”“혁수 오빠!”그때, 변여름
두 사람이 소파 위로 함께 쓰러지듯 누울 때도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양혁수의 무게가 실리자, 변여름은 작게 신음을 뱉었다.그 소리에 양혁수는 잠시 멈칫했고 변여름은 목을 꽉 껴안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양혁수는 키스 도중에 눈을 떴고 마침 눈을 깜빡거리는 변여름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끈적하게 이어졌고 양혁수는 점점 변여름에게 이끌렸다.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그러니 지금 양혁수의 행동을 별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운 에든베타에서 변여름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변여름을 품에 안고 있으면 양혁수는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양혁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변여름의 호흡에 맞췄다.사랑에 서툰 부분에 있어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있었다.변여름은 용기와 재능이 있었지만, 그동안 양혁수가 협조하지 않은 탓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그때 윗입술을 스치더니 입술 끝이 가볍게 빨렸다. 짜릿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지자 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도 무의식적으로 들렸지만 양혁수의 다리에 눌려 다시 꼼짝 못 하고 그의 품 안에 갇혔다.그렇게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느새 온몸으로 번져갔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꼭 껴안고 싶다가도, 온몸이 힘이 빠져 그저 그의 품으로 가만히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어 양혁수가 몸을 낮추고,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다.호흡마저 뺏겨버렸지만 변여름은 점점 긴장을 풀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양혁수를 믿었다.서툴던 키스는 점점 익숙하고 완벽해졌다.양혁수는 처음으로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황홀한 기분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래서 자세를 바꿔 더 깊게 변여름에게 다가갔고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처음엔 행동이 생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이젠 상황 판단이 되었어도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양혁수는 그렇게 밀어내던 변여름에게 키스를 쏟아붓다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